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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한문유머
難 匿 赤 婢
難(어려울 난) 匿(숨길 닉) 赤(붉을 적) 婢(계집종 비)
감추기 어려운 물건
백사 이항복이 도원수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첫 날 밤에 보았던 여종이 마음에 들어 장인에게 청하기를 '제가 조용한 곳에서 독서에만 열중하고자 합니다.'하였다.
권율이 허락하므로 백사는 종요한 곳에서 글 읽는다는 핑계 삼아 매일같이 그 여종과 놀았다.
하루는 여종과 함께 자고 있는데 장인이 미리 알고서 손님을 데리고 들어 왔다. 백사가 어떨 결에 그 여종을 이불로 둘둘 말아 한 구석에 밀어 놓았다.
갑자기 사람이 여럿이 들어왔으므로 권율이 "방이 비좁으니 이불은 들어 시렁위에 올려놓는 게 좋겠소이다."하면서 사람을 시켜 이불을 들어 올리니 발가벗은 여종이 이불 속에서 떨어진다.
백사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과연 발가벗은 여종은 감추기 어려운 물건이군요.'라고 말했다.
모두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대경실색 - 크게 놀라서 얼굴빛이 변함.
김삿갓이 방랑 하다가 서당에서 지은시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어느 서당을 욕하다 / 김삿갓
書堂乃早知 서당이 여기 있는 줄
서당내조지 내 일찍이 알고 있었네.
房中皆尊物 방안에 있는 이
방중개존물 모두 귀한 인물 일세
學生諸未十 학생은 합해서
학생제미십 열 명도 안 되는데
先生來不謁 선생은 끝내
선생래불알 나와 보지를 않는구나.
▶서당은 <내조지>요. / 방중은 <개좆물>이라.
학생은 <제미씹>이요. / 선생은 <내불알>이로다.
김삿갓이 원한의 땅인 조부의 수난의 임지 (선천) 에 갔을 때에는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온종일
성문밖을 서성대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가까운 글방을 찾았었다.
그러나 젊은 훈장의 태도가 너무 쌀쌀 해서 욕시 한수를 건네주었다.
시의 뜻은 욕이 아니지만 소리내어 읽던 훈장은 목침을 잘못 던져
학동의 머리를 깨고 말았다.
그도 사내라서 음담을 알았던가.
하마터면 동거까지 할 뻔한 가련 이라는 늙은 기생의 딸과 불 끄고 나눈 이야기가 전해온다.
삿갓 : 毛深內闊必過人 모심내활 하니 필과인 이라 ? (숲이 깊고 속이 넓으니 분명 누가 다녀간게로구나 ?)
가련 : 後園黃栗不蜂裂 후원황율 은 불봉렬 이요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유 는 불우장 이라오...
(뒷산 노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개천가 버들가지는 비 안 맞아도 잘 자라 늘어진다오...)
秋美哀歌靜晨竝(추미애가정신병)
雅霧來到迷親撚(아무래도미친년)
凱發小發皆雙撚(개발소발개쌍년)
愛悲哀美竹一撚(애비애미죽일년)
- 시 해석 -
가을날 곱고 애잔한 노래가 황혼에 고요히 퍼지니
우아한 안개가 홀현이 드리운다.
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이나 모두가 자연이다.
사랑은 슬프며, 애잔함은 아름다우니 하나로 연연하다.
수많은 풍자시들을 지으면서 풍류가객으로 일생을 마감한 영원한 가객 김삿갓이 담양의 죽물시장에서 다 헤어진 삿갓을 버리고 새갓을 사면서 한수 읊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시입니다. 김삿갓은 이 시를 짓고 난 후 동복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시제를 대나무 죽(竹)자를 끝말로 하는 죽 타령이랍니다.
此竹彼竹 化去竹(차죽피죽 화거죽) :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 浪打竹(풍타지죽 랑타죽) :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 生此竹(반반갱갱 생차죽) :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나오는 대로
是是非非 付彼竹(시시비비 부피죽) : 옳고그름은 따지지 말고 그저 그런대로
賓客接待 家勢竹(빈객접대 가세죽) : 손님접대는 집안형편대로
市井賣買 歲月竹(시정매매 세월죽) : 물건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萬事不如 吾心竹(만사불여 오심죽) : 만사는 다 내맘대로만 못하니
然然然世 過然竹(연년년세 과년죽) :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가세
김삿갓의 漢詩 두 수를 더 소개합니다. 나유심조
(1)
시인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나이 서른을 넘어
한양을 방문하기위해 원주를 떠나 安昌을 지나고
다시 지평(砥平) 땅에 들어섰다.
도성이 가까워서 인지 인심이 사나왔다.
그래서 고향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詩를 남긴다.
김삿갓 시 중에서 많이 알려진 유명한 시 중의 하나이다.
二十樹下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四十村中五十食(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인간기유칠십사)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스무나무아래의 서른 나그네에게,
마흔 집의 동네에선 오십 밥을 주는구나.
인간이 어찌 칠십일이 있으리오.
집에 돌아가 삼십 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
글자대로 해석해 보아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숫자를 잘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스무나무 아래에 있는 낯 설은 손님에게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쉬어서 못 먹게 된 밥)을 주는구나.
인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집에 돌아가 설은 밥(덜 익은 밥)을 먹는 것만 못하구나.
※스무나무 : 떡갈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喬木.
(2)
서울, 개성을 지나 시인은 황해도의 平山 고을로 들어섰다.
고을 어느 부촌 마을로 들어서는데, 잔치가 있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노랫소리를 찾아가니 꽤나 큰 부잣집의
주인양반 회갑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단히 잔치에 뛰어들어 흥을 깨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 祝詩 한 首를 지어드리지요.”
말을 마친 김삿갓 휴대한 지필묵을 꺼내
일필휘지 하는데, 그 첫 구절에 曰
彼坐老人不似人(피좌노인불사인이니)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아니하니.
환갑노인을 사람 같지 않다고 하였으니, 둘러서서 보고 있던
일곱 아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곧 멱살이라도 움켜잡을 기세이다.
그러나 시인은 개의치 않고 다음 句節을 써내려간다.
疑是天上降眞仙(의시천상강진선이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신선 같구나.
일곱 아들의 입은 함박만 하게 벌어지고,
근심에 싸인 채 바라보던 마을 훈장은
“그러면 그렇지! 과연 大詩客이야”
하며 맞장구를 친다.
시인은 들은 체도 않고 第三句를 써 내려가는데,
膝下七子皆爲盜(슬하칠자개위도하니)
슬하에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질을 하였으니,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인가. 일곱 아들을 모두
도둑놈으로 몰고 있지 않은가?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 진다. 그 때 훈장 曰
“보시오들, 다음 구절이나 마저 봅시다.”
시인은 結句를 아무렇지 않은 듯 단숨에 써 내린다.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이라)
하늘의 천도복숭아를 훔쳐 회갑잔치에 바치는구나.
일곱 아들은 물론 환갑노인까지 입이 귀까지 찢어지도록
기뻐한다. 회갑노인을 신선이라 하고 일곱 아들을
다시없는 효자로 묘사했으니 말이다.
노인은 버선발로 내려와 우리 시인을 上座로 모셔
극진한 대접을 한다.
김삿갓의 유명한 일화
언제나 그렇듯 갓 쓴 선비네 들은 정자에 앉아 옆에 계집을 꿰어 차고는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삿갓을 쓴 행인이 그들의 틈에 끼더니 시를 쓸테니 술대접을 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양반네들이 무시하고 그 행인을 쫓으려고 했지만 한 양반이 호감을 느끼고는
선비들을 말려서 그 삿갓은 행인에게 시를 지어보게 했어요.
그 행인은 정자에 앉자마자 과제를 내라 했습니다.
너무 당당한 모습에 당황한 양반들.
양반들은 꾀를 내어 자신들의 이름을 이용해 시를 지으라 했지요.
그 양반들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원 생원, 문 첨지, 서 진사, 조 석사
그 말을 듣자 말자 대뜸 종이위에 휘갈겨 쓴 그 삿갓 나그네는 종이를 내어 놓고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길을 떠났습니다.
그 선비들이 삿갓 쓴 나그네가 지은 시가 궁금해서 종이를 봤는데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日出猿生員 (일출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들에 나오고
黃昏蚊添至 (황혼문첨지) 날 저무니 모기들 처마에 모여드네.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고양이 지나자 쥐는 모조리 죽고,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밤들자 벼룩은 자리에 나와 쏘네.
원생원을 원숭이로. 문첨지를 모기로. 서진사를 쥐로. 조석사는 벼룩으로...
김병연. 아니, 희대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그렇게 틀에 박힌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며 팔도강산을 떠돌았습니다.
*. 돈 많고 권력이 센 월씨란 사람이
동네 가난한 사찰의 스님에게 자기 집 족보를 만들 종이를 상납할 것을 요구하자
지혜로운 스님이 아래와 같은 시를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月氏之 譜紙는 월씨지 보지는
天下之 大譜紙인데 천하지 대보지인데
以一僧之 造紙로 이일승지 조지로
何堪當 하리오. 하감당하리오
天下之 大譜紙인데 천하지 대보지인데...
월씨 당신네 족보는
천하에서 인정하는 가문족보인데
어찌 하챦은 중이 만든 종이로 감당하겠습니까?
천하에 유명한 족보를...
아마 이런의미인듯..
방랑시인 김삿갓 시선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가탁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 희작시들은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리고 있고, 시의 소재 또한 당시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非詩的 대상을 詩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표면 진술의 糖衣를 입혀,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월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전통 한시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들 희작의 파격시들은 시랄 것도 없는 희학질에 불과하다. 도대체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은 못되는 것이다.
희작시는 보통 전승의 과정에서 복수성을 띠면서 부연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삿갓이 어느 늙은이의 부고장에 '柳柳花花'라고 넉 자를 써 주었는데, 그 뜻은 훈으로 새겨 '버들버들(柳柳) 떨다가 꼿꼿(花花)이 죽었다'의 의미가 된다. 그러면 이것이 그 다음에 가면 '柳柳井井花花'로 부연된다. 즉 '버들버들 떨다가 우물우물 하더니 꼿꼿이 죽었다'는 것이다. 〈흥부전〉에서 놀부의 심술 가지 수가 이본에 따라 한없이 늘어나는 양태와 방불하다. 이런 말장난이 좀더 세련된 시의 모양을 갖추면 새로운 한편의 희작시가 탄생된다.
세상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남들은 모두 다 활활 가는데,
내 마음 벌벌 떨기만 하며
나 홀로 살살 오가는구나.
말들은 비록 풀풀 뱉지만
세상일은 데데하기 그지없도다.
마음을 꼿꼿이 지키면
앞길이 솔솔 열리리라.
世事熊熊思
人皆弓弓去
我心蜂蜂戰
我獨矢矢來
言雖草草出
世事竹竹爲
心則花花守
前路松松開
참으로 절묘한 말장난이다. '熊熊'이 '곰곰'이 되고, '弓弓'은 '활활'로 읽는다. '蜂蜂'이 '벌벌'로, '矢矢'가 '살살'이 된다. 대개 장난도 이쯤 되려면 이전부터 쌓여진 노하우가 있지 않고서는 안된다. 김삿갓의 부고장이 극단에까지 이른 양상이다.
김삿갓은 없다. 언필칭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들은 김삿갓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두 주워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거의 실상에 가깝다. TV 광고에서 김삿갓이 죽장을 짚고 근엄하게 외치는 "백년도 못되는 인생을 살면서, 천년의 근심을 지닌 채 살아가는 중생들아. 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도 사실은 그의 시가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古詩十九首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응수에 의해 김삿갓의 시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그가 세상을 뜬지 근 70년 뒤인 1939년의 일이다. 이응수는 이곳 저곳에서 구전되던 김삿갓의 시 183편을 모아 상재하였다. 대부분이 傳聞에 의한 기록이고 보면, 그 眞僞를 헤아려 따진다는 것은 애초에 무망한 일이다. 최불암 시리즈가 그렇고 덩달이 시리즈가 그렇듯이 극단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의 시 또한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옳음 아니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옳지 않음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 그름이 아닐진대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로구나.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라고 한 김삿갓의 〈是是非非詩〉는 이미 김시습이 지은 것으로 홍만종의 《소화시평》에 소개되고 있다. 한마디로 是非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한 개판의 세상을 향한 야유다. 뿐만 아니라 김시습은 아예 한수 더 떠서,
다른 것 같다 하고 같은 것 다르다 하니, 같고 다름이 다르고
같은 것 다르다 하고 다른 것 같다 하니, 다르고 같음이 같구나.
同異異同同異異
異同同異異同同
라는 구절도 남기고 있다. 許厚도 그의 〈是非吟〉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참 옳은 것 시비하면 옳음도 그름 되니
물결 따라 억지로 시비할 것 아닐세.
시비를 문득 잊고 눈을 높이 두어야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할 수 있으리.
是非眞是是還非
不必隨波强是非
却忘是非高着眼
方能是是又非非
다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말장난들이다. 또 김삿갓이 문전축객 하는 주인을 풍자해서 지었다는 〈人到人家〉에,
사람이 사람 집에 왔는데 사람 대접 않으니
주인의 인사가 사람 되기 어렵도다.
人到人家不待人
主人人事難爲人
라 한 것은, 역시 奇遵의 시에,
사람 밖에서 사람 찾으니 사람이 어찌 다를 것이며
세간에서 세상을 찾으니 세상을 같이하기 어렵겠네.
人外覓人人豈異
世間求世難同世
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李書九가 만년에 은퇴하여 향리에 물러나 있을 때 일이다. 그가 허름한 베잠방이 차림으로 냇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경망한 선비 하나가 시내를 건너려다, "여보. 늙은이! 나를 좀 업고 건네게." 했겠다. "그러시지요." 하고는 젊은 것을 업고 시내를 건너는데, 이 친구 늙은이 등에 업혀 까닥까닥 냇물을 건너다 보니 아뿔싸! 늙은이가 정승이나 할 수 있는 玉貫子가 하고 있지 않은가. 시골 무지랭이 늙은인줄 알았다가 큰 경을 치르게 생겼다. 어쩔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창졸간에 시내를 건넜는데, 경망한 선비는 좀전의 서슬은 간데 없이 난짝 꿇어앉아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죽을 죄를 빌었다. 그러자 이 의뭉스런 늙은이는 시를 한 수 읊어주고는 다시 건너가 모른 척 낚시질이다. 그 시에 일렀으되,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이라 하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굳이 해석을 해 보면.
내가 세상의 '시옷'을 보니
是非가 '미음'에 있더라.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라.
吾看世시옷
是非在미음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가 된다. 점점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옷은 '人'이요, 미음은 '口'의 모양이다. 리을은 '己'요, 디귿에 점을 찍으면 망할 '亡'자가 된다. 이렇게 풀고서 다시 시를 읽으면,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是非가 '입'에 있더라.
집에 돌아가 '몸'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
吾看世人
是非在口
歸家修己
不然則亡
가 된다. 경망한 선비에게는 活訓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 김삿갓의 시로 둔갑이 되면서는 처음 1 2구가 슬쩍 바뀌고, 전후 이야기도 달리 윤색되었다.
허리 아래엔 '기역'을 차고
소 코에는 '이응'을 뚫었네.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아라
그렇지 않으면 '디귿'에 점찍으리.
腰下佩기역
牛鼻穿이응
歸家修리을
不然点디귿
1구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무색하다. 소의 코뚜레를 잡고 허리에 낫을 차고 지나가는 떠꺼머리 총각을 묘사한 것이 1 2구라면, 3 4구는 박절하게 나그네를 타박하는 주인에게 쏘아붙인 독설이다. 자! 어느 것이 진짜 김삿갓이 지은 것인가?
현재 김삿갓의 시로 수록된 작품 속에서 역대 야담집이나 시화에 다른 사람의 시로 이미 소개된 것은 위의 예들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도 오늘날 김삿갓의 시로 믿고 있는 것이 어떤 경로로 정착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월 소재 김삿갓 묘를 발견하여 보고한 바 있는 朴泳國 선생이 1987년 김삿갓의 三回甲을 기념하여 전국에 김삿갓 遺詩를 공모했던 바, 무려 690수의 시가 제보되었는데 앞서 본 "세상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는 시도 이때 김삿갓의 시라고 제보된 것 중 하나이다. 이렇듯 김삿갓의 시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고 보면, 종내는 조선조에 노래된 모든 희작시가 김삿갓의 이름 아래 야권통합(?)을 이루고야 말 모양이다.
슬픈 웃음, 解體의 詩學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 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 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김준오,《도시시와 해체시》(문학과비평사, 1992) p.17). "해체주의는 자명한 이치와 질서와 도덕을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자아도 더 이상 일관되게 세계와 교섭하고 대결하는 심리적 통일체나 종합적 기능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계를,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p.152) 80년대의 해체시를 두고 한 이 언술들은 필자가 읽기에 마치 김삿갓의 시를 두고 한 말처럼 여겨진다. (이하 본문 중의 따옴표는 이 책의 구절들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부치는 저대로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온갖 일 내 마음대로 함만 못하니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내세.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竹〉이란 작품이다. 脫絶凡俗한 자태로 세속을 초월한 고고한 선비의 절개를 표상하던 대나무는 이 시에서는 급전직하 '될대로 되라'는 '대'로 전락하고 있다. 원문을 중국사람에게 읽힌다면 무슨 암호문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른 바 이두의 원리를 이용한 '낯설게 만들기'가 시도되고 있는 해체의 현장이다. 이 시만 해도 조선 후기 시화집인 《夢遊野談》에는 세사에 달관한 어느 정승의 일화 속에 포함되어 실려 있다. 글자에도 다소간 출입이 있다.
예전 鄭澈이 관동부사로 있을 때 일이다. 강릉 사람 全義民이 시를 잘 지었는데, 송강이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平昌에 갔을 때 藥水라는 지명이 있길래 한 구절을 지었는데 그 바깥 짝을 얻지 못했다" 하고 읊조리기를,
땅 이름 藥水인데 병 고치기 어렵고 地名藥水難醫疾
라 하였다. 그러자 全이 말하기를, "그 대구가 있지만 감히 여쭙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송강이 억지로 말하기 하니, 그가 말하였다.
역 이름 餘粮인데 주림 구하지 못하네. 驛號餘粮未救飢
餘粮은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역 이름이었다. 송강이 낯빛을 고치고 그를 대하였다. 대개 시 속에 풍자의 뜻이 담겼던 것이다. 《詩評補遺》에 보인다. 두 구절이 모두 지명을 가지고 훈으로 풀어 유희한 것이지만, 담긴 뜻은 진지하다. 그러나 김삿갓이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지었다는 〈無題〉를 보면,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한 고장 아니요
허가 허가 해봐도 허가하지 않는구나.
명천 명천 하건만 사람은 현명찮코
어전 어전 하여도 식탁엔 고기 없네.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魚
라 하였다. 같이 땅 이름을 가지고 장난쳤지만 진지함을 찾기 어렵고 가벼운 말장난에 뿌리를 대고 있다. 꼴에 운자는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이 아니 얄미우랴. 교묘한 말장난 외에는 따로 건질 것이 없다.
고을 이름 開城인데 어찌 문을 닫으며
산 이름 松嶽인데 어이 땔감 없느뇨.
황혼의 逐客은 사람 인사 아닐래라
예의 동방 이 나라에 그대 홀로 오랑캐라.
邑號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自獨秦
이것은 개성에서 땔감이 없어 냉골에서 재울 수 없다는 핑게로 逐客을 당하고서 그집 대문에 써붙이고 갔다는 시다.
작년 9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금년 9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누나.
해마다 9월이면 구월산을 지나노니
구월산의 빛깔은 노상 9월이로세.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김삿갓의 〈九月山〉이다. 무려 '九月'이란 어휘가 여덟번 되풀이 된다. 시인은 이렇게 하고서도 말이 되지 않느냐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유희적 태도가 행간에 넘난다. 이런 말장난뿐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벼룩이나 이, 아니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그의 시에서는 서슴없이 등장한다. 먼저 이(柕)를 읊은 시를 보자.
주리면 피 빨고 배부르면 떨어지니
온갖 벌레 중에 가장 하등이라.
먼 길손 품속에서 낮 햇볕을 근심하고
주린 이 배 위에서 새벽 우레를 듣는다.
모습 비록 보리알 같으나 누룩 되긴 어렵고
글자 風字 못되니 매화꽃도 못 떨구리.
묻노니 능히 仙骨도 범하려 는가
麻姑 할미 머리 긁으며 天台山에 앉았는데.
飢而橪血飽而熿
三百昆蟲最下才
遠客懷中愁午日
窮人腹上聽晨雷
形雖似麥難爲麴
字不成風未落梅
問爾能侵仙骨否
麻姑搔首坐天台
역시 운자는 지켰다. 이(柕)를 시적 대상으로 노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파격인데, 그 발상 또한 흥미롭다. 먼 길손의 품속에서 낮 햇볕을 근심한다는 3구는 무슨 말인가? 길 가던 나그네는 햇살이 따뜻하면 양지녁에 쭈그리고 앉아 저고리를 홀랑 뒤집어 놓고 이른바 이 사냥을 하게 마련이다. 4구의 우레 소리는 주린 창자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다름 아니다. 보리알처럼 생겼음에도 누룩은 될 수 없고, '柕'자는 '風'에서 한 획을 뺀 것이니 헛김이 샐 밖에. 仙骨은 자신을 이름일 테고, 마고할미는 '麻姑搔痒'이란 말이 있듯 새처럼 긴 손톱을 지녔다는 전설 속 선녀의 이름이다. 그러니 7 8구는 긴 손톱으로 어디든 가려운 곳을 긁어내는 마고할미가 천태성에 앉아 仙骨인 나를 지키고 있으니 감히 내게 붙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경고인 셈이다. 삿갓 쓰고 떠도는 인생, 사방 어디 걸리는 것 없어도, 이나 벼룩 따위의 괴로움만은 면할 수 없어 해학으로 풀어본 것이다. 그러니까 주제는 '이야! 제발 내게서 떨어져 다오.'이다.
이러한 "풍자정신 앞에 신성한 것, 숭고한 것, 초월적인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생각해 보았는가'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 반응이다. 지적 반응은 희극적 태도다.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다."(p.21)
서당을 진작부터 알고 있나니
방 가운덴 모두다 존귀한 물건뿐.
생도는 모두 열 살도 안되어
선생이 와도 인사할 줄 모른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김삿갓이 고약한 시골 훈장을 기롱한 시로 전한다. 겉보기에는 심상한 시골 서당의 풍경을 노래한 듯 하지만 각 구절 뒤의 세 글자를 독음으로 읽으면 흉칙한 욕설이 된다. 다섯글자로 시 흉내만 낸 것이지 정말 고약한 장난이다. 김삿갓의 세상을 향한 비뚤어진 욕설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동글동글 중 머리통 땀난 말 불알 같고
뾰족한 선비 대가리는 앉은 개좇 같구나.
목소리는 구리방울로 구리 솥을 치는듯
눈깔은 검은 후추 흰 죽에 떨어진듯.
僧首團團汗馬崇
儒頭尖尖坐狗腎
聲令銅鈴零銅鼎
目若黑椒落白粥
아마도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듯 쨍알쨍알하는 목소리의 중과, 어디 박혔는지 한참 찾아야 할 지경으로 눈이 작은 선비가 합세해서 김삿갓을 구박했던 모양이다. 위 시는 이 때 김삿갓의 반격으로 전해지는데, 僧俗을 불문하고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형국이다. 경박하기 그지없고, 언어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게 무슨 시인가?
"시인은 현실의 온갖 추악한 모습을 비정하게 들추어낼 뿐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p.147) "해체시에서 세계는 온갖 추악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해체주의 시인들은 절대적 진리도 선도 가치도 믿지 않는다. 김병익의 기술을 빌리면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것, 전할 수 있는 것,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욕설과 요설의 비틀린 언어는 이런 허무주의적 공허의식의 산물이다."(p.152)
사정이 이렇고 보니, 일찍이 홍기문은 김삿갓의 시를 두고 비천한 재담이지 시가 아니라고 혹평한 바 있고, 근세의 한학자 呂圭亨은 이런 시풍이 유행하여 정통의 한시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 소문이 이웃나라에 알려질까봐 걱정이라는 시를 남기기까지 했다.
"풍자 일변도는 悲歌的 세계관으로 연결된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비가적 세계관은 불만을 삶의 완벽한 기교로 채용한다. 그래서 비가적 시인에게는 계속 짖어야 될 부정의 세계를 언제나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바뀌면 그 바뀐 세계의 불만의 요소를 또 발견해야 한다. 비가적 세계관은 상황의 거대함과 자아의 왜소함 사이의 그 엄청난 불균형을 과장한다. 그것은 넋두리와 하소연의 무기력한 어조를 띤다."(p.21)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시를 대할 때마다 필자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經國濟世에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으랴만, 그로 하여금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 시인을 낳았다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시에서 이나 벼룩, 욕설과 섹스 등 비시적 대상의 시화가 지배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김삿갓의 경우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 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고 있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김삿갓이 '비천한 재담'만을 일삼았던 광대였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가 천박한 재담만으로 일관했다면 애초에 그의 시는 문자로 기록되어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네 다리 소반에다 죽이 한 그릇
하늘 빛에 구름이 함께 떠도네.
주인아 면목 없다 말하지 마오
얼비쳐 오는 청산 내사 좋으니.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가난한 살림에 지나는 과객에게 먹다 남은 묽은 죽 한 그릇을 내오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이다. 죽이 얼마나 묽었으면 앞산의 그림자가 얼비쳤을까. 이런 시도 점잖은 체면에서 보면 되잖케 보이기 마련이어도,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관조하는 잔잔한 서글픔이 있어 좋다.
천황씨가 죽었느냐 인황씨가 죽었느냐
푸른 산 나무마다 온통 소복 입었네.
밝는 날 햇님보고 조문하게 한다면
집집 처마 마다 눈물이 뚝뚝.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畯前淚滴滴
눈을 노래한 〈雪〉이란 작품이다. 소담스런 서설이 내려 온 세상은 하얀 素服으로 갈아 입었다. 하얀 소복을 입고 흰 눈이 내린 날 아침에는 아이들을 울리지도 말자던 노천명과는 달리, 시인은 엉뚱하게 흰 눈에서 주재자의 죽음을 떠올리고, 햇볕에 녹아 떨어지는 낙수를 눈물로 환치시켜 버린다. 시상을 전개하는 시적 발상도 참신하려니와, 그의 무기력한 나른함과 뿌리 깊은 비애의 정조가 가슴을 씁쓸히 적신다. 그는 뒷날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34구의 〈蘭嗸平生詩〉를 남겼다. 그 끝 네 구절은 이렇다.
궁한 신세 속인들의 白眼視만 받았고
세월 가며 터럭만이 시들었구나.
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물기도 어려워
몇 날을 길 가에서 서성였던고.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撖髮蒼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김삿갓의 해학의 뒤안에는 이럴 수도 저러지도 못하는 체념의 悲感이 감돌고 있다. 연구자들은 김삿갓이 특히 科體詩에 능하여 200여수를 남긴 것을 특기한다. 과체시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과거 시험장에서 요구하는 형식이 지극히 까다로운 詩體이다. 김삿갓이 장난질의 와중에서도 그 많은 과체시를 남기고 있다면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은 무엇일까? 나도 마음만 먹으면 體制가 요구하는 교과서적인 시쓰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는 절규는 아니었을까? 어쨋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이즘 사람들의 악취미다.
漢詩 최후의 광경
"해체시는 전통미학과 기존문화를 해체하고 기존의 인간관도 해체시키려는 일종의 무규범성으로서의 소외 양상이었다. 해체시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세계에 대한 불신을 효과적으로 표명했다. 욕설, 야유, 아이러니의 비틀린 언어도 소외의 주목할만한 시적 양상이다."(p.115)
슬프다 문벌은 모두 훌륭한 집안으로
세월에 헛되이 늙으니 홀로 구슬프도다.
오로봉 아래에서 이치 논하며 앉았자니
세상 사람 모두 도를 안다 일컫네.
可憐門閥皆佳族
虛老風塵獨可悲
五老峯下論理坐
世人皆稱道也知
위 시는 《閒中記聞》에 실려 있다. 한 사람이 시덥잖은 제 집안과 학문을 지나치게 뽐내므로 林悌가 조롱하여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五老峯 아래에서 理를 논하며 앉아 있는 늙은이가 있다. 훌륭한 문벌의 자손으로, 이제는 영락해서 늙고 고단한 인생이다. 이야기야 예전 좋은 시절 조상 자랑이거나, 그렇고 그런 道學 이야기일테지만, 영문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道人으로 일컬으며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몰락한 양반님네의 안스러운 허세를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독음으로 읽어야만 본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슬프다 문벌은 모두 개가죽이요
세월에 헛되이 늙은 도깨비로다.
오로봉 아래에 노루가 앉았는데
세상 사람 모두들 도야지라 일컫네.
可憐門閥개가죽
虛老風塵도깨비
五老峯下노루坐
世人皆稱도야지
'모두 훌륭한 족속(皆佳族)'이 사실은 '개가죽'이었고, '홀로 구슬프도다(獨可悲)'를 독음으로 읽으니 '도깨비'가 되었다. '이치를 논함(論理)'는 들짐승 '노루'가 되고, '도를 안다(道也知)'는 기실 '도야지' 즉 돼지였을 뿐이다. 도대체 문벌이니 도학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개가죽이요 도깨비 같이 허상만 있고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껍데기가 아니던가. 노루를 보고 도야지라 하는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또 어떠한가. 시인은 기실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 추켜 세운 것이 아니라 돼지 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또 《俚諺叢林》에는 오성 이항복이 지었다는 시가 실려 있다.
오늘 아침 남의 수레를 빌려 타다
홀연이 떨어져서 뒤꼭지가 깨졌네.
장안 큰 길에서 에고에고 울자니
세상 사람 모두다 미치광이라 하더라.
今朝借乘남의襄
忽然落地꼭뒤傷
長安大道에에哭
世人皆稱미치狂
언문진서 섞어作으로 칠언절구를 지었다. 내용이야 뭐 대단한 것이 있을 리 없고, 다만 말을 씹는 재미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구한말에 오면
사랑 문간에 처녀가 있는데
무던한 얼굴에다 가녀린 허리.
사람을 한번 보고 얼른 숨으니
마치 구름 사이 달이 숨는듯.
舍廊곗집處女在
무던顔色가는腰
사람一見얼는隱
마치雲間月明消
로 진전된다. 李沂가 《대한자강회월보》에 소개한 것이다. 그 사이에 김삿갓의 "데걱데걱登南山, 씨근벌떡息氣散. 醉眼朦朧굽어觀, 울긋불긋花爛漫"이나, "靑松등성듬성立, 人間여기저기有. 所謂엇뚝빗뚝客, 平生쓰나다나酒"와 같은 작품들이 또 있으니, 대개 이러한 파격시도 어느 순간 평지돌출 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의 집적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시의 해체가 종당에 가면 아예 한글로 한시를 짓는 이른바 '언문풍월'로까지 발전한다. 언문풍월은 예전 주로 궁녀들이 한시의 작법을 응용하여 나름의 규칙을 세워 짓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김삿갓의 시에도 '타'를 운자로 해서 "사방기둥붉어타, 석양행객시장타. 네절인심고약타"와 처럼 3구가 낙구된채로 전해지는 언문풍월이 있다. 그러나 언문풍월이 본격적인 창작을 보게 된 것은 개화기에 와서인데, 1900년대에는 거의 시조문학과 경쟁관계를 유지할만큼 기세를 떨쳤다. 여러 잡지에서는 운자와 제목을 주고 현상공모를 하고, 응모작 중에 가작 수백편을 모아 《諺文風月》이란 책을 출판하는 성황을 이루기까지 했던 것이다. 언문풍월은 쉽게 말해 기존 한시의 작법을 패로디하여 만든 국문시가이다. 다음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작품이다. 제목은 〈자명종〉이고, 운자는 '가나다'이다.
두개바늘놀아가
글자마다치노나.
땅땅치는그소리
늙을로자부른다.
큰 바늘 작은 바늘이 쉬지 않고 돌면서 정시마다 종을 쳐댄다. 그 소리는 마치 늙음을 재촉하는 소리로만 들린다는 재치다. 1.2.4구의 끝에 운자를 차례대로 달았다.
참대붙인종이가
흔들면은바람나
몹시더운여름에
친한벗이네로다
제목은 〈부채〉과 운자는 역시 '가나다'이다. 운자가 언제나 '가나다'인 것은 아니다.
명주비단고운올
요리조리가는골
어김없는네로다
좋은솜씨지은솔
제목은 〈바늘〉이고, 운자는 '올골솔'이다. 올이 고운 명주비단에 요리조리 골을 내어 바느질을 하고 나니 솔기마다 솜씨가 정갈하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언문풍월은 일상적인 여러 소재들을 가지고 운자에 있어서도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게 창장되고 있다. 특히 이것은 한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없이 재치만으로도 창작이 가능했으므로, 특정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작가층을 가졌다는데서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이 시기에 와서 한시는 이제 더 이상 감당해 낼 역할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가져오고, 내용의 변모로도 의식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을 때 형식이 변한다.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 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로 그치고 말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는 심장하다.
해체주의의 80년대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이 공룡처럼 다가와 있는 오늘의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의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히 계속되고 있다. 기존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의 문법을 찾아 나서려는 노력도 힘차다. 그러나 시의 새로운 말하기 방식이 그 실험적 의도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인식하는 시대정신이나,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희필의 붙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정신사적 연관이 있다면 이 또한 아마도 이러한 언저리에 놓여 질 것이다.
김삿갓이 북도로 유람을 떠나 먼저 개성에 닿았는데,
날이 저물어 어느 부잣집대문을 두드렸는데,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땔나무가 없어 재워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시 한수를 남겼는데.....
邑號開城何門閉 도시 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울 닫아걸며
山名松岳豈無松 산 이름은 송악인데 나무가 없다는 말이 되는가.
黃昏逐客非人情 늦은 저녁에 손님을 쫓는 것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거늘
禮儀東方子獨秦 동방예의지국에서 네놈 홀로 오랑캐이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二十樹下 에 三十客 이
四十家 에五十食 이라
이 글은 音으로써 장난한 글로써
스무나무 밑에 서른 손이 망한 놈의 집에 쉰밥을 얻어먹었다. 는 말이다.
그 다음 방문한 곳이 그 유명한 평양이라
어찌 평양기생을 지나칠 수가 있나!
그래서 건사한 기생집에 들어가서 약을 올리는데....
平壤妓生何所能 평양기생이 어디가 능한고 하니
能歌能舞又能詩 소리에 능하고 춤도 능하지만 시에도 또한 능하지만
能能其中別無能 능하고도 능한 가운데 별로 능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月夜三更呼夫能 달 밝은 한밤중에 사내를 부르는 능력은 없구먼....!
이렇게 약을 올렸으니 그날 저녁 일은 不問可知라!
김삿갓은 이렇게 한세상을 떠돌았다오.
김삿갓의 사랑과 시 (1)
김삿갓은 시를 많이 남기신 분입니다. 워낙 시가 많지만 애틋한 사랑도 많았고 그 사랑의 자욱마다 시가 남아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로 소설 김삿갓(정비석)을 읽으면서 제 인상에 깊이 남는 사랑과 시를 스크랩하는 기분으로 적어보겠습니다.
1. 강계 기생 추월과의 사랑: 이 시들은 김삿갓과 추월이 독로강 강가에서 헤어지면서 나눈 것들입니다. 김삿갓은 강계를 떠나 어머니를 뵈러 홍성으로 가지만 김삿갓이 홍성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십니다.
추월:
돌로강 긴 둑에 풀 내음 향긋한데
정이 있으되 말이 없어 무정한 것 같구나.
정든 님 머나먼 만 리 밖에 보내자니
언제 또 만나 뵐까 그리움 한이 없네.
禿魯長堤芳草香(독로장제방초향)
有情無語似無情(유정무어사무정)
送君萬里碧山外(송군만리벽산외)
何時再逢離思長(하시재봉이사장)
김삿갓:
봄바람에 꽃향기 온 산에 가득한데
님 보내는 그대의 정은 한이 없구나
내 이제 배 위에서 그대에게 묻노니
너와 나의 슬픔은 과연 누가 더할고
春風桃花滿山香(춘풍도화만산향)
秋月送客別淚情(추월송객별누정)
我今船上一問之(아금선상일문지)
別恨與君推短長(별한여군추단장)
요즘이야 젊은이들의 사랑과 그 표현방식이 직선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요즘같은 분위기는 찾기 힙들었지요. 아마도 김삿갓식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시기가 1980년대가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줍고 은근하고 그러나 깊은 사랑.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蘭皐 金炳淵(1807~1863),그는 조선조 후기“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勢道大家 安東金氏 문중에서 태어났다. TV사극 '명성황후'에 등장했던 金炳冀, 金炳學, 金炳國 등과 같은 炳자 항렬이요,
그의 아버지 金安根은 荷屋大監으로 불리는 金佐根을 비롯하여 金汶根. 金洙根과 같은 항렬이며, 할아버지 金益淳은 純祖임금의 장인으로서 안동김씨 세도를 창시했던 金祖淳과 같은 항렬이었다.
그토록 60년 세도가문의 한 허리에 태어나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었을 그가세상을 등지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조국산하를 누비면서 숫한 逸話와 名詩를 남기고57세를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친 연유는 그의 할아버지 '金益淳-正法'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병연이 겨우 다섯 살이던 純祖 11년(1811)에 평안도에서는 '關西푸대접'을 이유로 한 '洪景來의 亂'이 일어났고 당시 그의 조부 김익순은 그 지역의 한 고을인 宣川府使로 나가 있었는데
불의에 叛軍의 습격을 받은 그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한 홍경래는 노도와 같이 일어난 민중을 조직적으로 지휘하여 擧事한지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嘉山, 博川, 郭山, 定州, 宣川, 泰川, 鐵山, 龍川 등 8읍을 점령하였으니 그 와중에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밀려난 고을이 비단 선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嘉山郡守 鄭蓍 같이 반도에게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하는 적으로부터 양팔이 잘이면서도 인둥이(守令을 상징하는 인장)을 입으로 물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끝내 목숨을 버리고 節義를 지킨 충신도 있었지만 그 외엔 다른 고을의 수령들도 거의가 선천부사와 다를 바 없었으니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항복한 것만으로 중형에 처해질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김익순이 壯金勢力의 비호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斬刑에 처해지고 만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그는 저항 없이 적에게 항복하여 순순히 복종하고 협력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叛徒가 흩어지는 틈을 타서 적진을 벗어난 후에 농민이 벤 홍경래의 참모 金昌始의 목을 돈 천 양을 주기로 하고 사서 자기의 전공으로 위장하고서도 약속한 목 값을 주지 않음으로서 파렴치한 그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김익순은 大逆罪人이 되어 斬首되고 家産은 籍沒되었으며 가족은 겨우 연좌형을 면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역죄인의 아들이 된 아버지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병연은 홀어머니에 이끌리어 황해도 谷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깊은 산골 寧越에 찾아 들어 정착했었나 보다.
寧越郡 河東面 臥石里 속칭 '노루목'에 그의 묘가 있고 거기서 2km쯤 더 들어가면 그의 모자가 살던 옛 집터가 나온다. 10년 전쯤 내가 그 곳을 찾았을 때는 진입로공사를 하는 중이어서 차를 3km쯤 떨어진 입구에 세워 놓고 걸어서 들어가야 했는데 지금은 진입로 뿐 아니라 묘역이 말끔히 정비되어서 하나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제법 큰 내가 흐르는 산기슭의 양지바른 언덕에 "나는 청산을 향하여 가는데 푸른 물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라는 유명한 그의 시가 새겨진 작은 빗돌이 하나 서 있고 그 위에 "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쓰인 자연석묘비와 함께 시인 김삿갓의 무덤이 흘러오는 푸른 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누워 있다.
그의 어머니 함평이씨는 첩첩산중, 노루꼬리만큼 해가 든다고 하여 노루목이라고 했다는 이 곳에 숨어 살면서 어린 아들에게 가문의 내력을 일체 숨긴 채 그저 글만 가르쳤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병연은 열 살을 전후해서는 이미 四書三經을 통독하였을 뿐 아니라 고금의 詩書를 두루 섭렵하면서 특출한 詩才를 표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고 한다.
더욱이 영월은 端宗의 莊陵이 있는 곳으로서 端宗哀史가 담긴 비통한 유적들이 도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영월읍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의 이름마저도 成三問峯이니 朴彭年峯이니 하고 지어 부르는 忠節의 고장에서 經書를 배우고 史書를 익히면서 그는 불의를 미워하고 節義를 흠모하는 대쪽 같은 선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