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유튜브 하나 들었습니다. 사실 마태오 형제님께는 미안합니다. 미국에 있는 평신도 마태오 형제님의 유튜브입니다. 자주 올라왔긴 한데 그냥 계속해서 패싱했습니다. 평신도라고 해서 그냥 무시했던 것입니다. 한 교우님의 댓글 하나 보고 사실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다셨습니다. 어설픈 신부보다도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 댓글을 본 순간 많은 생각이 제 머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주교님의 선한 사마리아 강론을 링크해서 원어로 듣고 충격을 먹었습니다. 댓글과 이 충격은 서로 상관성이 있습니다. 지금 신부님들의 강론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지금 평신도 수준이 예전하고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지금 모든 신부님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평일은 그렇다 치고 주일 강론을 듣다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이 제가 영세 받은 지 만 13년 째 되는 날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강론에 대한 묵상을 한번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주 간만에 굿뉴스에 들어왔습니다. 예전 글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제가 어떤 내용으로 올렸는지는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영성 서적을 많이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강론에서 얻는 은혜가 무감각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신부님들은 정말 뛰어난 강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잘하시는 신부님들도 계십니다. 강론을 듣고 나서 뭔가 하나라도 가슴에 여운을 주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강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대개 보면 일단 한국 신부님 전체 모든 강론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강론이 지루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 강론이 텍스트 100개로 이루어졌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이 텍스트 100개의 문단이나 내용이 다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실제로 보면 완전 따로국밥처럼 따로 따로 연결되지 않는 강론을 듣게 되면 그날 미사는 힘빠지는 미사가 되고 맙니다. 원래 미사 때 말씀의 전례의 연장선상에서 강론이 있게 되는데 이미 강론에서 주제가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하니 지루하게 되고 지루하다 보니 이미 말씀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가슴에 불이 타오른 그런 느낌을 받아야 성찬의 전례에서 절정을 이루게 돼 은혜로운 미사가 될 텐데 이미 말씀의 전례에서 죽을 쓰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유튜브에 사실 두 분의 신부님이 댓글을 다셨기에 사실 이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한 분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이셨고 한 분은 부산교구 신부님이셨습니다. 두 분 다 호의적으로 댓글을 다셨더군요. 제가 제목만 봤는데 형제님이 공학박사이더군요. 이미 한 편을 거의 다 봤는데 댓글에 어설픈 신부보다도 낫다는 댓글이 수긍이 간다고 해야 하니 조금 씁쓸합니다. 만약 제가 사제라고 가정하고 만약 이런 댓글을 보게 된다면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 주교님 강론을 보니 그 강론의 핵심은 이미 제가 교부들이 해석한 내용을 아마 영세 후 3년 쯤 됐을 때 책을 통해 봤습니다. 일단 내용은 알고 있었는데 그게 책으로 알게 됐을 때랑 강론의 형식으로 전해들었을 때랑은 완전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론도 이렇게 하면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가 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강의를 한 사람으로서 말씀을 드린다면 강론도 학교 선생에 비유해 표현한다면 티칭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교수법이 좋지 못하면 그 강의는 훌륭한 강의가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미국 주교님께서 강론하신 원고를 그대로 누군가 어떤 분이 그대로 한다고 해도 그만큼의 감동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선생으로 비유하면 티칭 기술입니다. 훌륭한 강론은 콘텐츠도 좋아야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 또한 훌륭해야 합니다. 일단 한국 신부님들의 경우 부실한 강론을 하시는 분들은 일단 콘텐츠에서도 빈약할 뿐만 아니라 글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펼쳐서 최종 단일한 주제로 내용을 결집해나가는 기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설령 어떤 강론에서 좋은 강론을 들었다고 해도 그건 주로 한 부분 한 부분 그 내용이 분리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전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서 제시하고자 하고 또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물론 선천적으로 글을 쓰는 달란트가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런 달란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얼마든지 훌륭한 강론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부님들 같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 강론을 위해 글을 쓰십니까? 한 편의 강론을 작성하시면서 글쓰기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 대원칙 몇 가지를 인터넷에서라도 발췌를 해서 그 원칙에 따라 퇴고를 거듭하고 거듭하면 훌륭한 글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그다음 티칭 교수법을 비유로 든 설명은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사제는 아니지만 팁 정도는 있습니다. 그건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학원 선생님을 뽑을 때 같은 시강 자료를 주고 해도 그냥 말그대로 있는 그대로 원고를 다 주고 하는데도 대학교로 말하면 오픈북으로 시험을 치는데도 시강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일단 영어발음은 귀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면 통과지만 한글 발음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냥 여차없이 탈락입니다.
오늘은 생각지도 않게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짓겠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부산교구 신부님이 댓글에 그 형제님이 미국에 있다고 하니 체계적으로 신학공부를 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댓글로 다셨습니다. 이 형제님이 다른 유튜브에 잠시 언급했더군요. 구독자 5000명 달성했다는 것에서 보니 형제님은 따로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게 아니고 그냥 신부님들 강론과 여러 성경과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형제님이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서 전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잘 하시긴 하더군요. 그래서 어설픈 신부보다 낫다는 댓글이 와 닿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부님들도 분발하셔야 합니다. 정말 사력을 다해 강론을 연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글 구성에 관계없이 정말 감동적인 강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멍청한 평신도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신학교만 가지 않았다뿐이지 뛰어난 평신도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아, 참고로 이 형제님 평화신문에 어떤 글을 기고하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