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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0연대등 속속 광주에 투입
시민대표 연행자석방등 4개항제시
계엄사, 1개연대등 병력 추가로 배치
11공수 61,62연대장 시민들앞에 나타나 [시위대 살해]전면 부인
첫 협상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등을 몰고 나온 시민들의 주류는 전남 도청 앞으로 향한다.
21일 오전 9시 30분께.
도청앞에 집결한 시민은 10만을 육박한다.
초파일을 맞아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들이 [시외교통]이 완전 두절됐음을 확인하고 도청으로 모여든다. 이날 새벽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구의 시체가 시위대 선두에 선다.
11공수 3개대대가 가톨릭 센터앞을 경계로 시민들의 도청진입을 저지한다.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의 거리는 불과 30미터.
[동족으로서 이렇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느냐] [공수부대는 당장 광주를 떠나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시위대와 공수부대원들 사이에 잠시 논쟁이 벌어진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김후식씨(당시 40세 5.18 광주 의거 부상자회 전회장)등은 당시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이날 오전 10시께 가톨릭 센터 앞으로 가보니 전옥주씨가 시체 2구를 실은 리어카 위에서 시민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일부 시위 군중들은 가까이 있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격렬히 항의 했다.당시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그렇게 험악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일부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자 빵과 우유를 사다주기도 했다. 지난 3일동안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희미한 믿음같은 것이 있었다. 말로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이 얼마만큼 순진한 것이었는가하는 점을 깨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시민들의 항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자 11공수 61,62 연대장인 안부웅 이재원 중령등 지휘부가 시민들 앞에 나선다. [이 시체는 바로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수가 있느냐. 당장 광주에서 철수하라.] 시체를 눈으로 확인한 안중령등은 모든 사실을 부인하며 이를 거부한다. [우리는 일선 대대장이라 시민들이 요구하는 공수부대 철수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과잉진압이라고 하는데 시민들이 공격을 안하면 우리도 안한다. 그리고 조선대에 학생들이 연행돼 있다고 하는 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당시상황 녹음 재현)
안중령등의 답변에 대해 시민들은 더욱 흥분한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안중령은 시민대표와 장형태 전남 지사와의 면담을 주선하겠다며 대표선정을 요구한다.
시위를 주도하던 장옥주씨와 김범태군(당시 조대 법대 1년)회사원으로 추정되는 두사람등 4명의 대표가 선정된다.
오전 9시 50분 18일 이후 시민대표와 행정기관 관계자간의 최초의 면담이 이뤄진다.
도청 시민 진입 저지
당시 시민 대표가 장지사에게 제시한 요구사항은 모두 4가지.
*먼저 지난 3일 동안 발생한 유혈사태에 대해 전남지사가 사과할것
* 연행시민,학생들을 전원 석방하고 입원중인 학생들의 소재와 생사를 알릴것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모두 시내에서 철수 할것
* 전남북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와의 협상을 주선 할것.
김옥주씨(당시 32세)의 증언. (전씨는 이날의 상황을 20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중령과 대위한 사람이 우리 4명을 도청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안내한 곳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장형태 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30분쯤 지난 후에야 장지사가 들어왔다. 모친상을 당해 다녀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장지사는 먼저 자신도 현재의 상황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엄군이 주둔하게 되면 자신에게 사전에 통보토록 돼있는데 그 절차를 무시했다는 불만이었다. 잠시후 대표들이 요구사항을 얘기하자 장지사는 낮 12시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책임지고 계엄사령관을 만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12시까지 기다리기엔 시민들이 너무 흥분해 있다며 도지사가 직접나와 방금 이야기한 상황을 설명하고 시민들을 달래줄 것을 요구했다. 장지사는 이를 수락했다. ]
약속을 받아낸 대표들은 다시 금남로에 나와 [도자사가 곧 나오기로 했다.]며 시민들에게 질서를 유지해 줄것을 호소한다.
다섯명이 한조가 돼 어깨동무를 한 시민들은 [선구자] [아리랑] [늙은 군인의 노래]등을 부르며 장지사를 기다린다. 그러나 5분뒤에 나오겠다던 장지사가 30여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시민들 사에에 술렁임이 인다.
[속았다]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시민대표가 또다시 도청으로 들어가 장지사에게 빨리 나와 줄것을 요구한다.
헬기로 선무공작
도청안에서 협상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김역택씨(당시 동아일보 주재기자)는 당시 장지사가 시민들앞에 나왔을 경우 시위상황이 상당히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 군중들은 도지사가 도착하지 않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대대장 2명조차도 빨리 지사님이 나와서 사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끝내 장지사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때 장지사가 시위군중 앞에 나왔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 장지사의 출현이 늦어지자 군중들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왔다.]
잠시후 당시 광주 시장이던 구용상씨가 시위대 전면에 임시로 마련된 연단에 선다. 그러나 시민들은 구시장을 야유로 맞이한다.
도지사를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광주시장의 등장은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김옥주씨의 증언. [장지사를 기다리며 노래와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구 시장이 연단위로 올라왔다. [광주시민여러분 저는 광주 시장입니다.]로 시작된 구시장의 연설은 세마디를 넘기지 못했다. 흥분한 군중들의 야유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시위대의 전면에 서있던 장갑차가 간이 연단을 밀고 들어왔다. 구시장은 비서의 도움을 받아 관공호텔쪽으로 빠져 나갔다. 잠시후 엄청난 양의 최루탄이 발사됐다. 너무 심하게 발사돼 숨을 쉴수 없는 지경이었다. ]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대화를 시도했고 대화를 통해 계엄군 철수 등의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시민들의 바람은 산산히 깨지고 만다.
최루탄에 밀려 잠시 골목길로 대피했던 시민들은 또 다시 금남로로 모여든다.
몽둥이 ,쇠파이프를 든 시민들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난다.
10시 40분께 도청 상공에 헬기가 나타난다.
시민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장지사는 헬기를 탄채 [공수부대를 철수 시킬테니 시민들은 질서를 지켜달라]고 요구한다.
시민들의 반응은 분노에 찬 돌팔매질. 그러면서도 시민들은 기다린다.
[비록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공수부대를 철수 시키겠다는 약속만큼은 지킬지 모른다]
[정오까지 기다려 보자. 설마 저렇게 까지 얘기했는데 약속을 어길리 없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신군부의 움직임은 시민들의 이런 바람과 정반대로 나간다.
공수부대 공세형 진압
장지사가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 철수를 약속하고 있을 그 시각 이희성계엄사령관은 오히려 광주에 1개연대의 추가투입을 결정한다. 비무장 민간 시위대 해산을 위해 투입된 병력은 공수 특전여단 10개 대대와 20사단 61,62연대. 그것도 부족해 1천 5백명 규모의 60연대 투입이 결정된다.
21일 정오.
금남로에는 20여만명의 시민들이 집결한다.
가톨릭센터앞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선이 1백여 미터쯤 후퇴한다.
공수부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방어적이던 공수부대의 저지대형이 공세형으로 바뀐다. 도청에는 헬기가 쉼없이 오르내린다.
폭풍전야.
그러나 이같은 상황변화가 [10일간의 항쟁 기간]중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될 [집단발포]의 시작임을 일반시민들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