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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을 떠난 사막
직장을 알아본다는 사촌 녀석의 소식만을 줄곧 기다릴 수는 없었다. 주위의 가능성 있는 모두에게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정라를 만나야 했다. 그녀를 만나서 원점으로 되돌아간 오해를 풀고 미래를 도모해야 할 명분이라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그녀가 직장을 나가지 않았을 일요일을 잡아 또 잠복을 시도했다. 신내동 야산 밑자락의 야트막한 슬레이트집 뒷산이었다. 대문이나 담벼락도 없는 세월이 멈춰진 고향의 모습과도 같은 곳, 햇살이 고스란히 내려와 아지랑이가 아롱지는 집, 마당에는 여전히 이불빨래를 널었던 나일론 끈이 포물선을 그린 채 바람에 일렁거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방에서 나오는 그녀를 목격했다. 그녀는 누구와의 약속이 있는 듯 원피스를 곱게 입은 차림이었다. 행여나 또 선이라는 것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 순간 멈칫해졌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결과도 없는 법, 이미 저만치 언덕을 내려가는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황급히 산에서 내려왔다.
또박또박 걷는 그녀의 뒤에서, 보름달처럼 꽉 찬 엉덩이 뒤에서, 원피스 밑자락 종아리의 블랙스타킹 뒤에서, 흑심이 속절없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낙산해수욕장의 추억을 불러 일깨웠다. 어깨 너머로 하늘거리는 스카프는 탄금대의 추억과 포개졌다.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이 여지없이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선을 보았다는 트집이 화근이 되었던 터였다. 흑심을 질끈 묶고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게 상책이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검은 그림자의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힐끗 돌려보았다. 그리고 짧은 순간.
“어머머, 깜짝이야!”
정라의 머리카락이 영화에서처럼 흩날리며 내게로 쏟아졌다. 눈썹꼬리는 아래로 처져 더욱 착해졌다. 매초롬한 입술은 열려 하얀 치아가 살며시 트였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이라도 치는 양 무작정 비시시 웃기만 했다. 그녀의 마음을 얻을 요량으로.
“전양우, 니가 여긴 어쩐 일이여?”
“그냥……. 니 보려구!”
“니는 항상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니?”
“나두 몰러. 지난번 일 때문에, 니가 안 만나줄 것 같았거든!”
타는 속내를 숨겨야겠기에 여유 있는 척 호기까지 부렸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듯, 곱게 차려입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이냐고 묻고 싶은 말은 깊숙이 밀어 넣고서.
“나, 지금 약속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도리 쳐 흩날리던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머리카락은 찰랑이며 가지런해졌다. 그런 그녀의 동작마다 오금이 저려 나는 다시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난 괜찮어. 다음에 만나지 뭐.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가두 되지?”
“그럼, 그렇게 혀. 그런데 니는 언제 올라온 거여?”
“며칠 됐어!”
“저번에 말한 것처럼 아주 올라온 겨?”
그녀는 지난번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로 상경하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맹랑하게 토라져 가버리고 나서도 나를 생각했다는 말인가, 그녀의 요지부동이던 마음이 이젠 용서된 것일까,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무뎌진 것일 터, 이것은 환상일까. 환상이라도 과분하다. 그녀 옆에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현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래서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서울에서 취직하려구 아주 올라왔어!”
“과수원은 어쩌구?”
“형이 있는데 뭘. 그런데, 지금 어디까지 가는 겨?”
“그건 왜 물어? 또 선이라두 보러 갈까 봐?”
그녀가 잠시의 짬도 없이 뽀로통한 입술로 되받아쳤다. 무관심한 척 물어본 본심을 알고 있다는 앙다문 입술은 위협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노여움을 무마하기 위해 얼른 진위를 풀어 나열했다.
“그냥 무심코 물어본 거여. 지금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가는 길이잖어! 그때는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구. 술 취해서 한 말이니까 이제 줌 이해해주라. 더구나 첫선이었잖어!”
“알았어. 다시는 그러기 없기다!”
“예, 알았습니다. 마님…….”
그녀의 부드러워진 억양에 허리를 꺾어 머슴이기를 자처했다. 몸도 굽실거리며 살랑살랑 꼬았다. 마님의 아량 있는 처분을 기다리는 머슴의 어리광이었다. 내 넉살에 피식하는 비음과 함께 엷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진즉에 이렇게 부딪힐 것을 왜 가슴앓이를 했는지 바보 같았다. 대관절 이런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튀어 나오는지 나 자신도 의문스러웠지만, 그녀의 굳었던 마음을 녹이는 데는 더 할 나위 없는 방법임을 깨우쳤다. 그녀가 내게 되물었다.
“이문동으루 갈 거여?”
“그래야지 뭐. 별 일두 없는데…….”
“오늘은 좀 그렇구……. 내일 퇴근하구 만나!”
“정말? 어디서?”
나는 나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글쎄, 종로는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싫구. 그래. 저기두 괜찮네! 퇴근하구 저녁 8시!”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쏘았다. 버스 정류장 인근의 허름한 건물 지하의 노란색 다방 간판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쾌재였다. 시간과 장소를 약속받은 것 자체가 서울 재입성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때마침 버스가 왔다. 그녀가 먼저 올랐다. 뒤따라 튀어 올랐다. 그녀가 나를 뒤돌아보며 미행은 왜 하느냐는 투로 물었다.
“버스는 왜 타. 혹시 따라오는 겨?”
“아니여. 난 중랑교 지나서 내릴 거여. 방향이 같잖어!”
이제 그딴 짓 안 한다는 듯 정색하며 반론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나란히 함께 앉았다. 옆구리로부터 따스한 온기가 스치듯 느껴졌다. 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체온, 낙산해수욕장에서 부대로 오는 버스 안에서 잠깐씩 졸음을 달래던 체온, 손을 잡거나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전해오던 체온, 여전히 따스함 그대로 옆구리에 남아 있었다.
지하다방은 넓었지만 습하고 어두웠다. 하물며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패거리들이 귀퉁이에 거만하게 앉아 담배 연기를 연신 뿜어내어 자욱했다. 여종업원의 짧은 치마는 엉덩이 가까이에서 나풀거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없이 길게 느껴지는 십여 분이 지난 시간, 출입 문가에 정라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녀는 전날 입었던 원피스와 스카프 차림으로 습한 다방 분위기를 화사하게 높였다. 불량스러운 패거리 녀석이 그녀를 힐끗거리며 염탐하는 눈길이 몹시 거슬렸다.
“오래 기다렸어?"
그녀는 먼저 명랑한 기분으로 무안함을 전했다.
“조금 됐어. 우리 커피만 마시구 밖으루 나가자. 지하라서 그런지 공기가 별루 안 좋네!”
내 답변에 정라가 주위를 한번 휑하니 둘러보았다. 눈치 빠른 그녀는 내가 서두르는 분위기를 금세 알아내고는 응수를 보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밖에서 저녁이나 혀!”
평범한 커피를 통일되게 시켰다. 나는 식지도 않은 커피를 쫓기듯 서둘러 털어 넣었다.
“천천히 마셔 얘. 무슨 커피를 꼭 물 마시듯 하니!”
“난 아직 커피가 무슨 맛인지 몰러서 그려. 쓰구 텁텁하게만 혀.”
“그럼, 다른 것 시키지 그랬어.”
“차 정도 마시는 일에 그렇게 요란 떨구 싶지두 않어!”
자꾸만 불편한 감정이 튀어나왔다. 혹시나 정라를 아는 동네 녀석인가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불량배 때문이었다. 내 행동을 감지한 그녀가 서둘러 커피를 비웠다.
곧바로 다방을 나왔다. 불량스러운 패거리들의 눈길을 벗어나자 겨우 정라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저녁은 허름한 인근 식당을 들러 가정식 백반으로 주문했다.
“참, 정호 오빠는 곧 제대한다나 벼!”
그녀가 잊었던 일이 생각난 듯 불쑥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라는 그동안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장남에게 넘기게 되었다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어떻게, 제대가 가능해졌대?”
“진급을 못해서 제대를 하나 벼. 제대하려구 일부러 사고까지 치구 했다니까 차라리 잘됐지 뭐.”
“잘됐네. 장남이 가까이 있으면 믿음이 가구 좋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밀려오는 불안으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정호의 제대 이야기는 그녀의 상기된 표정과는 달리 공포를 지울 수 없는 요인이었다. 적어도 진수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은 공포가 착상되어 있는 탓이었다. 어쩌면 정호는 사나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부딪히며 해결해야 할 숙제로 야금야금 다짐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제 그 시기가 도래한 것일 뿐. 맞서자, 정호는 정라를 넘어 나의 몫이다. 나는 스스로 뇌까리며 불안한 마음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정라가 야기시킨 불안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정식 백반을 거반 비울 때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 니한테 고백할 게 있어. 지난여름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 소개받은 남자가 있는데, 요즘 은근히 결혼 얘기까지 해서 미치겠어!”
이건 또 무슨 발설인가. 둔탁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그토록 우려했던 남자를 또 보았다는 말인가, 하물며 그녀에게 결혼 이야기까지 했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게거품을 품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의 목소리는 거의 폭발음 수준이었으나 의지와는 다르게 메말랐다.
“그래서?”
“뭘 그래서야.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그쪽에서 안달이었을 뿐 난 그런 남자 관심 없어! 전처럼 니가 신경 쓸까 봐 말하는 것뿐이지.”
그녀는 선을 보았다고 생떼를 놓았던 지난 과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쓰러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는 말은 지난번에도 같았다. 어떻게 얼굴도 본 적도 없는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상대를 염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을 보고도 수시로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 이야기는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럼,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시집은 갈 참이여?”
“또 과민반응이네. 질투여, 협박이여?”
그녀가 부러지듯 되레 강하게 윽박질렀다. 자신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데 웬 난리냐는 표정이었다. 나의 과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 지난번과 같이 질투를 부리는 행동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는 허무한 일이 될 터였다. 그녀의 마음이 선을 본 사내에게 없다는데 굳이 미련을 떨 필요성이 있을까, 나는 최대한 집중력을 갖추어야 했다. 안으로는 꼬리를 내리고 겉으로는 태연함을 억지로라도 보여야 했다.
“질투두 협박두 아니여. 어떤 사내인지 궁금해서이지!”
“그럭저럭 잘나가는 편인 것 같어. 집안두 보통은 되구……. 나이는 서른셋.”
“꽉 찼군!”
나의 공허한 투덜은 정라의 실소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신경 쓸 거 없어. 난 아직 시집갈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쩌면 혼기를 앞둔 여자의 신분상승 기회는 남자보다 다양하고 많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보았다는 선이라는 것도 화려한 기회를 엿보는 행동의 단면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산재되어 있고, 더구나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여자의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녀는 나를 늘 친구라고 못 박았다. 얼마나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지, 얼마나 강한 신뢰를 얻어야 옭아맬 사랑일지, 나의 가늠은 아득하기만 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녁을 먹는 내내 정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버릇이 도졌다. 고왔다. 조명에 흘러내리는 결이 고왔다. 오물거리는 입술은 앙증해서 더욱 고왔다. 마냥 빨려 들어가는 나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가 대충 수저를 놓으며 조잘대었다.
“다 먹었으면 그만 가자. 그리구, 그렇게 뻔히 쳐다보는 버릇 고쳐!”
움찔했다. 하지만 들켜버린 음흉함을 만회하려 또 능청을 부렸다.
“왜, 부담돼? 난 그냥, 니를 내 눈에 넣어두려구 그런 건데……”
내 능글스런 변명을 듣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까르르 폭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명쾌하고 크던지 건너편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시에 우리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물론 나의 얼굴도 금세 붉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니는,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아무 여자한테나 쓰는 수법 아니여?”
“아녀, 정말! 니를 보구만 있어두 늘 그랬어. 가볍게 여길까 그동안 말을 못했던 거지.”
나 역시 속삭임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녀가 알았다는, 고맙다는, 행복하다는, 아름답다는, 복합적인 미소와 함께 손사래까지 쳤다. 그러고는 그만 나가자는 손짓을 연신 보냈다. 그녀의 눈가에는 행복감이 가득 흐르고 있는 것이 엿보였다. 식당을 걸어 나가는 걸음걸이는 마치 나비와도 같이 가볍게 사뿐거렸다.
계산을 치르고 앞서 나간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 한낮에 잔뜩 찌푸렸던 잿빛구름이 몸집을 불려놓았던 모양이다. 바람을 탄 눈송이가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는 금방이라도 세상을 하얗게 덮을 기세였다. 몇몇 송이는 그녀의 얼굴로 착상했고, 머리카락에 앉은 눈송이는 바람결에 흩어지며 나부꼈다. 정라가 양팔을 벌려 학 같은 자세를 취했다. 선녀와도 같은 동작에 나는 또 온전히 오그라들었다.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오른팔로 옆구리를 꿰찼다. 한층 살가워진 그녀의 행동에 나는 덩달아 고무되었다. 따듯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의중을 떠봤다.
“맥주 한잔 하구 갈까?”
“아니, 그냥 이렇게 걸어서 집에 갈래!”
“그럼 집 근처까지 가두 되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발맞추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하얀 꽃송이를 벗 삼아 서두를 이유 없이,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병아리처럼 하늘을 보다가 서로를 보면서, 나란히 걸었다. 먼 하늘로부터 잉태하여 지상으로 낙하하는 눈송이는 앞뒤에서 마구마구 춤을 추었다.
그렇게 걷기를 얼마였을까, 양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뒤뚱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느 아주머니려니 무관심이었지만, 정라의 고개는 무시로 갸우뚱해졌다. 그녀의 길게 뽑아진 고개는 혹시 아는 사람인가를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말을 내뱉었다.
“잠깐만, 저기 앞에 가는 사람, 꼭 우리 엄마 같은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나의 머리도 거북이목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어둠 속에서, 더구나 장마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어머니를 알아본다는 것은 천부당이었다. 내가 서너 차례 갸웃거리는 사이 이미 어머니임을 확인한 그녀의 팔이 살같이 옆구리를 빠져나갔다.
“엄마아!”
눈 깜짝할 순간에 그녀는 저만치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물건을 빼앗고 반가움에 콩콩 뛰기까지 했다. 엄마 지금 퇴근하는 거야부터 시작하더니 이게 뭐야, 택시 타지 그랬어, 식당에서 음식 이렇게 싸오는 거 앞으로 하지 마,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등등……. 나의 존재는 아예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가 스무 걸음쯤 뒤에서 뻘줌하게 서 있는 나를 의식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참, 엄마! 반장집 아들 양우 알지? 봉계 살던…….”
“누구라구? 봉계 반장집 아들? 석우가 여길 어떻게?”
어머니가 실눈을 찡그리며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정라는 쥐고 있던 물건을 한 손으로 옮기고 가까이 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어머니께 인사시키려는 행동이었다. 나는 적잖이 긴장한 탓에 한쪽 발이 짧은 장애아처럼 주뼛거리며 기웃기웃 걸음을 옮겼다.
“엄마두 참, 석우 동생 양우라니까! 나하구 동갑내기…….”
그녀가 석우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밝힐 때쯤 나는 이미 어머니에게 허리를 깊이 꺾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허리를 폈을 때,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자태에서 고향냄새가 느껴졌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수한 옷차림, 착한 눈썹과 눈빛, 희고 동그란 얼굴, 정라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금방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눈발은 점점 더 떼거지로 흩날리며 어머니와 나 사이를 춤추며 날았다.
“어려서 봐서 그런가, 못 알아보겠네. 니가 석우 동생 양우여?”
“그렇다니까 엄마는 참, 캄캄한 데서 보니까 더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여? 니들은 여기서 어떻게 만난 겨?”
“엄마, 얘는 나처럼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녔어. 고향에 잠깐 있다가 서울루 올라왔대!”
나는 벙어리였고, 어머니가 물으면 정라가 대답하고 해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지금 둘이 연애하는 겨?”
“엄마는 참, 남세스럽게 연애는 무슨……. 시골동창이니까 그냥 만나는 거지!”
정라가 정색을 하며 부인했다. 연애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래서 한 걸음씩 부딪혀 나갔으면 했는데, 지나친 기대였는가 싶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더는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어머니가 물었다.
“자네, 어무니는 잘 있는 겨?”
내 어머니와의 친분을 떠올린 궁금증이었다. 나는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예, 과수원 일로 바빴는데 요즘은 손주가 생겨서 더 분주합니다!”
“과수원이라니? 갑자기 손주는 또 뭔 소리여?”
이번 역시 나보다 먼저 정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엄마는 참, 궁금한 것두 많다. 얘네 봉계에서 연못둥지과수원으루 이사 갔어. 석우 오빠가 결혼한다더니 아들을 낳았나벼!”
“석우가 하마 장가를 갔어? 석우 어무니는 한시름 덜었겠네!”
나는 정라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대화를 가로채는 치졸함을 보였다.
“예, 지난해에 예식 올렸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어머니는 곧바로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어머니의 더운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져 스러져갔다. 아마도 군에 묶여 있는 정호와의 비교 때문일 터였다. 보통의 어머니와 같이 그녀의 어머니도 장남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를 터, 정호가 제대하기를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생각을 잊고 있었다.
“이제 곧 정호 형두 제대한다구 들었습니다. 서둘러 결혼시키면 되겠지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참으로 넉살 좋은, 어쩌면 정호가 먼저 장가를 가야만 정라의 차례가 쉬워지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아부였다.
“참, 양우 니는 언젠가 우리 집에두 한번 왔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지난 일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공치사까지 늘어놓았다.
“할무니 돌아가셨을 때…….”
“그려 맞어. 고기를 문간에 놓구 간 사람이 니였다구 했었지!”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듣던 그녀가 느닷없는 안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 추운데 그만 가자. 길에서 얼어 죽겠어!”
“갑자기, 얘가 왜 이려?”
어머니가 정색을 했다. 그러나 정라는 어머니의 팔을 내처 잡아끌었다.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올까 두려워하며 대화를 차단하려는 의도로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나는 머쓱해졌다. 그녀는 나에게 돌아갈 것을 종용하는 신호를 보내며 떠밀듯 말했다.
“양우야, 니는 그만 여기서 가야겠다. 다음에 또 연락혀!”
정라는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보일까, 나의 무엇을 감추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까, 서운함은 눈송이처럼 마구 흩날리면서 점점 크게 뭉쳐졌다. 그러나 당장은 이것이면 족했다. 다음의 일은 다음을 기약하면 될 일, 오늘 어머니와의 만남은 기대하지 않은 큰 소득이었다.
“그럼, 그러자. 양우는 기회 되면 또 보자꾸나!”
“예에……. 어, 어머님, 살펴가세유!”
정라의 일방적인 힘에 떠밀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섰다. 나는 등 뒤에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자 정라의 손짓은 이미 어둠 속으로 작아져갔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스카프는 바람결을 타고 너울거렸다. 정라 어머니의 굽은 등 뒤로 눈발이 달라붙었다. 눈송이는 도시의 야경을 받아 은빛으로 울었다. 영락없는 폭설의 조짐이었다.
양희를 만났다. 비록 좁은 방 한 칸에서 직장 동료와 자취하는 양희였지만 나름 활기차 보였다. 양희에게 고향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석우와 혜진과의 우려를 말하고, 내팽개쳐진 가축 등 과수원에 태만한 실정을 이야기해도 올케인 진영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석우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양희에겐 자신의 즐거움만이 최선인 듯싶어 간단하게 취직만을 부탁하고는 헤어졌다.
열흘이 지났어도 사촌들, 하물며 양희나 정라에게조차 취직에 대한 희소식은 없었다. 기다림이란 단어는 정라의 일로 어느 정도 단련된 나였지만 예측보다 취직이 안 되는 지루함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허구한 날 정라를 만나자고 전화를 한다는 것도 차마 염치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한 번을 만나 정호가 제대한 사실을 전해 들었고, 나와 맞닥뜨린 어머니에 대한 느낌이 어떠했는지를 알고자 애썼을 뿐이었다. 정라는 어머니가 별다른 궁금증을 나타내지 않았다며 내 기대를 꺾어버렸다.
열흘이 더 지났다. 누구에게서도 연락은 없었다. 그동안 군 경력을 써먹을 수 있을까 싶어 차트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진로가 미약해 탐탁하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 빵 제조공장을 가보았지만 출근거리가 멀어 역시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벼랑에 몰린 심정으로 올백머리를 하고 나이트클럽 보이 자리를 면접보기도 했으니 비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괴감에 빠져 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는 중랑천 둑에 쪼그리고 앉아 홀로 소주를 마셨다. 그 많던 사람들이 철거되어 사라진 황량한 중랑천, 검은 젤리처럼 찌꺼기가 퇴적된 중랑천에 돌을 던졌던 일이 상기되었다. 돌멩이가 가라앉으며 뽀글뽀글 떠오르는 공기방울을 응시하다가 느닷없는 공포에 빠져들던 곳, 무수히 늘어선 판자촌의 희망 잃은 사람들이 자살이라도 하면 시체를 찾기는커녕 퇴적층에 가라앉아 썩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엄습하던 곳, 오물찌꺼기로 켜켜이 엉겨 있는 퇴적층에는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가라앉아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중랑천을 포기해버렸던 학생시절, 나의 운명이 중랑천 앞에 정지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냉기로 더욱 왁작거렸다.
취했다.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받아쳐내는 동안 병균이 침투하여 활개를 치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엎어졌을 때는 이미 독감이 골수를 파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죽었다. 죽음은 혹독했다.
이틀을 내리 죽었다. 거의 굶다시피 하여 몸속에 기생하던 분노의 찌꺼기를 배출하고 나니 허하게 가벼워졌다. 하지만 일어나 움직거릴 명분이 없었다. 그나마 겨우 몸을 가누고 기운을 차리게 한 것은 미리 부탁은 했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에게서의 연락 때문이었다. 당분간 아르바이트라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마저도 다행이다 싶어 받아들였다.
동창이 소개한 곳은 다이어리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소규모 제조회사였다. 청계천 고가도로가 끝나는 삼각동 인쇄타운의 지하실에 있는 공장을 찾아간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자격요건이 따로 없는 아르바이트였으므로 친분이 있는 사람의 소개만으로도 출근 일정이 잡혔다. 무엇보다 정라에게 소식을 알려야 했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들은 정라의 목소리는 맑았다.
“잘됐네. 내가 알아본 데는 조금만 기다려 보라구 해서 연락 못했는데……. 우선 그거라두 하다 보면 일이 풀리겠지. 우리 오빠두 외국계 회사에 취직되었어.”
“외국계 회사? 잘된 일이다. 우리 이번 주말에 만날까?”
“다음에. 이번 주말에는 가족끼리 충주 근처에 있는 조상님 산소에 가기루 했어.”
“충주?”
“어, 엄정면 추평리 선산!”
“그려, 그러면 다음에 연락하지 뭐. 조심해서 다녀와!”
선산이라면 그녀의 집안이 지주였을 적에 살았던 곳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곳은 나의 조상 몇몇도 묻혀 있다. 지주였던 그녀의 조상 그늘에서 머슴으로 살던 나의 조상들, 그들도 언저리에 흩어져 같이 묻혔다. 지난 몇 해 전 아버지와 석우를 따라 벌초를 간 적이 있었다. 돌보지 못한 지주의 무덤은 황량했고, 돌보아오던 머슴의 무덤은 단정했었다. 칡넝쿨로 어지럽게 에워싸인 지주의 무덤 언저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버섯이 촘촘했으며, 잔디가 잘 자란 머슴의 무덤 언저리는 잠자리 떼가 군무를 추었다.
정라 가족이 조상의 무덤을 찾는 이유는 정호의 제대와 맞물리는 듯싶었다. 정호의 전면적인 등장은, 더구나 외국어에 능통하여 단박에 외국계 회사에 취직한 능력과 힘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엄습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호흡을 뿜어내었다. 하늘은 붉었다. 청계천 고가도로에서 내리꽂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더구나 거대한 빌딩의 검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튕겨 나온 역광의 불빛조차 나를 맹렬하게 할퀴고 달아나 일순간 눈을 감아야 했다.
비록 아르바이트였지만 사뭇 긴장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몇 번씩 되뇌다가 새벽에 잠든 탓에 늦게 눈을 떴으며, 버스노선을 정확히 익혀두지 않은 방심에 두 번을 갈아타고 가까스로 공장에 도착했다.
“여기는 1년 중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야. 세 달 벌어 1년을 먹고 살지. 잘해보세!”
공장장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계 앞으로 돌아갔다. 일은 스스로 알아서 찾으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서성대며 눈치를 살폈다. 생산라인은 좌우 두 곳이었는데 왼쪽은 아주머니들 다섯 명이 수다를 떨며 다이어리에 연신 비닐표지를 끼우는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다이어리에 구멍을 뚫어 스프링으로 표지와 결합하는 수작업 제본라인이었다. 양쪽 라인의 흐름을 보면서 내가 자리할 적당한 위치를 찾았으나 망설임이 앞섰다.
“이봐, 총각! 거기 멀뚱하니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박스 좀 싸!”
왼쪽 라인의 활달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손짓을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 손짓이 그토록 반갑고 정감 어릴 수가 없었다. 내처 다가가 표지에 끼워진 다이어리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손으로는 표지를 끼우면서도 입으로는 심심풀이로 신상을 파고들었다. 고향은 어디며, 사는 곳은 어디고, 애인은 있느냐, 연애는 해봤느냐, 적당한 농까지 섞어가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향은 충주이고, 이문동에 산다는 것만 답변하고 다른 물음에는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아주머니들은 숨겨놓은 애인이 있는 모양이라며 놀림감 삼아 한참을 시시덕거렸다.
아주머니들의 의미 없는 입놀림을 들으면서 줄곧 이어진 포장작업에 그나마 오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오후에도 오로지 포장작업만 했다. 농사일로 단련된 몸이라 별반 힘든 작업은 아니었다. 단순한 반복동작으로 허리가 약간은 뻑적지근했지만 체격보다 손이 맵다는 아주머니들의 칭찬에 마음은 개운했다.
이튿날 상황은 더욱 분주해졌다. 좌측 라인의 포장은 물론 우측 라인의 포장도 눈치껏 번갈아 도맡아 해야 했다. 온종일 줄곧 포장을 했다. 뿐만 아니라 매장에서 출고전표가 떨어진 납품회사의 물건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겨 차량에 실어야 하는 노동도 추가되었다. 그나마 나보다 어린 남자아르바이트생 다섯 명이 스프링 작업을 하는 중간마다 합류하여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노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이어리는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거래처에 배포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주문량이 한꺼번에 몰렸다. 매장에 비치되는 다이어리의 크기나 디자인만 해도 수십 종이었으며, 앞부분에 회사 홍보자료를 첨부하고 표지에 상호를 각인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문되는 업체의 다이어리마다 사양이 모두 달랐으며 수량이나 납기가 각양각색으로 딜러들의 주관적인 입맛에 맞추어야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다이어리는 해를 넘겨서는 거의 쓸모가 없게 되는 물건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접어들자 일요일 특근은 으레 당연해진 현실로 고착되었다. 네 명의 아르바이트생이 충원되었어도 거의 매일같이 야근까지 해야 했다. 숙련되지 않은 아르바이트생은 물론 직원들마저 작업 능률은 날이 갈수록 무뎌져 갔다. 하지만 공장장은 농익은 여유로 국방부 시계가 가듯 다이어리 시계도 돌아간다는 농담을 섞어가며 나날이 작업진행을 교통정리했다.
사람은 기계처럼, 기계는 사람처럼 엉켜 국방부 시계인 양 매일매일 흘렀다. 라디오에서 흘려보내는 크리스마스캐럴도 남의 음악이었으며, 남북 이산가족 찾기로 텔레비전에서 연일 눈물바다를 이루어도 남들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우리에겐, 특히 나에겐 아르바이트였지만 연말까지 버텨내는 것만이 관심사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 정라를 만나기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가끔 전화통화만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말했을 때 그녀도 바쁘다는 이유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그래도 이브인데 아르바이트생은 야근까지는 안 시키겠지 싶어 모처럼만에 정라를 만날 계획을 세웠다. 선물은 어떤 것을 할까, 장소는 어디에서 만날까, 혼자만의 계획을 세우다가 마침내 정라로부터 데이트 약속을 받았다. 내 마음은 벌써부터 들떠 올랐다.
그런데 저녁 무렵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기업체에 납품한 다이어리에서 결정적인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스프링다이어리 앞에 첩부한 홍보자료의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는 황당한 사건이었다. 하물며 수량도 2만 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재작업으로 납기를 미루자니 해를 넘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수선작업을 하자니 밀려 있는 업체들의 납품이 불가능해지는 진퇴양난의 입장이었다.
책임자들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논의된 결과는 공장장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납품된 다이어리를 회수하고, 스프링을 해체하여 화보를 교체한 다음, 다시 스프링을 결합하는 수선작업이 결정되었다. 시간은 곱절이 소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말까지 아주머니들만 제외하고 철야작업 일정이 잡혔다고 통보되었다. 인근에 여관을 얻었으니 퇴근도 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2교대로 편성된 명단이 벽에 나붙었다. 하물며 나는 군대를 다녀온 빌미와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장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정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한 마음을 섞어 자초지종을 말하자 공장 근처에서 잠깐 커피나 해도 된다며 성숙된 이해심을 보여주었다. 저녁에 잠시 종로에 나가 그녀에게 선물할 자주색 스카프를 겨우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신앙에는 무관심인 내가 크리스마스를 빙자하여 정라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는 데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처음부터 시간의 쪼들림에 불안해진 나는 다방에 앉자마자 곧바로 스카프를 건넸다.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뭐여? 난 선물 준비 안 했는데…….”
“괜찮어. 그냥 주구 싶어서 샀어.”
“뭔데?”
“스카프, 니는 스카프가 너무 잘 어울려서!”
나는 그녀의 어머니와 신내동 길가에서 맞닥뜨렸을 때 눈발과 함께 흩날리던 스카프를 추억하며 말했다.
“참 세심하기두 하다. 스카프가 어울리는지 나두 잘 모르는데 언제 다 본 거여?”
“지난번 길에서 어머니 만났을 때. 그날 니 정말 이뻤어!”
정라가 나름 정성스럽게 여민 포장지를 어루만지듯이 풀었다. 가지런하게 접힌 자줏빛 스카프가 조명을 받으며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어머, 색깔이 너무 이쁘다. 어쩜 이렇게 고운 색깔을 낼 수가 있지!”
“맘에 들어?”
“그럼 맘에 들구 말구, 정말 고마워!”
작은 선물에 크게 감동하는 그녀의 착한 표정이 무구해졌고 나도 덩달아 무구해졌다. 그녀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보니 진즉에 금반지 따위가 아닌 이런 선물공세를 펼 것을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도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주문한 커피가 왔다.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며 즐거워하는 정라를 부러워하는 여종업원의 질투 어린 눈빛이 나에겐 우쭐함으로 자라났다. 스카프를 꺼내어 요리조리 살피며 연신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니 늘 그랬던 것처럼 요즘의 집안 분위기가 궁금해졌다. 특히 정호의 소식.
“정호 형은 회사 잘 다녀?”
“나두 잘 모르겠어. 오빠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거의 매일같이 술이여. 결혼 같은 건 아예 생각두 없구, 그냥 그렇게 살겠대. 조상들이나 아부지의 무능력이 징그러워서 맘 내키는 대루, 되는 대루! 아주 병적이여, 하루라두 빨리 결혼해서 가정두 꾸리구 애두 낳아서 대를 이으라구 하면,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며 막무가내여. 정말 미워. 맘에 안 들어 미치겠어!”
“의외네. 누구보다 진취적인 사람이잖어?”
“군대 갔다 와서 사람이 180도로 바뀌었어. 험한 꼴을 많이 겪었나벼. 술 취하면 광주, 삼청교육대, 지난번에 있었던 미문화원점거 운운 하면서, 내 관심 밖인 정치적 소리만 지껄이는데 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마 제대두 그런 것 때문에 하게 된 것 같어!”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맘 편하게 가져!”
“사실 난 정치나 이념 따위에는 관심 없어. 그것 때문에 우리 집이 대대루 이렇게 고생한 거잖어. 그런데 달라진 게 뭐여.”
“그래두 형 같은 사람들의 목숨 건 견제가 있으니까 이나마 아니겠어! 반목보다는 화해가 더 빠른 지름길인지두 모르지만!”
“그런가? 넌 참 이해심 많은 친구여!”
그녀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하지만 나는 친구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실쭉했다.
“난, 친구가 싫은데.”
“또 그런다. 친구두 친구 나름이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친구는 친구 이상이 아니겠어!”
내심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친구 이상의 친구라는 생각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녀에게 친구 이상의 친구라는 의미는 결코 평범한 뜻이 아니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단어인가. 크고 작은 정이 쌓여 매듭이 되고 그 많은 매듭들이 대나무처럼 촘촘하게 되었다.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터, 끊어지지 않는 견고한 매듭을 자꾸자꾸 엮으면 될 일, 한 아름의 희망이 내게 쏟아지는 듯 밝아왔다. 그 빛은 정말이지 장마 이후 가장 편안하고 따사로운 빛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라는 들떴다. 나는 내내 행복했다. 커피를 비운 그녀가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족히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양우 니, 이제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녀?”
“그러네, 그만 들어가 봐야 할까벼!”
“내가 괜히 미안하네. 니는 이런 날 특근까지 하는데 말이여!”
“별 소릴 다 하네. 고작 아르바이트나 하는 주제에 요란 떨어 오히려 민망한 걸!”
그녀가 목덜미에 스카프를 두르며 미소를 보냈다. 깊은 마음속에서 배어나오는 수줍은 미소였다. 스카프 위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숙녀 본연의 정갈함, 다방의 미등과 어우러진 그녀의 여덟팔八자 착한 눈썹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나는 또 왈칵 굳어져 버렸다.
“양우야, 뭐 혀. 안 나갈 겨?”
그녀의 채근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주뼛거리며 일어섰고 이미 앞서 나가는 그녀의 뒤를 머슴처럼 줄래줄래 뒤따랐다. 거리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온통 덮여 있었다. 그 대열에 휩쓸려 물결처럼 흘러 다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었는지 자꾸만 눈치를 살피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내게 들켜버렸다.
“양우야, 난 저 버스 타구 갈게. 넌 어서 들어가!”
버스가 왔다. 버스가 몰고 온 바람에 스카프가 너울거리며 끌려갔다. 그녀가 너울대는 스카프자락을 왼손으로 정리하며 악수하자는 의미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습관처럼 엉덩이에 쓱싹 닦고는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미소가 교환되었다. 버스에 오르며 손을 흔들어 작별 표시를 한 그녀는 버스 안에서도 차창을 통해 줄곧 손을 흔들어 보냈다. 자줏빛 스카프의 색감이 유독 선명하게 차창에 아롱졌다. 멀어지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다.
예정보다 늦게 공장에 들어서자 공장장이 별도로 나를 호출했다. 다른 동료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너만 통뼈냐는 핀잔이려니 생각되어 내심 긴장되었다.
“야, 전양우! 너, 좋겠다!”
정라를 숨기고 만난 것이 누군가의 눈에 띄었는가 보았다. 일단 모른 척 시침을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사장님한테서 특별지시가 내려왔다. 얼마 전에 너 어떠냐고 묻기에 칭찬 좀 했더니 연말까지만 아르바이트 하라신다!”
“본래 그러기루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야 인마, 신년부터 정식직원으로 채용한다는 뜻이야. 네 의향을 물어보라고 하셨다.”
의외였다. 나름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꾀를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일한 대가였다. 나는 공장장에게 허리를 깊숙이 꺾었다. 그리고 단숨에 현장으로 돌진했다. 어깨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체증처럼 걸려버린 응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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