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건국시 태조의 호족세력 포섭과정 - 혼인정책, 사성정책, 공인제도>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弓裔)를 타도하고 즉위한 후 가장 시급한 문제는 안정의 달성이었다. 그는 태봉(泰封)의 수많은 호족(豪族) 중 유력한 자의 한사람으로서 비록 고려(高麗)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시기하고 의심하여 협조하지 않은 세력과 그를 질시하고 적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아서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즉위 직후에 일어났던 여러 차례의 정권탈취 기도사건이 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태조(太祖)는 주위의 여러 호족(豪族)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호족(豪族) 포섭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조(太祖)의 호족에 대한 정잭으로서는 결혼정책(結婚政策),사성정책(賜姓政策),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기인제도(其人制度)가 있다. 그리고 호족들에 대한 유화적인 화합정책(和合政策)을 들 수 있다.
태조(太祖)는 먼저 호족(豪族)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동시에 황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결혼정책(結婚政策)을 실행하였다. 태조(太祖)는 무려 29명이나 되는 후비(后妃)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후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 《고려사(高麗史)》 후비열전(后妃列傳)을 보면 정략적인 혼인정책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느 왕건(王建)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만난 정주인(貞州人) 삼중대광(三重大匡) 류천궁(柳天弓)의 딸인 신혜왕후(神惠王后) 류씨(柳氏)와 나주인(羅州人)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를 제외한 나머지 후비들의 지역적인 배경과 비부(妃父)들의 정치적 지위로 볼 때 보다 분명해진다. 즉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 류씨(劉氏)는 충주 호족 내사령(內史令) 류긍달(劉兢달)의 딸이고,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는 광주의 호족인 대광 왕규(王規)의 딸이며,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는 춘주인(春州人) 대광 왕유(王柔)의 딸인 점이나,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와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는 각기 명주의 호족세력인 왕경(王景)과 왕예(王乂)의 딸인 점에서, 왕건(王建)이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유대관계를 강화하고자 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오랫 동안 태조(太祖)에게 불복했던 명주 지역의 호족세력들에 대해 혼인과 사성(賜姓)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자 한 점이 태조(太祖)가 행한 혼인정책의 목적을 보다 확연히 말해 주고있다. 더욱이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였던 (昇州) 호족 박영규의 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와 신라왕(新羅王) 김부의 백부인 억렴(億廉)의 딸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와 혼인한 것은 후삼국 통일 후의 통일지배질서 마련을 위한 태조(太祖)의 통일 전략의 일환으로 보여진(女眞)다. 또한 태조(太祖)는 고려 건국의 1등 공신 홍유의 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홍씨)나 평주(平州) 호족 태?(太?) 삼중대광(三重大匡) 박수경(朴守卿)과 그의 형 박수문(朴守文)의 딸인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와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그리고 평주인 태사 삼중대광 유검필(庾黔弼)의 딸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와 황주인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 황보제공(皇甫悌恭)의 딸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와의 혼인관계를 통해지지 기반인 호족들과의 결속력을 더욱 다져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태조(太祖)는 각지의 유력한 호족들이나 세력가의 딸들과 혼인을 통한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서 통일을 위한 군사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태조(太祖) 자신이 많은 자손들을 두어 왕가의 기반을 다져 고려 왕실의 번성을 꾀하려는 면도 있었다. 실제로 태조(太祖)는 직계자손을 제외한 그밖의 친족세력은 미미하였다. 이렇게 수적으로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가문을 위해서 태조(太祖)는 많은 부인을 통해 자손들 두고자 하였기에 모두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자녀를 둔 태조(太祖)는 그의 자녀들을 혼인시키는데 있어서 특별하였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와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소생의 공주가 고려에 항복해 온 신라왕 김부와 혼인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이복 남매끼리 결혼을 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를 들어 고려에 자진 항복한 김부의 경우는 고려왕실이 김부에게 왕녀를 시집 보내고 동시에 신라왕실에서 후비를 맞아 들이는 이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유서 깊은 신라왕실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여 통치 지배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밖의 대부분은 극도의 근친혼이었다. 특히 신명왕후 유씨와 정덕왕후(貞德王后) 류씨(柳氏)는 자기들 소생의 자녀들을 서로 바꾸어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두 왕후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배후자라는 관계 이외에 서로 상대한 소생의 왕자에 대해서는 장모로 공주에 대해서는 시어머니로서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고려왕실이 이렇게 복잡한 근친혼 관계를 맺은 것은 태조(太祖)가 많은 후비들의 자녀들이 유력한 다른 호족과 혼인했을 경우 파생되는 왕실의 분열과 대립을 방지하고, 각 지역 호족들의 딸인 후비 수생의 자녀들끼리 중첩되는 결혼을 통해 가족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이들 호족세력들을 왕실 주변에 묶어 두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였다.
태조(太祖)는 유력한 호족들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여 이들과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어 유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는 먼저 태조(太祖)와 명주세력과의 관계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태조(太祖) 5년(922) 7월 무술일에 오래 동안 불복하여 태조(太祖)를 노심초사하게 하였던 명주 장군 순식이 그의 아들 수원을 보내 귀부해 오자 태조(太祖)는 왕성(王姓)과 전택(田宅)을 준 사실과 태조(太祖) 10년 8월에 순식이 그의 아들 장명에게 600인의 군사를 주어 태조(太祖)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고, 이어 태조(太祖) 11년에는 순식이 자제들과 부하들을 이끌고 친조(親朝)하자 순식에게 왕성을 주고 대광으로 임명한 데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 때 장명에게 렴(廉)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원보로 임명하였으며 소장(小將) 관경에게도 왕성을 하사하였다. 역시 명주의 재지세력인 김예(金乂)도 이때 왕성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女眞)다. 또한 광해주(光海州; 춘주) 사람으로 궁예(弓裔)에게 협력하여 동관기실(東官記室)의 벼슬까지 지내고서 궁예(弓裔)의 실정을 보고 숨어 살다가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찾아 온 박유(朴儒)의 경우에도 태조(太祖)는 예(禮)로써 대우하고 왕성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태조(太祖)는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에 계속된 반란과 배신으로 야기된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여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후삼국 통일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자들과의 결속력을 다지는 방편으로 결혼정책과 더불어 사성정책(賜姓政策)을 시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밖에도 호족들에 대한 시책으로는 사심관(事審官)제도와 기인제도(其人制度)를 들 수 있다.
사심관(事審官)의 기원은 태조(太祖) 18년에 신라왕 김부가 고려에 항복해 오자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케 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 이후 다른 공신들도 각각 그 출신지의 사심관으로 삼게 되면서부터 사심관(事審官)제도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태조(太祖)가 이 제도를 시행항 목적은 호족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경(開京)에 거주하는 호족들로 하여금 출신지역을 관장케 하는 간접적인 지방 통제를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인제도(其人制度)는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이 고려나 후백제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자신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삼게 한 것으로, 태조(太祖)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시행하였다. 기인(其人)의 성격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되어 그 지위도 격하되었지만 태조(太祖)대에는 개경에 기인으로 거주하고 있던 각 지방호족들의 자제를 우대하였다. 이는 당시 호족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군사적 대립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태조(太祖)는 호족 포섭을 위해 유화적인 화합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太祖)가 호족들과의화합을 위해 기울인 노력은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그는 즉위한 다음날인 6월 정사일에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위에 나간 것은 여러 호족들의 추대 때문이라 하고 군신 모두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즐거움을 함께하자면서 조서를 내렸다.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망한 왕의전철을 경계하고) 풍속을 개혁하여 모두 새롭게 하고자 하니 마땅히 새 법규를 세우고 이전 것을 실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는 물과 고기처럼 서로 화합하여 이나라 강산이 평화롭게 되는 경사가 있을 것이니 내외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에게 마땅히 나의 뜻을 알게 하라[《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태조(太祖) 원년 하 6월 정사]. 같은 달 무올일에는 한찬(韓粲) 총일(聰逸)을 시켜 청주 출신으로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를 석방케 하였다. 이전 임금(궁예(弓裔))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 하였다. 그대의 고향인 청주는 토지가 비옥하고 호걸이 많아 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모두 섬멸하려고 군인 윤전(尹全),애견(愛堅) 등 80여 인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렀다. 그들은 지금 결박되어 오고 있는데 그대는 빨리 가서 그들을 방면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게 하라[《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태조(太祖) 원년 하 6월 무오]. 또한 8월 기유일에는 왕이 군신들에게 아래와 같이 유시하자 과연 각저의 호족 중 고려로 귀부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각처의 도적들이 내가 처음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듣고 혹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을 대해 염려된다. 「단사(單使)」를 각지로 파견하여 폐백을 후히 하고 언사를 낮추어서 「혜화(惠和)」의 뜻을 보이게 하라[《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태조(太祖) 원년 8월 기유).
같은 달 신해일에도 왕은 거듭 화합을 장려하는 조서를 내렸다.
신하로서 뛰어난 책략으로 제왕의 창업을 도와 세상에 보기 드문 공훈을 세운 자에 대해 토지를 나누어 주고, 높은 관직을 주어 포상하는 것은 백대(白代)의 모범이며 천고의 규범이다. 내가 미천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보잘것 없으나 실로 여러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마땅히 폭군(弓裔)을 폐할 때 충신의 절개를 다한자에 대해 상을 주고 그 공훈을 표창해야 할 것이다.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을 1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라, 포백 등을 차등있게 주고, 전권(堅權),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금악(金樂),연주(連珠), 마난(麻煖)은 제 2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백을 차등있게 주고, 제 3등 2천여 인에게는 각각 능백과 곡식을 차등있게 주게 하였다. 내가 공들과 더불어 백성들을 구제함에 있어 끝까지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음에 이 공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 상을 주지 않으면 장차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해서 오늘 포상한 것이니 그대들은 나의 뜻을 알라[《고려사(高麗史)] 권 1, 세가(世家) 1, 태조(太祖) 원년 8월 신해].
태조(太祖) 스스로가 미천한 출신이요, 재주와식견이 모자라는 데도 불구하고 중망에 힘입어 왕위에 나갔으며 또한 그들과 함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신하가 지킬 도리를 지키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겸하의 뜻을 표하고 홍유 이하 2천여 인의 국가공로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갑오일에 상주적수(尙州賊帥) 아자개(阿字盖)가사신을 보내어 내부하자 태조(太祖)는 의례를 갖추어 이를 영접하게 하였는데, 이 영접을 위한 연습까지 할 정도로 신중과정서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태조(太祖)의 다년간에 걸친 화합과 포섭의 노력에 의하여 태조(太祖)는 즉위 직후에 환선길,이흔암,임춘길,진선 등 내부 호족들의 모반사건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외부로부터는 삭방골암성수(朔方鶻巖城帥) 윤선,상주적수(尙州賊帥) 아자개,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 하지현장군(下枝縣將軍) 원봉,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 진보성주(眞寶城主) 홍술, 명지성장군(命旨城將軍) 성달, 벽진군장군(碧珍郡將軍) 양문, 매조성장군(買曹城將軍) 능현, 고울부장군(高蔚府將軍) 능문 등 각지의 유력한 호족을 동맹자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태조(太祖)는 내적으로는 고려정권에서의 왕권의 안정을 이룩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국력의 신장을 가져 올 수 있었으므로, 드디어 외적으로 후백제와 쟁패전을 벌일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18&mode=content&query=%C1%F6%B9%E6%C8%A3%C1%B7&dircode=0
2만월대 |
연대 : 919년 위치 : 개성시(開城市) 송악동(松岳洞)
만월대(滿月台)는 고려의 거의 전기간 왕국이 자리잡고 있던 유적이다. 원래 이 궁궐안에 망월대라고 불리우던 궁전이 있었는데 후세 그 어느 때인가 이 궁궐 전체를 만월대(滿月台)라고 부르게 되었다. 송악산(松嶽山)을 배경으로 그 남쪽기슭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려 왕궁은 궁성과 황성을 합하여 125만 평방미터, 궁성은 약 39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 경사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군으로 묶어지고 건물들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왕궁에는 황성의 정문인 동쪽의 광화문과 궁성의 정문인 남쪽의 승평문, 그 뒤에 연이어 세운 신봉문, 창합문 등 많은 문이 있었다. 정면 7간 약 27미터, 측면은 4간 약 11미터으로 된 신봉문터에는 지금도 3개의 문길을 가진 2층 문루의 장엄하고 화려하였던 옛모습을 상상케 하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만월대(滿月台)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會慶殿), 장화전(長和殿), 원덕전(元德殿)과 그 밖의 건물들이 규모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맨 앞 회경전(會慶殿)의 축대 정면에는 높이 7.8미터 되는 커다란 돌계단이 놓여있다. 만월대(滿月台)의 기본정전인 회경전터는 동서 약 60미터,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막혀 있다. 만월대(滿月台) 중심축대 동쪽에는 동궁터, 서쪽에는 건덕전터, 침전터 등 수많은 건물터들이 있다. 만월대(滿月台)의 뒤 언덕에는 정자터들이 남아 있다. 황성의 성벽은 후삼국때 태봉국(泰封國)이 쌓았던 발어참성(勃禦塹城) 성벽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 안을 따로 가로막아 궁성 성벽으로 삼았다. 고려시기 천문 기상을 관측하던 유적으로 유명한 개성 첨성대(開城瞻星臺)는 여기 황성 서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만월대(滿月台)에서는 기와와 벽돌, 치미, 괴면, 기둥밑 장식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다. 유물들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것을 계승한 점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고려의 괴면과 기둥밑 장식은 발해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고려 왕궁터 만월대(滿月台)는 고려시기 궁성제도와 건축기술의 발전된 높이와 함께 왕궁의 규모와 배치, 건물들의 평면구조와 건축 부재 등을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고려 백성들의 지향과 감정을 잘 보여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35&mode=title&query=%B8%B8%BF%F9%B4%EB&dircode=0
3완옌부
시 기 : 1108년(예종 3) 2월 11일~5월 초순
전투지역 : 함남 길주군 동해면 웅주성
전쟁상대국 : 여진
관련유적 : 여진족성터, 다신산성터
고려 예종 3년(1108)의 여진정벌 전쟁 중 웅주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총병력 17만의 여진정벌군은 12월 13일 정주성 관문 정면의 여진군을 패퇴시킨 후 여진족의 촌락 125개소를 소탕하여 적병 3,740여명을 격살하고 1,030여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여진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에 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함주(咸州)·공험진 등 여섯 고을을 설치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고려가 여진의 거주지역을 직할령으로 삼아 통치력을 강화하자 1108년 1월 완옌부 여진은 잃은 땅을 되찾기 위하여 남침을 개시하였다. 영주성에서 고려군에 일격을 가한 여진군은 2월 11일 수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웅주성을 포위하였다. 웅주성은 현 길주군 동해면에 있는 다신산성터로 추정되는데, 두만강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고려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여진군은 고려군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자신하여 웅주성을 일거에 공략하기 위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공세를 가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은 여진군의 방심을 틈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여진군의 포위공세가 장기화됨에 따라 군량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척준경은 야음을 틈타 여진군의 포위망을 뚫고 정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여 다시 웅주성에 도착, 여진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성의 위기를 구원하였다. 웅주성 공격에 실패한 여진군은 영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두만강 밖으로 잠시 물러난 여진은 4월 8일 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 주변 일대에 목책을 세워 웅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웅주성의 병마별감 임언과 병마판관 최홍정을 비롯한 고려 군민들은 여진군의 공격에 맞서 힘껏 싸웠으나 공방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점차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4월 23일 웅주성이 위급하다는 급보에 접한 고려 조정에서는 오연총을 지휘관으로 한 1만여 명의 증원군을 급파하였다. 고려의 증원군이 웅주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여진군은 병력의 일부를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배치하여 고려군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곳에서 여진군과 두 차례에 걸친 격전을 벌여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하여 웅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여진군의 배후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전후 양면에서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된 여진군은 그들이 구축해 놓은 목책과 각종 장비를 소각하고 퇴각을 단행하였다.
웅주성 전투에서 패각한 여진군은 이후에도 길주·영주·함주 일대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빈번하게 벌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자 고려 동북계에 대한 무력 침공을 포기하고 고려에 화의를 제기하였다. 고려 역시 여진과 전쟁을 계속하면서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는 것보다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의를 수락함으로써 고려와 여진 사이에는 일단 평화가 회복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8090&mode=content&query=%BF%CF%BF%BA%BA%CE&dircode=0 4혈연
전통'적인 가족? 부계원리에 따라 형성된 조선의 가족과 친족은 지금 '전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가저으이 권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고, 같은 성씨의 남자들이 친족을 조직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 남자들과 결혼한 여자들이 가족과 친족의 구성원으로 합류하였다. 그러나 고려에는 현재 '전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가족과 친족이 없었다.
'전통'이전의 '전통' 고려에서 가족과 친족을 구성한 원리는 총계의 원리였다. 총계 원리라 ㄴ아버지 쪽이든 어머니 쪽이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피가 통하면 친족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총계의식은 고려의 친족 칭호에 잘 반영되어있다. '이모'와 '고모'의 구분없이 모두 '아자미'라 불렀고, 삼촌과 외삼촌은 '아자비'였다. 외할아버지나 외손자라는 말도 없었다.
똑같이 존중하고 똑같이 사랑하고 고려에서는 남편이 부인 집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대로 거기서 살았다. 처가 거주관행은 부부관계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가정사에 있어서느 ㄴ부인의 발언권이 더 셌다고도 볼 수 있다. 부인이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 남편도 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소냐 고려의 부부관계를 평등하게 만든 요인으로는 균분상속 관행도 크게 작용하였다. 고려에서는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균등하게나눠주었다. 재산을 균분하는 것은 관습일 뿐만 아니라 법으로 규정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407&mode=title&query=%C7%F7%BF%AC&dircode=0
5충렬왕
변발의 고려 태자, 원의 공주와 혼인하다 1274년, 원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과 혼인한 충렬왕은 25번째로 고려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고 역대 권신들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는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결국 이를 기점으로 고려는 원의 종속국이나 다름 없는 처지가 되어 이후 많은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일본 정절에 힘을 보태라' 원나라의 제안 충렬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 첫번째는 원나라가 일본 정벌의 뜻을 밝히며 고려에게 함께 군사를 보낼 것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일본은 원나라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사신과 서신을 보내어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원 황제는 마침내 군사를 동원하여 일본을 평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고려가 정벌에 나서기 위해 필요한 선박의 조선과 함께 충분한 군사를 협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 아닌 제의를 한 것이다. 달리 방도가 없는 고려는 원의 요구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1차 원정, 하카다 항의 전투와 철군 결정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을 실은 9백여 척의 배가 일본의 하카다 항에 도착했고 배가 해안에 닿기가 무섭게 그 안에서는 성난 기세를 띤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군의 격렬한 전투는 어둠이 내리는 사각까지 이어졌고, 처음에는 양 쪽의 기세가 비등한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반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밤이 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남은 군대의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은 하카다 항을 점열하고 많은 포로를 획득하며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일본을 보호한 바람, 신풍 날이 밝아오자 흘돈은 병사들에게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라고 일렀고 어제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병사들은 다소 의아해 하긴 했지만 이내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다. 바로 그 때 엄청난 파도와 함께 거대한 바람이 험악한 기세로 연합군의 배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모든 함대가 태풍으로 인해 침몰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미쳐 조치를 취하지 못한 배들은 자기들끼리 부딪혀 뒤집어지고 파도에 묻히는 등 그 손실이 결코 적지 않았다. 태풍과 폭우가 지나간 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급히 배를 돌려 본토로 돌아갔고, 다시 벌어질 전투에 두려워하고 있던 일본군은 '적군이 돌아가고 있다' 는 전령의 보고를 받은 뒤 해안가로 나와 정말로 배가 저 멀리 떠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크게 안도했다. 예상치 않게 신풍을 만나 본토로 돌아간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5년 뒤 다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나, 이 때도 역시 5년 전과 비슷한 태풍을 만나 온갖 고초를 겪고 배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원나라가 품었던 일본 정벌의 꿈은 두 번의 시도가 끝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이루지 못한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또한 원다라를 도왔던 고려도 별 다른 성과 없이 국력을 소진하는 것으로만 끝나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기도 했다. 충렬왕의 외교, 원나라의 압박 충렬왕은 영토 보존에 대단히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탐라를 비롯해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다른 영토들도 적지 않게 돌려 받았고, 이는 원나라에 대한 그의 외교 수완이 녹녹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충렬왕의 요구를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점령하고 있던 일부 영토들을 고려에 반환해 주는 대신, 원 세조는 고려의 관제에 대해 간섭을 하며 고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충선왕의 개혁 시도와 좌절 충렬왕이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난 후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여 저마다 힘을 다하여 300개에 걸친 수 많은 크고 작은 개혁인들을 내 놓았고 충선왕 역시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려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허나 연이은 원의 간섭과 폐위, 복위로 인해 충선왕이 고려 내에서 일으켜 보려던 개혁들은 비록 그 시도는 좋았으나 중간에 여러 차례의 난관에 부닥친 뒤 결국에는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을 잃고 스스로 좌초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고, 고려는 여전히 원나라의 부미국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419&mode=title&query=%C3%E6%B7%C4%BF%D5&dircode=0
6속장경
1) 교장(敎藏): 한역(漢譯) 정장(正藏)에 대하여 동양 학승들의 연구 저술과 소초(疏鈔)를 의미한다. 의천(義天)은 선종(宣宗) 2년 몰래 중국으로 유학하여 1년 2개월 동안 머무르며 각지를 순반하면서 고승 50여 명과 만나 각종 교리를 묻는 구법활동을 통해 각 종파의 찬술과 소초를 3천여 권이나 수집하였다. 귀국 후에는 요나라와 일본에서까지 두루 장소(章疏)를 모아 집대성하여 목록집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저술(선종(宣宗) 7년)하였고 수록 범위는 경율론 삼장이 상중하의 3권에 차례로 분류 수록되어 있는데, 장소의 총수는 1,010부 4,857권의 방대한 양이다. 동양 학승들의 교장 찬술과 소초를 의천(義天)이 최초로 방대하게 모아 간행하려고 엮은 목록인 점에 의의가 있다.
이듬해 남부 지방에 가서 4천여 권의 장소를 더 찾아냈고 이들을 모두 수습하여 돌아와 흥왕사(興旺寺)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오류와 누락을 바로잡은 뒤 개판에 착수하였다. 이후 숙종(肅宗) 7년 무렵까지 계속 간행하였으나 숙종(肅宗) 6년 의천(義天)이 47세로 별세하여 개판이 중단되었다.
2) 속장의 규모: 4,857권이 모두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속장경(續藏經) 초간본 3종이 전해지고 완질은 일본 동대사(東大寺) 도서관 소장의 징관(澄觀) 저술의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20권 40축 뿐이다.
3) 속장의 의의: 동양 최초의 수집하여 정장(正藏)과 쌍벽을 이루게 한 것에 의의가 있다. 속장은 국내와 외국에서 수집한 장소의 본문을 일일이 교감하고 탈오를 바로잡은 다음 매줄 20-22자 형식의 중간 글자로 판서본을 정성껏 써서 새기는 우수한 조판술이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464&mode=title&query=%BC%D3%C0%E5%B0%E6&dircode=0
7전민변정도감
본문 |
국가나 관에 소속되어 있는 공노비가 도망치거나 숨어있거나, 혹은 불법으로 양인이 된 자를 색출하던 기관으로 임시관서였다. 공노비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공노비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자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라는 노비 추쇄 기관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권세있는 권력자들이 공노비를 임의로 사노비화하는 문제가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간관(諫官) 전백영(全伯英)의 건의로 태조 4년(1395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1479년(성종 10)에 노비추쇄도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경외노비 26만 1,984명, 역노비(驛奴婢) 9만 581명 등 모두 35만 2,565여명이 집계되었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추쇄하고 20년마다 정안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였다. 한 번 추쇄하는데 최소 3- 4년이나 걸리는 대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 후 150년 동안에는 모두 6번의 추쇄가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임진왜란을 전후한 100년간은 신분제도가 약화되면서 한 번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효종때에 와서 다시 실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재정적자 때문이었다. 1655년(효종 6)에 국가는 2만석의 재정적자가 났는데 수입은 10만석이지만 지출이 12만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효종은 등록되어 있는 19만여명의 노비중에 불과 2만 7천명만이 신공을 내고 있음에 착안하여 추쇄를 실시하였다. 이 때 노비추쇄도감사목(奴婢推刷都監事目)의 내용은 ① 할아버지 때 생원-진사과에 합격해 그 자식과 손자가 양인(良人)으로 거짓 행세하고 있는 자는 양인으로 허락한다. ② 아버지 때 생원-진사가 된 자의 자식 또는 아버지는 등과하지 못했으나 아들이 생원-진사가 된 자로서 거짓 양인 행세를 한 자는 대구속량(代口贖良)을 허락한다. ③ 3대 이상 등과한 사람이라도 자수한 자는 위와 같은 은전을 베풀어주고, 자수하지 않고 적발된 자는 누대(屢代)가 지난 뒤라도 천적(賤籍)에 환속한다. ④ 법정 절차를 밟지 않은 면천자는 환천한다. ⑤ 시노(寺奴)가 사비(私婢)와 결혼해 그 처를 속량(贖良)시켰을 경우 그 자녀는 부역(父役)을 따르도록 한다. ⑥ 경중(京中) 각사 노비의 추쇄는 각사의 장관이 이를 책임진다 등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10만명 이상의 실공노비(實貢奴婢)를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불과 1만 8,000여명만 찾아내었다. 그 후에는 각 지방관청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추쇄만 실시했으며 전국적으로 노비추쇄도감은 설치되지 않았고, 1801년(순조1년)에 공노비가 혁파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출쳐: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00924&mode=content&query=%C0%FC%B9%CE%BA%AF%C1%A4%B5%B5%B0%A8&dircode=0
8홍산대첩
기 : 1376년(우왕 2)
전투지역 : 충남 부여군 홍산면
전쟁상대국 : 일본
관련유적 : 홍산대첩비
고려 우왕 2년(1376) 충남 부여 홍산 일대에서 고려군이 왜구를 대파한 전투.
1376년 7월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호하던 왜구는 금강 상류를 거쳐 북상하여 공주를 공격하였다. 공주를 함락한 왜구는 연산현의 개태사를 향해 전진하면서 양광도원수 박인계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였고, 승기를 잡은 왜구는 홍산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판삼사사 최영을 박인계의 후임으로 출전하도록 하였고, 최영은 최공철·강영·박수년 등과 함께 고려군을 이끌고 홍산에 이르렀다. 홍산 일대는 삼면이 우뚝 솟은 절벽에 둘러싸여 오직 한 가닥의 길만 뚫려 있는 험준한 지형이었다.
왜구는 높은 지형에 의지하여 고려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영은 전군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전진하지 못하였다. 최영이 몸소 군사의 진두에 서서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왜구의 진영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이때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왜구가 쏜 화실이 최영의 입술을 명중시켜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최영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곧바로 적을 쏘아 이를 죽이고 난 뒤에야 박힌 화살을 뽑았다. 사기가 오른 장병들은 앞을 다투어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고, 이를 막지 못한 왜구는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내고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홍산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금강 연안의 내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왜구의 기도를 저지할 수 있었고, 양광도 지역 일대에 침입한 왜구이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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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진포대첩
시 기 : 1380년(우왕 6) 8월
전투지역 :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
전쟁상대국 : 일본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전북 군산 진포에서 고려군이 왜구를 대파한 전투.
1351년부터 왜구는 고려 전역에서 침구와 약탈을 자행하며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고, 때로는 내륙에도 출몰하며 개경을 직접 위협하기도 하였다.
1380년에 들어와 왜구의 대규모 선단이 군산 앞바다인 진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전선 5백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진포는 한반도 수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강의 하구로, 이곳은 선박으로 군산과 장항이 연결되며 상류로 가면 부여·공주 등 강안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들과 연결되는 곳이다.
고려군은 5백여 척에 달하는 왜구의 선단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을 편성하였으나 왜구에 비하여 5분의 1 정도인 1백 척에 불과하였고, 군사도 3천명을 약간 웃도는 병력이었다.
고려군은 왜구에 비하여 병력상으로 열세였으나 최무선에 의하여 개발된 화약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왜구는 자신들의 병력이 양적으로 우세한 점을 알고 고려군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선공을 하였다. 고려의 수군은 왜구의 선단이 가까이 오자 일제히 화포사격을 개시하였다. 고려군의 화공에 불길이 오른 왜구의 선단은 후퇴하려고 했으나 여러 척으로 연결되어 있던 선박들은 움직임이 둔하여 피해가 커졌다.
왜구는 고려군의 화약무기 앞에서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대패를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선단 5백여 척이 대부분 소각되었으며, 2만명에 다하던 병력도 거의 섬멸되고, 잔여 왜구는 금강 상류로 올라가 내륙으로 도주하였다.
출쳐: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0025&mode=title&query=%C1%F8%C6%F7%B4%EB%C3%B8&dircode=0 10일연
(1206 ~ 1289)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호는 무극(無極)이며 속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견명(見明)이다.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한 후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定林社)에 주재하며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일을 맡기도 했다.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84년 경북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고, 1289년 입적하였다. 단군왕검에서 고려에 이르는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ㆍ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출쳐: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0225&mode=title&query=%C0%CF%BF%AC&dircode=0
11천산대렵도
고려 제 31대 공민왕(1330-1374)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서 말을 탄 귀족 남자가 개체변발을 하고 질손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체변발이란 머리 변두리를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 땋아 늘인 것으로서, 고려후기에 몽고풍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게 되었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당시 원나라에 다녀올 때 변발호복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는 영을 내리어 모두 몽고의 의복과 개체변발을 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반 서민이 모두 따른 것은 아니고, 지배계급인 관료층과 출세를 희구하는 일부 지식층에서만 호응하였다 한다.
개체변발은 중간에 머리를 남기며 겁구아(怯仇兒)라고도 하였는데, 몽골어로는 '허헐'(Kekul)이라고 한다. 충렬왕 4년(1277) 2월에는 신하에게 강요하여 개체령을 발표하고 있으니 그 때까지 백성들은 개체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몽골은 앞을 치는 데 비하여 국말까지의 변발은 앞머리를 치지 않았다. 다만 성인의 상투 밑을 치는 '백호친다'는 어휘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불교적 어휘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개체의 풍속은 변발의 풍습으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본래의 모습에서는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가잡복고>에 "공민왕 원년에 변발호복은 우리 선조의 제도가 아니라는 신하의 말에 변발을 풀었다."고 하였으며, <고려사>에는 "원(元)을 섬긴 이래 개체변발하여 호복을 입은 지 백년이 가까이 오다가 이때부터 의관문물이 완연히 다시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충렬왕의 개체변발은 1272년에 시작되어 1389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길어야 100년정도 계속된 것이고, 궁에 사는 왕족과 신하들이었고 백성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 후 본래의 고유한 수발양식인 상투와 얹은머리로 되돌아갔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층과 관련하여 '얼음 배급'이라는 흥미로운 제도가 있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국가가 신료나 신민에게 얼음을 주는 것은 나름의 철학관이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고려시대는 귀족권의 견제나 호족 연합을 위해, 조선시대는 여름날 창성한 양기를 얼음을 통해 절제한다는 의미로서 나름의 정치적 철학적 의미가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제 3대 정종시절에 얼음 배급시기를 음력 4월 입하 날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저장과 배급의 원칙을 보면 해가 북륙(음력12월)때 얼음을 저장하고 서륙(음력4월경)에 있을 때 배급했다고 한다. 이처럼 얼음 배급은 단순히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려시대의 역법과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는 중요한 제의 수단이었기에 새끼 염소를 바쳐 제사를 하고 나서야 빙고의 문을 열었으며, 사용 기간도 춘분에서 입추까지로 했다.
정종2년(1036년) 6월에는 문하시중(오늘날의 국무총리)으로 휴직한 유방 등 17인에게 입추까지 매 10일에 1회씩 얼음을 내려주라는 조칙이 있었다. 이때부터 휴직 중인 관리에게도 얼음을 배급했다. 고려 문종 2년(1049)에 얼음 배급에 관한 법제가 완성되었는데 "해마다 6월부터 입추까지 얼음을 나누되 퇴직한 여러 관료들에게는 3일에 한번씩 하고 복야, 상서(尙書), 경(卿), 감(監), 대장군(大將軍) 이상에는 7일에 한번씩" 하라고 했다.
한편 얼음의 지급시기는 고려 정종때는 4월, 문종때는 6월이었다. 지급시기를 보면 얼음이야 더울 때 먹는 것이지만 왕권이 강할수록 얼음지급이 늦어지고 귀족권이 강화되면 약간 앞당겨졌다. 그만큼 얼음 배급은 백성들의 고된 부담이었기에 국가로서는 시기를 늦추려 했고, 혜택받는 귀족들은 이를 앞당기려고 애썼다.
문종 이후 <고려사>에는 귀족에게 얼음을 나눠주었다는 기사가 없다. 귀족들도 얼음을 채취하고 저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무신 집권기에 들어서면 이제는 권문귀족이 얼음을 사적으로 채취 저장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즉 <고려사> 반역열전 최이 항목을 보면 최이가 서산에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하려고 백성을 징발했는데,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쳐: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470&mode=content&query=%C3%B5%BB%EA%B4%EB%B7%C6%B5%B5&dircode=0
12신돈
부원세력 기철과 권겸 원나라 황제의 둘째 황후이며 태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누이동생 덕에 지금껏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고려안에서 권세를 누려온 기철을 점차 원나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음에 심기가 불폈했다. 그와 같은 처지인 권겸 역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반원정책을 펼치며 개혁을 외치는 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실패로 끝난 역모 왕이 베푸는 연회장에서 기철과 권겸, 노책은 왕을 살해할 계획을 꾸민다 마침내 왕이 방심하고 있다 생각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던 병사들에 의해 이들의 계획은 탄로나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오랫동안 고려 내 부패의 온상이던 부원세력의 중심은 기철 일파를 제거한 뒤, 공민왕은 다소 마음 편하게 지지부진하던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원의 연호를 중지하고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를 다시 되돌리는 등 공민왕의 반원자주화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 내부의 분란을 꽃피기 전에 알아 채고 잠재웠나 했더니 이번에는 외세의 침입이 공민왕의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다. 원나라 군대에게 쫓긴 홍건적이 퇴로를 한반도로 삼아 고려를 침범한 것이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대 승을 거두었으나 2년 뒤 다시 쳐들어온 홍건적이 끼친 피해는 예상 외로 막대해서 마냥 외침을 물리쳤다는 것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난은 평정했으나 고려 역시 쉽게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국력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민왕의 개혁에도 부득이하게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또 한번의 역모, 흥왕사의 변 홍건적이 물러 가고 나라가 잠잠해지자 마치 순환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또 다시 내부 분란이 일어났다. 역모를 꾸미는 주범은 다름 아닌 김용으로, 그는 공민왕이 태자 시절에 원나라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을 때 곁에 시종을 들던 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그였으나 그 마음이 간사하여 시기심이 많고 심약하여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을 바꾸는 성품이 끝내 화를 부르고 말았다. 권력에 눈이 멀어 왕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그의 계획은 환관 안도치에 의해 탄로나게 되어 안도치가 공민왕의 복장을 하고 대신 칼을 맞아 왕을 구하였다. 신돈의 개혁 가까운 신하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공민왕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것은 왕후인 노국공주와 한 명의 승려였는데, 이 승려의 이름은 신돈이라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왕후의 내조와 맞먹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공민왕은 항상 그의 존재를 든든히 여겼다. 두 사람의 정성 어린 격려로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은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봉하고 본격적으로 긴밀한 의견 교환을 통해 많은 난관들에 부딪쳐 흔들리던 개혁 정책에 다시금 박차를 가했다. 꿈을 잃은 공민왕, 신돈을 내치다 하지만 이처럼 뜻을 같이하며 견고하게 유지되던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왕후인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변화를 가장 먼저 실감한 사람은 신돈이었다. 이전까지 자기와 함께 밤을 새며 고려의 앞날에 대해 토론하던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릴없이 손수 그린 왕후의 그림만을 붙들고 낮이나 밤이나 술에 취해 있는 주정뱅이만이 남은 것이었다. 그런 공민왕에게 작언을 하는 신돈은 왕의 신임을 잃어 갔고, 그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반대 세력들은 바로 이 때다 하는 생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공민왕을 찾아가 아무래도 역모를 꾀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며 신돈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았다. 이미 판단력을 잃은 공민왕은 결국 신돈을 내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왕사는 쓸쓸히 유배지로 보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자신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꿈꾸던 두 사람을 모두 잃은 공민왕은 더 이상 지탱할 곳이 없어진 탓에 계속 휘청거리다 결국은 신하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신돈의 죽음으로 인해 고려는 다시 오지 않을 개혁의 꿈을 묻은 채 조용히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출쳐:"
부원세력 기철과 권겸 원나라 황제의 둘째 황후이며 태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누이동생 덕에 지금껏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고려안에서 권세를 누려온 기철을 점차 원나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음에 심기가 불폈했다. 그와 같은 처지인 권겸 역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반원정책을 펼치며 개혁을 외치는 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실패로 끝난 역모 왕이 베푸는 연회장에서 기철과 권겸, 노책은 왕을 살해할 계획을 꾸민다 마침내 왕이 방심하고 있다 생각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던 병사들에 의해 이들의 계획은 탄로나고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오랫동안 고려 내 부패의 온상이던 부원세력의 중심은 기철 일파를 제거한 뒤, 공민왕은 다소 마음 편하게 지지부진하던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원의 연호를 중지하고 원나라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를 다시 되돌리는 등 공민왕의 반원자주화 정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 내부의 분란을 꽃피기 전에 알아 채고 잠재웠나 했더니 이번에는 외세의 침입이 공민왕의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다. 원나라 군대에게 쫓긴 홍건적이 퇴로를 한반도로 삼아 고려를 침범한 것이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대 승을 거두었으나 2년 뒤 다시 쳐들어온 홍건적이 끼친 피해는 예상 외로 막대해서 마냥 외침을 물리쳤다는 것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난은 평정했으나 고려 역시 쉽게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국력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민왕의 개혁에도 부득이하게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또 한번의 역모, 흥왕사의 변 홍건적이 물러 가고 나라가 잠잠해지자 마치 순환이라도 하듯 이번에는 또 다시 내부 분란이 일어났다. 역모를 꾸미는 주범은 다름 아닌 김용으로, 그는 공민왕이 태자 시절에 원나라에서 10년간 머물러 있을 때 곁에 시종을 들던 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그였으나 그 마음이 간사하여 시기심이 많고 심약하여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을 바꾸는 성품이 끝내 화를 부르고 말았다. 권력에 눈이 멀어 왕을 시해하기로 결심한 그의 계획은 환관 안도치에 의해 탄로나게 되어 안도치가 공민왕의 복장을 하고 대신 칼을 맞아 왕을 구하였다. 신돈의 개혁 가까운 신하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공민왕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던 것은 왕후인 노국공주와 한 명의 승려였는데, 이 승려의 이름은 신돈이라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왕후의 내조와 맞먹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공민왕은 항상 그의 존재를 든든히 여겼다. 두 사람의 정성 어린 격려로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은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봉하고 본격적으로 긴밀한 의견 교환을 통해 많은 난관들에 부딪쳐 흔들리던 개혁 정책에 다시금 박차를 가했다. 꿈을 잃은 공민왕, 신돈을 내치다 하지만 이처럼 뜻을 같이하며 견고하게 유지되던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왕후인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변화를 가장 먼저 실감한 사람은 신돈이었다. 이전까지 자기와 함께 밤을 새며 고려의 앞날에 대해 토론하던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릴없이 손수 그린 왕후의 그림만을 붙들고 낮이나 밤이나 술에 취해 있는 주정뱅이만이 남은 것이었다. 그런 공민왕에게 작언을 하는 신돈은 왕의 신임을 잃어 갔고, 그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반대 세력들은 바로 이 때다 하는 생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공민왕을 찾아가 아무래도 역모를 꾀하려는 기미가 보인다며 신돈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았다. 이미 판단력을 잃은 공민왕은 결국 신돈을 내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은 왕사는 쓸쓸히 유배지로 보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자신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꿈꾸던 두 사람을 모두 잃은 공민왕은 더 이상 지탱할 곳이 없어진 탓에 계속 휘청거리다 결국은 신하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신돈의 죽음으로 인해 고려는 다시 오지 않을 개혁의 꿈을 묻은 채 조용히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었다 |
출쳐: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418&mode=title&query=%BD%C5%B5%B7&dircode=0
소감:고려라는 역사에만 이렇게 책한권을쓸 글자수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역사는 엄청많고 중요하고 어렵다는것을느꼈다 | | | |
첫댓글 속장경이 뭡니까?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