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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0조 벽계정심(碧溪淨心)
다음은 구곡각운의 법을 이었다는 벽계정심 碧溪淨心. 그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에 쓰여진 『해동불조원류』『동사열전』 그리고 휴정이 지은 「벽송당행적」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다음과 같이 찾아질 뿐이다.
이름은 淨心이고 호는 碧溪이다. 金山 崔氏로 멀리 龜谷에게서 법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에 들어가 임제종하의 摠統화상에 법을 인가받고 와서 공양왕 때 사퇴후 불교의 사태로 말미암아 머리를 기르고 처자를 거느리고 黃岳山에 들어가 古紫洞 物罕里에 은거하였다. 깨달은 후 장차 手足에게 계시하여 ?嚥“?禪을, 敎를 淨蓮에게 전하였다. (『해동불조원류』 구곡운법사 제 삼세 벽계정심)
위의 글에 의하면 淨心은 금산 최씨이며, 호는 碧溪라고 했다. 언제 누구에게 출가했는지 알 수 없으나 구곡(각운)에게 법을 받고 공양왕 이전의 시기에 명나라에 가서 雪堂摠統화상에게 사사받고 고려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출가사는 알 수 없으나 구곡(각운)에게 법을 사사받았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중국에 갔다는 사실도 현재로서는 어떠한 문헌에도 입증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淨心이 正心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데 그(正心)는 1440년 간행된 『함허당화상어록』의 간기에 刻手로 실려 있으며 1433년에 간행된 『古今韻會擧要』{에도 각수로 실려 있고 승계는 선사이다. 이에 대하여 아직도 의문은 많지만 세종시의 각수로 활동한 정심이 지엄의 스승에 가깝다고 하였고 정심은 기화(1376~1433)의 제자라고 명시하지 않았으나 기화의 어록을 간행한 각수이고 당시 선사라면 그의 문도일 가능성이 크고 사제간의 생존연대와 활동연대와도 일치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실록에 의하면 정심이란 승려에 대한 기록을 유일하게 찾을 수 있다.
이계통이 답하였다. " 학열이 지난날 강릉의 제방을 점령하여 고을 백성의 소송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남의 제방을 빼앗은 것입니다. 信眉 學悅 正心 雪俊의 무리가 巨萬의 재물을 축적하였고 여러 큰 절의 豪僧이 대개 이와 같으니 이는 부유함이 재상과 같은 것입니다. " (『성종실록』권35 성종 4년 10월 2일 경신조)
성종 4년(1474) 정심이 세조대의 삼화상이라 존경받았던 신미와 그의 제자 학열 등과 더불어 강릉 오대산 상원사 등에 머물면서 많은 재물을 모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은 내용이다. 이는 당시 억불기에 불교계 고승들이 불교홍포를 위해 사찰경제를 나름대로 확장 발전시키는 사례라 생각되어 주목되는 것인데, 여기에 正心이 찾아진다. 여기의 정심은 기화의 제자로 추정되는 신미와 함께 어울리는 것으로 보아 역시 기화의 제자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곡각운은 가지산문인 태고보우의 문도로 알려져 있고 기화는 사굴산문계인 나옹혜근의 법손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필자 나름대로 이해한다면 앞서 언급한 바대로 고려말 이래 산문의식에 대한 변화가 있었고 보우의 문도가 사굴산문계인 송광사의 예를 들어 불교계를 정비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처럼 사굴산문의 영향이 그만 큼 컷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는 공양왕 때 사퇴후 불교의 사태로 말미암아 머리를 기르고 처자를 거느리고 황악산에 들어가 자하동 물한리에 은거하였고 하는데 선학이 지적한 바와 같이 공양왕 때 승려가 환속할 만큼 불교계에 대한 탄압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다만 『동사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스님의 법명은 覺雲이고 법호는 龜谷이고 혹은 小隱이라고도 한다. 尹紹宗이 임금께 간하여 粲英스님을 내치도록 한 사건을 계기로 줄곧 은둔생활을 하였다.(『동사열전』 권2 구곡왕사전)
찬영은 혼수와 더불어 태고보우의 대표적인 제자 木菴粲英이 1390년(공양왕 2) 국사로 책봉되려고 하자 대사헌 成石璘과 左常侍 尹紹宗 등이 반대하여 개경 숭인문에 도착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가야만 했고 그러한 일이 있고 얼마 있다가 입적하였다. 이미 1382년 12월 24일 그의 스승 태고보우가 입적하였고 그의 문도인 각운도 이색이나 특히 정추(1333~ 1382)가 각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남기는 것으로 보아 1382년 무렵에 입적한 듯하다. 이에 그의 제자라고 하는 혼수가 1383년 국사에 올랐으나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입적하였다. 혼수가 입적하자 유서를 받들고 임금께 보고하고 혼수의 도제인 만우가 지은 그의 행장을 가지고 왕께 보고하였던 삼여소안도 그의 스승이 입적한 직후 지방으로 유력하였던 사실이 다음의 글에서 찾아진다.
홍무 임신년 겨울에 幻老가 떠나자 그 이듬해 봄에 그의 積德한 사적을 기록하여 주문하니 나에게 명하여 그 비문을 짓도록 하여 두 차례나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삼여가 돌아 가면서 하직하기를 " 환암에게서 衣하며 오랫동안 인자한 敎誨를 들었습니다. 마음을 관하는 공부에는 힘을 얻었지만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하고 싶은 뜻이 매양 마음에 격동되었는데 다만 스승께서 살아계셔서 감히 곁을 떠날 수 없더니 이제는 스승께서 이미 가셨고 뒷일도 끝이 났습니다.
천지 사이를 구름이 떠돌 듯 두루 기이한 경치를 편력하되 한 없이 가보고 구경하기를 素志대로 함으로써 반드시 柏樹에 서쪽에 온 뜻이 있음을 알아내고 조금이나마 참으로 사람을 건네주는 뗏목을 타 본 뒤에야 알겠습니다. . ( 「送三與師遊方 紹安」 『양촌집』 권16 서)
위의 삼여는 혼수를 가까이 모셨던 대표적인 제자 가운데 한 인물이었는데 이미 앞서 언급한 바대로 그가 벽계정심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조계종의 安上人이 나를 황려강 위로 하고 와서 그의 平心堂에 글을 써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였다. " 이것은 나의 승승 幻菴의 명령입니다. 선생은 그 뜻을 부연해 주십시오. 상인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동료들 중에서 뛰어나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설자가 없었다. 그런 때문에 선불하는 것을 당하여 登階의 이름을 얻었다. (「평심당기」 『목은문고』 권6)
조계종의 登 安上人은 호를 三與라고 짓고서 나에게 銘을 청한다.(「三與銘 幷序」 『목은문고』 권12 )
조계종의 사문 安 三與는 智解가 출중한 데 幻菴에게 배워서 입실한 사람이다. 禪科를 보아 벼슬에 오르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계율을 지키기를 더욱 조심스럽게 하므로 내가 일찍부터 사귀며 중하게 여겼다. 홍무 임신년 겨울에 幻老가 떠나자 그 이듬해 봄에 그의 積德한 사적을 기록하여 주문하니 나에게 명하여 그 비문을 짓도록 하여 두 차례나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 ( 「送三與師遊方 紹安」 『양촌집』 권16 서)
위의 글을 보게 되면 소안은 호를 삼여, 당호를 平心堂이라 했고 등계라고도 불리었다. 여기서 삼여가 정심과 동일인물이라면 역시 보우의 문도들이 정치사회 및 불교계에서의 입지가 약해지자 정심도 하산하여 황악산 일대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정심이 실제 정말 환속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동시대의 고승인 법장과 도연과 비교가 된다. 고려말에 머리카락이 주치나 되고 표주박 한 개를 가지고 풀피리를 불면서 만행을 하였던 志崇 高峰法藏(1351~ 1428, 송광사 제 16국사로 비정)이나 만행을 일삼았던 長遠心이나 慈悲와 같은 승려도 환속하지 않았다. 다만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키자 관직을 버리고 출가 했던 원진국사 元 국사 道衍(? ~ 1414) 과 같은 사례는 있으나 그의 경우는 충효의 정서에 따랐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하여 그가 황악산 일대에 머물렀던 다음의 기록은 매우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比密來在汝邊 何人繕性佩韋絃 山中公案無他地 天下衲僧同一天 潑潑橫機臨濟喝 寥寥面酸趙州禪 打開八字和盤出 孤露波波枉百年 衣冠愧我趨塵客 甁錫多公不世情 寺號雙林陰佛境 縣名黃澗澤民生 茶因遠市橋邊買 詩爲交深生坐上成 聞道洞門溪一派 淙淙流下碧爲泓 (金守溫「次登階詩卷韻」『 廂集』 권4 )
위의 글에 의하면 그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황악산 황간현 雙林寺에서 수행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선풍의 다음과 같이 엿 볼 수 있다. 공안을 가지고 임제할을 쓰고 조주선풍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구곡각운이 지녔던 선풍과 다름이 없다.
그밖에 벽계의 행적으로 찾아지는 것은 그가 만덕사의 주지로 있었고 『금강경』을 교정하였다는 것이다.
前 俗理寺住持 臣 演熙 前 萬德寺住持 臣 正心 等 校正
(『금강경』 발문 김수온 奉敎謹跋 )
그가 언제부터 만덕사 주지를 하였는지 알수 없으나 만덕사는 백련결사의 도량이었던 백련사이다. 그런후 그는 연희와 『금강경』교정사업에 참여했는데 간경불사에 참여했던 신미나 그의 제자인 학조가 황악산 직지사 주지로 있었으므로 정심과 학조의 교류사실을 짐작케 하며 연희가 주지로 있었던 법주사에는 수미와 신미와 그의 제자 학열 등이 머물렀던 사실로 보아 그들간에는 서로 교류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심은 선을 벽송지엄에게, 교를 정련법준에게 전하였고 묘각왕사 수미도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정심은 교와 선을 두루 섭렵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선교를 일치시키고자 했던 지눌의 선풍의 영향이라 하겠다. 그들 제자들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정심이 교를 전해 주었다는 정연법준은 어떠한 인물인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정심의 제자인 벽송지엄이 그에게 준 게송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법준선자에게 게송을 주었다. '그대를 만나 莫 劍을 주노니/ 그 칼에 푸른이끼가 끼게 하지 말라./ 五蘊山 앞에서 만일 도적을 보거든/ 한번 둘러 낱낱이 베어 가져오라. (「벽송당행적」『청허당집』 권3 三老行蹟, ;「示法俊禪伯」『?烟?老松』)
교를 전수한 법준은 禪伯이라 부르고 있고 게송도 역시 선가의 것이다. 따라서 선에 교를 포용한 선풍을 지녔다고 하겠으며 그의 제자 白霞禪雲과 법손인 蓮霞玉晶이 있었다고 하나 그들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정심은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하면서도, 특히 선사와 교학사를 달리 사사받았으면서도 교를 경시하지 않고 선을 주종으로 하는 선풍은 선교를 융합하고자 하였던 지눌의 선풍과 맥락이 통하며, 이러한 선풍은 그의 문도에게 전수되는 것이다.
스님의 법명은 정심, 법호는 벽계, 금산 사람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구곡에게 법을 이었다.
이조 태종 불교사태 당시 머리를 기르고 축첩하였다.
황악산에 들어가 고자동 물한리에 살았다.
선은 벽계정엄(벽송지엄)에게 전하고 교는 정연법준에게 전했다.
선과 교 두 갈래가 끊어지지 않고 번성하여 뻗어 나가니 무상함이여 시운이라.
정열수가 이르되, "내가 하산한 후에 벽계정심을 위하여 북산으로 이사하지 않으리다." 하였으며,
남명 조식선생은 이사하여 추념하였다.
문인으로는 벽송지엄, 묘각수미, 정연법준 등이 있으며 행장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당할 때 벽계정심 선사는 머리를 기르고 속인 같이 지내기 위해서 이름도 자칭 '거덜첨지'라고 부르며 예쁘게 생긴 과부를 얻어 사는데,부인 거벙네는 1년을 살아도 과부요, 2년 3년을 살아도 이름만 영감이지 언제나 밤이 괴로운 남남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스님, 저는 갈랍니다." "왜?"
"첨지님은 이름만 영감이지 저는 항상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니, 이래서는 더 이상 못 살겠소."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나 3년 동안 밥해 주느라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 동안 수고한 수고비로 이것이나 받으시오." 하면서 표주박을 하나 내어준다.
부인 거벙네가 그것을 받아 가지고 나오다가 동구 밖 샘물가에 앉아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고 팔자 한탄만 하다가 표주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만 놓아둔 채 3년 동안 영감을 얻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살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해 보니 어차피 과부 신세 면할 길 없으니, 다시 첨지를 찾아가면 이름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더니,
"내 다시 올 줄 알았소."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그러면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물으니 부인거벙네는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 가서 보시오.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요." "어째서요?"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 번이나 하였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소.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니 부인도 내것이니 아무도 손대지 못한거요"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밑져봐야 본전이니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면서 가서 보았더니, 과연 3년 전에 자기가 버린 바가지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인 거벙네는 인과법칙의 이치는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확연히 깨닫고 다시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첨지(선사)를 죽을 때까지 잘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마음이라야 곧 마음을 능히 알 것이요
법이라야 곧 가히 법을 아는것이니
이제 법과 마음을 부촉하는 바는
마음도 아니요 또한 법도 아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