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의 영광을 안기까지는 무엇보다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인 부인 이희호 여사의 그림자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38년 동안 김대통령의 환희와 좌절, 절망과 영광의 정치 역정 뒤안길에는 역대 퍼스트 레이디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여사만의 남모르는 눈물과 신념, 애환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 오랜 고난의 길을 헤치고 남편을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한 이여사만의 남다른 내조법.
글·최미선 기자
사진·동아일보 DB팀
10월13일 오후 6시. CNN 등 외국방송과 국내 TV에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역사적인 멘트가 일제히 터져나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수상자 발표에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50년간 계속돼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의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며 시상 이유를 밝혔다.
한국인으로서 노벨상을 받기는 김대통령이 처음. 더구나 노벨상 1백년째, 새천년 들어 첫 수상자로 그 의미는 더 크게 다가왔다.
이번 노벨 평화상에는 개인과 단체를 합쳐 모두 1백50명이 후보로 올라 있었다. 이중 김대통령과 함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등도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동안 김대통령은 15번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14전 15기’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노벨상 추천은 정치인은 역대 수상자, 노벨위원회 전·현직 위원, 각국의 국회의원 이상, 정치학자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나 단체만이 가능하다. 그 와중에서 김대통령은 14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추천을 받아 왔다.
첫 추천은 김대통령이 미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86년 제임스 레이니 미국 에모리대 총장(이후 주한 미대사 역임)이 했다. 김대통령의 미국 망명시절, 남다른 친분을 갖고 있던 레이니 총장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김대통령의 기여를 높이 평가했던 것.
87년에는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더불어 독일 사민당 의원 73명이 동시에 추천한 바 있다. 이후에도 김대통령은 로마 바티칸 주교단체, 앰네스티 등 해외 인권단체, 코스타리카의 오스카 아리아스 전 대통령 등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와 해외 지인들이 끊임없이 후보로 추천했다.
국내에서도 88년 이후 김대통령 소속 정당 국회의원들이 꾸준히 추천했다. 노벨상 추천 마감은 매년 2월1일. 올 1월에도 여전히 민주당 의원들이 서명한 노벨상 추천서를 노벨위원회에 보냈다. 매번 보낼 때마다 추천서, 김대통령의 저서, 강연 등 주요 발언, 주요 외신 보도 등 증빙서류가 라면 1상자 분량을 넘었다고.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있던 시각 김대통령은 청와대 관저 안방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와 단둘이 이를 지켜보았다. 수상자로 선정되는 순간 김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여사의 손을 꼭 잡은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며칠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대통령은 “좀 창피한 얘기지만 아내와 껴안고 좋아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울러 “막상 받고 보니까 꿈 같기도 하고 정말 책임이 무겁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면서 “올림픽은 금메달을 받고 나면 끝이지만 노벨상은 받은 직후부터 시작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며 수상자로서의 책임감을 표명했다.
어느 정도 기대가 되기도 했지만 막상 김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국내외 인사들의 축하 전화와 전문이 빗발치듯 쏟아져 들어왔다. 청와대는 한순간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청와대 곳곳에서는 흥분과 함께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38년간 김대통령을 내조하며 고난의 길을 옆에서 지켜온 이희호 여사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이 땅의 모든 소외받고, 병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며 짧게 소감을 밝혔다.
이희호 여사다운 모습이었다. 좋은 일이라고 크게 떠들지도, 슬픈 일이라고 크게 낙담하지도 않은 그였다. 기자가 김대통령의 야당 시절, 조촐한 생일축하 모임에 초청되어 갔을 때나 97년 대선 때 대통령 후보자 아내로서의 입장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청와대에 들어간 후 6개월이 될 무렵 영부인으로서의 모습을 취재할 때… 언제나 차분하고 묵묵하게 남편을 뒷바라지해오는 그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빛과 그림자’가 아닌 ‘빛과 그 빛의 근원’ 관계
김대중 대통령의 인생에 있어서 이희호 여사는 아무리 빼놓으려 해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희호 여사 입장에선 김대통령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IMF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김대통령으로선 정치인 가운데 가장 아내를 잘 만났다고 해도 뭐랄 사람이 없다.
군사정권하에서의 사형선고 등 여러차례에 걸친 죽음의 고비, 6년간의 투옥생활, 55차례의 가택연금, 10년간의 망명생활…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맞붙어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를 한 것이 고난의 출발점이었다. 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된 이후 유신 반대의 한 정점에 있던 김대통령은 73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돼 1주일만에 ‘귀환’하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79년 10월 박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찾아온 ‘서울의 봄’도 잠시,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또 다시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그후 무기징역을 거쳐 ‘유기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82년 12월 석방되어 미국 망명길에 오른 김대통령. 85년
귀국 후 대선에서 잇따라 패배한 끝에 97년 대통령에 당선,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의 막을 열게 되기까지 늘 이희호 여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누군가 이런 걸 두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라고도 했지만 사실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빛과 그 빛의 근원’이라고 하는 게 옳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김대통령의 인생에 있어 이여사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지금껏 말없이 감내하며 남편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그였다.
사실 김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해외에서 더 긍정적으로 매겨져 왔다. 심지어 영국의 <더 타임스>는 ‘그가 런던을 방문한다면 영국이 깔 수 있는 붉은 카펫 가운데 가장 긴 카펫을 밟을 자격이 있다’고 했을 정도다.
이러한 김대통령이 있기까지 숨은 공신이자 일등공신인 이희호 여사. 그렇다면 그의 어떤 모습이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건 일반사람들로서는 선뜻 결정할 수 없는 김대통령과의 결혼에서부터 시작된다.
부유한 의사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여성’ 이여사가 62년 김대통령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모두 반대를 했다. ‘하필이면 왜 김대중이냐’는 것이었다.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이 딸린 홀아비인데다 나이든 어머니와 병든 누이동생과 함께 전셋방에 사는 가난한 사람인데다, 국회의원 선거에 거듭 낙선되고,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겨우 당선되긴 했지만 5·16 쿠데타로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낭인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결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선 당시 인터뷰에서 이여사는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일축시켜 버렸다.
“인연이라고 해야 할지, 신의 섭리라고 해야 할지… 그분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도 그렇고 주변에서 모두 반대했지만 밀고 나갔어요. 저는 김대중이라는 사람 하나만 보고 결혼했습니다. 그분은 그때도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얻은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의지와 성실성을 갖고 있었어요. 저는 그 분의 꿈이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신뢰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아, 이분은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이여사는 선택도 신중하게 하거니와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혼 이후 줄곧 시련을 겪었던 이여사는 기자와 인터뷰 도중 “정치하는 사람이라 굴곡이 많을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기도 했지만 “한번도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다”며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자신있게 얘기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이여사는 김대통령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양말과 속옷은 반드시 다리미질을 해서 넣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구차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남편에게 차입하는 물건이라도 반듯한 것을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겉옷에는 언제나 향수를 뿌렸다. 감방냄새를 조금이라도 덜 맡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남편을 옥바라지할 때는 그렇게 남다른 세심한 배려가 있었고, 가택연금 중에는 말동무가 되고, 미국 망명시에는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던 이여사는 아내로서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라 차라리 동지였다. 이여사 또한 여성운동가답게 ‘내조’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수평적 관계는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 기자가 방문했던 일산 자택의 문앞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김대중 이희호’ 라고 이름이 나란히 쓰여진 문패가 걸려 있었던 것.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퍼스트 레이디 내조법
어쨌든 내조라는 차원을 넘어 이희호 여사는 지금껏 ‘안주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퍼스트 레이디 내조법’을 담은 <이희호의 메이 아이 헬프 유?>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그 몇가지를 굳이 꼬집어 말하면 누구든 공감을 하게 될 것이다.
우선 이여사는 어떠한 상황이든 불평을 늘어놓질 않았다. 남편이 정치한다고 돈한 푼 안 들여와도, 툭하면 잡혀가고 교도소생활을 해도 소위 말하는 ‘바가지’를 긁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충고는 아끼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특히 여성문제에 있어 이여사의 충고를 많이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김대통령은 교도소 내에서도 아내의 의견과 충고를 구했고 그런 아내의 조언을 존중하는 남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여사는 매사에 치밀한 면모를 보였다. 김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사건이 많은 남자였다. 그를 정치지도자로 보지 않고 아내 입장에서 단지 남편으로만 본다면 그야말로 ‘사고뭉치 남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여사의 꼼꼼함은 단순히 살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하다간 때론 정치적인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82년 미국 망명길에 오를 때 김대통령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거금을 받았다는 소문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시끄럽게 나돌았다. 그 누명은 이여사의 꼼꼼함이 벗겨냈다. 당시 가지고 나갔던 돈을 증명하는 15년전의 환전영수증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
아울러 이여사는 사람을 대하는 그릇이 컸다. 특히 ‘남편의 손님’을 언제나 내집 식구처럼 대했다. 야당시절부터 김대통령의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때문의 이여사의 집 부엌엔 언제나 3백명분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을 자칫 소홀히 대하면 그 피해가 남편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였다. 비단 피해가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을 대하는데 최대한의 예의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김대통령을 만든 것이다.
첫댓글 지난5월8일 동교동에서 대통령님께 그동안 이희호 여사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따로 박수를 쳐야겠다고 하니까 미소를 지으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이희호여사님은 박수와 환호성을 지르는 저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요.. ^^
험난한 정치역경을 이겨낸 그 뒤안길에 이희호 여사님의 조용한 그림자 내조가 ....
조중동이 이러한 진솔된 기사만 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신 밑바탕에는 여사님의 역활이 대통령님 못지 않았음을 감사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