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은 8.15광복 제61주년이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광복 제61주년을 맞는 광복절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 가운데 정읍 고부 초등학교(안성 교장)에서도 8.15일 광복 제61주년 기념식과 개교 100주년을 맞는 ‘개교 100주년 기념
큰 잔치’가 열렸다.
고부 초등학교의 개교 100주년 기념식은 고부 초 총동문회 은희태 회장을 주축으로 한 기념식 준비 팀이
결성돼 기념식 200여일을 앞두고 기념식을 위한 협찬금 1억원을 초과 달성해 학교 기념탑 건립과 학교 발전을 위한 장학금 전달 등 개교이례 여느
광복절과 개교 기념식 행사 때보다 그 규모와 의미가 큰 행사를 치렀다.
오늘
날 애환의 소 도읍지로 전락했던 고부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부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은 특이하게도 그 날짜마저 8월 15일 이다.
1894년 1월 10일, 동학농민혁명을 불러왔던 고부군수 조병갑은 고대사 중방고사성(中方古沙城)이던 고부군을 쇠락 시켰던
장본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오늘 날 그 관아 터에 키웠던 후대 정룡기 군수의 교육 혼은 100년을 넘겨 추앙(推仰)되고 있다.
구한말, 시대적
격동기의 한 복판에 자리했던 고부군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부 초등학교의 역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듬해인 1906년 8월
15일, 정룡기 고부군수가 설립한 광화학교로부터 시작된다.
1906년 정룡기 군수는 기존 고부군 관아 순교청(巡校廳)의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했던 순교청의 기능을 살려 초기 순교청 에서의 첫 교육을 시작으로 보통교육(普通敎育)의 필요성을 인식한 정 군수가
교육장을 명륜당(明倫堂)으로 이전하며 처음으로 사립 보통학교(普通學敎)가 고부관청에 설립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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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개교 당시 고부초등학교의 전신이던 광화학교
사진 |
구한말의 척박했던 교육환경은 나라의 고위관리나 일부 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마을 공동체 형태의 훈장(訓長) 1인 체제의 한학위주 교육이 성행하던 시기로 무학자가 많았다.
또한 보통학교 교육조차 일부
특정인들의 추천을 통해서 면접을 거쳐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정룡기 군수가 관아 순교청을 이용해 보통학교 교육을
실시했던 것은 분명 시대를 앞서 실현한 교육개혁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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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무 총리대신 이던 이완용의 교지 빨간색
원안 |
정군수가 1906년 8월 15일 설립했던 첫 사립(私立)
광화학교(匡和學校)는 2년 후인 1908년 5월,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매국노인 내무대신 이완용의 신교육 제3기 확장 방침의
교지에타라 공립(公立) 고부보통학교(古阜普通學校)로 확장되며 오늘 날 고부 초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이로 인해 고부군 관아 터는
학교의 확장과 함께 좁아져 갔고, 1911년 고부보통학교 13명의 1회 졸업생이 배출된 이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고부군의
관청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부보통학교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혼란과 격동기속에서 화려했던 고부군의 관청은
사라졌지만 이곳을 관장하던 정룡기 군수는 학교에 남았고 초대 학교장으로 이것을 기억하는 학교와 학생들과 묵묵히 이러한 격동기를 지켜 보아야
했다.
이와 관련해
공립 고부보통학교 1940년, 제30회 졸업생인 은성림(81, 상동거주)씨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옛 관아 터 모습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았고
객사를 비롯한 일부 건축물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학교 건물과 달리 방치되어서 흉물스럽게만 보였다.”라고 회고했다.
고부초등학교 안성
교장은 “조병갑 군수이후 안길수 군수를 비롯해 정룡기 군수 등이 고부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일제 강점기의 격동 속에서 그분들의 노력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들에 의해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요. 어쩌면 그렇게 시작된 학교가 살아남았던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 입니다.”라고 전했다.
고부 보통학교 초기의 학군지역은 그때까지만 해도 과거 고부군의 관활 지역에 있던 인근의 영원과 덕천, 이평, 소성,
정토(정우면), 백산, 주산, 부령, 행안, 산내(현 부안) 일대의 학생들이 주류를 이뤘다.
고부초등학교에 소장돼 있는 학교
연혁지에 따르면 정룡기 군수가 초기 학교장이던 강화학교의 학생들과 공립 고부보통학교 학생들이 합해 1911년 졸업했던 최초 졸업생은 11명이고,
학급 수는 3개 반에 학생 153명, 교직원 4명으로 1명이 서무와 교직을 겸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공립 고부보통학교는
해방을 전후로 한때 학생 수가 1,780명에 이르는 큰 학교로 성장되었다가 1949년 인근 관청의 운룡국민학교로 학생수가 분리되고 1950년
6.25 이후 학생 수가 390여명에 이르는 감소 추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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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고부초등학교 30회 졸업생
은성림씨 |
그러던 학생수는 1971년에는 자체학생수만 1,297명에 이르는
거대학교로 다시 성장 했다가 1976년 이후부터 다시 감소추세로 돌아서 1988년 약 400여명의 학생 수가 유지되다가 최근 2006년 통계로
학생 수 102명 선이 유지되는 소학교로 변해있다.
그러나 오늘 날 고부초등학교를 실존케 했던 초대 학교장이자 고부군의 마지막
군수이던 정룡기 선생이 설립했던 고부초등학교는 지난해 2005년 2월, 96회까지 8,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낸 저력의 학교다.
오늘 날 졸업생 모두가 정룡기 군수와 역사와 애환의 고부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 고부 초등학교와 고부의 미래는 밝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