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살림집-한옥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집을 한옥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적인 독특함이 집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독특함은 한국의 기후와 재료, 관습 등에 의한 차별화와 더불어 중국의 가구 구조를 받아들이면서 함께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양건축이라는 큰 범주 안에 한옥이라는 개념을 포함시킬 수 있고,
그 특징이라 하는 것은 가구 구조보다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 그 특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우리 외가나 시골집이 그 특징의 정수를 표현하는데
바로 온돌과 마루라고 불리는 공간이 한 집안에 함께 시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온돌과 마루라는 것이 어떤 존재이기에
한국의 독특함이라고 하는지 이제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한옥 - 한국의 살림집 - 의 특징이라 하면 앞에서 언급한 온돌과 마루의 공존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집에 이 둘이 모두 설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곳도 있지만 그 정신만은 항상 포함되어 있다.
일단 온돌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온돌은 방바닥을 이루는 구들, 불을 때는 아궁이, 그 불길이 지나가는 통로인 고래,
그리고 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을 설치할 때는 취사용이나 기타 용도에 쓰인 불의 에너지를
방으로 돌려 난방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따라서 아궁이는 대게 부엌에 놓이게 되는 것이며 부엌 옆에 가장 큰 방이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독립적으로 난방을 하기 위해 아궁이를 만들기도 한다.
즉 별실이 존재하거나 구조적으로 하나의 아궁이로 난방을 하기가 무리인 경우이다. 이렇게 아궁이가 만들어지는데
아궁이는 불을 때는 장소인 만큼 방바닥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한옥의 부엌이 낮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온돌을 포함한 집은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저상식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저상식이란 것은 낮게 짓는 다는 의미로 상대개념인 고상식을 염두에 둔 용어이다.
고상식이란 것은 마루집을 의미하는데 남방의 건축계통이라 하겠다.
이런 온돌과 성격이 비슷한 난방 방식은 물론 중국에도 있지만 온돌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온돌은 방 전체를 난방하는 방식인데 중국 만주지방에서의 난방방식은 방 일부분만을 난방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즉 내부에서 한 면을 낮추고 거기에 아궁이를 만드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런 경우 집의 전체 구조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상식의 북방계통 집이 언제 우리 나라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이는 우리 나라 집의 역사와 같이 하는데
움집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의 경우 이 구들의 쓰임이 하류계층에서만 보이고 있는데
이는 아마 그 당시 선진적으로 도입된 건축기술과 이 온돌방식을 접합하기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리 북방계통의 전통을 받아 고구려가 집 만드는 기술을 받아들였지만 그 구조 자체가 마루집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마루집이라고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목구조를 기본으로 하기에 그렇게 본 것이다.)
이런 온돌이 한국의 건축물에 보편적으로 채용되는 것은 고려중기 이후며 이 당시도 그 남방 한계가 중부지방이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이 구조가 채택되기에 이른다. 즉 온돌을 주요한 난방의 구조로 채택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화로를 이용한 부분난방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마루구조의 채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마루의 원형은 우리가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원두막이다.
즉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를 막고 한 낮의 지열로부터 피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런 구조는 남방에 어울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남방고상식이란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마루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뜰마루라는 것이 있다. 이건 쉽게 우리가 아는 평상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런 평상과 같은 것을 집에 쓰게 되면 뜰마루가 되는 것이다. 쪽마루와 툇마루라는 것이 있는데,
쪽마루는 모양에 있어서 뜰마루와 같은데 다만 집에 고정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고, 뒷간에 만든 마루를 툇마루라고 한다.
퇴라는 개념은 상당히 골치 아픈 것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집에 벽을 두르고 내부가 아닌 곳에 기둥이나 기타 지지물을 이용해
또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내부와 외부의 중간개념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일반적으로 또 다른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주변이라는 개념이다.
건축물의 간살이를 셀 때 쓰이는 툇간의 개념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청마루를 들 수 있다. 집의 한 부분을 뚫어 마루를 짜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마루가 생기게 된 역사에는 마루를 집에 채용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루의 채용이 무엇이 어려운가 생각되지만 실제 그것을 실험하며 쓰기에는 전통의 무게가 적지 않은 것이다.
마루가 사용된 데에는 그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루는 처음에는 거주공간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아주 부분적이었다.
그건 겨울이 아무리 남쪽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그냥 겨울을 보내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루는 북부지역에서는 창고에서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음식물이나 기타 물건을 보관하는 집의 구조가
마루와 같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던 마루에 한가지 필요가 더 추가되었다. 보온을 위해서나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방마다
간살이를 만든 것까지는 좋은데 그 때문에 동선이 매우 불편해진 것이다. 그리고 방의 특성상 큰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더운 우리 나라의 여름을 이길 공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필요성에 의해 뜰마루, 쪽마루, 툇마루, 대청 등의 다양한 마루가 연결,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마루의 채용 역시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조선중기에 와서나 전국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거의 2000년에 걸쳐서 한국의 집 원형이 완성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우리의 집은
우리 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런 필요와 과학적 이유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국건축의례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 이유는 지어서 팔 집이 아닌 조상과 자신이 함께 살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터를 구하는 것부터 풍수지리를 생각하여 좋은 터를 구하려 애썼고 집을 짓는 것도 옛날부터 내려온 격식을 지키려 하였다.
집을 짓는 격식을 일러 우리는 '建築儀禮'라 부른다. 그리고 '건축의례'는 우리 옛 집들이 자기 건강을 지키기 위한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통과의례들은 제각기 의미를 가지는데,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집에 대한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건축의례' 그 각각의 모습을 살펴보자.
가) 날받이․텃고사
집 지을 재목이 준비되면 주인은 문복장이(점쟁이)로부터 집터 닦는 날, 주추 놓는 날, 상량 올리는 날 등을 미리 받아 놓으며
그 중에서도 상량일은 날짜는 물론 시(時)까지 맞추도록 노력한다. 이것을 '날받이'라 하는데 날을 받음과 동시에
사랑채․안채․대문․곳간․헛간․뒷간․우물자리까지 잡는데 이 역시 문복장이가 정한다.
'텃고사'는 집터의 신(土地神)에게 땅을 파헤치고 집을 짓게 되었으니 집 짓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도와달라고 지내는 제사이다.
이 때에는 집터 가운데에 흙을 모아놓고 주위에 왼새끼를 치며, 집터 네 귀에 술을 부어 사방의 신들을 먹이는 것으로 여긴다.
'텃고사'는 집터뿐만 아니라 묘지 터를 잡을 때도 올렸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집터를 양택(陽宅),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한가지로 생각한 결과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집을 짓고 살아가는 동안 운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며 한 해 한 번씩 정기적으로 지내기도 한다.
이 고사는 음력 정월달에 지내며 솔잎으로 잡귀의 접근을 막기도 한다.
나) 開工고사
'개공고사'는 일꾼들이 일을 벌이기 직전에 올리는 제사이다.
이 고사는 목수들이 마름질한 들보 아래에 톱을 늘어놓고 가신을 모신 뒤에 제례를 올린다.
그리고 붉은 종이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라는 글귀를 붉은 글씨로 써서 처음 손질할 나무에 걸어두어 잡귀를 쫓는다.
'개공고사'는 오늘날의 기공식과 같은 것이다.
다) 모탕고사
이 고사는 목수들의 안전을 위해 올리는 제례이다.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받치는 나무) 주위에 연장과 간단한 제물을 차리며, 대궐에서 큰 공사를 할 때에는 대장장이들이
풀무까지 가져다 놓았다. '모탕고사'는 배를 만드는 목수들도 지낸다.
다른 고사들이 집주인이나 공사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이 '모탕고사'는 집 짓는 기술자들 만을 위한 고사인 셈이다.
라) 성주운 보기
'성주운 보기'는 집주인의 운수와 앞으로 그 집을 지켜줄 성주의 운이 서로 맞는가를 문복장이에게 알아보는 일이다.
양쪽 운이 좋을 때는 '성주운이 닿는다'라고 한다. 운이 닿지 않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운을 빌리기도 하는데
매매절차로 술대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통은 성주운이 좋아지는 이듬해까지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다.
마) 상량고사
상량고사는 기둥 위에 보를 얹고 그 위에 상량인 마룻대를 놓을 때 올리는 고사로 집 짓는 고사 가운데 가장 성대하게 지낸다.
이로써 집의 외부공사가 대체로 마무리되며 다음부터는 마루를 까는 등 내부공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상량을 올리는 일은 집을 지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마루턱을 이룬다.
또 마룻대는 집의 제일 높은 곳에 거는 중요 부재인 까닭에 누구든지 이 고사는 첫 손으로 꼽으며
형편상 다른 고사는 빼더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지낸다. 양옥이나 빌딩 같은 현대식 건물에는 실제로
상량이라 할 만한 부분이 없음에도, 건축주가 이 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고사에 대한 재래의 관념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재물을 차리는 것은 일정하지 않아 주인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친척들이 집주인을 위해 덕담과 재물을 내놓는데 목수들이 이들을 모두 차지한다. 그래서 상량일을 목수의 생일이라고도 한다.
상량고사때 주인은 집 짓는 데에 사고가 없고 짓고 나서 부귀공명을 누리게 해달라고 축원을 올리며 술을 집의 네 귀퉁이에
조금씩 붓는다.
상량에는 상량문이라 하여 집을 지은 해․달․날․시․좌향․축원문 등을 적으며 큰 건물에는 신축이나 중창여부,
도편수와 중편수의 이름까지 쓴다. 특수한 건물이나 일반 가옥에는 이 글을 상량의 받침도리 바닥에 먹으로 써 놓아서
누구든지 읽어 볼 수 있으나 공공 건물인 경우에는 한지에 글을 써서 상량도리 장혀에 구멍을 파서 넣고 도리를 얹으므로
도리를 빼기 전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러한 건물에는 상량문을 새긴 현판을 따로 만들어 걸어두기도 한다.
일반 가옥의 상량문 좌우 양 끝에는 용자(龍字)와 구자(龜字)를 서로 마주대하도록 써 둔다.
용과 거북이는 수신(水神)이므로 이렇게 적어두면 화재가 나지 않으리라 여긴다.
상량문은 십간과 십이지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농가에서는 방아 상량이라 하여 디딜방아를 만든 다음, 방아 틈 왼쪽에 '경신세 경신월 경신글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나
'강태공 하마처'라는 글귀를 써둔다. 이러한 글귀는 모두 방아의 수명이 오래고 방아 때문에 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주문이다.
바) 집들이
집들이는 새로 지은 집으로 처음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이 살던 집으로 이사갈 때 미리 날을 받아 두었다가 지내는 제례이다.
이삿짐 중에 먼저 집에서 쓰던 화로나 아궁이의 불을 죽이지 않고 가져가며 물동이도 물이 담긴 그대로 옮긴다.
이렇게 하면 먼저 집에서 누리던 복락(福樂)을 잃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새집에 입주할 때는 남자가 먼저 들어가는 등의 순서를 미리 정하거나 문을 따로 하여 여자는 뒷문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장남은 오곡이 담긴 그릇을, 어머니는 거울을, 그리고 대주는 가신을 모시고 차례로 안 마당에 들어가서 자리를 펴고
향을 피우며 예를 올린다. 또 이날은 재물을 들이는 것은 좋으나 재물을 내가는 것은 나쁘다.
그리고 집들이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그 집의 운수가 불길처럼 일어나라고 성냥따위를 가져간다.
사) 성주고사
성주는 집을 지켜주는 으뜸가는 신령이다.
집을 지었거나 이사를 하였을 때 주인의 나이가 7의 수가 되는 해(예:27, 47, 57살……)사월 상달에 날을 받아
이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성주고사 또는 성주굿이라 한다.
이 고사는 무당이 밤에 벌이는 것이 보통이다. 무당은 대청에 차린 굿상 앞에서 성주 받이로 들어간다.
백지 한 장을 맨 소나무(성주대라고 한다)를 무당이 들고 마당에 서서 성주신의 강림을 기원하며 성주대가 흔들리면
이것을 신으로 생각한다. 신령을 깨끗한 곳에 모신 뒤에 무당은 춤을 추어서 신령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덕담을 풀어헤치며 성주풀이를 베푼다.
이 성주신에게는 집안의 제삿날이나 명절에 제일 먼저 상을 차리며 혼사 따위의 일상적인 일이 아닐 때도 알린다.
지역별 특징
민가의 외부형태는 건축재료의 개량, 건축기술의 발달에 따라 비교적 빠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민가의 평면 구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생활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평면 구조는 지역에 따라
그 지역의 풍토에 맞게 연구되어 오랫동안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대대로 우리나라 민가의 평면 구조를
관서․관북․중부․남부․제주형으로 나누고 그 특색을 밝히고 있는데, 중부․남부․관서형의 가옥 구조가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데 대하여
관북형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외 다설지역의 가옥 구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가) 관북형
기본형은 전(田)자형, 일(一)자형 때로는 이(二)자형 등도 있고 구조상의 특색은 겹집이라는 점과 방과 부엌 사이에 벽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또한 화북 지방에서 만주 일대에 분포하는 항의 계통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정주간이 가장 뛰어난 특징이다. 정주간은 부엌과 방 사이의 넓은 온돌방이고, 부엌과의 사이에 벽이 없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정주간은 부엌에 붙은 방이기 때문에 가장 따뜻한 방이 된다.
겨울에는 침실로도 사용되고, 평소에는 식당으로 이용되면서 거실의 역할을 하는 다목적 방이다.
또한 외양간과 광은 모두 부엌과 가까이 있어 부엌에서 직접 출입할 수 있으며 마루방은 없다.
이러한 특징은 길고 추운 겨울에 견디기 쉬운 구조이다.
한편 한국의 가옥은 대들보 아래 방을 일렬로 배치한 단열형(홑집)과 2열로 배치한 복열형(겹집)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대표적인 관북형은 복열형 가옥이고, 온돌방 네 개와 온돌인 정주간을 합쳐 오실이 되어 오실형 이라고도 한다.
정주간에 접속되는 방은 경제력의 차, 발달 단계의 차에 의해서 2실, 4실, 6실 등이 부가되는 경우도 있으나
관북형에서는 5실형이 가장 넓게 분포한다.
나) 관서형
몸체의 구조는 일자, ㄱ자, ㅁ자형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자형과 ㄱ자형이 많다.
대들보 아래에 방을 일렬로 배치하는 한반도의 서부와 남부에 분포하는데, 관서 지방에는 일자형의 몸체에
부속건물이 평행하게 배치되어 이자형을 이룰 때도 있다. 일자형의 경우에는 평면 구조가 단순하여
일실일주거(一室一住居)의 한국 가옥 기본형에 가깝다. ㄱ자형의 경우에는 부엌과 방 사이에 반드시 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방에는 냉기를 막기 위하여 좁은 골방이나 벽장이 붙어 있고 대청마루는 없으나 관북형에서는 볼 수 없는 툇마루가 등장한다.
안방의 명칭은 부엌에 가까운 쪽의 방을 아랫방, 다음 방을 윗방이라고 부른다.
다) 중부형
기본형은 ㄱ자형이며 집이 커짐에 따라서 ㄷ자형 또는 ㅁ자형이 되며 일자형도 혼합되어 있다.
관북형이나 관서형과 달라서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중부형의 현저한 특색이며, 그것은 손님 접대와 여름철 거처로 이용된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한다. 건넌방은 대청마루와 연속되는 마루의 유리창으로 바깥쪽과 접하는 경우와
또는 좁은 툇마루가 붙은 경우가 있다. 중부형에서도 서울형은 폐쇄적인 것이 특징이며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이 기본 구조를 이룬다.
라) 남부형
기본형은 일자형이며 집이 커짐에 따라 이자형의 겹집과 ㄱ자형도 많다.
일자형의 가옥은 2개, 3개의 방이 단열로 길게 배열하는 퉁구스 계통의 형태를 이룬다. 이자형의 경우는 이동(이동)
또는 별동(별동)으로 이루어져 습윤한 남방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중부 이북의 가옥은 한랭 기후에 맞도록
가옥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대하여 남부형은 분명히 온난한 기후에 맞춘 개방적 가옥구조이다.
남부형의 특징은 대청마루와 방 앞에 툇마루가 붙은 점이다. 방의 넓이는 관북, 관서형에 비하면 약간 좁은 편이나
중부형에 비하면 넓다. 방과 툇마루 사이의 문지방은 현저히 낮아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일본가옥의 시키이와 비슷한 구조를 이룬다.
마) 제주형
넓은 의미로는 남부형에 속하나,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 관계로 반도 남부와는 크게 다른 고립된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하여,
가옥의 평면 형태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과 부엌이 있다.
방 뒤쪽에는 곡류, 두류, 유채 등을 담는 항아리를 넣어두는 고팡이라는 방이 있다. 기후가 따뜻하므로 방의 일부에만 구들장을 깔고
그 외는 흙바닥에 장판을 발랐으며, 굴뚝이 없으므로 연기는 땐 아궁이로 다시 되돌아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또 솥을 걸지 않고 정지 한구석에 3개 이상을 별도로 솥덕(삼발이 식으로 돌을 높은 받침돌)에 걸어 놓고 불을 땐다.
온돌은 대체로 합실 아궁이로 되어 있으며 원래는 소와 말의 똥을 연료로 사용해 왔었다.
바) 눈이 많은 지역의 가옥
눈은 보온성이 있으나, 많은 눈은 그 중량으로 건물을 파손시킨다. 그리고 적설이 많아지면 집이 눈에 파묻혀 출입이 막히고
창을 막아 집안의 채광, 환기가 나빠지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해 집을 높이 짓고 특수한 구조를 갖는다.
또 눈의 자연 낙하를 위해 지붕의 경사를 급하게 한다. 우리나라 고래의 다설지의 가옥 구조로 알려진 것은 울릉도의 집이다.
울릉도의 우데기는 방설 장치로서 집 둘레를 숫대, 새, 싸리로 둘러 눈을 막고 적설 기간에는 우데기 안에서
집을 일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강원도 지방에는 지붕을 '너와'라고 하는 나무판자를 깔아 놓고 강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로 누른다. 이 너와집은 산간 삼림 지역에서 지붕의 재료를 나무로 한 집이다.
너와집이나 함석집은 다같이 눈의 하중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천장 구조는 방안의 보온에도 특별한 기능을 갖는다.
나무 판자 위에 삼대, 갈대 등을 깔고 그 위에 5센티미터 내외의 진흙을 이겨서 두터운 천장을 이루고 있다.
또 벽도 통나무를 쌓고 그 사이를 진흙으로 매운 너와지붕의 통나무집은 산간의 눈이 많은 지역의 전통적인 가옥 형태이다.
집에 얽힌 사상
현재 남아있는 한옥의 대부분은 17세기 전후에 세워졌으며 목조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다.
그런데 17세기는 유교적 생활 규범이 집안 구석까지 영향을 끼칠 때이다. 그러므로 이때 가옥들은 유교적 틀에 맞춰
집을 지으려고 노력했고 집안을 한 가족의 주거공간보다는 유교적 도덕률을 실행하며 가르치려는 하나의 도장으로 여겼다.
우리나라 가옥 평면구성이나 배치가 부부의 애정을 돋우고 가족이 단란하게 화합하여 가정생활을 꾸려 나가기보다는
가부장의 권위를 세우고 그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에 알맞도록 이루어진 것도 유교적인 윤리관 때문이다.
이제부터 유교의 대표적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조상숭배, 남녀유별, 장유유서의 관념이 우리네 살림집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가) 조상숭배의 생활
孝는 유교사상 가운데 최고 최선의 개념이다. 자손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물론, 돌아가신 뒤에도 효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었다.
같은 문화권인데도 상속의 경우 중국에서는 실질적인 재산권을, 일본에서는 상징적인 가장권인 호주의 지위 계승을
상속의 제일 요건으로 삼았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권한을 이어받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장남에게 넘겨주고 여러 가지 종손의 권위를 높여주는 제도가 있는데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상숭배 관념은 위패를 모셔두는 사당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상류가옥에서 사당을 세운 것은 14C부터인데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이를 강력히 권장하였다.
그리고 시대가 지날수록 비중은 높아만 갔다. 집을 지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사당 터를 잡으며 다른 건물보다
높이 세우고 한번 세운 사당은 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사당은 집의 동북쪽에 두어 사랑채와 최단거리에 둔다.
동북쪽은 양(陽)을 의미하며, 길조의 상징이고, 사랑채와 가까운 것은 사당의 실질적인 관리자가 남자이며
사랑채를 양의 방향에 배려한 결과로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분할하는 원칙과도 관계가 깊다.
사당은 보통 세 칸 건물이며 담을 두르고 문을 만든다.
때에 따라서는 사당이 화려해 사랑채나 안채가 사당에 부속된 느낌마저 주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집안의 공간을 죽은 사람에게도 분배하여 조상을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다.
그리고 사당을 대하는 마음 또한 경건하여 사당 안에 조상이 살아 계시듯 여겨 음식을 바치고 집안의 대소사를 고하기도 하였다.
사당에는 4代 선조까지의 위패를 왼편부터 나란히 모시며 대가 지나면 맨 윗대의 위패를 그의 무덤 앞에 묻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어떤 집에서는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다른 하나를 왼쪽에 별도로 모시는 일이 있다.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로를 끼친 인물에 대해 그가 영원히 제사 받도록 하려고 국가에서 지정한 인물의 위패로서
이를 국천(國遷), 도천(道遷)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형편상 사당을 따로 세우지 못하는 집에서는 집안의 어느 한 공간을 사당으로 정하고 이곳에 위패를 모셨다.
이를 마루에 꾸미는 경우에는 사당청, 방에 꾸몄을 때는 사당방이라 한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중류가옥에서 이루어진다.
사당방이나 사당청조차 따로 두기 어려운 경우에는 사당벽장이라 하여 대청 뒷벽상부에 붙은 작은 장에 위패를 두는데
이것이 벽감이다. 위패를 갈무리하는 감실은 대체로 궤짝처럼 짜며 조각을 붙이거나 집 모양으로 꾸미기도 한다.
서민가옥에서는 조상당세기․몸오라기라 하여 쌀을 담은 작은 단지를 안방 시렁 위에 모신다.
이 단지는 주로 장손 집에 두며 위패처럼 조상수대로 마련하거나 1대에 1개씩 모두 4개를 놓기도 한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상류에서 서민까지 사당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또 사당 가까운 곳, 예를 들면 대청 등에서의 문중회의는 조상과 함께 결정하는 회의로 여겨 아무도 그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상류가옥에서는 조상을 받들기 위한 공간으로 사당 외에 여막방(가빈방)이라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이 방은 육친이 사망했을 때 시신이 담긴 관을 서너 달 동안 모셔 두는 공간으로 후손들은 평시와 다름없이
조석상식을 차리고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관례였다. 주검이 담긴 관을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두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악취의 제거와 시체에서 흐르는 장수의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관 아래에 태운 수수 알갱이를
수북이 쌓아 놓거나, 밤낮으로 쑥을 피워 악취를 덜거나, 관을 둔 방에 천장까지 모래를 채워주는 등의 방법이 있다.
가빈 풍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의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을 설치하였다가
3년이 지난 뒤에 날을 가려 장례를 치른다.'는 기록이 《삼국지》<수서>「고려전」에 전해져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백제나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빈과 유사한 것에 초분장법이 있다. 이것은 산기슭이나 해변에 이엉을 덮은 관을 3년쯤 두어 살이 완전히 썩은 뒤에
뼈를 다시 추려서 장례를 지내는 풍습이다. 이의 역사도 매우 오래인데 《삼국지》〈위지〉「동옥저」에 '죽은 사람을
가매장하였다가 육탈이 된 뒤에 뼈를 거두어 목곽 안에 넣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가빈과 초분을 구별함에 다만 공간의 여유가 있는 상류층에서는 가빈을 차리고 그렇지 못한 서민층에서는 집밖에
초분을 꾸몄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초분과 가빈은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 男女有別의 생활
남녀유별의 가르침은 우리 가옥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부일지라도 남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집은 사랑채 중심 남자 공간과, 안채 중심 여성 공간으로 나뉘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담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이 문이 닫히면 두 세계는 완전히 차단되는 것이다.
보통 집의 구조는 사랑채는 동남쪽에, 사당은 동북쪽에, 그리고 안채는 서북쪽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다.
동쪽의 공간을 남성의 기거 공간으로 여기는 풍습 때문에 이러한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이런 풍습은
세계 여러 곳에 있다. 베드윈 족도 이런 풍습에 따라 천막의 동쪽은 남자가 기거하고 서쪽은 여자의 생활 공간이 된다.
이와 같은 관습은 궁궐 내에서도 지켜져 임금의 침전인 창덕궁 대조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 방이 하나씩 딸렸는데,
임금의 방을 동쪽에 배치, 이를 '동온돌'이라 불렀으며 서쪽의 왕비방을 '서온돌'이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여성은 안채에서, 남성은 사랑채에서 각기 생활하였으며 비록 부부일지라도 내외가 함께 있는 경우를
집안의 다른 사람이 발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상류층 가옥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시집온 뒤 평생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몇 번 안되는 경우도 있다. 남녀가 이처럼 제각기 생활하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이 부부생활이다.
더구나 조선 사회에서는 여자가 임신을 못할 경우 쫓겨나는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커다란 모순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젊은 주인이 아내 방에 드나들기 위한 비밀통로를 따로 마련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어떤 집에서나 며느리방 한쪽에 쪽문을 붙여두는데 이 문은 그네 남편의 출입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출입구와 통로 등은 외부인에게 감추어지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남편은 깊은 밤중에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가 이른 새벽에 자기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부부간의 생활이 이러하였던 만큼 외간 남자의 안채 접근이 철저하게 봉쇄되었던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주인의 허락없이 안마당에
들어선 사람은내정돌입이라 하여 법에 의존하지 않고 사형(私刑)을 가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집을 팔고 사는 경우에도 안채에는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처럼 외부 사람의 안채 출입을 엄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선이 안채에 이르는 것을 막으려고 내외벽이나 내외담을 치기까지 하였다.
내외벽은 중문이 열렸을 경우 마당에서 안채의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것을 막으려고 중문간의 안채 쪽에 세운벽이다.
이렇게 하면 옆으로 돌아 동행하는 등의 불편이 있지만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이러한 불편과 손실을 감수한다.
외부벽 대신 중문 가까이에 작은 화단을 꾸미고 이곳에 상록수를 심어서 내외벽에 대신 하기도 한다.
상류가옥의 내외벽이나 내외담은 외부사람의 시선을 막으려는 시설이지만 서너칸에 지나지 않는 중류가옥에서도
이를 흉내낸 차면벽을 세웠다. 충남 어느 지역에는 부모가 거처하는 안방과 아들 내외가 기거하는 건넌방 전면 퇴 사이에
널벽을 치거나, 부엌과 안방 전면의 퇴 사이에 널벽을 붙였다. 이러한 널벽은 모두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한 시설이지만 실제로는 상류층 사이의 내외관습을 흉내낸 시설에 지나지 않다.
다) 長幼有序의 생할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 차례가 있다는 이른바 장유유서의 관념도 우리나라 상류가옥 공간 배치나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사랑채의 경우, 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을 큰 사랑방, 아들이 쓰는 방을 작은 사랑방이라 하며 안채에서도 시어머니 방을 안방,
며느리 방을 건넌방이라 하였다. 따라서 방의 이름을 통해서도 우리는 공간의 성격이나 비중 또는 규모까지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규모뿐 아니라 방의 위치도 차이를 보이며 세간에서는 더욱 더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장유유서의 관념은 부모 대와 아들 대 뿐만 아니라 맏아들과 그 다음 아들들과의 관계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맏아들이 대를 잇게 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시키는, 이른바 장자 우대 상속제도이다.
사당도 장손은 중앙의 출입문을 드나드는데 반해 나머지 사람들은 좌우의 옆문을 쓰며, 맏며느리만 큰방에서 해산하는 지역도 있는데
이는 맏며느리가 대를 이을 맏손자를 낳는다는 기대 때문이다.
중류가옥에서 부모가 안방을 맏아들에게 내어주고 사랑으로 물러났다가도 아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 방은 둘째 아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사랑채에서 다시 들어와 차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은 그의 형이나 부모와 한 집 살림을 하는 경우에는 안방에서 생활할 기회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라) 상하 계층의 의식
조선시대의 상류가정에는 노비들이 매여 있었다.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대를 이어 물려도 주었으며, 시집오는 새댁은 몸종을 데리고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은 이처럼 신분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예외의 상태에 있었다.
이른바 양반계층에서는 남녀유별의 관습을 규정짓고 그처럼 엄격하게 지켰으면서도 이들은 내외법을 지킬 자격조차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식사 때에도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부엌에 모여들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음식을 들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류층 가옥의 부엌 면적이 매우 넓은 것은, 이곳이 노비들의 식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잡역을 담당하였으나 그 내용은 집에 따라 달랐다.
또한 이들은 바깥 행랑채나 안행랑채에서 혼인하기 전에 기거하지만 혼인 뒤에는 주인 집 주위에 세운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잠만을 자기 집에서 잘 뿐이며 생활은 주인집에서 이루어졌다. 경상도에서는 이들의 집을 '가람집',
전라도에서는 '호지집' '호제집', 평안도에서는 '마가리집', 황해도에서는 '윳집'이라 한다.
이러한 집들을 주인집 주위에 세우는 것은 일을 시키기 편한 까닭도 있지만 주인집을 보호케 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리고 상류층 가옥에 있던 3~4군데의 뒷간도 실용성보다는 위아래 사람이 뒷간을 같이 쓸 수 없다는 계층의식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류가옥에서 안채나 사랑채를 지나치게 높이 세웠던 것도 상하 계층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더 높이 세워서 축대의 높이가 1m가 넘으며 어떤 집에서는 축대를 겹으로 쌓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아랫사람을 위압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상하계층 의식은 양반과 양민 또는 양반과 천민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양반과 양반 사이에도 가문이나 출신,
벼슬의 높낮이 또는 나이에 따라 반영되었다.
상류가옥의 양반이나 사랑방의 칸수가 2칸인 경우 통칸으로 쓰지만, 흔히 장지를 써 칸을 막으며
이 장지를 들어올리면 문턱이 생기는데 그 문턱이 신분상의 경계선 구실을 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 안살림․바깥살림
우리네는 안살림은 주부가, 바깥살림은 가장이 맡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으며 상대방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안사람'이라 하고, 아내가 남편을 '바깥양반'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의 경우 어머니의 품을 일단 벗어나면 그에 관한 교육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전담하게 된다.
이에 비해 딸은 그의 교육을 어머니나 할머니가 맡는다. 안살림을 상징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열쇠 꾸러미이다.
따라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살림권을 물려줄 때도 열쇠를 끌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편 바깥 살림에서는 중요문서(주로 땅이나 산문서)를 아들이 아버지에게 넘겨받는 것으로 세대교체의 상징으로 삼았다.
안살림에 있어서나 바깥살림에 있어서나 경제적인 결정권이 살림살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안살림권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깥살림권을 넘겨주는 관행이나 시기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살림권을 넘겨주는 시기는 며느리가 살림살이의 내용을 알만한 시기(10여년후)에 이루어지며,
아들에게 권한을 넘기는 아버지의 살림권은 그와 같거나 조금 늦다. 그러나 넘겨주는 방법에 있어서는 어떤 지역은
살림권을 방과 함께 넘겨주거나 또는 그렇지 않은 경우 등 큰 차이를 보인다.
집지킴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는 데에 완성하기까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하였다.
이러한 것은 집을 물질로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그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과 함께 숨을 쉬며 지내는 존재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한국인이 예로부터 가져온 자연관에 기초한, 사람과 자연과의 호흡을 집으로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집에서 또 하나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집에 신이 함께 산다는 사상이며 이를 '집지킴'이라 한다.
'집지킴'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집에 존재하는 '神'이라 하는 것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친근한 존재이며
때로는 사람과 동격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집의 평안을 기원하며 설정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직까지 농․어촌 등지에서는 이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성격이 우리 조상들의 오랜 생각에서 나온 터에
우리하고는 무관하지 않다.
이제부터 '집지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가) 성주신
성주신은 여러 가신(家神)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신이다.
다른 신들은 깃든 장소나 구실이 한정되어 있으나 성주신은 집 자체의 신으로 받들어진다.
성주신은 가장 보편적인 가신으로서 그 분포는 전국적이며 신체를 따로 모시지 않는 집에서도 '건궁성주'라 하여 그 존재를 믿는다.
새집을 짓거나 이사하여 제일 먼저 성주맞이 굿을 벌이거나, 명절이나 제사때 첫 상을 성주에 올리는 것도 성주신의 보호 없이는
한 가족의 복락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신체를 살펴보면, 첫째 고사 때 걸어 두었던 백지와 실과 돈을 둥글게 뭉쳐서 대청의 들보 밑이나 안방 웃목 벽 상부에 붙인 것,
둘째 앞의 한지를 모지게 여러 겹으로 접고 돈 한 닢을 꽂은 다음 안방 쪽으로 향한 대들보에 붙이고 쌀을 뿌려 붙게 한 것,
셋째 쌀을 넣고 백지로 봉한 항아리를 안방 선반 위에 올려놓은 것, 넷째 쌀이 담긴 항아리 안에 돈과 함께 접은 한지를 넣은 것,
다섯째 성주굿을 할 때 입었던 무당의 옷이 담긴 상자를 대청의 들보 근처에 올려놓은 것,
여섯째 가는 베나 종이 오리를 들보에 걸은 것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주는 대청의 들보 위나 안방과 같이 집안의 높은 곳이나
중심에 모시며 신체는 곡식이나 한지가 보편적이고 곳에 따라 베 헝겊이나 대추나무가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집안의 태평과 농사의 대풍을 위해 상을 차리는데 명절이나 제삿날에도 상을 바치는 것으로 미루어
조상신과는 관련이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성주신은 농경신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햇곡식을 바칠 뿐 아니라
새 성주는 반드시 추수가 끝난 시월에 모신다.
나) 터 신 (土地神)
터신은 집터를 관장하는 신으로 '土地神' 또는 '터주신'이라고도 하며 전라도에서는 '철륭' 경상도에서는 '용단지'로 부른다.
이 신은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뚜렷한 비중을 차지하나 충청도를 경계로 남으로 내려갈수록 희미해진다.
신의 모양을 살며보면 쌀이 담긴 작은 단지를 장독대 뒤에 모시고 해마다 햅쌀로 갈아 놓은 것, 오곡이 담긴 단지에 뚜껑을
덮고 단지 목만 나오도록 땅에 묻어 놓은 것, 밤나무 가지를 세운 뒤에 주저리를 덮고 터신으로 삼아 이듬해 가을에는
다시 주저리를 엮어서 덮은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예전의 기록 즉, 이능화(1869~1945)의 '조선무속고'에 어떤 곳에 있는
터신에 대해 적은 것을 살펴보면 '쌀과 베가 담긴 볏자리를 부엌 뒷벽에 걸어두고 이에 비단오래기를 줄줄이 매달아서
마치 국수집 사지를 닮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10월에 농사를 마친 뒤 안택고사를 올릴 때, 무당들이 성주에게 먼저 치성을 올리고 터신에게는 뒤에 바치므로
토주(土主)풀이를 뒷전풀이라고 한다.지금도 영남지방에서는 터신을 위해 이른바 '지신밟기'가 성행한다.
다) 조상신
조상신은 조상단지․지석신․세존․조상님․제석․조상할매 등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며 대체로 안방 시렁 위에 모신다.
신체는 작은 단지 안에 담긴 곡식으로 전라도에서는 쌀만 넣으나 경상도에서는 봄․가을로 보리와 쌀을 담는다.
단지는 백지로 봉하고 왼 새끼를 동여맨다. 곳에 따라, 집안이 잘 되려면 쌀이 불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때에는 양이 줄거나
빛이 변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충남에서는 곡식 외에 깨와 같은 양념이나 엽전을 신체로 삼기도 한다.
조상신은 유교적인 관념에 종손 집에서만 모시나 차남이 분가할 때 새로 받들기도 한다.
이 신에게는 명절이나 가족 생일에 상을 차려놓고 주부가 집안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재물에서 솔이나 고기류는 사용하지 않는다.
조상신은 그 관념이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고 이 신은 여성신으로 농사와 관련이 깊으며 지석신․세존 등의 명칭이 붙은 것은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이라 여겨진다. 또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중요 가신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와 같이 오랜 역사성이 존재해 왔다.
라) 삼신
삼신은 아이를 낳게 해주고 또 건강하게 키워주는 여성신이다. 이 신의 신체로는 쌀이 담긴 단지, 백지 두루마리에 실타래를
걸어 놓은 것, 쌀이 담긴 베주머니, 쌀을 담은 삼신바가지에 실타래를 넣은 것 등이 있다.
전북에서는 삼신을 '지왕단지'라 부르며 해산할 때 상을 차려 삼신에게 제사지내며 '명도 많고 복도 많고 젖도 많고 순산하게 해줍소서. 헛 심 주지말고 된 심 주어서 헌 치마에 외 빠지듯 얼른 낳게 도와줍소서'하고 읊조린다. 전남에서는 삼신을 삼시랑이라 한다.
그리고 삼신을 받드는 목적에 대해 충청도 어느 지방 조사에 의하면 '아기를 위해, 집안이 잘되라고, 자손을 위해'의 차례로 나타났다.
그리고 삼신을 받드는 이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마) 조왕신
조왕신은 부엌신 또는 부뚜막신으로 지역에 따라 조왕할매, 조왕대감으로 불린다.
부뚜막 뒷벽 한 가운데에 흙으로 작은 턱을 붙이고 이에 물이 담긴 종이나 작은 단지를 올려놓는다.
따라서 신체는 그릇 안의 물인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 가족의 수명과 안전을 관장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재운과 관계깊다고 여긴다. 부지런한 주부는 아침마다 깨끗한 물을 갈아 부으며 가족의 안녕을 비는데
이러한 것을 맏며느리에게 맡겨 권위를 높여주기도 한다.
조왕은 음력 12월 23일에 승천하여 1년 동안 주인집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을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보고한 뒤 설날 새벽에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따라서 그 해에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조왕이 승천하는 날밤 아궁이에 엿을 발라서
옥황상제에게 못 가도록 막는다. 아궁이는 출입문인 동시에 입을 상징하므로 이렇게 하면 조왕이 옥황상제에게
가기 어렵거니와 가더라도 입이 열리지 않아 자기의 비행이 드러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집안이 잘되라고 조왕신을 위하는 이가 가장 많은데 조왕신은 火神으로서 가족의 안녕 뿐만 아니라
가운과도 관계가 깊다고 믿어지며 이것은 가운의 융성을 왕성한 불길에 비기는 주술적인 관념 때문이다.
어떤 이는 조왕신의 성격을 불이 지닌 정화력에 두기도 하는데 조왕신의 신체가 물인 점도 이와 유관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물을 신체로 삼는 집지킴에 칠성신이 있다. 장독 위에 물을 담은 그릇을 올려놓고 칠성신으로 받든다.
바) 업
업은 집의 재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사람․뱀․족제비 따위의 동물이 위주가 되나 간장을 신체로 여기는 지방도 있다.
사람 업은 어떤 아이가 태어나 집에 재운이 붙거나 하여 이 아이를 '업동이'라 부를 때, 개구멍받이가 들어와
다시 내차지 않고 기르던 관습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동물 업의 뱀과 족제비 등은 그 자체를 업으로 여겨서 그러한 동물들이
집 근처에 살 수 있게 공간을 제공하며, 이런 동물이 빠져나가면 불길하다고 여긴다.
또한 간장을 업으로 삼는 경우에는 그 간장을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음식에나 쓰이며 쓴 만큼 새 간장으로 보충한다.
주저리를 업으로 상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은 해마다 새로 만들어 쌓아 나가면서도 헌 것을 버리지 않아 어떤 때는
처마 끝에까지 쌓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업신은 한 가족의 재복을 지켜준다고 믿어졌는데, 이들이 줄거나 사라지면 그 집의 재운도 그 만큼 약해진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념은 무엇이든지 있던 것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재산이나 복이 감소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사) 대문신
문은 집의 입구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문을 통해서 복이나 재운이 들어오지만 악운이나 잡귀도 이곳을 통해서 침입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문을 잘 단속하여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 하였고 잡귀나 악운이 들이닥칠 때 문신이 이를 막아주리라 여겼다.
그리고 가정뿐만 아니라 절이나 마을에서도 문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를 세워 놓았으니 금강역사나 장승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대문에 특정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 잡귀를 물리치는 비방이나 화상, 글귀 등을 붙여 악운을 쫓으려 하였다. 대문이나 방문 위 엄나무 묶음이나 임금 王자를 써서 대문에 붙여 놓은 것, 호랑이 뼈를 대문에 매달아 놓은 것,
대문 좌우에 호랑이나 용의 상을 그려 붙이거나 글자를 써 붙이는 것 등이 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옛날부터 궁중이나 상류가옥의 대문에 여러 가지 그림이나 글씨를 붙여서 액운을 쫓으려 하였다.
『동국세시기』 정월조에 보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설날 궁중에서는 붉은 도포에 검은 사모를 쓴 모습을 그려서
궁궐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고 종규가 귀신잡는 상이나 귀신머리 그림을 문설주에 붙여서 액과 나쁜 병을 물리친다.
그러므로 궁가와 척리의 문짝에는 모두 이들이 붙였으며 민간에서도 이를 본떴다.'라고 전해진다.
그림이나 글씨뿐만 아니라 부적도 붙였는데 부적 등을 모두 주사로 지은 것은 붉은 기운이 빛이 어둠을 물리치듯
잡귀를 쫓을 수 있으리라 여긴 까닭이다. 민가에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문설주에 발랐던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잡귀를 쫓기 위해 어떤 형상을 대문에 붙이던 풍습은 신라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설화가 그것이다.
처용은 도교의 영향과 시대적 변천에 따라 간단한 그림이나 글씨 등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대문에 걸어두었던 금줄 등도 문신의 의미가 어느 정도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 외양신
소는 농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꾼으로 소가 거쳐하는 외양간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강원도에서는 외양간 신을 '쇠구영신'이라 부르며 안택굿 뒤에 소의 건강을 위해 백설기를 놓고 축원을 한다.
그리고 백설기를 외양간 들보에 매달아 놓는다. 그 외 여러 지역에서도 가끔 외양간에 재물을 차리거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 뒷간신
우리네 뒷간은 대체로 안채나 사랑채에서 떨어진 으슥한 곳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밤늦게 이곳에 드나들 때는 움츠려 드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무서움이 뒷간신의 관념을 낳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뒤를 보려고 힘을 쓰다가 쓰러지는 일이 있었으므로 이런 생각이 굳어졌을 것이다.
뒷간신은 변소각시․칙간조신․정낭각시․변소장군․칙시부인․칙도부인 등 대체로 젊은 여성으로 여겨졌다.
이 뒷간신은 머리칼을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는데 사람이 갑자기 뒷간에 나타나면 놀라서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 사람은 앓다가 죽게 된다고 한다. 산림경제 복거조에 보면 '측간에 갈 때 3~5보 떨어진 데에서 두서너번 기침 소리를 내면
귀신이 자연히 피한다'는 기록도 있다. 뒷간신은 6일, 16일 등 6자가 든 날에만 있고 다른 날에는 외출하므로 6자 일에는
조심을 해야 한다고 한다. 집안 대부분의 신들이 수명장수와 평안, 그리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지는데 반해 뒷간신만은
잘 받들지 않으면 탈을 입으리라 여겨 대조를 보인다. 뒷간신을 젊은 여성으로 여기는 것도 이러한 신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옥의 구조
한국 살림집의 배치와 평면구성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나 집의 배치에서 기둥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것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한옥의 구조를 알아보자.
1) 배치법 일자형의 단순한 평면 구성, 예를 들면 '一'자 형이나 'ㄱ'자 형에서 살림 형편이 어느 만큼 여유가 생기면
새로 집을 덧붙여 지은 'ㅁ'자형의 날개집이나 'H'자 집으로 다양한 변화를 주기도 한다. 추운 곳이라면 폐쇄된 배치를 하고,
땅에 여유가 있다면 넓은 터전에 여러 채의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기도 한다.
2) 평면 구성 원시시대 집의 내부는 칸막이가 없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방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평면은 점점 복잡해졌다.
3) 기초 터전이 정해지고 집의 규모가 결정되어 기둥자리가 정해지면, 그 자리를 정리하고 구덩이를 판다.
주추 놓을 자리를 정하고 '달고질'을 한 후 구덩이에 흙을 넣어 단단히 다진다. 귀틀집에서는 땅과 닿는 기둥 부분이
쉽게 썩지 않도록 달고질을 하면서 소금을 뿌린다.
4) 기단과 계단 처마 밑을 따라 흙, 잔디, 돌, 벽돌, 기와, 강회 섞은 삼화토를 써서 마당보다 높직하게 쌓는 것을 죽담,
댓돌 또는 기단이라고 한다. 죽담을 만든 까닭은 지표면보다 한 단 높게 하여 마당에 고인 물이 집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것과
습기와 곤충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높직한 자리에 주인이 거처하여 권위를 유지하는 목적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장대석 기단을 '계'라 하였는데, '계'는 '단'과 틀리다. 단이란 건물을 짓기 위해 쌓아 올린 넓은 터전을 말하는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에서와 같이 집을 높여 짓기 위한 석재의 구조물은 '월대'라고 하여, 사방을 모두 높게 쌓아 올렸다. 경사진 지형 전면을
쌓아 평평한 터전을 구축한 것을 축대라 해서 구분한다.
5) 주춧돌 주추를 놓고 기둥을 세우는 일은 발달된 건축법이다.
옛날에는 지표에 주추를 놓지 않고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기둥을 박아 세웠다.
주추를 놓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다가 돌로 바뀌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제 구실을 하는 주추를 놓기 위해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자연석 그대로의 주춧돌에다 기둥을 세우는 것에는 상당한 요령이 필요한데 주추와 기둥 밑바닥이 밀착되도록 하여
기둥을 안정되게 세우는 '그랭이질'을 통해 돌의 높낮이와 생김에 따라 나무의 단면을 깎아 두 물체를 고착시키는
고도의 기법으로 집을 반듯하게 유지시킨다. 주추는 쓰이는 자리마다 그 모양이 달라지며
18세기 이후에는 호화롭게 다듬은 주추가 사용되기도 하고 사랑채의 누마루에는 돌기둥형의 주추인 누주를 높직하게 만들기도 한다.
6) 기둥 주춧돌 위에 세우는 나무를 기둥이라 부르는데, 공간 구성의 기본이다.
기둥은 집을 상징하는 대표적 구성물로 둥글게 다듬은 기둥은 두리기둥, 네모진 기둥은 모기둥이라 한다.
연모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절에는 자연 그대로의 나무 둥치를 가지만 잘라내고 대충 가다듬은 원초형으로 시골집 헛간이나
원두막 같은 구조물에서 볼 수 있다.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주추 위에 잘 다듬은 기둥을 세워 기둥 밑면과
주춧돌이 잘 밀착되게 하기 위해 모양새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둥이 수직이 되도록 반듯하게 잡아 세우는데,
수직선을 측정하는 일을 '다림 본다'라고 한다. 수직을 보아 기둥이 바로 세워졌으면 기둥 밑둥과 주춧돌이 밀착되도록
'그랭이질'을 한다. 그랭이질은 목수의 노련한 솜씨를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또한 '오금법'이라 하여 귀기둥의 기둥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하고, '귀솟음법'으로 귀기둥의 키를 높게 하는데
이는 사람의 눈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을 교정해주는 고도의 기술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기법이다.
7) 수장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질러 꾸미는 나무들을 통틀어 수장이라 하며 사용되는 제목은 주로 켜낸 각이 진 목재들이다.
수장재는 전용공간 쓰임새가 분명해지면서 벽체가 칸막이로 고착되어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성격상 벽체와 문얼굴과 마루 등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눈다.
8) 도리와 공포 구성 기둥 위에서 보면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나무 중에서 서까래를 받는 부재를 도리라 한다.
둥근 도리는 '굴도리'라 하고 네모진 것은 '납도리'라고 한다. 굴도리에는 '장혀'라는 도리를 받는 폭이 좁은 각재가 있어
둥근 도리 몸을 편안하게 받는다. 굴도리에는 장혀가 없는 양식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원초적 기법으로,
집의 구조가 발달되면서 채택된 부재인 것을 알 수 있다.
공포는 기둥머리에 구성되어 처마와 지붕을 받아 그 무게를 받치는 것으로 살림집에서는 집을 크게 지을 수 없으므로
구성에 제한을 두었다.
주심포계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는 것이고, 다포계는 기둥 이외에도 공포를 주며, 익공계라 하여
조선 말기에 크게 유행한 공포의 유형도 있다. 이들 공포는 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9) 가구 지붕을 받게 하기 위하여 들보와 여러 가지 부재들이 이루는 조합을 통틀어 '가구'라 한다.
살림집에서 가구 구성의 기본형이되는 것은 삼량가로 2개의 기둥 위 도리와 1개의 마루도리, 도합 3개의 도리에 서까래가 걸리는 것이다. 다섯 개의 도리가 걸리는 오량집, 다시 두 개가 추가된 칠량집 등이 있으나 오늘날의 대부분의 살림집은 삼량과 오량이다.
10) 천장 연등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천장이며, 우물반자는 제일 고급의 것으로,
바둑판 같은 모양으로 지붕을 막은 천장이다.
11) 처마 서까래가 주심도리에 걸렸을 때 도리의 바깥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처마라고 부른다.
처마에는 서까래, 부연, 추녀, 박공 등이 있고 서까래만으로 구성된 것을 홑처마라 하고 덧서까래가 첨가되면 겹처마라고 하여
덧서까래의 끝을 부연이라 부른다. 추녀는 지붕의 양쪽 귀퉁이에 있는데 추녀 좌우의 서까래는
처마의 안허리 곡선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부채살 펴듯 구성된다.
12) 지붕 지붕의 기능은 우선 빗물 처리에 있다.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지붕 물매 각도가 달라진다.
물매가 급하게 잡히는 집들은 강우량이 많은 고장의 것이고, 강우량이 적은 지역이면 물매가 완만하다.
물매가 완만한 집의 처마는 기둥과 처마 끝까지의 사이가 짧으며, 물매가 급하면 처마가 길다.
천연 재료로 지붕을 만들던 시절에는 식물성 재료로 갈대, 삼, 억새 등의 풀이나 나뭇잎이 쓰였고, 동물성 자재로는 가죽이 쓰였다.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굴피처럼 넓은 판형재를 얻어 지붕을 덮기도 하고 큰 나무를 잘라 널빤지로 너와지붕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 이엉으로 쓰이면서 초가지붕이 되고, 기와지붕의 등장으로 지붕의 구조는 다양해지고 장식적 기법도 함께 발달한다.
<참세상 카페에서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