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변호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하는 인식에 젖은 보수당 간부들 때문에 계속해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선거 유세장마다 따라다니며 열성으로 보수당의 선거운동을 도운 결과, 1958년 런던의 핀츨리 선거구에 입후보할 수 있었다. 그 지역구는 보수당의 세력이 큰데다 대처처럼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이 많은 곳이어서, 대처는 마침내 1959년에 꿈에도 그리던 국회의사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대처는 여느 영국 정치인들과 다르게 유머감각이라고는 없었고, 말도 거창하고 화려한 표현을 쓰지 않고 필요한 말만 했다. 그래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필요한 말한 하는” 점, 과학도답게 연설에서 반드시 통계수치와 계량적 지표 등을 내세우며 듣는 이의 신뢰감을 높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면서도 당차고, 열정적이고, 강철 같은 의지를 내보인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의원이 된 지 2년 만에 차관 제의를 받았으며, 이는 금방 보수당 정권이 와해되면서 무산되었지만 1965년에 다시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자 1965년에 주택장관과 연금장관, 1966년에 재무장관, 1967년에 에너지장관, 1968년에 교육장관, 교통장관, 1970년에 다시 교육장관을 지내는 등 화려한 공직 이력을 쌓게 되었다. 그 중에서 대처의 이름이 가장 두드러졌을 때는 1970년에 다시 교육장관이 되었을 때인데, 그녀는 평소의 신념대로 취학 아동에게 무상으로 지급되던 우유를 유료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러자 노동당과 언론은 길길이 뛰며 정부를 성토했고, “우유 도둑은 물러가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학부모단체가 도심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이를 “최소한의 효용 때문에 최대한의 정치적 희생을 겪은 일”이었다고 썼다. 스스로 대단치 않은 개혁에 너무 큰 위험을 감수했다고 자책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왜 영국의 정치는 그토록 대단치 않은 개혁에도 벌벌 떨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도 남겨준 사건이었다.
히스 내각이 1974년에 무너지면서 그녀는 야당 정치인으로서의 설움도 겪게 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크나큰 기회였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히스의 당권에 도전하고, 1975년에 보수당 당수가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야당 당수로서 노동당 정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마침내 1979년, 경제난과 총파업이 엎친 데 덮치며 “불만의 겨울” 속에 노동당이 무릎을 꿇었다.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에 이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서구 국가들 중에는 최초의 민선 여성 최고통치자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녀는 여느 수상보다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고, 영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정치인이 되었지만 정계에서는 입지가 튼튼하지 않았다. 아직도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라고 보는 의원들, “많이 키워줬더니” 그녀가 배신했다며 이를 갈던 히스와 그를 따르는 보수당 원로들은 그녀를 흰눈으로 흘겨보며 뭔가 꼬투리만 잡았다 하면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 그녀의 각료들까지도 그녀를 수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의 여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대중정치와 마키아벨리즘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매스컴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을 위대한 정치인으로 부각시키는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한편(가령 지루할 뿐이던 보수당 전당대회도 그녀는 자신과 보수당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화려한 볼거리로 탈바꿈시켰다), 자신을 싫어하는 정치인들의 뒷조사를 해서 만약 자신을 계속 적대시하면 그들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결국 막강해 보였던 화이트홀의 반 대처 전선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쯤에는 그녀에게 대들 정치인은 사실상 없어져 버렸다.
“대안은 없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7%2F18%2F232%2F10px.jpg) 대처는 1979년의 총선에서 감세 정책과 자력경생, 법질서의 회복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불만의 겨울”을 거치며 지나친 세금과 고물가, 노조의 공격성에 부자들뿐 아니라 “조용한 다수”까지 진절머리를 내게 되었다는 표시였다. 대처는 자신과 보수당의 신자유주의 노선만이 해답이라면서 경제 정책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정부는 통화안정에 힘쓰고,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여야 한다. 법인세와 준조세를 줄이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기업이 활동하기에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민영화를 확대해야 하고,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노동 유연성을 늘려야 한다.”
그녀는 이를 실천하고자 취임 첫해에 외국환 관리 철폐와 국영사업 민영화에 착수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규제하는 입법에 나섰다. 1981년에는 공정금리를 폐지해 정부주도의 금리통제를 중지하고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정책을 취했다. 이밖에 정부의 주택구입 보조비를 폐지하며, 고등교육 지원금을 폐지하는 등(이 때문에 그녀는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기로 예정되었다가 학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교육 투자 예산 대폭 감축 등을 추진했다. |
첫댓글 찾아보려고 했는데 찾아놓으셨네요 감사해영 햇님~ ㅋㅋㅋㅋ
벌써찾으셨네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당~~
내 친구 센스 넘치는데? ㅋㅋ
센스터지는기택이오빠!오빠덕분에공부더햇어요!!짱짱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마가렛데처의 일대기는 2011년 철의여인이라는영화로도 나왓다고합니다ㅋㅋ기택이행님좋은글읽고가요~~ㅋㅋ
경영대학원 야간 수업 마친후 이제까지 그들의 석사논문 지도하고 지금 이 글을 읽었단다...비록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정독하여 두번 읽었단다...나 역시 기택 덕에 다시금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간단다. 특히 마지막 기택이의 코멘트.. 그 판별의 성숙함과 사고의 진중함...너무나 뿌듯하고 믿음직스럽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