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 서울대병원 안에도 사도세자와 관련된 곳이 있다구요?
아빠 : 그럼! 병원 건물 뒤편에 있는 함춘원터는 사도세자와 관련이 깊은 곳이야. 저기 보이는 함춘문 앞에서 천천히 설명해 줄께.
함춘원지(含春苑址, 함춘원터)는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에 있는 조선시대 원유(園囿, 여러 가지 식물을 심어 가꾸거나 여러 가지 동물을 기르는 일정한 장소)로써 사적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안에 사도세자의 옛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기 때문에 경모궁지(景慕宮址)라고도 불린다.
"봄을 품고 있는 정원" 이라는 함춘원의 한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함춘원은 창경궁의 부속후원이었다. 창경궁을 만든 성종임금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지세가 허약한 창경궁의 동쪽을 비보하기 위해서 동쪽언덕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했던 것이 함춘원의 시작이었다.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은 함춘원을 대규모로 확장하였는데 주변의 민가들을 철거한 뒤 기이한 화초들을 심어 별세계를 꾸몄으며 담밖에는 군사들을 배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는 등 그 안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
연산군에게는 한양의 서쪽 세검정 근처에 봄의 풍류를 방탕하게 즐기려고 지었던 정자와 돈대인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다면, 한양의 동쪽에는 함춘원이 있었으니 어디서든 봄을 즐기려 했던 연산군의 방탕함을 엿볼 수 있다.
아무튼 함춘원은 그 후로도 역대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임진왜란때에 상당부분이 파괴된 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 이후 인조임금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 마구간 및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에 할당해서 이후 방마장(放馬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순조임금 당시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에는 창경궁의 가장 우측 아래쪽에 벽이 없이 기다란 형태의 마구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 부분이 사복시의 궁궐내 출장소 격인 내사복시(內司僕寺)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함춘원의 유적은 <함춘문> 뿐이고 돌로 만든 석단은 후대 정조임금때 설치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유적이다.
딸 : 굳이 왜 이 곳에 사도세자의 사당을 만들었을까요?
원래 사람이 죽으면 살아생전 몸속에서 조화롭던 음양의 기운이 각각 빠져나가는데, 사후(死後) 양(陽)의 기운인 혼(魂)을 모신 곳을 <사당(廟)> 이라고 하고, 음(陰)의 기운인 백(魄)을 모신 곳을 <무덤(墓)> 이라고 한다. (둘 다 한자의 발음이 `묘` 이므로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영조는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원래 사도세자의 <사당> 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같은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 함춘원지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그런데 이때 사당의 위치는 아마도 함춘원지의 방마장(放馬場)을 제외한 나머지 땅에다 지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김정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수도 한양의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함춘원과 경모궁이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모궁이란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수은묘(垂恩廟)를 격상시킨 이름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임금의 주거처인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에서 먼 곳에 있던 사도세자의 원래 사당위치를 창경궁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함춘원지에 옮겨 놓은 것이 다름 아닌 영조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조는 왜 그랬을까?
아무리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또한 종묘사직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사도세자를 죽이긴 했지만 자식을 죽인 영조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곧바로 죽은 세자에게 애도하면서 생각한다라는 뜻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이유를 종사(종묘와 사직)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밝혔고 그 부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 영조실록 제99권, 38년(1762 임오년) 윤5월 21일(계미) >
사도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후략)
한편,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은 실로 대단했다. 아버지의 사당을 수은묘에서 경모궁으로 승격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거처하던 창경궁 쪽과 서로 통할 수 있도록 경모궁의 서쪽편에 문을 두개 만들었는데 이름이 일첨문(日瞻門)과 월근문(月覲門)이었다. 첨(瞻)은 볼 첨이니 매일 바라보겠다는 뜻이고, 근(覲)은 뵐 근이니 매달 찾아뵙겠다는 뜻이다.
함춘원의 정문이었던 함춘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뒷면의 기둥은 원기둥을, 그리고 가운데 기둥은 네모기둥을 써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는 하늘과 가까운 쪽은 양, 하늘과 먼 쪽은 음으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리 전통의 천원지방 사상의 표현으로 여겨지며, 경복궁 근정전 행각에서도 비슷한 기둥 배치법을 확인할 수 있다.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전달해 주는 건축부재인 공포는 새의 날개 모양을 닮은 초익공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구조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겹처마를 이루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의 세련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아빠 : 사도세자의 사당은 사도묘, 수은묘, 경모궁을 거쳐 현재는 종묘에 모셔져 있단다.
딸 : 그럼 사도세자의 무덤은 어떤 변화를 겪었나요?
사도세자의 <무덤>은 처음에는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완전히 복권시키고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사당>인 경모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무덤> 이었던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일단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물론 정조의 속마음 같아서야 <장헌세자>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었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정치적 실세인 노론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었다.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조>가 되는 것은 훗날 고종 때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하지만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고 해도 이름만 바뀌었을 뿐 <무덤> 그 자체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는데, 그 후 정조는 `영우원` 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 이라고 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그러다가 고종 때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나서는 당당히 조선의 왕릉으로 인정받아 현재는 `융릉` 으로 불린다. 바로 옆에 있는 정조의 무덤인 `건릉` 과 아울러 `융건릉` 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딸 : 사도세자의 사당과 무덤에 대해서는 이제 잘 알겠는데 실제로 뒤주에 갇혀 죽은 장소는 어디에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을 찾아내는 것은 풍수지리의 기본적인 원리만 알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아무리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폐서인 되었다 하더라도 일국의 세자였는데 저잣거리에서 형을 집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궁궐 내에서 형을 집행하여야 했다. 그런데 궁궐은 기본적으로 명당에 만들어지고 또한 궁궐의 명당기운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명당 물길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모든 궁궐은 돌다리를 건너야만 궁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는 나쁜 기운이 생겨나기 때문에 궁궐의 명당기운을 해치지 못하도록 궁궐내에서도 가장 명당기운이 약하거나 다른 곳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곳에 형의 집행장소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풍수원리를 알고 사도세자의 처형장소를 풍수기법으로 찾아보자.
사도세자는 당시 동궐(창덕궁+창경궁) 속의 시민당(時敏堂) 건물을 정당(正堂)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동궐 속에서 처형장소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면 두 궁궐 중의 하나이다. 창덕궁 영역이냐, 아니면 창경궁 영역이냐?
창덕궁은 조선 후기 국왕의 법궁으로 활용된 궁궐이고 창경궁은 성종때 대비들을 위해 만들어진 부수적인 보조궁궐이다. 따라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창경궁이 처형장소로 1차 결정이 된다. 그렇지만 창경궁도 매우 넓은 공간이다. 거기서도 또 2차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궁궐에는 가장 중심이 되는 중심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정전(正殿) 또는 법전(法殿)이라고 하며, 궁궐내의 전각중에서는 2층 또는 가장 큰 규모로 짓는다. 창경궁의 법전은 <명정전> 이다. 그런데 명정전 앞의 조정마당에는 삼도(三道)라 하여 3차선 돌길이 깔려있다.
일반적인 궁궐의 경우에는 그 삼도를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임금(군주남면)의 왼쪽(동쪽)은 문신들이 줄지어 서고, 임금의 오른쪽(서쪽)은 무신들이 줄지어 선다. 무신은 원래 전쟁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본업이다. 따라서 처향장소는 무신들이 있는 서쪽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창경궁은 독특하게도 남향이 아니라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의 오른쪽은 방위상 서쪽이 아니라 남쪽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처형장소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남쪽방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처형장소의 2차 선택까지 완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장소는 매우 넓어서 더 범위를 줄여야 한다.
여기서 또 한가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궁궐 내에서도 명당인 곳이 있고 명당이 아닌 곳이 있는데 두 구역을 가르는 것은 물길이라고 했다.(명당기운은 물을 건너가지 못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창경궁의 옥천교 밑을 흐르는 명당물길 바깥쪽이 최종 처형장소로 선택되어야 하는 것이 풍수기법으로 찾아본 결과이다. 그것도 물길이 거의 끝나가는 쪽일 수록 궁궐에 영향을 덜 주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사료를 통해 실제 사도세자의 처형과정을 정리한 데이타와 풍수기법의 추리과정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현 창경궁 문정전) 앞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뒤인 윤5월 21일 사도 세자의 사망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
○ 왕세자가 대명(처분을 기다림) 하다
○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
○ 사도 세자가 훙서하다. 왕세자의 호를 회복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세자를 처음 뒤주에 가둔 곳은 휘령전 앞마당이었는데 여기서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휘령전은 지금의 문정전인데 이는 곧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정치활동을 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이내 뒤주를 선인문(宣仁門) 앞마당으로 옮겼다. 굳이 뒤주를 옮긴 이유는 죽을 장소를 따로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창경궁 지도를 꺼내서 선인문 앞마당을 찾아보면 신기하게도 우리가 풍수기법으로 찾아본 장소와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딸 : 불쌍한 사도세자... 아빠의 말을 듣고나니 풍수로 보는 궁궐의 구조가 궁금해지네요.
아빠 :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를 보러갈까? 사실 동궐도 만큼 비밀을 많이 간직한 문화재도 찾기 쉽지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