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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만주: 동아시아 변혁의 핵 Ⅱ. 일제의 만주강점과 조선 Ⅲ. 만주국군과 한국군, 그리고 민 |
간인 학살 Ⅳ. 경제개발계획과 사회분위기 Ⅴ. 맺음말 |
Ⅰ. 서론 - 만주: 동아시아 변혁의 핵
만주는 우리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만주하면 흔히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이 펼쳐졌던 우리의 옛 땅으로 생각한다. 만일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만주가 아직 우리 땅일텐데 하는 아쉬움 넘치는 공상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1)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고대사에 관한 이런 공상은 정작 만주라는 지역이 우리 근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만주국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관심을 가로막는다.
만주는 단지 고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이래 숱한 이민들이 둥지를 튼 땅으로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만주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깊이 개입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빼놓고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만주는 비단 우리의 근현대사에 영향을 미친 중요사건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곳만도 아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1932년에 간행한 만주에 관한 저서의 부제를 ‘갈등의 요람’(Cradle of Conflict)라고 부쳤다. 라티모어에게 만주는 낡았지만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은 중국문명, 보다 새롭고 물질적으로 막강한 서양 - 제국주의화된 일본을 포함 - 문명, 그리고 동양을 향해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었다.2)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일본인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생명선(生命線)이라 불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사활을 결정하는 특수지역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차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은 독일을 모델로 생각해 온 일본군의 젊은 장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총력전으로 수행되는 현대전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군사력 뿐 아니라 총체적인 전쟁수행능력을 제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 그런 그들에게 만주는 일본제국주의의 사활을 결정짓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주가 일제에게 생명선이었다면, 1930년대의 만주는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중들에게 일본제국주의와 첨예하게 대치하는 새로운 전선이었다.
새로운 대치선 만주는 동아시아 변혁의 핵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체제의 싹이 발아한 곳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첨예한 대결이 계속되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남과 북을 각각 통치한 박정희와 김일성은 모두 청년기의 중요한 시기를 만주에서 보냈다. 만주 시절 박정희와 김일성은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들이 각각 만주에서 얻은 체험은 이들이 정권을 잡은 후의 국가운영과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고에서는 일제의 조선 강점의 유지에서 만주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만주국의 유산이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 군부의 성장에서 만주국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낸 점, 경제갸발계획의 성격,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분위기 등에 드리운 만주국의 그림자를 설명하고자 함이 본고의 목표이다.
Ⅱ. 일제의 만주강점과 조선
1931년 9월 18일 일제는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만주를 불법강점했다. 이 침략행위는 요즈음들어서 ‘만주사변’이라는 일제의 용어 대신 ‘만주전쟁’으로 불리며, 2차대전의 도화선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인들에게 싫든좋든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 왔다. 관동군이 만주에서 군사행동을 강행한 것은 정치인, 관료, 군부, 재벌, 귀족 등 일본제국주의 내의 주요 엘리트 그룹의 합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시와라 칸지(石原莞爾) 등 관동군 참모들은 군부가 만주를 점령하면 일본정부도 이를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치밀한 계산 하에 과감한 행동을 단행했다. 일본 군부에서 불세출의 천재적 전략가로 불리는 이시와라는 만주를 점령해야만 조선통치가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4) 비단 이시와라 만이 아니었다. 같은 관동군 참모로 후에 육군대신을 지낸 이타가끼 세이시로(板垣征四郞)도 “만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참된 조선통치는 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들은 더 적극적이었다. 칸다 마사타네(神田正種)는 반일운동의 기세가 높아가는 “조선 내부의 당시의 정황 상, 한번 일본군의 실력을 그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음을 통감”했다고 회고했다.5) 같은 조선군 참모인 토요시마 토요타로(豊島豊太郞)는 만주에서의 반일운동이 고조되면서 이 영향이 조선 내의 반일운동을 고무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통치의 안정을 기하고 민중들을 길들이기 위해 과감한 군사행동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6)
만주, 특히 간도의 치안이 유지되어야 조선의 안정이 가능하다고 본 조선군의 일부 참모들은 관동군과는 별개로 만주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기도 했다.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 9월 초순 조선주둔군 참모 칸다 마사타네 중좌는 “조선으로서는 조선 내 선인의 불평에 대한 안전판을 제공하는 의미에서 간도를 조선에 편입시킬 때”라 생각하고 간도 용정(龍井)으로 특무기관장 고노 에츠지로(河野悅次郞) 소좌를 찾아 갔다. 고노는 칸다의 제의를 크게 환영하였고, 두 사람은 조선의 회령(會寧)과 간도의 용정촌을 연결하는 철도에 폭파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계기로 조선주둔군 요다(依田)여단을 투입하고 이와 함께 외무성 경찰을 폐지하고 조선경찰을 투입할 것을 계획했다.7) 10월 중에 실행할 것을 목표로 한 이 계획은 관동군이 먼저 ‘만주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일본의 만주 강점이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리라는 관동군과 조선군 참모들의 기대는 불행히도 일본의 만주강점 이후 현실화되었다. 국제법 상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기존의 세계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던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해 서구열강과 중국의 국민당 정권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순식간에 일본이 자기 영토의 몇 배가 되는 광활한 만주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무적 황군’의 신화를 강고히 했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바라던 조선인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일본의 힘을 보면서 조선 내의 많은 지식인들은 민족독립의 희망을 잃어갔고, 희망을 잃은 지식인들은 민족운동 선상에서 점차 탈락하면서 친일의 길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0년대에 국내의 반일운동,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 쇠퇴한 것은 결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희망이 민족독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일제의 만주강점은 조선의 브르조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이들은 만주라는 광활한 시장을 확보한 일제가 차린 잔치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일제의 만주강점은 ‘만주 붐’ 또는 ‘만주열(滿洲熱)’이라 불린 호황을 가져 왔다.8) 실제로 일본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나라였고, 그 이유는 바로 만주의 점령으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다.9) 조선의 자본가 계급에게 이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모반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의 만주강점은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반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비록 민족주의 계열의 주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담한 공산주의 계열의 유격대에 의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Ⅲ. 만주국군과 한국군, 그리고 민간인 학살
1930년대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미개척의 벌판 만주에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20년대까지 파산당한 우리 동포들이 마지 못해 짐을 싸 만주로 발걸음을 떼었다면, 1930년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한 사람들이 많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도 그런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다.10) 동양의 서부 만주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들이 뒤엉켜 살고 있었다. 인종적으로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듯이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일본인, 조선인 등이 뒤엉킨 만주는 세계 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일본 군인과 관료에서부터 그들의 망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끝내는 죽음을 당하는 중국농민들이 함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200만 재만조선인들에게도 아편장사, 개장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천황폐하에 충성을 바치는 황군 장교에서부터 일제를 타도하려는 공산유격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살 길을 찾아 몸부림치는 곳이 만주였다.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인 이한림(李翰林)은 당시의 만주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시 만주의 무한한 개척의 여지와 야성적인 풍광, 대륙성 기후, 뚜렷하게 중국적인 것만도 아닌 혼합민족적 요소는 묘한 매력으로서 작용되는 것이었다. (...) 1932년 만주사변으로서 일본이 조작해 놓은 만주제국은 확실히 정치적인 의미에서만 독특한 분위기가 아니라, 풍토적인 조건이나 인종 및 주민의 성격으로서도 독특한 것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 국제사회와는 전혀 폐쇄되어 있으면서도 그런 폐쇄 속의 은근한 풍요가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국가행정이나 법이나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무한히 넓은 공지(空地) 는 그 속의 사람들을 이상하게 활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면이 있지만, 텍사스적인 열기. 짙은 투전판의 분위기, 겨울밤의 눈보라와 눈썰매, 독한 고량주, 일본 한국어 노어 중국어의 혼합, 우글거리는 강도단, 비적 마적단의 횡행 등 강렬한 남성적 약동성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만주 땅의 특징은 소년 시절에서 청년기로 접어드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에게 소극적인 것, 우유부단한 것, 엉거주춤한 중간파 기질을 혐오하도록 만들었고, 강렬한 것, 적극적인 것, 분명한 것을 열망하도록 변화시켰다.”11)
그 부글부글 끓던 만주에서 젊음을 보낸 식민지 출신의 두 청년은 20여년이 지난 후 남과 북의 최고통치자로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결하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과 박정희가 각각 너무나 다른 위치에서 보낸 만주에서의 젊은 시절의 경험은 분단된 남과 북의 정치사회문화에 서로 다른 각도에서 엄청난 규정성을 발휘했다.
흔히 “유격대국가”라고 불리우는 이북은 주체사상의 시원을 항일무장투쟁에서부터 찾고 있으며, 혁명전통을 주체사상과 더불어 이북 사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축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이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은 단지 지나간 역사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와 사회의 운영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북에 미친 만주의 영향이 일제와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대한 저항 속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이남에 미친 만주의 영향은 바로 만주국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인맥이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남에서 만주인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역시 군부였다. 1950년대에 이미 봉천군관학교나 만주군관학교 츨신의 만주인맥은 군의 요직을 점령하여 한 때는 육군참모총장(정일권), 1군사령관(백선엽), 2군사령관(강문봉)이 동시에 만주인맥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한국전쟁 시기와 그 직후에 만주군 출신들이 군부 내에서 두드러진 출세를 하게 된 것일까?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 이후 이북에서 군사적 실권이 중국군에 넘어간 것처럼 남쪽에서는 미군이 군사적 분야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군 수뇌부의 역할이란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군과의 사이의 연락장교단 이상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어렵다. 만주군 출신은 관동군과 만주군 간의 관계를 이미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서 일본군에서만 복무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적응을 잘했다.12)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군 고위지휘관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미군으로서도 만주군 출신을 선호했던 것이다. 30대 초반에 불과한 정일권이나 백선엽 등이 나이나 경력이 앞선 일본 육사 출신의 군 선배들을 제치고 3군총사령관이나 연합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군부에서 만주국 출신의 진출이 가장 현저했던 것은 1950년대이지만, 만주국의 그림자가 이남 사회 전체에 짙게 드리운 것은 역시 5ㆍ16군사쿠데타로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난 뒤의 일이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꾸밀 때 만주인맥, 특히 박정희의 동기생보다도 1년 선배인 만주군관학교 1기생들인 이주일, 김동하, 윤태일, 박임항, 방원철 등은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13) 또 박정희와 동갑이지만 군 경력은 훨씬 빨랐던 정일권은 박정희 아래에서 오랜 기간 국무총리를 지냈고, 만주국의 고위관료 연성기관인 대동학원 출신인 최규하는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로서 박정희가 죽은 뒤 감당할 수 없는 자리 대통령을 잠시 지내다가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만주 출신들이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면서 대통령이나 총리같은 요직을 지냈다는 것만으로 이남사회에 드리운 만주국의 그림자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일이다.
만주국은 흔히 괴뢰국가라고 불린다. 여기에 비해 대한민국은 분명히 독립국가이다. 그러나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갖는 자율성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면지도(內面指導)’14)라는 이름 아래 국정의 구석구석에 깊이 개입하며 좌지우지한 관동군 지배 하의 만주국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내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삼가고 있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해 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분명 명실상부한 독립국의 역사는 아니었다. 5ㆍ16 군사쿠데타 이래 이남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만주국에 주둔한 관동군과 만주국군이 소련이라는 가상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면15), 이남의 군부는 ‘북괴’라는 주적없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다.
만주국이 대한민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군대와 경찰이 갖었던 임진격살(臨陣格殺)의 권능이다. 임진격살이란 군과 경찰의 재량으로 만주국에 적대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16) 이 임진격살의 기능은 건국직후인 1932.9에 제정된 「잠행징치도죄법(暫行懲治盜罪法)」에 규정된 것으로 이 법은 1941년 12월에 페지되었지만, 임진격살권은 이 법을 계승한 치안유지법의 규정에 따라 만주국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제의 항일유격대에 대한 토벌, 즉 집단부락 건설을 중심으로 한 비민분리(匪民分離) 전략이 엄청난 유혈과 폭력을 수반하며 전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7) 이 전략은 여순반란 사건 이후의 공비토벌작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중의 공비토벌작전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군의 수뇌부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제의 유격대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한국군의 수뇌부에 대거 포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통비분자에 대한 임진격살권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이들을 통해서 임진격살의 관행은 대한민국에서의 공비토벌 작전에서 그대로 유지되어 많은 민간인 피해자를 낳았다.
그리고 이 불행한 역사는 1965년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견된 이후 재현되었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은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 청문회에서도 누차 지적된 것처럼 순수한 전투와 토벌작전을 결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에서의 토벌전략은 유격대 활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자연촌락이나 산재호를 분쇄하고, 주민들을 신생활촌이라 불리는 전략촌으로 옮겨 유격대와 주민의 접촉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략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과 중국의 항일유격대를 대상으로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집단부락 건설 중심의 비민(匪民)분리전략을 그대로 빼닮았다. 실상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채용한 토벌전술의 원형은 일본군이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면서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공비토벌 작전에서 한국군은 이 전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물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공비토벌작전에서도 이 전술은 거창, 산청, 함양 등 숱한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의 쓰라린 역사를 낳은 바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조차 민간인에 대한 오인 학살이 빈발했던 한국군의 전술적 특성 상, 낯설은 남의 땅에서 민간인 학살이 가능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토벌작전에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사르던 일본군의 잔재가 남아 있다가 발현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에서도 만주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18)
Ⅳ. 경제개발계획과 사회분위기
1960년대의 경제개발계획도 실은 그 뿌리가 만주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 등 일본의 이른바 개혁관료들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자신들의 이상을 펼 수 없는 일본을 떠나 만주국 실업부에 자리를 잡고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국가개조를 꿈꾸는 고급장교들과 개혁관료들의 실험실이 되었고, 이 실험실에서 입증된 경제개발계획은 일본에 남은 동료들에 의해 일본으로 수입되었다.19) 1933년 실업부 계획과장으로 만주로 부임한 시이나는 만주의 산업개발을 위해서는 자원조사가 불가결함을 깨닫고 임시산업조사국을 창설하여 뒷날 경제개발계획과 중요산업통제법의 입안의 기초를 닦았으며, 기시는 1936년 만주로 와 산업부 차장으로 일하면서 산업개발5개년계획과 북변진흥3개년계획 등 중요정책을 추진했다. 이와 유사한 계획은 뒤에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1960년대 한국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만주국의 선행성, 실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시와라 등 만주국의 건설자들은 만주가 일본의 국내개조를 단행한는 도약대, 실험대로서의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이 시기 만주국에서 일한 개혁관료들은 기시를 정점으로 만주인맥을 형성하였고, 일본의 고도성장에서 견인차 역할을 한 통산성(通産省: MITI)을 짊어지고 나가는 인물이 되었다.20)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면에서 볼 때, 군수산업에 역점을 둔 자급자족적 중화학공업화와 수출주도형 성장을 추구한 박정희 시대의 계획은 일부 서구학자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에서 시행된 총독부의 경제개발정책21)이나 일본 본토에서의 경제개발계획보다는 역시 만주국의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방향을 따르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은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의 유입으로 추진되었는데, 일본 쪽에서 1965년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이 기시 전 수상이었고, 또 당시 외상으로서 이 조약에 서명한 인물이 바로 시이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과 일본에 포진한 만주인맥의 협력과 상호 신뢰에 기반해서 추진된 것이다. 1961년 11월 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박정희는 이케다 수상이 주최한 공식만찬에 특별한 손님을 초청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南雲) 장군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다카끼 마사오(高木正雄)으로 돌아간 박정희는 나구모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22) 일본의 만주인맥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자, 이남에 만주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게 됨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훈육하는 병영국가, 규제국가로서의 만주국의 분위기는 유신시대 박정희 치하의 이남 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월요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의 낭독으로 시작되어 재건체조로 마무리되는 애국조회, 목요일에는 사열과 분열행진으로 이어지는 교련조회, 국기에 대한 맹세, 점심시간의 혼식검사, 학교와 거리에서의 장발단속, 학생과 공무원들을 아침일찍 동원하는 조기청소, 김일성 화형식 등 각종 궐기대회, 쥐잡기와 채변 등 위생의 강조, 열손가락의 지문을 꽉꽉 눌러 찍는 주민등록증(만주국에서는 國民手帳) 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충효이데올로기 등 우리에게 낯익은 70년대의 학교와 사회생활에서의 규제분위기는 40여년 전 만주국의 사회분위기를 빼다놓은 것이다.
Ⅴ. 맺음말
이 글은 만주국이 한국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시론적으로 살펴 본 것이다. 만주국은 대한민국의 성립 이후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었다. 특히 만주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박정희 시대에 그 영향은 두드러졌다. 만주국의 제도나 사회분위기와 박정희 시대의 대한민국의 사회분위기에는 유사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유사점을 직접적인 영향 관계로 보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주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모두 파시즘적 성격과 신식민지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만주국과 대한민국에 나타난 유사성이 파시즘 체제 일반이나 신식민지 일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만주국의 특수한 경험이 만주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대한민국의 지도부에 진입한 몇몇 인사들을 통해 의식적인 학습과 모방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전수된 것인지는 보다 세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정치문화 사이에도 상당한 유사점이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등을 거치면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황민화교육, 만주국에서의 식민지 교육, 그리고 일본에서의 군국주의 교육을 모두 받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국군에 복무하던 시절 미국 유학의 경험까지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적인 요소, 만주국적인 요소, 그리고 식민지 조선적인 요소를 모두 갖고 있던 복합적인 인물인 박정희에게서 순수하게 만주적인 것을 골라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현실이 대한민국에 강요한 여러 가지 조건, 즉 국방에 힘쓰는 강력한 반공국가, 미국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서 외형상의 독립국가를 표방해야 했던 처지 등의 조건은 국방이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선이나, 괴뢰성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던 제국 일본보다 만주국의 그림자가 대한민국에 더욱 짙게 드리우게 만들었다.
만주국과 대한민국은 각각 일본과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으며, 일본과 미국이 각각 만주국과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역시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에게 만주국은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곳이었다면, 미국에게 대한민국이 갖는 중요성은 만주국이 일본에게 갖는 중요성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했다. 그는 당연히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물론 미국은 박정희의 삼선개헌이나 흔히 10월유신이라 불리는 친위쿠데타를 용인하는 등 박정희의 개인권력 강화를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의 기대와는 달리 1971년 대한민국 정부와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일본이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 본토를 점령할 경우 천황과 대본영이 만주국으로 이동하여 만주에서 최후까지 결사항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만주국을 중시한 일본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일본이 만주국을 중시한 것처럼 미국도 대한민국을 중시해 주기를 기대했던 박정희는 미국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몹시 분개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려는데로 나아가려 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 대해 불쾌감을 보이며 극히 제한된 의미에서의 반미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박정희 말기에 나타난 한미관계의 불협화음은 박정희가 진정한 자주성을 추구했다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식의 속류 민족주의의 찬사와는 달리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지원과 유사한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기대하다가 그것이 좌절되자 나타난 것이었다. 즉 이는 박정희가 일본과 미국이 각각 만주국과 대한민국에 대해 갖는 이해관계를 잘못 읽은 정치적 미숙성의 표현일 뿐이었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 땅의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박정희 시대의 제도교육과 병영 생활에 의해 훈육된 사람들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을 반대해 싸워 온 사람들 안에도 박정희 시대의 잔재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를 욕하면서도 대부분의 인권운동가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들은 재작년의 주민등록증 갱신에서 별로 거리낌 없이 열손가락 지문을 꽊꽉 눌러 찍었다. 중고등학교와 병영의 분위기는 70년대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론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 요인이 만주국의 영향만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구조, 큰형님 미국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 부모의 나라 일본의 훈육을 받는 만주국의 그림자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Abstrct)
The Shadow of Manchoukuo
over South Korea
Han, Hong Koo
The Korean masses usually think that Manchuria was the theater of ancient Korean history, but Manchuria also served as a hotbed that bred the seeds of north and south Korea. Kim Il Sung and Park Chung Hee, who respectively led two halves of divided Korea, spent their young days in Manchuria. Their Manchurian experiences, although quite opposite in nature, had profound influences over the management of state apparatus and societies.
It was the south Korean military that the advance of the Manchurian group was most conspicuous. The former officers of the Manchurian puppet army who were familiar with the Kwantung Armys control easily adapted themselves with a new situation of the U.S. Armys control of the ROK Army.
The darkest shadow of the Manchoukuo over south Korea could be found in the random execution of civilians during the anti-communist pacification operations. The Japanese counter-guerrilla strategies, especially the tactics of the separation of people from guerrillas, accompanied severe violence and bloodshed. These strategies and tactics were succeeded by the ROK Army in the pacification campaigns during the Korean War, and also adopted in Vietnam by south Korean troops.
South Korean economic development plans had their roots in the Manchoukuo. The economic strategies of park Chung Hee that focused on the export-driven policy and heavy-chemical industrialization based on the military industry shared most with the economic plans of the Manchoukuo rather than those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in Korea or of Japan.
The social atmosphere of the Manchoukuo that the state regulated every aspect of the daily lives of its citizens was revived in south Korea. The Patriotic Ceremony on Monday morning that started with reading the National Education Charter and ended with the Reconstruction exercise; the Military Training Ceremony on Thursday morning that repeated military inspecting and marching in file; the oath to the national flag; the inspection of lunch box at school to regulate consuming of rice; the endless emphasis on sanitation through anti-rat and anti-parasite drives; forced inspection of long hair at school and on the street; morning cleaning of streets mobilizing students and civil servants; anti-communist rally that mobilized tens or hundreds thousand civilians and students; taking of ten finger-prints to issue an ID card: All these very familiar landscapes of south Korea in the 1970s were the duplications of the social atmospheres of the Manchoukuo.
▶ 원문:http://www-2.knu.ac.kr/~china/16hanhong.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