부산은 가야인가? - 복천박물관
(부산시립 복천박물관)
『복천박물관』은 동래읍성 주산 마안산 중턱 주택가에 새색시 다소곳이 앉은 모습. 박물관은 도심속 작은 미술관 같아 얼핏 눈에 띄지 않는다. 마안산 5부 능선 좁은 공간을 살리면서 정성을 기울여 지은 건축양식이다. 1996년에 문을 연 복천박물관은『복천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테마별로 가지런히 전시하고 있다.『복천고분』은 마안산에서 길게 뻗은 언덕위에 4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큰 무덤과 작은 무덤 169기가 발굴되었다.
『마안산(속칭 대포산)』은 해발 419M의 작은 산이지만 동래지역의 주산이다. 3.8㎞의 동래읍성이 마안산을 지킨다. 마안산 정상에 올라보면 이 산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금방 알아차린다. 고개를 둘러보니 앞으로 연산벌과 황령산, 오른쪽에 길게 이어달리는 금정산맥, 왼쪽에 장산과 수영강, 뒤로 노포동까지 부산지역을 아우른다. 금정산 고개 너머 낙동강이 찬란한 금관가야의 젖줄처럼 가락벌을 내달린다.
부산은 삼한시대 변한 12국의 하나 거칠산국 또는 독로국. 삼한사회는 철기 사용의 확대에 따라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로 발전한다. 부산은 가야인가? 신라인가? 『복천고분』은 6세기 이전 부산 유일의 지배층 무덤으로서 부산지역이 가야에서 신라의 지배로 옮겨가는 과정을 시기별 유물에서 나타난다. 169기의 크고 작은 무덤에서 덧널무덤, 가야토기, 철제무기구 등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한다.
(마안산에서 바라본 복천고분, 사적 제273호)
변한 12국을 모태로 성립한 가야는 6가야의 연맹이다. 부산은 전기가야의 맹주 금관가야의 지배를 받는 가야이다. 서기 400년 금관가야 제5대 이시품왕, 가야는 신라와 나라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혈전을 마안산을 두고 각축했을 것이다. 부산지역은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며, 낙동강을 두고 가야와 신라가 꼭 차지해야 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가야는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조를 받은 신라에게 백기를 든다. 이때부터 금관가야는 힘을 잃는다. 부산지역 역시 신라의 영향권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복천고분에서 5세기 중반부터 신라 유물이 출토된다.
(복천박물관 야외전시관과 무덤 자리)
(야외전시관 내부, 돌덧널무덤 안 덩이쇠와 가야토기))
부산지역에서 철을 사용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북부지방에서 전래된 철은 사회제도의 큰 틀을 바꾼다. 20세기의 혁명, 컴퓨터의 사용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다. 철로 만든 낫, 괭이, 쇠스랑은 농지를 개량할 수 있어 이전보다 엄청난 농작물을 거둔다.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은 철의 사용을 무기구로 눈을 돌린다. 칼, 창, 화살촉, 갑옷, 투구를 만들어 영토 확장을 벌인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한다.
복천박물관은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이다. 복천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부산지역이 4세기부터 6세기까지 가야에서 신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부산이 가야이든 신라이든 대수롭지 않다. 가야에서 신라로 바뀌어 가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현재 체제에 안주했든, 주변나라와 관계가 소흘했든 아니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없었든가?
역사는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간다.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운 가야, 서기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에 이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다. 통일신라 역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어언 천 년. 복천고분에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내린다. 무덤 안에는 갓 구워낸 가야토기의 온기가 느껴지고 ‘환두대도’를 차고 말 갈기 휘날리며 동래벌을 가로지르는 젊은 무사의 함성이 들린다. ‘덩이쇠’를 낙동강 포구에서 수출하던 가야인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오후의 태양아래 잠들어 있는 복천고분은 말한다. 역사는 어느 편이 아니라고...
“... ...
바람은 불고 연신 남쪽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마을에서 한나절을 서성거릴 동안
세상 밖으로는 백 년도 천 년도 지나가 버리고
한 왕조가 쉽게 꽃으로 이울고
달빛 가락에 취한 피리소리 강물소리
날고 있는 나비 날개에 다 젖는데
이슬방울 털어내는 숙근초 뜰을 지나
사립문 밖까지 따라나온 삽살개가 꼬리를 젓고 있다.”
(김석규, 삼국유사의 마을 · 72 - 마을의 끝)
2008. 2. 10
조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