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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 국제문단 국제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趙南宣
<한국 명 수필 릴레이>(24)
만추(晩秋)의 화석정(花石亭)
해담 조남승
며칠 전 가을의 마지막 절후인 상강(霜降)이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이젠 품안에 안겨오는 조석(朝夕)의 바람이 꽤 쌀쌀하게 느껴진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지난주에 절정을 이루었던 설악산의 단풍이 서서히 남쪽으로 이어져 이젠 인근 공원의 나뭇잎들도 곱게 물이 들었다. 바야흐로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음이다. 계절의 바뀜은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 계절의 변화를 주도하면서 우리 인간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춘하추동이 바뀌어가는 자연의 윤회 속에서, 가을이 되면 봄여름 내내 성장을 위해 힘써왔던 활동들을 멈추고 에너지들을 수렴(收斂)하여 땅속뿌리에 응축시켜 다음해에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위한 동안거(冬安居)에 든다. 요즘같이 상강(霜降)을 지나 입동(立冬)을 앞두고 있을 때쯤이면 천자만홍(千紫萬紅)으로 곱게 물든 단풍들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한 것 들뜨게 한다. 그리곤 이내 낙엽이 되어 바람에 흩날리며 가슴 한복판에 휑한 쓸쓸함을 몰아넣는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모를 처절한 그리움으로 마음을 애태우게 된다. 이런 땐 그리움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삶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 여행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꼭 긴 여행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가 안 되면 반나절이나 인근의 공원에라도 낙엽을 밞으며 사색(思索)에 잠겨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이란 많은 사람들과의 인과관계에서 내가 아닌 남의 시선과 타인의 생각에 맞추어 세속의 탈을 쓰고 광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문밖출입 없이 단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과 감정에 따라 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은 뒤로하고 가족들을 먼저 살피여만 하는 희생적 배려의 삶을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래서 나무들이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마저 미련 없이 떨구어 내면서 빈 몸이 되어가고 있는 늦가을을 맞으면, 누구나 덕지덕지 달라붙은 잡동사니 같은 관계관념이나 망상들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싶게 된다. 여행길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가늠해보면서 한걸음한걸음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 진정한 자신과 마주해보고 싶은 것이다. 잠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 난 주말을 맞아 결혼식 주례를 보고나서 서울 근교의 파주에 자리 잡고 있는 화석정을 찾아 반나절의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올해에 세 번이나 찾아가는 화석정이지만, 강변의 늦가을 경치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과 세간의 근심을 풀어놓을 생각에 다소 들뜬 마음으로 파주를 향해 달려갔다. 일요일 오후라서인지 서울로 들어오는 차량은 줄을 이어 복잡하지만 파주 쪽으로 나가는 차량은 그리 많질 않아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었다. 도로 왼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폭이 점점 넓어진다. 임진강이 흘러들어와 한강과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맥(地脈)은 일대간 일정간 십삼정맥(一大幹一正幹十三正脈)으로 이루어져있다. 주맥(主脈)인 백두대간이 동쪽으로 뻗어내려 왔기 때문에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세를 띠고 있다. 따라서 강물들은 자연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이북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임진강 역시 서쪽으로 흐르고 흘러 대하(大河)의 한강을 만나 서로가 얼싸안고 한 몸이 되어 강화의 앞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교통사정이 좋아 별 지루함 없이 길지 않은 시간에 화석정에 도착하게 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우선 매점에 들러 주인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올봄에 처음 매점주인장을 만났을 때 그분은 화석정에 담긴 역사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화석정은 세종 25년에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 선조께서 누대를 이어 살아온 이곳 율곡촌(栗谷村) 임진강가의 벼랑위에 처음 세우셨습니다. 그 후 성종 9년에 율곡선생님의 증조부이신 이의석(李宜碩) 선조께서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花石亭)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다시 율곡선생님이 중수하시고선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엔 이곳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하면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풍광이 아름답고도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였습니다만 그땐 관리가 지금 같진 않았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 칠도 예쁘게 해놓고 주차장과 화장실 등 모두를 다 잘 해놓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쓰신 화석정(花石亭)이란 현판을 걸어놓았던 거예요.’ 신이 난 듯 설명을 하던 어르신이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선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한번 훑어본 다음 강한 어조로 ‘저 현판이 그냥 저렇게 계속 걸려있던 건줄 아세요? 제가 아니면 아마 저 현판도 없어졌을 겁니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으니 ‘역사를 바로 세운 다나 어쩐 다나 하면서 광화문 현판을 비롯하여 전국에 산재해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들을 모조리 제거하여 교체하던 시기에 저 현판인들 온전할 이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내가 현판을 떼어 숨겨 놓았다가 정권이 바뀌어 잠잠 해졌을 때 다시 걸어놓은 거예요.'라고 자랑을 하듯 힘주어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선 화석정의 현판을 바라보는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화석정(花石亭)의 현판을 우러러보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강에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엔 아직 색색의 단풍들이 만추의 맑은 햇살에 더욱 고와 보였다. 그러나 정자의 마당엔 느티나무의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정자 양 옆에 묵묵히 서있던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어서 오라는 듯 곱게 물든 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반긴다. 난 웃는 얼굴로 느티나무에 다가가 그동안 ‘강녕하시었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네며 느티나무를 껴안았다. 수령(樹齡)이 560년이나 된 나무이고 보니 둘레가 얼마나 큰지 나무를 껴안았다기보다는 그저 나무의 일부분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느티나무가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느티나무와 한 몸이 되어 한참동안이나 숨결을 함께하였다. 느티나무가 나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다. 편안하면서도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나무의 품에서 벗어나 화석정 정자에 올랐다. 정자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강 건너를 바라보니 만대(萬代)의 한방명의 허준선생의 묘가 있는 뒷산이 한적하게 바라다 보인다. 멀리엔 북한 개성의 오관산과 서울의 삼각산이 아득히 눈에 들어온다.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을의 끝자락에 펼쳐진 고즈넉한 풍광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방을 한 바퀴 쭉 둘러보고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자 늦가을의 경치가 더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한참 후에 눈을 떠보니 “숲 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으니 시인의 정회(情懷) 끝이 없어라(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멀리의 물결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살에 붉구나(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산은 둥근달을 외롭게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산토고륜월 강함만리풍).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려는가? 그 울음소리 저물어가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누나(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란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화석정 팔세부시(八世賦詩)’의 현판이 정자 안에 걸려있다. 시의 말미인 현판 끝부분에 후학(後學) 박일규(朴一圭) 근서(謹書)라고 새겨져있었다. 시를 음미하던 난 ‘풀숲의 들국화와 구절초 꽃/저물어가는 햇살에 마지막 향기를 내품네/눈앞에 펼쳐진 만추의 경치와 시에 담긴 풍경이/하나의 감정으로 어우러지니/화석정을 찾아 시를 음미하는 나그네/추말동초(秋末冬初)의 정취(情趣)에 빠져들어/절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라고 중얼거리며 율곡의 재능과 시상(詩想)에 탄복을 하였다. 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의 첫 구절인 임정추이만(林亭秋已晩)의 이미 이(已)자가 몸기(己)자로 서각(書刻)되어 있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제대로 썼을 텐데 조각가가 착오를 하여 잘못 새긴 것 같다.
율곡은 이렇게 어린나이 때부터 화석정을 자주 오르내리며 정자양옆의 느티나무와 함께 성장을 하였다. 저렇게 느티나무가 거목이 되어 있듯이 율곡 또한 조선의 대학자요, 충신으로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만인으로부터 추앙받는 큰 인물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성품과 취미, 기질과 사상이 같아야만 다정한 벗이 되고 변치 않는 우정을 깊게 쌓아갈 수 있다. 율곡역시 파주지역의 인근에 함께 세거(世居)하면서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학문적으로 아주 친하게 지내며 교우했던 절친한 벗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율곡보다 한 살 위인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두 살 위인 조선 중기의 도학자라 불리는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시와 문장이 출중하였다. 이들은 늘 서로가 격려와 우정을 나누며 함께 학문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고, 예(禮)와 정(情)을 나누며 평생 동안 변치 않는 벗으로 지냈다. 이 세분의 절친함은 생전에 서로 왕래한 편지를 후대에 4첩(帖)으로 엮어낸 삼현수간(三賢手簡)이 전해지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구봉, 율곡, 우계가 살고 있던 곳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의 산남리, 율곡리, 눌노리였다. 산남리는 출판단지와 맞붙은 심학산 아랫동네이다. 심학산은 조선시대 구봉산(龜峯山)이란 이름으로 불리었기에 구봉산자락에서 생활하고 있던 송익필의 호가 구봉(龜峯)이 되었다. 또 임진강변의 율곡리(栗谷里)에서 자란 이이(李珥)의 호도 지명에 따라 율곡(栗谷)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혼(成渾)역시 율곡리와 지척인 눌노리(訥老里)에서 성장하였으며 또 마을 어귀에 소개울이 흐르고 있었기에 우계(牛溪)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고 본다. 구봉산자락에서 이어온 혈맥의 끝자리에 솟아오른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흐른다. 그래서 이 지역의 이름이 교하(交河)가 되었다. 두 강물이 하나 되어 저 넓은 서해바다로 흘러 대해(大海)를 이루듯이 구봉, 성혼, 율곡도 임진강의 물길을 따라 이어 살면서 학문의 뜻을 이루어 대학자(大學者)가 되었다.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은 도봉산에서부터 굽이굽이 뻗어 내려와 임진강과 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수(合水)되는 지점에서 끝나는 구봉산자락에 자리 잡고 후학(後學)을 길렀다. 그 당시 광산김씨(光山金氏)인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는 자신의 아들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13살이 되자, 조선예법의 초석을 다진 당대의 석학이요, 사상적으로 자신과 뜻이 같은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에게 보내 수학(修學)을 시켰다. 구봉의 영향을 받은 사계(沙溪)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더불어 조선의 예학(禮學)을 완성시킨 대학자이다. 이로 인하여 사계와 신독재의 부자(父子)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얻었으니 바로 부자명현(父子名賢)인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길러낸 구봉(龜峰)선생이 지은 많은 시들 중에서 아주 장문(長文)으로 이루어진 족부족(足不足)이란 시의 구절 중에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며(君子如何長自足/군자여하장자족),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小人如何長不足/소인여하장부족). 부족해도 만족한줄 알면 늘 여유로움이 있고(不足知足每有餘/부족지족매유여), 족함에도 부족하게 생각하면 항상 부족하기만하네(足而不足常不足/족이부족상부족).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樂在有餘無不足/락재유여무부족), 근심이 부족함에 있으면 언제나 만족할까(憂在不足何時足/우재부족하시족).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求在我者無不足/구재아자무부족),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 하리(求在外者何能足/구재외자하능족). 고금(古今)의 지극한 즐거움도 족함을 앎에 있고(古今至樂在知足/고금지락재지족), 천하의 큰 근심도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도다(天下大患在不足/천하대환재부족).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不足與足皆在己 /부족여족개재기), 외물(外物)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外物焉爲足不足/외물언위족부족). 책상 가득 쌓인 경서(經書)엔 도(道)의 맛 깊고 깊어(一床經書道味深/일상경서도미심), 천고(千古)의 사람을 소중한 벗으로 함이니 스승으로 삼을만한 벗이 족하구나(尙友千古師友足/상우천고사우족).’라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들이 있다.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명구(名句)들인가!
또한 우계(牛溪)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조선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작가이며 시인이고, 성리학자요 철학자이며 정치인이다. 율곡이 세상을 뜬 후에야 출사(出仕)하여 관직이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묘에 배향(配享)된 해동(海東)18현(賢)중의 한사람이다. 율곡은 살아있는 동안 인근에 함께 살고 있던 우계와 함께 종종 화석정에 올라 나라를 걱정하고 학문을 논하며 정담(情談)을 나누는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과 화석정에 얽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화석정에 올라 시문(詩文)을 논하다가 정자아래의 임진강에 조그만 배를 띄워놓고 선유(船遊)를 즐기게 되었다. 선유놀이를 하던 중 갑자기 풍랑이 심하여 배가 기우뚱거리며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우계가 당황하여 허둥거리는데 율곡은 뱃머리에 자연스럽게 서서 시를 읊으며 거센 물결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성혼이 걱정스러움에 놀라 “어찌 변화에 대처하는 도리도 듣지 못하였단 말인가?”라며 율곡을 나무랐다. 그러자 율곡은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익사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태연스럽게 말하였다는 것이다.
율곡은 자신보다 한 살 위인 우계가 혹여 세상을 먼저 뜨게 될까봐 걱정을 하였으나 오히려 율곡이 먼저 세상을 뒤로하였고, 우계는 49세에 타계(他界)한 율곡보다 무려 14년이나 더 살면서 파란의 임진왜란까지 겪게 되었다. 우계는 율곡의 기일이 되면 옛정을 회상하면서 소복을 입고 애도하였다고 한다. 율곡과 성혼은 사후에도 유택(幽宅)이 같은 지역인 파주에 모셔져 있고, 두 분을 위한 자운서원과 파산서원 역시 파주에 있다. 그러나 구봉(龜峰)선생은 비운(悲運)과 파란(波瀾)의 말년을 보내게 됨으로써 파주엔 아무런 유적(遺跡)도 없이 산소 등이 충남 당진에 모셔져있을 뿐이다. 구봉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심학산자락에 구봉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정자와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화석정에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일화가 있다. 바로 선조의 피난길을 밝혀주었다는 것이다. 율곡선생은 왜구의 침공을 대비하기위하여 십만의 군사를 길러 전쟁에 사전 대비해야 한다면서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동서붕당의 혼란으로 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율곡은 크게 낙심하였다. 그 후 율곡은 생전에 제자들을 시켜 매일같이 정자의 기둥에 들기름을 바르도록 하였다. 드디어 선조 29년에 왜구가 침입하였다. 십만양병설을 무시한 선조는 왜구에게 맥없이 패퇴하여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비우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길에 나서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비까지 내리는 날임에도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화석정아래 임진강변에 도착한 것은 마침 저녁때였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강을 건너게 된 선조의 호위 병사들은 당연히 우왕좌왕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화석정에 불을 붙이자 타오르는 불빛이 대낮같이 강변을 환히 비추어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율곡이 살아생전 그토록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바르도록 한 연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율곡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뛰어났단 말인가!
이렇게 훌륭한 율곡선생은 강원도 강릉의 외갓집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을 낳던 해 봄 율곡의 모친 사임당의 꿈에 동해바다에 나가있는 자신에게, 한 선녀가 살결이 옥처럼 빛나는 귀하게 생긴 어린아이를 안고나타나 아이를 사임당의 품안으로 던져주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꾼 뒤 얼마 되지 않아 율곡을 임신하게 되었다. 그리곤 율곡을 낳던 날 저녁엔 바다에서 흑룡이 침실 쪽으로 날아와 마루사이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나서 그날 새벽에 출산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인하여 율곡의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 율곡은 11살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팔뚝을 찔러 아버지의 입에 자신의 피를 넣어드리고선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하여 빌었다.
그렇듯 지극한 효성에 의해 이튿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린 율곡을 가리키며, ‘이 아이는 동국(東國)의 대유(大儒)이니, 구슬옥(玉)변에 귀이(耳)자를 붙여 이름을 지으라.’고했다”는 꿈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부터 현룡(見龍)이었던 율곡의 이름을 이(珥)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율곡은 말보다 글을 먼저 깨우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효심이 출중하였다. 당시 과거시험에서 한 번의 장원급제도 어려운 일이거늘, 율곡은 무려 아홉 번이나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또 율곡이 49세에 임종을 하던 하루 전날 부인 노씨의 꿈에 흑룡이 침방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아마도 하늘로부터 큰 인물로 점지되어 태어난 분이시었던 것 같다.
마치 중종 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처럼 조선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 개혁정치를 주창하였던 율곡은, 왜군의 침략이 미구에 닥쳐올 국가 위난 시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파당을 지어 서로의 진영논리에 따라 국론이 동서로 분열되어있음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겉으론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면서도 속으론 자기파만을 위해 자신들의 양심과 판단을 저버린 채, 오직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율곡은 때때로 시대에 적응한 개혁정치를 단행해야 함을 애타게 호소하였다. 따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직접 의견을 아뢰었다. 그렇지 못하면 소장(疏章)이나 저서로라도 간곡히 아뢰었다.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인심도심설, 시무육조계, 십만양병설 등 참으로 많은 언론(言論)과 저술을 남겼다. 그중 성학집요는 24세의 임금인 선조를 위하여 공자, 맹자, 주자 등 성현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을 모아 요약하여 쓴 것이다. 이 책은 현대에 와서도 나라의 큰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고위공직자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귀한 내용들로 되어있다. 성학집요의 위정(爲政)편에서 율곡은 ‘왕은 백성의 부모이니 항상 덕을 닦아 어질게 다스리는 것이 하늘이 내려준 직분을 올바로 행하는 길이다. 그러려면 항상 언론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천하의 눈을 나의 눈으로 삼으면 눈이 밝아 보지 못할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나의 귀로 삼으면 귀가 밝아 듣지 못할 것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으면 슬기로워 생각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난 정자에서 내려와 나무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해질녘 차가와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벤치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우리나라가 겪어온 파란의 역사를 회고해보면서, 나라의 앞날을 헤아려보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이리저리 국론이 분열되어 국가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는 서글픈 사회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조선시대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방비는 뒷전이고 그저 당파싸움에만 매달림으로서 국력이 쇠해진 나머지 결국엔 임진왜란을 당하고, 이어서 36년이란 긴 세월을 일제치하에서 갖은 고통과 함께 우리의 역사를 유린당하는 참담함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잊어버리고 전철(前轍)을 밟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국론분열의 걱정을 넘어 국가적 위기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든다. 난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선 감았던 눈을 뜨고 멀리 북한쪽을 바라다보았다. 저녁을 맞이하는 안개만이 가득한 북한쪽의 하늘을 보자니 마음만 더 혼미해졌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벤치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다시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꼭 율곡선생의 혼이 담긴 것 같은 느티나무에게 하소연이라도 해보고 싶어서였다. 느티나무에 기대서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늘은 맑고 한층 높아보였다. 율곡은 진시폐소(陳時弊疏)란 상소문에서 “상지(上智)는 변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사전에 잘 다스림으로서 위태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고, 중지(中智)는 이미 변란이 일어난 것을 깨닫고 이를 다스려 위태로운 것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며, 변란인 것을 알고도 이를 다스리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도 이를 안정시키려 하지 않는 것을 하지(下智)라고” 말하였다. 무슨 일이든 사전예방이 최우선이고, 문제가 발생된걸 알게 되면 머뭇거리거나 체면 차리지 말고 바로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비리)수사처’ 설치여부를 놓고 국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엇갈려 두 진영이 자신들의 주장을 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다. 도대체 어찌하다가 우리나라의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비리를 전담하는 독립수사기구를 만들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법을 잘 모르는 일반국민들은 무지에 의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소위 고위공직자들이야말로 정심정도행(正心正道行)을 체질화하고 정신만 바짝 차려 주변관리를 철저히 한다면 어찌 자신과 친인척들이 비리와 연관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또 정부에서도 비리를 저지르면 조사하여 처벌하겠다는 으름장보다는 불의(不義)의 수치스러움과 정의(正義)의 떳떳함을 자각하고, 스스로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지도와 교육을 통하여 사전에 예방을 우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보면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인도하기를 법으로 하고, 다스리기를 형벌로서 하면(道之以政 齊之以刑/도지이정 제지이형), 백성이 법망을 피하여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자신의 잘못을 수치로 여기는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백성을 인도하기를 덕으로 하고 다스리기를 예로써 하면(道之以德 齊之以禮/도지이덕 제지이례), 백성이 자신의 잘못을 수치로 여겨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스스로 선에 이르게 될 것이다(有恥且格/유치차격).’라고 하였다. 위정자들이 꼭 새겨봐야 할 글귀가 아니겠는가.
예나지금이나 공직사회에서 참모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국민의 소리를 올바로 판단하고 제대로 보고하여, 자신이 보필하고 있는 분의 판단이 흐려지지 않고 정책을 올바로 펼칠 수 있도록 간언(諫言)을 해야 한다. 의성(義城) 김씨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부친인 청계공(靑溪公)이 정했다는 가훈에 “신하가 되었으면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왓장으로 남지 말라(爲人臣子 寧須玉碎/위인신자 영수옥쇄)“ “곧은 도리(道理)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道理)를 굽히고 살지 말라(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인영직도이사 불가왕도이생)“는 내용이 있다. 바로 공직에 있는 자라면 의(義)를 지키고 윗사람에게 직언(直言)을 삼가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것은 지키고 사악한 것은 배척한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의 정신적 지주이며 조선말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면암 최익현 선생은 결단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고종재위 때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서슬이 시퍼런 대원군의 위세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판을 칠 때도 국가재정파탄을 걱정하여 목숨을 걸고 상소하였다. 또 일본이 조선 침탈의 발판으로 삼고자 맺은 강화도조약에 반발하여 ’차라리 내 목을 먼저 치라‘며 광화문 앞까지 도끼를 들고 나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급기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거병(擧兵)을 하여 일본과 맞서 싸웠다. 싸우던 중 순창의 격전지에서 대마도에 포로로 잡혀갔다. 면암선생은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한 끝에 결국 고귀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현시대에도 이러한 면암선생 같은 강직하고 기개 있는 고위공직자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결기 있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그립기만 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최고의 지도자들은 참모진들을 잘 용인(用人)하고 철저히 관리함은 물론, 그들의 말을 참언(讒言)인지 간언(諫言)인지를 분별하여 들을 줄 알아야한다.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보면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비루한 사람(鄙夫/비부)과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을까 걱정하는 것이니 진실로 잃을까 걱정되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송나라 사람인 근재지(靳裁之)란 사람이 ‘선비의 품격에는 대략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도덕(道德)에 뜻을 둔 사람은 공명(功名)이 그 마음을 얽어맬 수 없고, 공명에 뜻을 둔 사람은 부귀(富貴)가 그 마음을 얽어맬 수 없다. 그러나 부귀(富貴)에만 뜻을 둔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 공자가 말한 비루한 사람은 곧 부귀에 뜻을 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시경(詩經) 소아편(小雅篇)에 유왕(幽王)에게 추방된 태자의 측근이 참언(讒言)에 농락당하는 군왕을 비난하여 노래한 교언(巧言)이라는 시가 있다.
시의 내용 중에 ‘군자가 거짓과 불신의 실마리를 용납하여 받아들일 때 혼란의 싹이 트고/참언을 믿을 때 혼란은 다시 일어났네./군자가 참언을 듣고 참언을 하는 자에게 화를 낸다면 혼란이 즉시 그칠 것이요/또 어진사람의 말에 기뻐하고 그 말을 들어 시행 한다면 혼란은 바로 그칠 것이네.’ ‘군자의 뜻만 거듭 맹세하신 끝에 혼란은 더욱 자라났고/간사함만을 믿으셨기에 혼란은 사납게 되어갔네./간사한 말 달콤하여 혼란은 더욱 늘어났고/직책 모두 버렸기에 임의 재앙 돼버렸네.’란 구절이 있다. 참으로 시사(示唆)하는바가 큰 의미심장한 구절들이다. 참언(讒言)과 교언(巧言)에 빠져들어 자신의 뜻과 고집대로만 국가를 경영한다면 나라를 망치고 만다는 가르침의 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올바른 정사를 위해서는 충성스런 간언(諫言)에 귀를 기우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강을 바라보니 세상사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강물은 그저 제 갈 곳을 향해 아무런 말도 없이 유유히 흘러만 가고 있다. 그런 강물을 끼고 있는 자유로엔 많은 차량들이 좌우로 줄을 지어 쏜 화살처럼 달리고 있다. 바삐 달리는 저 사람들은 왜 저리도 경쟁하듯 달리는 것일까? 다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님 행복을 위해서인가? 행복해지려면 우선 마음이 편안해야 할 텐데... 마음이 편안하려면 근심걱정이 없어야 된다. 근심걱정이 없으려면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면 양심을 저버리지 말고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으려면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알고 내가 아닌 남의 그림자가 되어 살고자 하는 허상(虛想)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해지려면 과욕과 허욕이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집착의 끈을 놓아버려야만 한다. 명심보감 순명편(順命篇)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운명에 달린 것이요(生死有命/생사유명), 잘 살고 귀해지는 것 역시 하늘의 뜻에 달렸다(富貴在天/부귀재천).’는 구절이 있다. 또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이미 저마다 분수가 정해져 있거늘 뜬구름 같은 인생이 공연히 절로 바빠한다는(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만사분이정 부생공자망)말이 있다.
그러니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망을 줄이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양심막선 어과욕(養心莫善於寡欲)’과 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게 살수 있다는 ‘지족상락(知足常樂)’이란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때 아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나에게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말을 건네고는 삶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음을 아는 듯, 풀죽은 날개 짓을 하며 저녁노을이 물들어가는 풀숲으로 하늘하늘 사라져간다. 나비가 나에게 던진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處陰休影/처음휴영), 멈추어 있으면 발자국이 나지 않는다(處靜息迹/처정식적)’는 장자(莊子)의 말을 전해준 것 같았다. 그늘에 들어서야 그림자가 쉴 수 있고, 고요한데 머물러있어야 발자국이 쉬게 된다는 것이다. 심신을 고요히 하여 나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가 마음을 맑히고 도(道)를 찾으려면, 흐르는 물처럼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아무튼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선시대 대학자인 율곡선생님과 함께한 아주 값지고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조남승: <국제문예>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시집:『매화 향에 취해서』, 수필집:『만남 뒤엔 헤어짐이 올 수밖에』外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