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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김기석 아레오바고 2013.3.21
김기석.
2013년 아레오바고 첫 번째 시간에 오강남 교수를 모시게 되어 기쁘다.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로 한국교회에 큰 폭탄을 터뜨리셨다.
함께 참석하신 성소은 선생님(http://svadharma.blog.me)은 신앙적인 방황을 하면서 구도자로 여기 저기 기웃거리시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를 읽으면서 깨달으셨다고 한다. 본인이 걸어오신 신앙의 이력을 책 『선방에서 만난 하나님』(삼인, 2012)을 쓰셨다. 주위 사람들에게 읽혔는데, 반응이 좋았다. 자신들의 신앙적 방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일 거다. 그 이후 오강남 교수와 사단법인 ‘종교 너머, 아하!’(http://www.njn.kr)를 만드셔서 종교 간 대화와 학습을 열정적으로 하고 계시다.
오강남 박사. 많은 책을 저술하셨고, 신앙적 정신적 도전을 주고 계시다. 오늘은 『종교란 무엇인가』로 얘기를 나눠 보자. 환영의 박수 드리자.
굉장히 분주하시다. 국내외로 강좌가 많으신데, 매주 김영사 3층 강의실에서 3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계시다. 그런데도 이런 작은 모임에 와주셔서 감사하다.
『종교란 무엇인가』는 읽기에 어렵지 않은 책이다. 공부하셨던 심오하고 깊은 세계를 독자들과 편안하게 나누고픈,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쓰신,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중요한 저서가 될 것이다.
이제 오강남 선생의 얘기를 들어보자.
오강남.
이 모임의 성격이 어떻게 되나요?
김기석.
가볍게 만난 독서모임이다.
오강남.
이거나 저거나 똑같은 얘기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면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후, 연재한 것들을 모은 것이다. 최근에 많이 첨가하긴 했다. 6번 환생했다.
김영사에서 내고 싶다고 해서 현암사에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종교란 무엇인가』가 종교 전반에 얘기라면, 『예수는 없다』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했다. 『예수는 없다』의 표지가 좀 그런데, 50대에 썼는데 원로 종교학자 ‘필생에 마침표를 찍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고, 예수 그림은 뒤집어져 있다. 이걸 가지고 비판을 하기도 하더라. 『예수는 없다』는 그 당시까지의 생각을 개진해 본 것이었다. 중간 리포트로 생각해주길 바랐는데 말이다.
김기석.
아무튼 문제거리가 되었더니 많이 팔렸다.
오강남.
『종교란 무엇인가』, 여기서는 '길‘을 중심으로 얘기했다. 마침표는 아니지만, 요즈음 결론 비스무리하게 한 것을 말하라면, 종교에서 어느 종교나 표층과 심층이 있다는 결론 비슷한 얘기를 한다. 전통별로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종교에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층신앙. 이 표층신앙을 될 수 있는 대로 심화시키는 데 노력하자는 게 내 책의 기본적인 태도다. 요즘은 분명하게 노골적으로 얘기하고 다닌다.
표층종교과 심층종교의 차이가 뭐냐면, 올더스 헉슬리 같은 경우는 6단계로 나누고, D. T. 스즈키는 8단계로 나누고, 윌리엄 제임스는 4단계로 나누더라.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표층종교는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확대하거나 과장하거나 영광을 누리거나 지금의 나를 좋게 하려는 종교활동이 표층종교다. 심층종교는 지금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진짜 나, 참 나, 큰 나, 얼 나, 이런 것을 찾으려고 하는 그런 것이 심층종교다.
불교에서는 표층종교나 심층종교는 뚜렷하다. 108배해서 지금 내가 해서 좋아지는 것은 표층종교고, 부처가 되는 것은 심층종교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장자 철학도 죽고 사는 문제에서도 자유한 것이 진짜 자유라고 한다. 물고기가 새가 되고, 새가 천지로 날라가고..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로 초월해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심층이 별로 안 나타났다. 콘스탄틴 로마 황제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독교를 삼아, 기독교를 단순화simplify시켰다. 니케아에서 ‘하나’로 말이다. 이전의 것은 폐기당했다. 대표적인 게 도마복음이다. 도마복음 1년 「기독교 사상」에 연재했었는데, 도마복음은 이렇게 폐기 처분당한 것이다. 도마복음은 심층 기독교의 산물이었다. 예수의 어록 말이다.
요한복음은 믿으라고만 하는 믿음만 강조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믿으라는 말이 하나도 안 나온다. 비슷하게 하나 나오는데, 믿음과 관계 없는 거다. 도마복음은 계속 그노시스gnosis를 강조한다. 영지, 신령한 지식. 나는 영지라는 게 실감이 안 나서, 그걸 어디서 힌트를 얻었냐면, 불교의 프라즈나, 반야로 번역된 부분이었다. 깨침, 깨달음. 그래서 나는 그노시스를 깨달음으로 번역했다. 뭘 깨달으라면, 참 나를 깨달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네 속에 있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으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를 얻으리라.
도마복음도 표층종교를 언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늘나라라는 말을, 천국을 많이 쓴다. 이건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신국, 하나님의 나라이 맞다. 저 위에 있는 어떤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거다. 통치의 원리. 그 원리가 편만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거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으라, 그러면 네가 자유를 얻으리라. 이것은 전형적인 심층종교다.
근데 이것을, 이런 ‘영지주의 복음(gnostic gospel)으로 치부해서 콘스탄틴은 폐기한 것이다. 2세기의 영지주의는 2원론의 육신을 악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일렌 페이지, 케런 킹(하버드 대학) 같은 학자들은 나스틱 가스펠이라 부르지 말자고 하더라. 깨달음 복음서 라는 표현이 낫지 않을까.
아무튼 심층종교는 지금의 나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자는 거다.
둘째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느끼라. 브라만과 아트라가 하나다. 범아. 기독교에도 이게 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교회 내에서의 싸움에서 화합하자는 거 이상의 의미다. 하나됨. 하나님과 하나됨. 내 속에 있는 참 나가 거룩하고 신성한 거다. 하나님이 내 속에 있는데,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나의 진정한 나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과 하나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신성모독이라 여길 수도 오해를 살수도 있겠다. 아무튼 참 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내 속에 거하신다. 그 하나님이 진정한 나다. 이런 이해가 모든 종교 심층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학이다. 시천주 인내천. 내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인간은 곧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동학은 심층이 잘 드러난 종교이다. 동학의 경우, 나만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니라 이웃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이웃을 대하기를 하나님 섬기듯이 해야 한다. 사인열천. 시천주 인내천 사인열천. 이것이 심층종교의 기본적이 가르침이지 않나 싶다.
아무튼 두 번째가, 내 속엔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이 나다. 이웃도 하나님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다. 표층종교는 모든 것이 개별적이라고 하는데, 심층종교는 보기에는 개별적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라는 거다.
만법귀일, 만물일체, 만유일체, 반본환원 모든 것이 하나다. 모든 것이 하나라고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다. 음과 양.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토텔러티totality의 상징이다. 십자가도 사실은, 그리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길이가 똑같다. 수직과 수평의 조화. 본래는 하나다. 다윗 별도 불교의 만 자도 하나를 뜻한다. 반대 같이 보이는 것이 하나. coincidentia oppositorum(양극의 조화). 이것을 아는 것이, 종교의 깨달음의 극이다. 칼 융 같은 경우, 이것을 매우 강조한다.
세계의 모든 신화를 해석해낸 조셉 캠벨이란 사람은, 모험의 길, mono-myth. 집을 떠나고 유혹이 있고, 어느 단계를 거치고, 신의 도움을 얻고, 자신이 원했던 잃은 보물을 찾는 결말이 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들 중에 상당수가 모르는 상징의 의미가 있는데, 물고기 있지 않은가. 익수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물고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알 거다. 그런데 다른 뜻이 또 있다. 두 원이 겹쳐지는데, 그 가운데 교집합 부분만 떼어놓은 것이다. 대립의 일치, 대립의 조화. 이것이 본래 더 깊은 뜻이다.
모든 상징에는 상징의 층이 있다. 모든 것이 심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표층종교의 사람들은 표층적인 뜻만 취한다. 심층적인 뜻을, 심지어는 안된다고 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 불교의 심층에 들어간 사람을 존경하지만, 기독교의 심층에 들어간 사람들은 배척당하고 이단시 된다.
또 다른 것은, 심층의 사람들은 종교적 체험이라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ineffable. 어쩔 수 없이 표현해낸 것일 뿐, 달을 보게 하는 손가락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심층은 문자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경계하는 종교가 불교이다. 불립문자! 문자에 달라붙지 말라는 거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니까, 손가락에 정신을 쏟지 말자는 거다. 손가락을 차라리 잘라버리는 상황까지 거론한다. 심지어 불교에서, 부처님에 달라붙어 달을 보지 못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살불살조!
기독교고 무슨 종교고 문자에 달라붙기 시작하면, 종교로서 가장 하질이다. 중국의 종밀 같은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더라. 제일 하질이 인천교라고 한다. 윤회할 때, 좋은 일 많이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등등의 인과응보 식으로 세상과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저질이라고 한다. 제일 좋은 것은 깨달음이라고 한다.
문자주의의 해독을 가장 강조하는 게 『웃고 있는 예수』(어문학사, 2009; laughing Jesus [티모시 프리크, 피터 겐디]) 이 책이다. 『예수는 신화다』(미지북스, 2009)라는 책이 대표작이다. 동아일보에서 나오려다가 몸 사려서 폐지해, 다른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했더라. 『웃고 있는 예수』 첫 부분이, 문자주의에 매달려서 생긴 피해가 해악이 얼마나 컸는지 역사적으로 소상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사실 문자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유교에도 있다. 조선 유교는 유교 근본주의다.
근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자주의다. 성경무오설 같은 것 말이다. 문자주의가 근본주의의 가장 큰 신조다. 표층종교의 가장 큰 특징이 문자주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표층 종교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대부분 표층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잘 살게 된다, 헌금하면 복을 얻는다는 표층으로 시작하는 게 어쩔 수 없다. 점점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것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의 해석방법 교리 해설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3단계에 머물러 있는다. 소수의 사람만이 4단계로 넘어가기도 하는데, 대다수는 어느 단계에서 끝나버린다. 신앙적인 종교적인 발달장애에 걸린 거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한평생 거기에 있으면 문제다. 여기저기 거론했는데, 산타클로스 문제 말이다. 아이들한테 그게 삶의 목적이요 기쁨일 텐데... 애들이 크면, 속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엄마의 선물임을 서로 사랑을 나누는 얘기임을, 좀 더 발달되면 나도 식구들에게 선물을 나누게 됨을, 좀 더 발달되면, 우리 식구만이 아니라 우리 마을 세계 전체에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인 산타클로스의 정신이구나, 이렇게 심화될 수 있다. 더 심화되면 쌀만 주는 게 다 중요하지 않구나, 평화나 정의 그리고 환경에 사회적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더 심화되면 산타클로스 얘기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반응하는, 신일합의 경지로 얘기할 수 있다. 이렇게 종교에는 층/레이어가 있다.
어디나 영지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성경을 읽을 때, 4층, 흙, 물(세례 요한), 바람(성령), 불 층으로 읽는다. 이런 레벨까지 오른 초대교회 사람들 중에 재세례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윗 사람들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라 그들을 억압한다.
아무튼, 성경을 볼 때, 문자적으로만 보는 것은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한한 것이고, 바람과 불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 깊은 층까지 봐야 한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는가. 문자는 우리를 죽이고, 영/정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표층과 심층의 차이.
심층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라고 했는데,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상호 연관, 상호 의존, 인터 릴레이션inter-relation, 인터 디펜던스ineter-dependence. 화엄종은 상직상립해서, 서로 같다고 한다. 책상하고 창문하고 상직상립한다고 한다. 창문이 없으면 집이 안되니까, 책상이 없으면 완전한 집이 안되니까, 책상과 창문은 개별적인 게 아니라 상직상립한 것이다.
쉽게 얘기하면, 불교의 연기설. 극적으로 하기 위해, 이 종이에서 구름을 보느냐 묻는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나무에서 종이가 왔는데, 나무가 자라려면 비가 있어야 하고 구름이 있어야 한다. 또 새의 지저귐도 들어가 있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 사람의 부모님, 먹어야 하는 밥, 밥을 만드는 가마솥이 있어야 한다. 아무튼 이 종이에 온 우주가 다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단, 종이가 없는 것이다. 엠티 오브 더 빙empty of the being. 자성이 없다. 이것이 빔, 공空의 사상이다.
이렇게 개별적인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아까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얘기했는데, 우리는 inter-being을 얘기해야 한다. 소녀girl를 전제하는 소년boy이 있다. I am a boy가 아니라 I am an inter-being이다. 심층적인 사람들만 얘기할 수 있는 거다.
기독교에서 심층은 신비주의자다. 신비주의의 전통을 가장 많이 가진 종교는 퀘이커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빛이 있고, part of God,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 그것이 빛으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면 나누는 것. 빛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듣고, 반박하는 경우가 없다. 뭔가 evoke되면, 또 얘기한다. 1시간 동안 아무 얘기도 없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빛으로 계신 하나님을 내 속에서 찾는 것, 이 때 흔들리는 것(quake), 이것이 퀘이커다.
표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종교라면 심층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40년 산 사람이 산타클로스를 그대로 믿기만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보기도 민망하고, 다른 사람에게 굴뚝 후비라고 야단하고, 그거 안하면 믿음 있냐 없냐 따지고 말이다.
질의응답.
김기석.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셨다. 이 책에서 표층과 심층종교의 얘기가 말끔하게 정리되진 않지만, 내용 전체는 그 내용이었다. 사실 이 책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게, 강의의 내용이었다. 표층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고, 물론 그런 비판은 애정어린 비판이라 하겠다. 심층으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들어가면서’라는 글에 쓰신 것처럼, 심층종교와 표층종교를 각각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라고도 표현하셨다. 이 책을 읽으신 분은 시원하고 어떤 면에서 아쉽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읽으신 분이 얘기를 해주신다면, 심화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질문 1.
어떻게 같이 심층으로 넘어갈 것인가, 이것이 고민이다. 그 과정을 어떻게 공동체 식구들과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런 부분이 조금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조언을 부탁한다.
오강남 답변.
목회적 관심을 존경한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겠다. 목회현장에서 목사님들이 더 잘 아실 거다.
불교에서 ‘방편’이라는 재미있는 개념이 있다. UPIA. 유피야. 호뱅.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 수준에 맞추어서 대해주어야 한다. 우리 어른의 입장에서는 장난감을 뺏으면 아이는 울고 불고 할 것이다.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장난감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깨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목회자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대다수의 목회자는 그 장난감을 가지고 이용하는 것 같다. 체념諦念시켜야 한다. 장난감이 가장 귀한 게 아니라고 깨닫는 것.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깨닫는 것이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 목사님께서 잘 하시리라 생각한다. 한종호 목사님은 책을 열심히 내셔서, 장난감 이후의 것을 알 수 있도록 도우셨다.
옛날에 도마복음을 보면, 그 가르쳐지는 진리는 천명 혹은 만명 중에 한 명이 알거다. 당시 문맹률이 높았다. 그들은 가서 듣는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이 바쁜데, 200리 밖 스승에게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은 손가락 몇 번 하면, 세계 석학들의 강좌를 들을 수 있다. 얼마든지 기회가 많다. 가마솥에 콩 튀기듯이 나올 거다.
칼 바너는, 21세기 기독교는 심층적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의 영향으로 표층 종교의 힘은 약해지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종교가 나올 것이다. 칼 바너 뿐만 아니라, 법주사의 월은 스님, 그 분도 병 고치고 좋은 학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종교는 명이 다했다고 말한다. 도로테 죌레, 『신비와 저항』(이대출판부, 2007; 정미현 역) 거기서 신비주의의 측면을 얘기하고, 이런 신비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갈 수 있다고,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얘기했다. 이제는 무작위로 이뤄지지 않고 대중화 될 거라고 했다.
유럽에 기독교가 없다는 것은, 표층종교에서 졸업을 한 거다. 제러미 리프킨. 유럽의 기독교인 수가 그렇게 적고, 미국에 기독교인이 많은 것은, 유럽이 예수의 정신에 더 가까운 정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형제도 폐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년 후반기에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 2012)가 나왔는데,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크만가 덴마크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거기서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 제일 문제는, 사회 복지에 하나님이 거론되면 안된다. 하나님 안 믿어서 가난해진다, 이런 말은 지양해야 한다. 방편 그 자체로는 괜찮다, 방편으로만 해서는 안된다. 방편이 더 중요해지면 안된다.
질문 2.
영지주의, 도마복음서. 도올의 강해서를 읽었는데, 도마복음이 분류되는 과정이, 정경화 과정에서 떨어진 것 아닐까, 그랬다면 심층종교에 대해서 알면서 그랬던 것일까?
오강남 답변.
아타나시우스. 그 정경화 과정에서 도마복음서가 제외되었을 텐데, 일레인 페인져스의 이론에 따르면, 심층 종교가 퍼지면 기독교의 하이라이키(heirarchy)에서 중간 매개자의 역할이 없어지니까, 막은 것이다. 다른 의견은, 퀘이커 모임이 소규모인데, 그건 대학원 과정 그 이하는 소학교 과정으로 비유해볼 수도 있겠다. 어쩔 수 없이 소수일 수밖에 없다.
폴 틸리히. 기독교를 받쳐주는 중요한 흐름.
아퀴나스. 종교 체험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다는 하나됨의 체험.
나는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잘 안쓰려 하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체험하는 거다. 언어도단의 체험 말이다.
질문 3.
읽으면서 고민한 게, 심층종교는 소수로 머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표층 종교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그런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개성화, 성숙을 도모해야겠지만, 너무 멀지 않았나 싶다. 지도자가 먼저 경험하고, 끌어나가야 한다고 받아들였는데, 그런 방법 밖에 없는 것인가?
오강남 답변.
그렇다.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스스로가 전체를 볼 수 있는, “전체적인 안목”(달라이 라마)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
슈바이처가 한 말이, 이상을 가야 한다. 우리가 할 것은, 이상을 가도록 도달하도록 노력해야지, 이상을 갈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 글은 하나의 제시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안주해서는 안 되겠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현실을 뚫고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조셉 캠벨, 첫 단계, 집을 떠나는 것, 현실에서 벗어나겠다는 거. 현실에 순응하면 쉬운 거다. 집을 떠나는 사람은, 지금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생활양식 등등을 당연히 여길 수 없고, 무언가 안된다는 걸을 알고 집을 떠나야 한다. 떠나면 외롭겠지만, 알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이런 것들이 엄습할 거다. 신화적 시험들이 올 거다. 그렇게 나가는 사람이 정신적인 영웅이다. 우리에게 집을 떠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질문 4.
마음 속 갈등. 가출은 아니지만 출가는 해야하지 않나. 근원적으로 떠나야 하는데, 용기가 없는 큰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출가/심층종교가 옳으냐는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대중에 대한 쓸데없는 사명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의 중 ‘자유’가 참 와닿았다. 논의는 많은데, 경험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이 궁금하다. 심층종교를 구가하는 영웅이 있는가?
오강남 답변.
그런 사람 60명, 『종교 심층을 보다』(현암사, 2011) 2년 전에 출간했었다. 플라톤 같은 종교인이 아닌 사람도 들어가 있다.
유영모, 함석헌. 기가 막힌 분이다.
동학 같은 게 우리나라에 생긴 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김경재 목사도 그렇게 말한다. 동학이 잘 성행하지 못해 안타깝다. 동서가 합해져 있는데 말이다. 이론도 실천도 좋은데, 참 안타깝다.
김기석.
손성은 선생께 평신도로써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잠시 말씀 부탁드린다.
손성은.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고,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 욕심도 있다. 목회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는 최 앞 선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떠하셨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가장 개혁적 혁명적이고 행동하셨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교회와 목사가 있는 것 같다. 근원으로 돌아가면 답은 쉬울 듯하다. 심층적인 얘기를 안한다는 건, 핑계이고 타협 아닌가. 그게 목회자일까?
오강남.
목회를 안해봤으니 그런 말을 하지.(웃음)
손성은.
가장 먼저 목회자들이 심층을 맛보셔야 한다. 성경 속에서 말이다. 예수의 유언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가 본질이다. 나머지는 예수의 사족인 듯하다. 진리가 뭔지 자유가 뭔지 답을 아셔야 할 것 같다. 이웃은 또 다른 나이다.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필연이다. 도와야 한다. 밑에서 오는 확신, 그런 믿음을 당신 스스로 먼저 맛보셔야 한다.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 그게 몫이자 사명이니까. 그게 진정한 믿음이고 사명감인 것 같다.
오강남.
예수는 목회를 성공하지 못했다. 12명인데, 그 중에서도 1명은 배반했으니 말이다.
손성은.
내가 환속을 했던 이유는, 표층 종교로 자족했었고, 기고만장했었고, 더 이상의 의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고 살았는데, 어느 날 그런 성경말씀이 내게 물음으로 다가왔다. 공부해도 해결이 잘 안되더라. 공의, 인권이라는 아젠다가 현장에서 해결되지가 않더라.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결국은 ‘자유’, 해탈로 넘어오더라. 그래서 교회를 나와서 이런 여정을 거쳤다. 정리가 된 것은, 잠잠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라. 이 말을 조금 알 것 같다. 집중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심층이라는 것을 뜨겁게 알게 하고, 그런 기쁨이 올라오더라.
출가를 해야 하는구나를 감을 잡으셨다면, 조금 있으면 자랄 것이다. 그게 커지더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더라. 밥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더라. 그래야 공부도 일도 잘 하게 되더라. 그런 확신이 생기더라. 불교의 ‘분심’처럼 말이다.
크리스챤으로서, 나누고 싶은 말씀은, 그냥 원점으로 돌아가자,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곁가지 말고, 뿌리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명확한 답이 나올 것 같다. 목회자로서 준비해야 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부채의식 있더라도, 나온다면 더 큰 양들이 있을 거고 바른 지도자 될 것이다. 물 한 모금을 줄 수 있지만, 물 길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사 상이 아닐까 싶다. 영원히 우리의 역할 모델은 예수이다. 예수의 말에 집중할 때, 답도 길도 나올 것 같다. 그의 나라와 의만 구하자. 얼마든지 가출할 타당성과 근거는 무궁무진하더라. 예수 때문이었다. 이전에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읽히면서, 어떤 담대함이 생기더라. 그걸로 부모님도 설득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었다.
먼저 개인적으로 정리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출이라는 경험을 했다. 후회는 고사하고,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일인 듯 하다. 언제 죽어도 신 날 듯하다. 그래서 교수님 모시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새롭게 살 수 있는 계기 주셔서 감사하다. 그래서 지금은 함께 힘을 모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김기석.
한국의 목회자들이 표층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표층과 심층을 넘나든다. 구체적 상황에선 표층종교의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심층종교로 인도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두 가지 욕구가 병존한다고 생각한다. 표층종교적인 해답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고, 단순한 답들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종교에 지치고 식상해진 사람들이 갈 곳이 없는 상황, 이런 상황이 병존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각자 목회자들이 어디쯤 자리 매김을 할지 생각해야 할 거이다.
코멘트.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는 전혀 고민스럽지 않다.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들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더라.
김기석.
마음의 습기가 배어있는 사람들이 넘어가는 거 오래 걸릴 거다.
질문 5.
신비체험, 깨달음. 구분을 해보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오강남 답변.
신비체험을 유일회적으로 확철되는 게 아니다. 계속적인 발견, 실체reality의 여러 면을 봐서 새로워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를 때마다 ‘아하~’의 연속. 그런 식으로 조그마한 깨달음, 그런 것들이 모여서 자연스러워진다. 10년 공부를 하고, 9년만큼 자유스러워진거다. 아는 만큼 자유스러워 진 것이다. 더 깊은 종교적 의미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만큼 자유스러워지는 것, 그것이 종교에서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된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이다.
오강남 소감.
나는 조금 삐딱하다. 가장 많이 거론한 학자가 마커스 보그, 존 셀비 스퐁이 아닐까 싶다. Newly emerging christianity, 새롭게 떠오르는 기독교, 삐딱하다고 얘기했는데, 이것이 다음 세대의 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