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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4일 한양대학교 풍수지리 답사
1. 집결시간 : 2009년 1월 4일 오전9시30분
2. 집결장소 : 포은 정몽주 선생 묘 앞 주차장
3. 이동방법 : 카풀로 승용차 2~3대(서로 연락할 것)
4. 답사지 :
① 영일정찌 포은 정몽주, 연안이씨 저헌 이석형 묘
② 청송심씨 심온(세종왕비 소헌왕후 아버지) 묘와 광교신도시(묘에서 보임)
③ 옛날 보리밥집
④ 청풍김씨 김인백 부인 안동권씨 묘
⑤ 사도세자 융릉, 정조대왕 건릉
답사지
1.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의 묘
- 소재지 :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 3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1호 (1972.5.4)
고려 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묘소는 본래 개성의 풍덕에 있었다. 그가 선죽교에서 타살된 뒤, 태종 6년(1406) 3월,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현재 위치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순절한 뒤 풍덕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遷墓)할 때 면례행렬이 수지읍 경계에 이르자 앞에 세웠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이곳에 떨어져 안장하였다 한다. 교과서적인 명당으로 풍수지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답사코스다.
옆에는 연안이씨인 저헌 이석형 선생 묘가 있다. 이 묘를 쓰고 광산김씨, 달성서씨와 함께 조선3대 명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명정이 이곳에 떨어졌으나 포은의 증손녀이자 저헌의 부인인 연일정씨가 밤에 광중에 물을 부어 차지했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두 집안 간에 앙금이 남아있다고 한다. 실제 조선 인물사를 살펴보면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그럴만한 말이 만들어진 것 같다.
연안이씨 중에서도 특히 이석형의 후손들이 현달하였다. 이석형의 현손(玄孫) 월사 이정구는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한문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며, 선조 때 대제학과 인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이명한(李明漢)은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이명한의 맏아들 이일상(李一相)은 효종 때 대제학을 하였다. 이정구-이명한-이일상으로 이어지는 3대 대제학을 배출한 것이다.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 가문을 정치적으로도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세도가로 대사헌과 좌찬성을 하였으며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이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9대 봉군(封君)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시백의 동생 이시방(李時昉)도 효종 때 형조, 호조, 공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후(李厚)는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영조 때 영의정, 이복원(李福源)과 그의 아들 이만수(李晩秀)는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 2대가 연속 대제학을 하였다. 이복원 큰아들 이시수(李時秀)는 영의정을 지냈다. 이밖에도 수 많은 인물들이 있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총 243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는데 이는 전주이씨(844명), 안동권씨(358명), 파평윤씨(338명), 남양홍씨(322명), 안동김씨(309명), 청주한씨(275명), 밀양박씨(258명), 광산김씨(253명)에 이어 랭킹 9위다. 이들 문과급제자 중에서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반면에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몽주(鄭夢周)
고려 충숙왕6년(1337년) - 고려 공양왕4년(1392년)
고려 말의 학자이며 충신으로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본관은 연일(延日)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가진 신동이었다고 한다.
공민왕9년(1360)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 수찬 등을 거쳐 공민왕13년(1363)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참가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우왕2년(1376) 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기도 했다. 외교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명과 왜 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다.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의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 고려의 위치를 확보하고 우호관계를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왜에서는 왜구의 단속을 청하고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 시켰다.
성리학에 매우 밝아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을 세워 교육 진흥에 힘썼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추앙 받는다. 의창(義倉)을 설립 빈민구제에도 힘썼으며, 1380년에는 문신이면서도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등 국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은 즉위하자마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使 修文殿大提學兼 藝文春秋館事 翼陽府院郡)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석형(李石亨)
조선 태종15년(1415년) - 성종8년(1477년)
조선 세조 때의 명신으로 자는 백옥(伯玉)이며 호는 저헌(樗軒)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다. 이무는 중국 당나라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 소정방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그는 황해도 해주 근처인 연안에 터를 잡아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고려와 조선 개국까지만 해도 크게 현달하지 못했던 가문이 이석형 때부터 번성을 가져왔다. 그는 세종23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를 섬긴 명신이었다. 문종1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면서 정인지 등과 고려사(高麗史),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홍경손과 함께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에 올랐다.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 나가 지방의 호패법 시행을 감찰하였으며, 세조가 죽은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예종1년 정일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성종1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다음해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2. 세종대왕 장인 청송심씨 심온 묘
-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13-10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조선조 500년을 통해 청송 심씨(淸松沈氏)는 정승이 13명, 왕비가 3명, 부마 4명을 낳았다. 서인(西人)의 주류로 혹은 왕실의 외척으로 이 나라 정계를 주름 잡았었다. 청송심씨의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3명은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에 이어 네 번째가 된다. 하지만 영의정이 9명이나 되어 영의정 수로는 전주이씨 11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다. 또한 왕비 3명은 청주한씨 5명, 여흥민씨와 파평윤씨가 각각 4명에 다음가는 숫자로 이 통계만 보아도 조선시대에 청풍심씨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세도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청송심씨는 고려 때 위위사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생졸(生卒) 연대나 행적은 기록을 실전(失傳)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청송 심씨의 세계(世系)는 크게 둘로 갈린다. 시조 심홍부의 증손은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 형제가 있었다. 형인 덕부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을 도와 좌의정을 지내면서 자손들이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하였다.
반면에 동생인 원부는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손들에게 이씨의 녹을 먹지 말라고 유훈을 하였다. 그 자손들은 그 유훈을 지켜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손손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 하였다. 현재 경북 청송과 영남 일대에 퍼져 살고 있는 심씨들 대부분은 원부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형집인 덕부 집안을 <서울집>이라고 부르는데 많은 정승과 문형(文衡), 왕비들은 모두 서울 집 출신들이다.
오늘날에도 각계에 활약하는 저명 인사 대부분이 서울 집 심덕부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심덕부는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일곱 개 파로 나눈다. 그 중에서도 넷째인 심징(沈澄)의 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와 다섯째인 심온(沈溫)의 안효공파(安孝公派) 후손들이 번성하여 굵직한 벼슬을 도맡아 했다.
심온(沈溫)은 44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다. 그러나 심온은 임금의 장인이면서도 태종 이방원의 비위를 거슬러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병권(兵權)만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철저한 외척 배격 정책을 썼다. 심온의 막내아우 정(湞)이 태종의 병권 장악에 불만을 품고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온다”고 당시 병조판서 박습(朴習)에게 말했다. 그런데 박습이 이 말을 태종에게 고하자 심정은 국문을 당하고 그 배후로 심온이 지목되었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을 다녀오다가 압록강을 넘자 체포되어 수원에서 사위인 세종이 내리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일화에 의하면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자손들에게 남기실 말이 없냐고 묻자 그 자리에서 받아쓰게 한 것이 “오자손세세홀여박씨상혼야(吾子孫世世忽與朴氏相婚也)”였다. 이 말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혹시라도 박씨와는 서로 혼인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유언은 불문율로 후손들에게 지켜져 왔고 설사 박씨와 결혼한다 할지라도 아들을 못 낳아 대가 끊기거나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심온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아들 회(澮)는 아버지가 사사되었다는 이유로 등용되지 못하다가 문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이는 심덕부와 심온, 심회로 이어지는 3대 정승을 한 것이다. 역사상 3대 정승을 한 집안은 달성 서씨, 청풍 김씨, 그리고 청송 심씨 세 집뿐이다. 청송 심씨 정승 13명 중 9명이 심온의 후손들이며, 대제학 2명, 왕비 2명, 부마 1명이 모두 심온의 후손들이어서 심온 묘가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은 신갈 안산간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면서 맥을 완전히 절단시켜 놓았다.
3. 옛날 보리밥집에서 점심식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226
계원예술대학 뒤편에 있다. 모락산 자락이 휘감아 돌며 작은 보국을 이룬 곳에 있다. 약100년 전에 지어진 살림집을 현재의 음식점 사장이 구입해서 개업했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양택지 공부를 할 수 있다.
4. 청풍김씨 발복지 김인백 처 안동권씨 묘
조선조 중기 청풍김씨 가문은 명당 하나를 잘 쓰고 3정승 6판서를 낸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가문의 번영을 있게 한 김인백 처 안동권씨 묘는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오봉산 아래에 있다. 서울에서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를 따라 가거나, 과천에서 수원 가는 고속화 도로를 따라 의왕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1번국도 의왕, 안양 방면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좌측으로 오봉산이 있는데 바로 그 아래에 묘가 있다. 가까이에 의왕시청이 있다.
오봉산은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 보은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분맥하여 죽산 칠현산까지 와서 다시 한남정맥이 되어 김포, 강화까지 행룡하는데 수원 광교산(582m)과 백운산(564.2m)을 지나 군포, 안양 수리산(474.8m)으로 가는 중간에 조그만한 봉우리 5개를 만들어 기봉한 산이 오봉산(205m)이다. 비록 산은 작고 높지 않지만 한남정맥의 대간룡(大幹龍)으로 산천 정기가 응집되어 있다.
청풍김씨(淸風金氏)가 조선 중기 이후 줄줄이 부자(父子) 영의정에 3정승 6판서를 배출하여 명문가로 자리 잡은 것은 오봉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본래 이 자리는 부자인 석씨(石氏)네 집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풍수지리에 밝은 두 지관이 팔도 유람을 하다가 큰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이곳을 보고 명당의 소응이 어떻게 나타나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몰래 마루 밑에 땅을 파고 솔잎을 묻어 두었다. 그리고는 1년 후에 다시 와서 솔잎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자고 하였다. 마침 이 집에 놀러왔던 김인백의 아들 김극향이 이 소리를 듣고 지관들이 오기로 한 날보다 일찍 와서 마루 밑을 확인해보니 솔잎은 누런 황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이 혈이라는 것을 안 김극향은 낙엽이 되어 떨어진 마른 솔잎을 주어다 황금빛 솔잎과 바꾸어 놓았다. 정확하게 1년이 된 후 두 지관이 와 이를 확인해 보니 솔잎은 모두 썩어 있었다. 그들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가우퉁 거리면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났다. 김극향은 친구인 주인 석씨를 설득하여 집을 매입한 다음 어머니 안동권씨가 돌아가시자 집을 헐고 그 자리에다 장사지냈다.
그 뒤 발복이 시작되어 극향의 아들 징(澄)이 전라도 관찰사를 하였고, 징의 아들 구(構)는 6조 판서를 두루 거쳐 우의정에 올라 당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치열했던 때 당쟁 완화에 진력했던 당대의 명신이 되었으며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김구의 아들 김재로(金在魯)는 영조 때 4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20년 동안 정승자리를 지켰으며 영의정만 4차례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의정 재임 기간동안 세조 왕위 찬탈 과정에서 억울하게 숨진 황보인, 김종서 등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도 했다.
김재로의 아들 김치인(金致仁)이 영조 때 또한 영의정에 오르니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영의정을 하였고 할아버지 김구까지 3대 정승이 연달아 나온 것이다. 역사상 3대 정승을 낸 집안은 청송심씨와 달성서씨, 그리고 청풍김씨 세 가문 밖에 없었다. 징의 차남이자 구(構)의 동생 귤(橘)은 숙종 때 대제학을 하였으며, 귤의 아들 취로(取魯)는 영조 때 판서를 했고, 약로(若魯)는 영조 때 좌의정, 상로(尙魯)는 영조 때 영의정을 하였다.
이렇듯 거의 같은 시기에 한 가문에서 6명의 정승을 냈으니 장안에 화제가 되어 이들을 4대 6상(四代六相)이라 불렀다. 이후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있는데 근세의 인물로는 구한말 이름 높았던 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윤식(金允植)과 김규식(金奎植)이 있고 소설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金裕貞)도 이 후손들이다. 청풍김씨는 조선 효종에서 정조대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을 배출하였고 조선조 문과급제자 수만 총110명에 이른다. 청풍김씨가 조선 중후기에 이렇게 번영하게 된 것은 오봉산 아래에 김인백 부인 묘의 발음(發蔭) 때문이라고 말한다. 안동권씨 부인 묘를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오봉산은 봉우리 하나에 정승 한 명씩 나온다고 하는 곳이다.
5. 사도세자 융릉, 정조대왕 건릉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융릉(隆陵)과 효행으로 손꼽히는 조선 제22대 정조의 건능(健陵)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산1-1에 있다. 융릉은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뒤주에 갇힌 채 생죽음을 당한 사도세자(1375~1762)와 헌경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를 모신 합장릉이다. 건릉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합장릉이다. 본래 왕릉의 위치는 임금이 하루 만에 참배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리인 백 리 안쪽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융․건릉은 백 리가 훨씬 넘는다. 신하들이 너무 멀다며 이장을 반대하자 정조는 화성이 80리라고 억지로 우겨서 이장을 하였다. 이때부터 수원 80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사도세장의 융릉은 용혈사수 모든 것이 두루 잘 갖추어진 명당이다. 그런데 능은 맥을 벗어난 곳에 쓰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간다. 정혈에만 썼다면 그 정도 명혈이면 자손이 끊길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가 일찍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등극하였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22세로 세상을 뜨자 손자인 헌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후사 없이 죽어 손이 끊기고 말았다. 사도세자와 후궁인 숙빈김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이 은언군의 3남이 전계대원군이며, 그의 아들이 강화도령 원범으로 철종이다. 그러나 철종도 후사없이 죽자 사도세자의 후손들은 모두 맥이 끊기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조선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평대군)의 6대 손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남연군이 되고, 그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며,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왕통을 이었다.
아무리 보국이 좋더라도 맥을 받지 못하는 곳이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왜 그랬을 까? 여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있었을 것 같다.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싸움이니 신하들 입장에서 왕이 명당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정혈처를 피해 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이다.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무덤이나마 좋은 곳으로 모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실제로 학문을 좋아했던 정조는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왕이 되자 제일 먼저 동대문 밖 배봉산에 묻혀있는 아버지 묘를 이장할 것을 명하여 좋은 자리를 찾도록 하였다. 신하들이 추천한 여러 후보지를 정조가 직접 좋고 나쁨을 평하여 최종지로 지금의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유골이 안장될 정확한 자리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풍수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이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조의 지시대로 공사를 했을까하는 점이다.
뭔가 여기에는 정조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숨어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이 직접 땅을 파는 것을 확인하고 감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이 능을 참배하러가도 능까지는 올라가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제를 올리고 돌아가므로 아무리 풍수지리에 능통한 정조라 할지라도 세심한 부분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개혁과 왕권강화를 꿈꾸며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던 정조! 그러나 미처 그 꿈을 다 펴지 못하고 49세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니 독살 당했다는 설이 있다. 임금을 독살할 만큼 배후세력이 존재했다면 능을 조성하는데도 일부러 나쁘게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의 의문은 여기에 있다.
정조대왕 건릉은 완전히 맥을 벗어난 곳에 조성하였다. 그러나 얼핏 보면 명당 터로 보이는 곳이다.
포은 정몽주, 저헌 이석형 선생 묘의 산맥도
심온 묘, 융건릉, 청풍김씨 발복지를 비롯한 수원일대 산맥도
* 산맥도 복사해 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