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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였다.
열심히 살아왔고 그 결과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주위의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내가 정직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써서 얻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때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전혀 내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의외의 고통의 사건이 발생해서 속수무책일때도 있었다.
이럴때면 좌절감 내지는 절망감에 빠지면서 도데체 이런 고통의 결과가 어떤 원인으로 유래된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일의 마땅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괴롭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기독교인으로서 불신자들로 부터 "예수를 어떻게 믿었길래 저런일을 당하는가?" 라는 비난을 받을때는 정말이지 미칠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금 냉정을 찾고 내 주위를 둘러 보면 나보다도 억울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쳐 봐도 않되는 날때부터의 장애인들, 자연재해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어른들의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는 어린이들, 지역적으로 가난하고 질병이 많은 곳에서 태어난 간난애기들........
불교에서는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무슨 고통이던지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므로 고행과 적선으로 업보를 씻어내고 수도를 통해서 해탈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해탈을 할때 까지는 반복되는 윤회의 삶을 살아야 하며 전생의 죄과에 따라 소나 말로도 태어나 심한 노동의 댓가를 치루거나 심하게 되면 지렁이나 미물로 태어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물들은 윤회의 과정을 밟고 있는 죄지은 인간들이므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때 까지는 죽이면 않된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대자대비의 원리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전생에서 착하게 살아서 현재 나는 인간으로 태어난걸까?
내가 살아온 과정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면 죄가 없다고 할수는 없다.
그러면 나는 내세에 어떤 윤회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소나 말? 비들기나 독수리? 악어나 고래? ........?
성경에 날때부터 소경된자(바디메오)는 누구의 죄때문이냐고 인과응보의 법칙에 근거해 예수님께 묻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요 9;1-3)" 라고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사실 나는 사는동안 적지않은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나는 수많은 살인죄를 지었다.
또 남의 것을 탐해본 일도 있었다. 그러니 난 도적질도 하였다.
또 쎅씨한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어 보기도 했으니 이미 간음도 했다.
자랑할게 못되니 이정도 해두기로 하자.
그러면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했으니 난 이미 죽어야 했다.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살인죄를 짓고도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다.
이것이 기독교만의 비밀인 "은혜의 법칙" 이다.
그런데 난 기독교인 이면서도 아직도 "뿌린대로 거둔다" 는 성경말씀에만 집착해서 잘못을 하면 나자신을 정죄하며 괴로워 했었다.
원인을 알수 없는 고난이 닥칠때면 인과응보의 법칙에 근거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다 쏟았었다.
더우기 나쁜짓만 하며 잘사는 인간들을 보면서 왜 인과응보의 재앙이 없느냐고 불평도 해봤었다.
이것은 바로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은혜의 법칙이 삶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까닭이였다.
즉 예수님께서 내죄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뤄 주셨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내 삶에 적용하는데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회심이후 은혜의 법칙을 나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면서 드디어 나는 인과응보의 함정에서 탈출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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