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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傳燈寺
이 땅 어느 절집인들 터 잡은 곳에 의미가 없으랴만, 전등사는 독특한 절집이다. 산성(山城) 안에 절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등사에는 산문(山門)이나 일주문이 없다. 대신 종해루(宗海樓)라는 이름을 가진 남문(南門)과 누각(樓閣)이 없는 동문(東門)이 절집의 출입구로 사용되고있다.
산성(山城) 안에 자리 잡은 절집의 위치도 유별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 정족산 사고 "를 지키는 조선왕실의 종찰(宗刹)로서의 사격(寺格)도 이채롭다. 사고수호사찰(史庫守護寺刹)은 이곳 전등사와 함께 월정사 (오대산 사고), 안국사 (적성산 사고) 그리고 각화사 (태백산 사고) 뿐이기 때문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 의하면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에 중창(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重修)가 있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전등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볼 수있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하였으나, 1282년(고려 충렬왕)의 비(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宋)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이후 전등사(傳燈寺)라고 고쳐 불렀다.
그 후 1605년(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두 차례의 화재(火災)로 전등사는 완전히 소실(燒失)되었고, 그 이듬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중건(重建)하기 시작하여 7년만인 1621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王室)의 보호를 받는다.
위 사진은 삼랑산성(三郞山城) 위에서 내려다 본 전등사의 전경(全景)이다.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있는 삼랑산성은 삼국시대 토성(土城)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서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쌓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랑산성은 타 지역의 산성과는 달리, 성내(城內)에는 오직 전등사만이 있기 때문에 역사성(歷史性)과 희귀성(稀貴性)을 함께 간직한 산성으로 유명하다.
산성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22m인 정족산(鼎足山 .. 그래서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른다)이며,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서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西門)도 안부(鞍部)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鞍部)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세(地勢)를 이용하여 성벽이 꺾여 도는 10여 곳에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곡성(曲城) 형태도 간직하고 있다.
정화궁주 貞和宮主
진종사(眞宗寺)로 창건한 이 절을 새롭게 일으킨 인물은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貞和宮主)이었다.동국여지승람에 전등사(傳燈寺)에 관한 기록을 보면, " 원나라 지원(至元) 19년에 충렬왕비 정화궁주왕씨(貞和宮主 王氏)가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바다를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 전등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강화부지(江華府誌)에는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玉燈盞)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 것이라고 했으며, 전등사본말사지에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전등사라고 사액(賜額)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어느 날 전등사의 대조루(對潮樓)에 올라 읊은 詩에도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이고 있다.
성역창망오태사 星歷蒼茫伍太史 세월 속의 역사를 오태사가 까마득한데
운연표인삼랑성 雲煙俵姻三郞城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아득하다
정화원당경수식 貞和願幢更誰植 정화궁주의 원당(願幢)을 뉘라서 고쳐 세우랴
벽기진혼상객정 壁記塵昏傷客情 벽게(壁記)에 쌓인 먼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고려 제25대 충렬왕은 원종(元宗)의 장자(長子)로 元나라에 가서 원나라 세조의 딸과 결혼하고 살다가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에 오른 충렬왕은 종실 시안공총(始安公總)의 딸을 정화궁주로 삼았다. 이때부터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궁주(宮主)와 공주(公主)는 서로 심한 질투를 하였다.
그런 가운데 " 정화궁주가 사랑을 잃고 무녀(巫女)을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 "는 투서가 있어, 궁주는 갇히게 되었다. 곧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공주가 죽을 때까지 궁주는 왕과 통하지 못한 채 항상 별궁에서 머물러야 했다. 왕의 사랑을 잃은 정화궁주는 전등사를 그의 원찰로 삼고 복을 빌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最古의 사찰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우리나라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사람은 중국 진(晉)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었다.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 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고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 때 고종은 삼랑성(三郞城)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의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都邑)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假闕(임시 궁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 고종 46년(1259년), 임금이 三郞城 안에 가궐을 짓도록 명하였다"라는 사실과 함께 5년 뒤인 원종 5년(1264년), " 임금이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어 4개월 동안 베풀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불정오성도량이라 함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의 온갖 재난을 물리치게 하는, 불교의 행사를 말한다. 원종임금이 진종사에서 이러한 행사를 갖게 한 것은 당시 진종사(眞宗寺)의 사세(寺勢)가 크게 중흥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1245년 선원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지닌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三郞城)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眞宗寺)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난 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玉燈)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傳燈寺)라 사찰의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법맥(法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鼎足山)의 산세(山勢)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의미이다. 풍수가들 역시 " 마니산이 할아버지 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 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福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最古의 사찰 ? ... 아닐 것이다
전등사본말사지에 전등사 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1편 1장의 전등사지(傳燈寺誌)에 의하면 이절은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고 하고, 그 후 고려 원종 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 절을 다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강화도(江華島)가 고구려(高句麗) 영토가 되는 것은 소수림왕 11년 보다 거의 100년이 지난 뒤인 장수왕(長壽王) 63년(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百濟)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래됨), 백제 영토인 강화도에 전등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은 아마 후세인이 잘못 윤색(潤色)해 놓은 허구(虛構)일 것이다.
역사의 섬에 창건된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歷史)의 축소판(縮小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나 마찬가지이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하여 유서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普門寺) 및 정수사(淨水寺)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古代)의 토성(土城)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石城)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선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삼랑성 三郞城
전등사는 삼랑성(三郞城) 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안에 있다. 삼랑성은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세웠다는 전설(傳說)의 성(城)으로 마니산의 단군신화(檀君神話)와 함께 신비로운 성이다. 삼랑성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잡석(雜石)으로 축성(築城)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보수(補修) 그리고 조선시대에 중수(重修)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삼랑성의 동문(東門)으로 1886년 병인양요를 당하여 이 곳 정족산성의 수성장(守城將) 양헌수(梁憲洙)는 이 곳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쳐 그들이 퇴각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 곳에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勝戰碑)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림의 왼쪽에...
傳燈寺의 문화유산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보물 제178호, 약사전(藥師殿)이 보물 제179호 그리고 범종(梵鐘)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타 청동수조(靑銅水槽) 등 인천유형문화재가 다수 있다.
전등사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양헌수장군의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대조루(對潮樓)에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절 입구의 대조루(對潮樓)를 지나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 옆으로 각종 전각들이 일렬(一列)의 형태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윤장대 輪藏臺
윤장대(輪藏臺)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전륜장(轉輪藏) 또는 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만 아니라 율(律)과 논(論) 또는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疎)도 함께 넣어 둔다. 사찰에 처음 윤장대를 설치한 것은 중국 양(梁)나라 시절이며, 불도(佛道)를 믿으려 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일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천 용문사의 윤장대가 유일하며, 기타의 윤장대는 그 것을 본 따 현대에 만들어 진 것이다. 용문사의 윤장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물 6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루 對 潮 樓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리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인다.이 바다가 바로 앞에 대하듯 보인다는 의미에서 대조루(對潮樓)라 이름지었다. 이 건물은 전등사의 불이문(不二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대조루의 초창연대(初創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1749년(영조 25)에 총섭 초윤(總攝 楚允) 등이 개수하였다 하며, 1841년에 총섭 연흥(蓮弘)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곳 대웅전에서 대웅전을 바라 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視線)으로 보게 하는 각도(각度)로,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하여 지어졌다.
이곳 대조루에는 1726년 조선 영조(英祖)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하여 썼다는 '취향당 (翠香堂) '이라는 편액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가 쓴 ' 다로경권(茶爐經卷) '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대조루와 英祖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實錄)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지속되었다.
1726년(영조 2)에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에는 곡식(穀食)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重修)에 사용된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英祖)가 시주(施主)한 것이며,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던 것이다.
전등사의 남동쪽으로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이는데,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 (鹽河)"라고도 부른다.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대조루에는 목은 이색 (牧隱 李穡)의 시가(詩歌)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막신 산길 산길 끌며 청아한 맛 즐기는데 / 전등사 늙은스님 내 갈길을 알려주네 / 창 틈으로 보인 뫼는 하늘가에 닿아 있고 / 누각 아래 부는 긴 바람 물결되어 여울지네 / 별자리를 아득하게 왕 별 속에 파묻혔고 / 안개 둘린 삼랑성에 자그맣게 보이누나 / 정화공주 발원 깃대 누가 다시 세워주랴 / 먼지 찌든 벽 글 보니 길손 가슴 아프구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 볼 때의 시선은 25도 쯤 위쪽으로 향하고 있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러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하여 지어진 건물이다.
은행나무 銀杏나무
전등사 은행나무는 600세가 넘는 나무로, 키가 30m,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는 8m에 달하고 있다. 원래 이 나무는 암나무로, 매년 많은 양의 열매(은행)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조 말엽 조정에서는 은행의 공출을 지시했는데, 그 양이 실제 이 은행나무가 맺는 은행의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전등사에 부과된 공출량을채우고자 스님들은 주변의 은행나무가 맺는 은행을 털었지만 그 물량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아예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로 변하도록 기도를 올렸고, 스님들의 기도 덕분인지 몰라도 이후, 전등사의 은행나무들은 은행을 더 이상 수확할 수 없는 수나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전등사의 지난 600년 세월을 지켜본 생명체는 바로 이 은행나무뿐이다. 은행나무가 이 절집에 자리 잡게 된 정확한 사연을 아는 이는 없다. 그 옛날 절집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은행 수확을 목적으로 심었을지도, 또는 조선의 건국을 기념해 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600여 년이란 나무의 나이를 역사에 대입해 보면 조선의 개국년(開國年)인 1392년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 이 은행나무가 222세가 되었을 때인 1614년, 절집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화재 현장을 지켜보기도 하였고, 229세인 1621년에는 불탄 잿더미 속에서 다시 옛 모습으로 되살아난 복원 현장에 환호했을 것이다. 그 당시 중건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덕분에 오늘날도 사람들의 입에 변함없이 오르내리는 대웅전 추녀 끝 네 귀퉁이의 나부상(裸婦像)과 목수(木手) 사이에 얽힌 이야기의 진위(眞僞)를 정확히 알고 있을 듯하지만,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이 절집의 사격(寺格)이 한순간에 변하는 과정도 지켜 보았다. 286세 되던 1678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史庫)가 새롭게 들어서는 광경을 보았고, 315세 되던 1707년에는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보사숸봉소(譜史權奉所)의 소임이 주어지는 현장도 함께 하였다. 어디 절집의 성쇠(盛衰)만 지켜 보았을까 ? 은행나무 나이 334세 되던 1726년에는, 영조(英祖)임금이 이 절집으로 행차하는 엄숙한 광경을 곁눈질할 수 있었고, 나이 474세 되던 1866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성내로 쳐들어오는 약탈의 현장도 지켜보았다.
나이 479세 되던 1871년에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보관소 포량고(砲糧庫)가 들어 섰으며, 이듬해에는 산성 수비군의 주둔지인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가 설치되는 것을 지켜 보았다. 나이 508세 되던 1910년에는 일제의 관료들이 정족산 사고에서 300년 이상 지켜왔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들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기는 모습도 내려다 보면서 나라 잃은 서러움도 함께 느꼈을 것이다. 600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은행나무가 경험했던 일들을 풀어놓고 보니, 절집 한모퉁이에서 서 있는 나무라는 생명체가 지닌 역사적 무게에 다시금 경이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은행나무의 전설
전등사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두 그루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하나는 대웅전 앞마당에, 또 하나는 입구 윤장대 근처에 있는데 각각의 이름이 노승나무,동승나무라고 부르며 암컷과 수컷 한쌍이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다.
윤장대 근처의 또 다른 은행나무
강화도령 철종(哲宗) 때의 일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열매를 20가마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전등사의 은행나무는 고작 10가마 정도 밖에 열매를 맺지 않았다. 난감해진 전등사의 노승(노승)은 백련사의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며칠 후 추송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여기에는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송스님은 3일 기도에 들어갔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 올랐다. 추송은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엎더니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두려워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추송스님을 비롯하여 전등사의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보물 제178호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1614년(광해군 6)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대웅전은 1963년 보물 178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을 1916년 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梁間錄)에 의하면, 1605년(선조 38)에 일부가 불탔으며, 다시 1614년(광해군 6)에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전소되었으므로, 이듬해인 161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의 건축물로는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 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龍頭)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唐草)가 화려하게 양각되었고, 중앙 우물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하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陽刻)해 놓아 마치 용궁(龍宮)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주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9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매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9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九龍吐音)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때도 있었다.
대웅전의 조성 수법을 보면, 기단(基壇)은 지형에 따라 동쪽이 높고 후면과 서쪽이 낮은 자연석 허튼층 쌓기를 하였으며, 기둥은 배흘림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모두 삼분합(三分閤)의 궁창판이 있는 빗살문을 달았는데, 2짝을 열어 겹쳐 들어올려 부연(副椽) 평고대(평고대)에서 내린 들쇠에 걸리도록 되어 있다.
나부상 裸婦像
전등사의 대표적인 법당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 즉, 나부상(裸婦像)때문이리라 .. 석가모니를 모신 신성한 법당에 왠 벌거벗은 여인인가? 어떤 사람은 벌거벗은 여인이 아니라 원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인도 등의 사찰에서 모셔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부상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의 모습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옷을 걸친 모습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 중 한 손으로 처마를 떠받든 모습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부처를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리고 그러한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하였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 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이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 있을 것이다. 한편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 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러기에 대웅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나부상(裸婦像)의 전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수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 진 것은 17세기말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중건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 곳 酒母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 주었다. 불사를 끝내고 같이 살림을 차리기로 약속도 하였다. 하지만 공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도편수가 그 주막을 찾아갔으나 그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이웃집 여자가 말하기를.. "며칠 전 야반도주하였으니 찾을 생각일랑 말라는 것이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분노로 일손이 잡히지도 않고, 잠도 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여인의 벌거벗은 모습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하였던 것이리라... 전등사 주지를 한때 역임하였던 고은(高銀) 시인은 이 나부상에 얽힌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시로 풀고있다.
강화도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 옛날 도편수께서 / 딴 사내와 달아난 /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넣고 / 네 이년 세세생생 /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 그 저주가 /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 까르르 / 까르르 /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 거기 잘 있사옵니다.
허균의 주장
절집에서는 추녀 끝의 조각상을 나부상이라고 주장하지만, 홍길동전의 허균(許筠)이 저술한책 ' 사랓 100미, 100선 '에서는 나부상이 아니고 나찰상(裸刹像)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흥미롭다. 허균은 그 증거로 북서쪽 (성문 방향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에 있는 인물상의 파란 눈동자를 들고 있다. 조각상의 파란 눈동자는 불교의 다른 신중계통의 인물상에서 볼 수 없는 나찰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나찰(羅刹)은 원래 고대 인도의 신으로, 불교에서 악귀(惡鬼)의 총칭이다.
허균은 법주사 팔상전 추녀 밑의 나찰상을 예로 들면서, 전등사의 여인상은 나부상이 아니라 외호신(外護神)의 하나인 나찰상으로 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부상이면 어떻고 나찰상이면 어떻랴. 나부상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절집 마당의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늘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절집을 찾는 많은 이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400년 묵은 느티나무에 눈길을 준 후, 대조루를 거쳐 600년생 은행나무를 만나러 윤장대로 향한다.
수미단 須彌壇
수미단은 불상을 안치하는 일종의 대좌와 같은 형식으로 대웅전 내의 천개(天蓋)와 더불어 장엄한불교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 이곳 전등사 대웅전의 수미단은 가로 480cm, 세로 118cm, 폭 200cm의 크기로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맨 하단 받침부 몰딩 사이에 불법의 수호신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되어 있고, 중간부분 장판에는 꽃나무, 새, 당초문, 보상화문, 상상의 동물 등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는 등 문화재 가치가 크고,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어있다.
사찰의 법당 등에 설치하는 수미산 형상의 단(壇)을 수미단(須彌壇)이라고 한다. 나무나 금속 또는 돌로써 수미산 형태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불상을 안치하는 대좌를 말한다. 사찰의 법당 내부 정면에 안치하게 된다. 대개 수미단에 불상을 안치하는 것은 예로부터 인도에서 행해졌으며, 이같은 수법이 중국과 우리나라 등 북방불교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수미산정 상에는 도리천궁이 있으며, 불좌(佛座)를 수미좌로 만드는 것은 석가모니의 위모설법(爲母說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불상의 기언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어느 해 여름, 석가모니가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서 설법하느라 자리를 비움으로 인해 불상의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수미산을 불좌로 사용하기에이른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병인양요, 조선 군인들의 자취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 때 조선 군인들의 막사로 사용되었던 전등사 대웅전 건물 안 기둥과 문에는 많은글자가 쓰여져 있다. 당시 전등사에 주둔하던 조선 군인들의 상당수는 사냥꾼 출신으로 정식 군사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공포심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막강한 화력을 가졌다고 소문난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이름과 함께 목숨을 지켜달라는 기도문과 심경을 적은 글들이다
청동수조 靑銅水槽 ... 인천유형문화재
이 청동수조는 지름 112cm, 높이 72cm의 크기로 고려 충렬왕의 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시주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 수조(水槽)는 보존상태가 극히 양호하며 수조 안에는 물고기와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청동수조는 불을 끄기 위한 것으로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가 긴급할 때 사용하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불귀신이 불을 일으키러 큰 건물을 골라서 다니다가 수조(水槽) 안에 있는 물에 비친 자신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는 동료가 불장난 하러 와 있는줄 알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는 전설도 있다.
명부전 冥府殿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위치한 명부전은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방보살을 비롯하여 시왕, 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十王)이 있는 곳은 명부전, 그리고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른다. 이 명부전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하여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고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柱杖子 .. 스님의 지팡이)를 짚은 채, 지옥의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약사전 藥師殿 ... 보물 제179호
전등사의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藥師殿)은 중생의 病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고,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의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 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수법이 특이하며 당시의 건축 수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약사전 내부의 후불탱화 및 현왕탱...인천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 梵鐘閣
범종 梵鐘 ... 보물 제393호
이 종은 우리나라 종이 아닌 중국종(中國鐘)이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범종과는 차이를보이고 있다. 우선 동종(銅鐘)이 아닌 철종(鐵鐘)이고, 우리 옛 종의 가장 특징인 두드려 소리 나는 소리와 관계가 있는 용통(甬桶)이 없으며, 종을 거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를 단순히게 고리 형태로만 만들었다. 그리고 몸통에 마련된 여러가지 조각 역시 닮은 곳이 전혀 없다. 종의 밑 둘레는 단순한 원형이 아니라 8등분의 파도형상으로 만들어 중국 종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범종은 중국 북송(北宋)의 철종 4년( 1097년. 고려 숙종 2)에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 백암산(百巖山) 숭명사(崇明寺)에서 주조(鑄造)된 철제종(鐵製鍾)이다. 일제가 제2차대전 당시 약탈하여 부평의 병기창에 놓아 두었던 것을 광복 이후에 찾아와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종(中國鐘)이라 울리지는 못하고, 대조루(對潮樓)에 따로 범종을 조성하여 두었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쌍룡(雙龍)을 갖추고 용두(龍頭)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돌렸으며, 종신(鐘身)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 개의 옆띠를 위 아래를 구분한 다음 종선(縱線)으로 위 아래 각 8개의 네모구획(四角區劃)을 마련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銘文)을 양각(陽刻)하여 두었다. 크기는 높이가 1.64m 구경은 1m에 이른다.
종구(鐘口)는 중국종에서 보이는 물결모양을 이룬 듯한 8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따라 소문(素紋)의 구연대(口緣帶)를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이다.특히 명문(銘文) 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 때의 시주인(施主人), 동역인(董役人), 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고, 종구의 하단 가까이에는 대송회주...(大宋懷州...)라는 27字가 새겨져 있다.
왜 중국종이 이곳에?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의 철종은 이 전등사 범종을 비롯하여 4개가 있다. 이들 중국 철제종은 일제강점기 말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대륙침략에 필요한 무기를 조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선느가정집의 숟가락까지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한편 중국 각지에서 거둬들인 쇠붙이를 녹여 필요한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부평의 조병창(造兵廠)에 모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일제는 전쟁에 패하여 조병창은 그대로 두고 일본을 쫒겨났다.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자 당시 인천시립박물관의 이경성관장이 광복되자 미군정과 교섭하여 중국 철제 범종 3개를 비롯하여 청동화로 2점, 청대 수형대포 1점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오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이 범종은 '전등사 범종 '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그러나 전등사에서 필요해서 만든 전등사종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전등사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이 '전등사 종 '은 마라토너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하고 받은 고대 그리스 청동제 투구와 더불어 명백히 ' 국산 '이 아님에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희귀한 문화재이다.
나무에 새긴 달마대사 .. 범종각 옆
달마대사 達磨大師
달마(達磨)는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이다.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줄임말이다. 달마는 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중국에 들어와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다. 그는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서 낙양(洛陽)에 이르러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이나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고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다.달마는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坐禪)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를 강조하였다.
삼성각 三 星 閣
조선 왕실과 전등사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어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하여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중에도 지경스님을 중심으로 재건을 시작하여 7년이 지난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대웅보전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의 종찰로서 더욱 성장하였다. 4곳에 보관되었던 왕조실록이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고 전주본만 남았을 때, 조선조정에서는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하여 전주 사고본은 이곳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시록은 봉화군 태배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1707년, 강화 유수이었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당을 새로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건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하여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전등사의 가장 어른 스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 불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정족사고 鼎足史庫
정족산 사고는 임진왜란의 산물이다.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星州)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 조선왕조실록 '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전주(全州) 사고의 '실록'만이 전란으로부터 온전히 보전되었다.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 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 사고로 옮겨 졌는데, 1653년 마니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들이 실화로 불타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을 짓고, 1678년에 남은 역대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면서부터 정족산 사고는 업무를 시작하였다.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서책들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져 관리되었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고 건물은 1910년대 이후 헐렸지만,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1929년에 발간된 ' 조선사찰 31본산 '에는 ' 절집에서 사고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고 밝히고 있다. 전등사에 사고가 복원된 것은 1999년으로, 대조루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의 현판도 복원된 이들 건물에 다시 달게 되었다.
정족산진도 鼎足山鎭圖
강화도 전등사 경내에 있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다. 이 史庫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인 정족진(鼎足鎭)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정족산성(三郞城) 안에 장사각과 선원각, 취향당 등의 사고(史庫)영역, 대웅전과 약사전, 향로전 등의 전등사 영역 그리고 내사(內舍)와 진사(鎭舍), 포량고(砲糧庫) 등의 정족진(鼎足鎭) 영역이 자리잡고 있다.
내사와 진사는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며, 포량고는 군량을 저장하던 창고이다. 이 곳을 발굴한결과 1870년대에 작성된 위 지도에 보이는 정족진 관련 건물 유적들이 거의 그대로 확인되었다. 포량고 건물 바닥 전면에는 벽돌을 깐 것으로 드러났으며, 정족진 내부에서 전면 외부로 빗물 등을 빼내기 위한 배수구 시설이 온전한 모습으로 벌견되었다고 한다.
사고 史庫
사고(史庫)란? ...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서적 및 문서를 보관하는 전각을 말한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 사찰에 보관된 것은 고려 때인 127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 때 고려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史庫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春秋館과 충청도 忠州, 경상도 星州, 전라도 全州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史庫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및 성주의 史庫가 소실된 반면 全州의 史庫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전주의 실록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에 明宗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태백산,적성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이 간행된 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사고 鼎足史庫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 강화도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史庫에 있던 전주본을 이 곳에 비장하였다.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수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구한말인 1908년 정족산,태백산, 오대산, 적성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을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본래의 정족산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애 걸려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原寶閣)"이라는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다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족사고는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아 있었고, 위 두개의 현판은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