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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류 문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K-POP, K-드라마, K-CINEMA를 필두로 해서 이제는 한식, 한복 등의 K-CULTURE가 일본, 동남아를 비롯하여 유럽,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렇게 한류에 빠진 세계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진면모, 즉 한국의 역사, 철학, 영성문화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렸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과 문화 침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올바른 뿌리 역사와 한국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가치는 지대하다.
본지에서는 환단고기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의 논리를 파헤쳐 보고, 환단고기가 가지고 있는 사서로서의 가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환단고기 출간 과정의 문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계연수 선생이 전해져 내려오는 4권의 책을 한데 묶어 1911년에 발간한 책이다. 이후 계연수의 제자였던 이유립 선생에 의해 1983년 재출간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환단고기의 발간 초기에 서지학적書誌學的 접근에 따른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대한 최근의 시비는 학문적 접근에서 이탈하여 다분히 편향적이고 악의적이다.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1970년대에 창작한 책이라는 음모론적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유립 본인이 『환단고기』를 고쳐 가며 창작하였던 흔적이 발견된다?反論<자유自由
*1)
>라는 잡지에 연재된 역사 관련 기고를 모두 합하여 편집한 것이 『환단고기』이므로 『환단고기』는 최근에 이유립이 저술한 것이라고 위서론자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라는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 책의 내용을 <자유>에 나누어서 게재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순리이다.
*1) 박창암朴蒼巖(190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이 1968년에 창간한 잡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유립 선생을 만나 환단고기를 배우기 시작한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8~ )은 “(대전 은행동의) 좁은 방에서 스승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환단고기 초간본을 글자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증언하였다.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 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 원본이 분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1965년도에 발간된 잡지 <커발한>에는 『환단유기桓檀留記』라는 제목으로 『환단고기』가 소개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환단고기』가 위작僞作되던 과정의 증거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환단유기桓檀留記』는 환단의 역사를 담은 유념해야 할, 유의해야 할 역사서라는 뜻이다. 『환단고기』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에 가제假題를 붙여서 소개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위서론자는 <자유自由>(1976)에 기고된 『환단고기』의 내용과 1979년에 발간된 내용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환단고기』는 점진적으로 수정·보완되어 1979년에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의 영인본에 있는 오탈자를 바로잡은 것을 근거로 위작 운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구나 그 방대한 내용과 시대적 정합성, 그리고 중국 사서와의 비교로 밝혀진 내용의 진실성 등을 고려할 때 어느 한 사람이 『환단고기』를 지어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임채우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곰과 범(웅족과 호족)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환단고기』의 각 권에서 서로 다른 의미와 기록이 보이는 점을 들어 『환단고기』가 한 사람의 저서가 아님을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즉 창작한 것이라면 그 내용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한 『환단고기』 편찬 과정에 의문을 품는다면, 계연수 편집본(1911), 오형기 필사본(1949),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1979),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1983)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 공부를 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말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위서론을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허구적 사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1979년에 저술된 위작 역사서라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오히려 한민족의 정통 역사서에 대한 위서조작설이 아닌가?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1911년에 편집된 책이 1979년에 출간되기까지 60년이 넘게 소요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反論1911년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 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다음 경신년(1980)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한편 계연수가 60년 뒤에 공개하라는 말을 이유립이 단학회 5대 회장인 이용담으로부터 전해 받았을 수 있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대에는 언론·출판이 통제되던 시기였다. 1980년이 넘어서야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역사, 문화에 관한 관심이 일어났고, 또 출판이 자유로워지면서 민족 사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계연수의 전언은 이러한 역사의 대세를 꿰뚫고 나온 지언至言일 터이다. 이유립은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 『환단고기』가 인정받을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그러나 출간 과정은 참고 사항이므로 이것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단정하는 데 단서가 될 수는 없다. 책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문제는 슬쩍 넘어가고 위서로 몰고 가기 위한 시선 흐리기 말장난에 불과하다. 진위 문제는 책 자체를 가지고 얘기할 문제다.
저자인 계연수는 과연 실존 인물인지도 의심된다?反論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 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와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서술되어 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 등이 있다.(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정신철학통편』의 저자 전병훈이 천부경을 언급하면서 그 출처를 계연수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계연수가 단군 신앙 계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1917년에 단군교에 의해서 공개된 〈천부경〉의 전래 내력에 따르면 계연수는 1916년 이전까지 〈천부경〉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계연수가 1911년에 썼다는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이 실려 있어 1920년대 계연수의 행적과 전혀 다르다?反論계연수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이기, 나철 등과 함께 이기가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의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등의 상고 사서를 주석하고 교열 작업에 들어갔다. 이기가 절명하자 계연수는 이기의 유언을 받들어 묘향산 단굴암에 들어가 1911년에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 그때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실려 있는 ‘천부경’이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을 확신하고, 1916년 묘향산 석벽에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탁본하게 된 것이다.
1916년에 탁본한 ‘천부경’과 1911년에 편찬한 ‘천부경’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천부경’은 계연수가 1916년에 묘향산 석벽에서 탁본하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한 ‘천부경’은 이기가 소장하고 있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이미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천부경은 환단고기 이외에도 다른 경로인 노사 기정진의 학맥으로도 전해 내려왔다. 또 일설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묘향산 탁본설을 퍼트렸다는 말이 전해진다. 따라서 천부경이 1916년 이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환단고기』는 1979년에 지어진 책이다?反論현재까지 알려진 『환단고기』 판본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초간본(30권), 1949년 오형기가 필사한 오형기본, 1979년 이 필사본을 조병윤이 광오이해사에서 영인·발간한 광오이해사본, 1983년 이유립이 오형기 필사본을 교정하여 발간한 배달의숙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초간본은 1976년 이유립이 분실하였다.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는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이다. 1980~1990년대에 나온 한글 번역서 『환단고기』는 대부분 광오이해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고, 2000년 이후에는 배달의숙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유립이 분실하였다는 원본이 보존되고 있다면 『환단고기』 위서 논쟁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이 1979년(광오이해사본 출간 연도) 이전부터 월간지 『자유』(1976년부터 기고 시작)에 기고해 오던 글을 모아 『환단고기』를 간행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의 필사본을 영인한 것이고, 오형기 필사본은 이유립의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1949)이 만들어졌고, 그 후 영인본(1979)이 나올 수 있었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 씨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언을 들려주었다.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한다.
당시 『환단고기』 내용을 암송하고 있었고, 이미 『환단고기』를 번역하여 주해註解해 두었던 원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교정한 후에 발간한 것이다. 하지만 위서론자들은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 내용을 암송하여 재발간했다는 사실을 빌미로 꼬투리를 잡아 『환단고기』를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암송하여 창작했다는 비판은 원본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환단고기』 원본이 있기 때문에 암송 창작이란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어떻게든 위서로 규정하기 위해 앞뒤가 안 맞는 주장에 그들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일부 얘기만을 확대 해석하여 인격 모독까지 저지르는 수준 이하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환단고기 출간에 자금을 지원한 오동진 장군의 저서에 환단고기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反論오동진 장군은 홍범도 장군과 함께 『환단고기』 발간에 자금을 제공한 분이므로 『환단고기』를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동진 장군은 독립운동으로 전쟁 중이었고, 바쁜 와중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계연수 선생이 일제에 의해 수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유립 선생에게 『환단고기』를 경신년에 출간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부 인사들만 비밀리에 간직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이유립 선생에 대한 문제?
이유립은 고성 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친의 영향으로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3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가 주관하는 배달의숙에서 계연수, 최시흥 등의 강의를 들었다. 해방 후 환단고기 책을 들고 월남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평생을 배고픔과 멸시 속에서도 역사 광복의 제단에 온전히 인생을 바친 우리 국사학의 아버지시다.
이유립은 커발한 개천각교 교주였고 환단고기는 그 종교의 경전이다?反論커발한 개천각은 환웅, 단군왕검, 고주몽, 치우,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등 국조國祖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69년에 이유립이 마리산에 만든 일종의 사당祠堂이다. 위서론자들은 조상님께 지내는 제사를 확대 해석하여 종교라고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이 건립된 후 있었던 일이다. 단단학회 조영주 선생과 많은 회원들은 단군 계통의 신흥종교에도 개방하여 재정에 도움이 되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는데 후에 회원들에 의해 개천각이 개방되자, 이유립 선생은 동가식서가숙하던 어려운 때에도 객客같이 대영절과 개천절에만 참석해서 행사를 주재하고 개천각 정수관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단학회 부회장을 지낸 조영주 선생의 증언이다.
커발한 개천각은 종교 건물이 아닐뿐더러, ‘개천각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위서론자들이 개천각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었다 하며 개천각교라 운운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종교 단체였다면 타 신흥종교가 개천각에서 행사하는 것을 회원들이 허락할 리가 없다. 단단학회가 종교와는 무관했기 때문에 단군 계열 종교들의 참배를 허락하자고 회원들이 건의할 수 있었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이유립을 태백교 교주라고 날조하여 비난한다. 하지만 태백교는 우리 민족이 예전부터 신앙해 오던 삼신상제님을 받드는 것이지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단을 형성한 조직 신앙이 아니다. 오로지 『환단고기』를 폄훼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고 고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악의에 찬 무책임한 발언들일 뿐이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2일자에는 삼육사 동인 일동이 투고한 ‘삭주 삼육사 창립’ 기사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유립이 철저히 일제에 순응하겠다는 의지가 만발한 내용이다?反論일제 식민 통치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1931년 당시는 어떤 단체든지 조선인이 모여 회합을 할 때는 반드시 주재소에 신고해야 되는 무렵이다. 그야말로 서슬 시퍼렇게 감시 통제가 날을 세우고 있을 때다. 당연히 신고해야만 되는 절차를 신고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유립을 친일파로 모는 조잡스러운 행태는 선전 선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유립은 학교를 마친 뒤 한동안 만주 일대를 유력하다가 1930년 고향에 돌아와서 해학 이기의 신교육 종지를 실천할 목적으로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이 되어 농촌 자력 진흥, 청소년 자유 교양, 국제 동향의 비판, 회람 잡지 발행 등을 실시하다가, 일제로부터 강제해산을 당하면서 한때 천마산에 입산하였다.
이유립은 1933년 친일단체인 조선유학회에 가입했다?反論한 인물을 평가하고 그 행적을 조사하려면 넓은 안목과 식견을 갖고 다양한 자료와 그 당시의 면밀한 정세 판단 및 상황 분석에 기반하여, 냉정한 자세와 객관적인 입장으로 분석 조사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미리 단정해 둔 초점에 맞추어 좁고 편협한 방법으로 그저 입맛에 맞는 사료들만 찢어다가 짜 맞추는 태도는 이미 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는 것이다.
이유립이 장성하여 그동안 보여 주던 고루한 유교에 반기를 들고 장차 민족주의를 창도하려 할 때 부친 이관집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너의 뜻이 옳다면 이는 힘써 해 나갈 일이리라. 그러나 향촌鄕村과 사람들의 의식에 깃든 유교를 업고 나가면 세歲를 얻기가 수월할 것이요 새로이 민족정신을 주창하여 나가는 일은 실로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의 사상적 편린의 핵심은 “구체적으로 민족아를 발견하여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민족 공동체의 삶을 올바르게 구현하자.”는 신념 체계로 요약된다. 이러한 정신은 그 후에 보인 행적에서도 그대로 잘 나타나고 있다. 단군교의 교주가 조선유학회와 손을 잡을 때 두말없이 참여한 행동과 그가 창간호에 쓴 격문檄文의 내용에 고스란히 이런 사상과 의지가 담겨 있음을 본다.
이유립은 안순환이 세운 녹동서원의 명교학원 1기생으로 입교하였다.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시고 단군교를 표방했으나 수업 내용은 모두 유학적 내용이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진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그 시기에 동아일보의 지국장을 지낸 자가 바로 이유립이다?反論이유립은 <조선유교회>에 자리하던 단군교에 대한 일제의 노골적인 간섭이 심해지면서 폐쇄 위기에 몰리자 낙망하여 그곳을 떠났다. 그때 마침 <동아일보>의 필화 사건으로 인한 정간 조치가 풀려 민족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백관수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리하여 1938년 1월 21일부로 삭주 지국이 개설되어 이유립이 지국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불과 4개월여가 지나 5월 1일에 <동아일보> 삭주 지국장 자리를 떠난다. 바로 <동아일보>에서도 차츰 친일적 색채가 농후해지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바치는 듯한 논조’들에 실망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겨우 4개월 남짓 재직하다가 돌연 5월 1일에 사표를 던진 시점이 위에 제시한 <동아일보>의 망언들이 집중적으로 실리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때문에 당연하게 그만둔 절차가 본인의 의사에 의한 퇴직인 의원해직依願解職일 수밖에 없었다.
신동아 2007년 9월호에 이유립 부인 신매녀는 해방 전후 시기에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증언이 있었다. 즉, 이유립 부인도 환단고기를 본 적은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反論신매녀 씨는 글을 모르는 분이다. 『환단고기』는 한자로만 되어 있다. 신매녀 씨가 여러 다른 책들과 함께 있는 『환단고기』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은 『환단고기』 원본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셋째, 지명과 인명 문제
교각살우矯角殺牛, 지엽에 매달리다 큰 것을 놓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경전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후대의 뛰어난 인물들에 의해 보정,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환단고기의 부분적 내용을 트집 잡아 책 전체를 위서로 몰아간다. 환단고기는 위서라는 전제를 깔아 놓고 이를 증명하는 수단과 방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상춘常春’은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다?反論상춘은 장춘長春과 같은 의미로, ‘늘 봄’을 뜻한다. 장춘은 원나라 순제 3년(1343)에 편찬되기 시작한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 여러 번 나오는 지명이다.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反論대표적인 위서론자인 조인성은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위서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명실록明實錄』을 인용하여 명나라 초기에 영고탑로寧古塔路가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명칭은 적어도 명나라 초기(1368)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영고탑을 단지 지명으로만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이다.
영고탑은 원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영고迎鼓터’란 지역으로 북부여北夫餘 이후 황폐화되고 고구려, 대진국의 멸망으로 자체 역사 기록이 사라지면서 그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다만 이름만 간신히 전해지다가 청나라 시조 전설과 맞물려 ‘영고탑寧古塔’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의 흑룡강성 영안시의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가 유래한 곳(요령성 신빈현)과는 다른 곳이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反論산동이라는 말이 『환단고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태백일사』이다.『한서』 「지리지」를 인용하면서 산동이라고 가필한 부분은 「신시본기」에 치우천황의 능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今據漢書地理志컨대 其陵이 在山東東平郡壽張縣闕鄕城中하니 高七丈이오 (『태백일사』 「신시본기」)
『태백일사』는 조선 중종 때 이맥 선생이 쓴 것으로 동평군 수장현이 어딘지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산동을 써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董仲 세 명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反論위서론자들의 주장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 원로, 동중’이라는 인명이 있고, 『세조실록』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에서는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이라는 구절처럼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다면, 몇 사람이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는 기록은 『삼성기』의 저자가 안함로와 원동중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서론자들의 핵심 논점은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책이라는 것이며 위서라는 주장인데, 『세조실록』의 기록은『삼성기』가 그 당시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더욱이 다른 어떤 역사 기록보다 신뢰도가 높은 『세조실록』의 기록을 부정하고 70년이나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하여 위서 운운하는 것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더군다나 왕조 실록은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이다. 그런데 이유립이 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본 것은 1980년대 중반 현 한배달회장 박정학을 만나고서였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인용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내용들은 어떻게 알았으며 이유립은 그 짧은 시간에 『환단고기』를 어떻게 위작할 수 있단 말인가?
일제의 사서史書 수탈收奪
백당 문정창文定昌(1899~1980) 선생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박문당, 1967)에서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한 1910년부터 1911년 말까지 약 1년간, 조선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의 주도로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국 각지에서 51종 20만 권의 사서를 강탈하거나 소각했다.”고 밝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료 수집 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9백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9백50종이다.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 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469매, 고기록류 3천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일제의 사서 수탈과 파괴는 식민지 지배 전 기간에 걸쳐 철저하고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사서 수탈에 대해 ‘역사 관련 책과는 관련이 없고 그 효과가 미비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이 있다. 침략자들의 간교한 혓바닥에 놀아나 자기의 영혼조차 뺏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사학에는 세 가지 병독病毒이 있다. 바로 왜독·중독·양독의 삼독三毒이다. 그러나 이 삼독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우리들 자신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정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 질서에 안착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우리의 역사를 수거하고 감추어 버렸다.
일제는 여기에 더해 우리를 영원히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사서를 멸절시키려 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역사 파괴의 결론이 ‘단군신화’라는 용어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를 펼치는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알아보자.
여섯째, 고고학적 및 과학적 증명의 문제
역사학에는 문헌학文獻學과 고고학考古學이 있다.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이지만 이 중에서도 문헌학이 주主가 되고 고고학이 부副가 된다. 유물사학으로도 불리는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문헌의 내용을 확인·증명·보완해 준다. 대표적인 예가 폼페이 발굴이다. 학자들이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파악해 왔던 고대 로마의 문명상이 폼페이 발굴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발굴 이전에도 폼페이는 기록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고학을 중시하여, 발굴되지 않았거나 증명되지 않은 역사 기록을 부정하는 행위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음이요 더 나아가 합리의 가면을 쓴 억지 또는 마타도어(흑색선전黑色宣傳)를 의심케 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反論2001년 이후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약 10km 떨어진 하가점夏家店에서 BCE 2400~BCE 1500년대에 이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어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지는 대규모 분묘터, 제단, 무기 등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 왕국의 성립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토품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 토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상의 발굴 성과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확립되거나 사회 기반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 준다.
중국의 학자들은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을 가지고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의 유형을 추정하였다. 이들은 ‘고동북유형古東北類型’에 속한다고 하는데(朱泓 길림대 교수), 중화인인 ‘고화북유형古華北類型’과는 다른 인종이다. 그런데 능하문화凌河文化(=비파형동검문화=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를 영위했던 문화인들도 ‘고동북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나 부여 등 예맥계 종족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화는 중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시작 시점이 BCE 25세기~BCE 20세기라는 의미는 고조선의 개국 시점인 BCE 2333년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가점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영역에 포함되는 곳으로 그 문화의 주역은 한민족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청동기 유적인 강릉 교동 1호 거주지는 BCE 1878년경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BCE 25세기 이전의 것으로 검증된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과 청동 단추가 출토되었다. 고조선 건국을 BCE 10세기경으로 한정하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현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적 불성실과 오만의 소치이다.
배달국의 유물로서 현재 출토된 것이 없다?反論배달국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은 요서 지역(발해 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紅山文化이다. 연대 및 강역이 배달국의 시기와 일치한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인 에밀 리쌍 등이 발굴하기 시작해서 문화대혁명이 지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출현 연대는 최고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 문명이 약 5천5백 년 전에 시작한 것에 비하면 홍산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1)
그리고 그 유적에서 나온 돌무지무덤 양식 등은 중국 내륙에서 발견되지 않는 동이족 고유의 무덤 양식이다.
우하량 여신전女神殿 터에서는 여신상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토템 신앙을 보여 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에서도 보인다.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들은 그 주인공이 동이족임을 말해 주고 있다.
1) 팔레스타인의 예리코Jericho(구약 이름은 여리고) 유적에서 1만 년 전 유물로 추정이 되는 성벽 등이 출토가 되었으나, 토기 사용이 없는 원시적인 단계였고, BCE 4000년에 이르러서 도시 문화에 해당하는 문명이 나타났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환단고기』의 오성취합 기록에 대해서 전용훈 박사는 오성취합이 5세기경 중국의 천문 서적에서 계산 방법이 밝혀진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후대에 하나라가 상나라로 교체되는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산하여 기록한 것을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나라의 마지막 걸왕 때의 오성착행五星錯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시기도 『환단고기』와 근사하다?反論1993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했다. 박 교수는 오성취루 현상이 1년의 오차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단군 원년을 정월 세수로 계산한 무진(BCE 2333)년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10월 세수로 따져 보면 원년은 정묘(BCE 2334)년이 되므로 천문학과 역사 기록의 오차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戊辰五十年(무진오십년)이라 五星(오성)이 聚婁(취루)하고 黃鶴(황학)이 來棲苑松(내서원송)하니라
재위 50년 무진(단기 601, 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흘달단군 조’)
1900년대 초를 살았던 계연수가 어떻게 평균 250년에 한 번 나타나는 매우 드문 천문 현상을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출현 시기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겠는가? 박창범 교수의 발표 이후 국내 사학자들 사이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진지한 서지학적 검토의 필요성이 적극 제기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일반인이 남겨서는 역사 기록으로 등재될 수 없다. 고도의 천문학적 지식을 가진, 인증認證된 기관이어야 가능하다. 바로 천문대天文臺(감성대監星臺)이다. 당시에 이미 천문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문대가 존재했다는 것은 천문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더 상위의 조직이 있었음을 말하는데 바로 국가(왕조)가 존재했다는 반증이다. 3,000년 전에 만주 땅에서 천문대를 포함한 여러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나라,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고조선古朝鮮)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사랑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석재는 자신의 저서 『개천기』에서 “오행 현상과 같은 천문 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천문 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오성취루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면, 1979년 이전에 이미 BCE 1733년 오행결집 현상을 이유립 선생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제대로 된 컴퓨터도 없었고, 손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계산이 가능하다면 오성이 모인 위치가 정확히 루婁성 근처가 되어야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실제로는 루婁성에 모이지 않고, 정井의 위치에 모이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의 기록이기 때문에 28방위 기준이 다르다는 등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작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굳이 어려운 천문 현상을 조작할 필요는 없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의 이름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 묘지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자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쓰인 기록인 것을 보여 준다?反論이 주장 역시 문헌학과 고고학의 순서도 분별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무령왕의 휘가 사마이며, 서기 523(계묘년) 5월에 붕어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 동일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모순인가?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1971년 이후에 쓰였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주장이 모순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 외에는 어느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朝代記(조대기)에 曰(왈) 淵蓋蘇文(연개소문)은 一云蓋金(일운개금)이니 姓(성)은 淵氏(연씨)오 其先(기선)은 鳳城人也(봉성인야)라 父曰(부왈)
太祚(태조)오 祖曰子遊(조왈자유)오 曾祖曰廣(증조왈광)이니 並爲莫離支(병위막리지)라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1923년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 묘비에서 확인되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환단고기』가 말하는 장수왕의 연호 ‘건흥’은 1915년 충주에서 발견된 불상 광배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1915년 이후에 쓰인 책이다?反論역사 기록의 진실 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시기적으로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밝혀 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위서론자들의 이 주장은 오히려 역사 기록이 유물로 증명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환단고기』가 1915년 이전에 저술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현재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굴되는 홍산문화 유적도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왕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그러나 관련 사서가 『환단고기』 이외에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불상에 나오는 건흥 5년, 병진년이 서기 몇 년도인지, 장수왕의 연호가 맞는지조차 확인을 못 하고 있는 현실이다.
『환단고기』에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어떻게 3,301년 동안 7명의 환인이 통치를 할 수 있었는가?反論동양 의학서 고전인 『황제내경』 제1장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먼 옛날에 누렸던 장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백 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기백이 ‘그들은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구약전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도 노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백 살의 장수를 누렸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에서 동방 선의 최고最古 조상으로 환인을 지목하는 것에서도 환국은 인간이 선仙의 경지에서 살았던 조화 시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전에 『환단고기』 내용을 인용한 책이 없다. 이전 기록에 제목이 알려져 있는 경우는 있으나 비교 검증할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反論『환단고기』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고유 사서들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고유의 정신문화를 밝혀 주고 있다. 불교, 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뿌리문화 속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합일 사상을 비롯하여, 불교 유교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중국과 일본은 그들보다 훨씬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 사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들은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 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하지만 일부 사서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왔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 역시 ‘고기古記’라고 하여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 시대를 기록한 옛 기록의 존재를 인정했다.
古記(고기)에 云(운) 昔有桓国(석유환국)하니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 『삼국유사』 임신본)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 『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성리학 중심의 통치 이념과 사관을 구축하기 위해 유교 문화에 부합되지 않는 전통 사서와 도서들을 조정에서 모조리 수거하였다. 그리하여 고유 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단지 책 이름과 저자 이름만이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만약 수거에 응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 발각되면 참수를 당하는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예종, 성종 당시 세 차례에 걸쳐 고조선비기,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등을 강제로 수거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국왕 3대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시대의 어떤 학자도 한민족 고유의 사서들을 인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 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다. 사료가 부족하니까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여섯째, 고고학적 및 과학적 증명의 문제
역사학에는 문헌학文獻學과 고고학考古學이 있다.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이지만 이 중에서도 문헌학이 주主가 되고 고고학이 부副가 된다. 유물사학으로도 불리는 고고학은 발굴을 통해 문헌의 내용을 확인·증명·보완해 준다. 대표적인 예가 폼페이 발굴이다. 학자들이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파악해 왔던 고대 로마의 문명상이 폼페이 발굴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발굴 이전에도 폼페이는 기록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고학을 중시하여, 발굴되지 않았거나 증명되지 않은 역사 기록을 부정하는 행위는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어리석음이요 더 나아가 합리의 가면을 쓴 억지 또는 마타도어(흑색선전黑色宣傳)를 의심케 한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反論2001년 이후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약 10km 떨어진 하가점夏家店에서 BCE 2400~BCE 1500년대에 이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어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 유적지는 대규모 분묘터, 제단, 무기 등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 왕국의 성립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출토품은 고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 토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상의 발굴 성과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형태가 확립되거나 사회 기반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 준다.
중국의 학자들은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을 가지고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의 유형을 추정하였다. 이들은 ‘고동북유형古東北類型’에 속한다고 하는데(朱泓 길림대 교수), 중화인인 ‘고화북유형古華北類型’과는 다른 인종이다. 그런데 능하문화凌河文化(=비파형동검문화=십이대영자문화十二臺營子文化)를 영위했던 문화인들도 ‘고동북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고조선이나 부여 등 예맥계 종족은 ‘고동북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화는 중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시작 시점이 BCE 25세기~BCE 20세기라는 의미는 고조선의 개국 시점인 BCE 2333년과 무관하지는 않다. 하가점하층에서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은 청동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한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고조선 영역에 포함되는 곳으로 그 문화의 주역은 한민족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청동기 유적인 강릉 교동 1호 거주지는 BCE 1878년경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BCE 25세기 이전의 것으로 검증된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과 청동 단추가 출토되었다. 고조선 건국을 BCE 10세기경으로 한정하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현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적 불성실과 오만의 소치이다.
배달국의 유물로서 현재 출토된 것이 없다?反論배달국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은 요서 지역(발해 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紅山文化이다. 연대 및 강역이 배달국의 시기와 일치한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인 에밀 리쌍 등이 발굴하기 시작해서 문화대혁명이 지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홍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 계급이 분화된 국가 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출현 연대는 최고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 문명이 약 5천5백 년 전에 시작한 것에 비하면 홍산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1)
그리고 그 유적에서 나온 돌무지무덤 양식 등은 중국 내륙에서 발견되지 않는 동이족 고유의 무덤 양식이다.
우하량 여신전女神殿 터에서는 여신상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토템 신앙을 보여 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에서도 보인다. 홍산문화의 다양한 유물들은 그 주인공이 동이족임을 말해 주고 있다.
1) 팔레스타인의 예리코Jericho(구약 이름은 여리고) 유적에서 1만 년 전 유물로 추정이 되는 성벽 등이 출토가 되었으나, 토기 사용이 없는 원시적인 단계였고, BCE 4000년에 이르러서 도시 문화에 해당하는 문명이 나타났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환단고기』의 오성취합 기록에 대해서 전용훈 박사는 오성취합이 5세기경 중국의 천문 서적에서 계산 방법이 밝혀진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후대에 하나라가 상나라로 교체되는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산하여 기록한 것을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실제로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나라의 마지막 걸왕 때의 오성착행五星錯行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시기도 『환단고기』와 근사하다?反論1993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세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했다. 박 교수는 오성취루 현상이 1년의 오차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단군 원년을 정월 세수로 계산한 무진(BCE 2333)년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10월 세수로 따져 보면 원년은 정묘(BCE 2334)년이 되므로 천문학과 역사 기록의 오차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戊辰五十年(무진오십년)이라 五星(오성)이 聚婁(취루)하고 黃鶴(황학)이 來棲苑松(내서원송)하니라
재위 50년 무진(단기 601, 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누성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13세 흘달단군 조’)
1900년대 초를 살았던 계연수가 어떻게 평균 250년에 한 번 나타나는 매우 드문 천문 현상을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출현 시기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겠는가? 박창범 교수의 발표 이후 국내 사학자들 사이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진지한 서지학적 검토의 필요성이 적극 제기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일반인이 남겨서는 역사 기록으로 등재될 수 없다. 고도의 천문학적 지식을 가진, 인증認證된 기관이어야 가능하다. 바로 천문대天文臺(감성대監星臺)이다. 당시에 이미 천문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문대가 존재했다는 것은 천문대를 조직하고 운영할 수 있는 더 상위의 조직이 있었음을 말하는데 바로 국가(왕조)가 존재했다는 반증이다. 3,000년 전에 만주 땅에서 천문대를 포함한 여러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던 나라, 바로 단군조선檀君朝鮮(고조선古朝鮮)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사랑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석재는 자신의 저서 『개천기』에서 “오행 현상과 같은 천문 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천문 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오성취루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면, 1979년 이전에 이미 BCE 1733년 오행결집 현상을 이유립 선생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제대로 된 컴퓨터도 없었고, 손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계산이 가능하다면 오성이 모인 위치가 정확히 루婁성 근처가 되어야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실제로는 루婁성에 모이지 않고, 정井의 위치에 모이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의 기록이기 때문에 28방위 기준이 다르다는 등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작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굳이 어려운 천문 현상을 조작할 필요는 없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의 이름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 묘지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자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쓰인 기록인 것을 보여 준다?反論이 주장 역시 문헌학과 고고학의 순서도 분별하지 못하는 주장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무령왕의 휘가 사마이며, 서기 523(계묘년) 5월에 붕어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 동일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모순인가?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1971년 이후에 쓰였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주장이 모순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 외에는 어느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朝代記(조대기)에 曰(왈) 淵蓋蘇文(연개소문)은 一云蓋金(일운개금)이니 姓(성)은 淵氏(연씨)오 其先(기선)은 鳳城人也(봉성인야)라 父曰(부왈)
太祚(태조)오 祖曰子遊(조왈자유)오 曾祖曰廣(증조왈광)이니 並爲莫離支(병위막리지)라
『조대기朝代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1923년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 묘비에서 확인되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환단고기』가 말하는 장수왕의 연호 ‘건흥’은 1915년 충주에서 발견된 불상 광배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1915년 이후에 쓰인 책이다?反論역사 기록의 진실 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시기적으로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 여부를 밝혀 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위서론자들의 이 주장은 오히려 역사 기록이 유물로 증명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환단고기』가 1915년 이전에 저술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현재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굴되는 홍산문화 유적도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 ‘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열제는 임자년인 412년에 붕어하였다. 즉위년 칭원법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할 경우 장수왕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불상 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 때의 연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신빙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출처: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
그러나 관련 사서가 『환단고기』 이외에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불상에 나오는 건흥 5년, 병진년이 서기 몇 년도인지, 장수왕의 연호가 맞는지조차 확인을 못 하고 있는 현실이다.
『환단고기』에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어떻게 3,301년 동안 7명의 환인이 통치를 할 수 있었는가?反論동양 의학서 고전인 『황제내경』 제1장에 나오는 황제와 기백의 대화에서도 먼 옛날에 누렸던 장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어찌하여 백 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는가?’라는 황제의 질문에 기백이 ‘그들은 천지의 법칙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이라 답하였다. 『구약전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도 노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백 살의 장수를 누렸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175세를 살았다. 우리나라의 신선 계보를 적은 『청학집』에서 동방 선의 최고最古 조상으로 환인을 지목하는 것에서도 환국은 인간이 선仙의 경지에서 살았던 조화 시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전에 『환단고기』 내용을 인용한 책이 없다. 이전 기록에 제목이 알려져 있는 경우는 있으나 비교 검증할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反論『환단고기』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고유 사서들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고유의 정신문화를 밝혀 주고 있다. 불교, 유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뿌리문화 속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합일 사상을 비롯하여, 불교 유교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중국과 일본은 그들보다 훨씬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 사서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러한 사서들은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 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다. 하지만 일부 사서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내려왔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 역시 ‘고기古記’라고 하여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 시대를 기록한 옛 기록의 존재를 인정했다.
古記(고기)에 云(운) 昔有桓国(석유환국)하니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 『삼국유사』 임신본)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 『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성리학 중심의 통치 이념과 사관을 구축하기 위해 유교 문화에 부합되지 않는 전통 사서와 도서들을 조정에서 모조리 수거하였다. 그리하여 고유 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단지 책 이름과 저자 이름만이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만약 수거에 응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 발각되면 참수를 당하는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예종, 성종 당시 세 차례에 걸쳐 고조선비기,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등을 강제로 수거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국왕 3대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시대의 어떤 학자도 한민족 고유의 사서들을 인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 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다. 사료가 부족하니까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일곱째, 환단고기 내용의 문제
사물事物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물에 접근했을 때는 사물의 진실이 왜곡될 여지가 많다. 그리하여 학문의 세계에서 중도中道를 견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도는 자신의 의도와 진실, 상식, 법칙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이다. 그 의도가 너무 앞서나가거나 의도에 불순한 목적이 섞인다면 학문은 중도를 잃고 저급한 정치政治, 선전 행위로 전락되어 버린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환단고기』 비판에는 중도는커녕 일말의 학자적 양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환단고기』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학문권력을 지키기 위해 일제 침략자의 편에 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온 국민을 속이는 사기행각이요, 민족반역의 길이다.
『환단고기』에는 과거 일본, 독일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국제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反論『환단고기』 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가 홍익인간
1)
이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역사 뿌리문화를 찾으려는 것이다. 물론 왜곡된 역사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외국에 나가 보면 국적이 한국이었다고 다 한국인일까? 대부분 정체성을 상실해서 왜 한국인인지를 모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었지만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이 단결하여 없던 나라도 만들어 냈다. 올바른 뿌리 역사가 아니면 모두 분열하여 나라는 사라지고 만다.
민족의 정체성, 우리는 어떤 민족이고 어떤 사상과 문화를 가지고 있던 나라인지에 대해서 그 어떤 책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하는 책이 또한 『환단고기』이다. 본래의 맛, 본래 문화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과도한 민족주의가 되어 세계화를 해치게 될까?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들의 뿌리를 바로 찾고 각 문화권의 특색을 살릴 때 그리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의 발전이 있게 된다.
1) 홍익이라는 것은 민족주의 차원도 초월했습니다. 중국의 중화사관은 자기가 세계를 지배해야 되는 세계의 중심이고, 일본의 황국사관은 일본의 천황이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주의입니다. 둘 다 독선 배타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이지만, 우리 홍익사상, 이 『환단고기』에 기초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연구해 보면 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세계주의적인 평화사상이라고 확신합니다. - 『아시아이상주의 저자 이홍범 박사 강연자료집』, 2013.12.8. 27쪽.
동북공정을 주도한 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자민劉子敏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주장이 비학술적이라 비판하였는데, 그 논거로 『환단고기』를 들고 있다. 『환단고기』가 오히려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적되기도 한다?反論어이없는 주장이다. 이제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 학자의 말조차 신성시하는 위서론자들의 난센스다. 『환단고기』가 아니면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데 문제가 될 게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학계는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핵심 논리가 바로 한사군의 유민遺民이 만든 나라가 고구려라는 점이다.
2)
『환단고기』만이 동북공정을 막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밝혀 주는 유일한 책이다. 단군조선의 성립과 변천, 그리고 멸망의 과정을 소상하게 밝혀 주고, 특히 단군조선과 중국 고대 왕조인 당요, 우순, 하우씨, 그리고 상나라, 주나라와 얽힌 국제 사건을 밝혀 준다. 고대 중국은 단군조선을 문화의 조국, 천자국으로 모시던 지방정권이었다. 한사군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역사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癸酉十三年(계유십삼년)이라 漢劉徹(한유철)이 寇平那(구평나)하야
滅右渠(멸우거)러니 仍欲易置四郡(잉욕역치사군)하야 盛以兵(성이병)으로
四侵(사침)이라.
於是(어시)에 高豆莫汗(고두막한)이 倡義起兵(창의기병)하야
所至(지소)에 連破漢寇(연파한구)할새 遺民(유민)이 四應(사응)하야
以助戰(이조전)하니 軍報大振(군보대진)하니라.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환단고기』에는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숨겨졌던 영웅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등장한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제왕 중의 하나로 꼽는 한 무제를 패퇴시킨 분이 바로 이분이다. 「북부여기」에 따르면 한사군은 한 무제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기 위해 한사군을 역사 사실로 기정사실화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우리의 강단사학자들은 여기서 한술 더 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 땅으로 옮겨 버렸다.
山上帝元年(산상제원년)에 遣弟罽須(견제계수)하사 攻破公孫度(공파공손탁)하시고 伐玄菟樂浪(벌현도낙랑)하사 滅之(멸지)하시니 遼東(요동)이 悉平(실평)하니라
고구려 (10세) 산상제 원년(단기 2530, CE 197년), 아우 계수罽須를 보내어 공손탁公孫度을 쳐부수고,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함으로써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고구려국본기」)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197년에 현도와 낙랑을 쳐서 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도와 낙랑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곳이 평나인데 바로 우거의 도읍이 있었던 곳이다. 곧 번한의 수도였던 왕험성이자 지금의 창려 지역이다. 이것은 중국 측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라는 기록이 있다. 갈석산이 있는 낙랑군 수성현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란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주류 사학은 물론 한국의 주류 사학까지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한다. 하지만 낙랑군의 중심지 수성현이 갈석산 근처에 있었으니 당연히 낙랑군 역시 그 일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땅을 떠서 옮기는 귀신같은 재주’(신채호)이다. 종합해 보면 한사군은 한무제의 희망 사항으로 출발했고, 존재를 인정한다 해도 4군이 아닌 2군을 인정할 수 있다. 그 위치도 지금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이다.
동북공정은 이러한 역사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역사사기극이다. 『환단고기』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가장 장애가 되는 책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환단고기』를 부정해야 동북공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강단사학에서 동북공정을 방관하고 있고, 오히려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핵심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2) Jiang makes no bones about his position that the Gaogouli/Koguryo Kingdom was Chinese. It was ‘‘an ancient local regime of our country whose people were mainly ethnic Han migrants,’’ he writes. He adds, ‘‘Because of geography, their economy and culture could not keep pace with the interior. Gradually, they became indigenized and the central plains dynasties came to see them as Yi and Di tribes.’’(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DECEMBER 11, 2012)
지앙(창춘 사범대학 동북아시아 연구소)은 고구려가 중국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말한다. 그는 “주로 한나라 이주민에 의해 건설된 지방정권이었다.”라고 썼다. 왜냐하면 지정학적으로 그들의 경제와 문화는 그들 내부에 의해서 발전될 수 없었다.(한나라에 의해 유입된 경제 문화로 발전했다.) 점차적으로 그들은(이주민) 토착화되고, 동이족으로 보게 되었다. (미의회 조사국, 2012.12.11.)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은 우리 민족과 관련 없는 사람이다. 묘족의 조상으로 모셔지고 있는 분이다?反論중국의 많은 기록은 치우가 동이東夷인 구려九黎의 천자天子라 하고 있다. 『상서전』 에는 ‘구려국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사기집해』 에 응소는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칭이다’라고 하였다. 『사기색은』 에서 공안국은 ‘구려의 임금 호칭을 치우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에서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제압했다고 나오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황제헌원을 굴복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의 「고기古記」에서 환웅은 세 명의 신하로 풍백風伯, 우사雨師, 그리고 운사雲師를 두었다. 『산해경』 에서 치우는 그의 수하로 풍백과 우사를 부린다고 하였으며, 『춘추좌전』 소공17년 조와 심지어 『사기』 에서도 황제는 운사라고 하였다. 결론은 치우가 천왕이고, 황제가 그의 신하이다.
3)
치우천왕은 황제헌원을 굴복시키고 서방 한족에게 동방의 신교와 천자문화를 전해 준 대제왕으로서 병법의 비조이다. 『사기』 「봉선서」에 팔신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천주는 천지만물의 조상인 삼신상제님을, 병주는 병가의 원原시조인 치우천왕을 뜻한다.
주周나라 혁명의 일등 공신이며 병법의 중시조인 동이족의 재상 강태공姜太公도 제나라에 왕으로 분봉된 뒤 팔신께 제사를 올리면서 치우천왕을 병주兵主로 모셨다. 이후 진秦·한漢대에 이르기까지 동이족과 한족은 10월에 치우천왕의 능陵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뻗쳐올랐으며, 그 붉은 기운을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둑제’를 지냈는데, 고대로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서 군신軍神 치우를 상징하는 깃발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大早旗’라고 불렀다. 조선은 둑제를 국가 제사인 소사小祀의 하나로 정비하고 전국에 둑소를 마련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둑제는 서울과 각 지방의 병영·수영에서 각각 시행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 에 전쟁 중 둑제를 세 차례 거행하였다고 기록했다. 서울의 뚝섬에는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가 있었는데, ‘뚝섬’이라는 이름은 이 둑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둑신사에는 높이 6자, 폭 36자의 벽화가 있었는데, 치우와 헌원과의 싸움인 탁록전을 그린 그림으로 일제 말기까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묘족은 『회남자』 권11 제속훈에 있는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묘苗라 했다.”라는 구절과 『산해경』 권17 대황북경에 나오는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 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묘민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어 보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 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인류원한의 뿌리 단주』 (이재석, 2008)에는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 가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국 역사서에 따르면 치우가 탁록대전에서 황제에게 패한 후 묘족 대부분이 남쪽 장강과 회수 유역으로 이동하여 삼묘를 형성했고, 다시 요·순·우 등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산해경』 에는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 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는 것이다.
3) 박병섭, 2011, 『사기』 오제본기와 그의 전거( 『대대례기』 「제계성」 , 『공자가어』 「오제덕」 , 『춘추」 , 『국어」 , 『상서』 ) 사이의 비교분석-천왕, 치우와 그의 신하 운사, 황제(1)- , 선도문화 제11권 168쪽.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동방 민족, 동이東夷라고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이는 후한 때 만들어진 최초의 한자사전, 『설문해자』 에 나온다. 이夷가 동이를 뜻하게 된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이다?反論역사시대 이전 동이족과 한족이 처음 접촉한 때, 상대방의 특징을 상형화하여 그림글자가 나타났다. 그 후에 문명이 더욱 진화하면서 종족의 호칭으로 표현해 낸 한자 형태가 『설문해자』 의 이夷다. 즉 설문해자의 자형字形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동이의 습속을 표현한 갑골甲骨에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결코 동이東夷라고 부른 적이 없다. 광명光明처럼 환한 민족, 하늘의 아들인 밝은 민족이라 칭하였기에 구환九桓, 박달 등이라 하였다. 그 후 주나라 시대에 화하족이라 자처한 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땅을 중원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쪽에 있던 외족外族을 동이東夷, 서쪽에 있으면 서이西夷(후에는 창을 잘 사용한 흉포한 무리라 하여 서융西戎으로 바꾸어 부른다), 북쪽에 있으면 북적北狄(狄도 밝은 이들이란 뜻이다)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사실상 이족夷族이었다. 따라서 화하족華夏族과 접촉하면서 우리를 표현하기 시작한 ‘이夷’라는 명칭이 나오기 전에도 우리 민족은 우리 나름의 존재 형태와 생활 풍습을 가지고 그곳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류문명의 뿌리 동이』 (김선주, 2009)에는 동이 명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한 무제 때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 를 저술하면서 동이의 역사를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설문해자』 의 내용대로 동이는 춘추전국 시대까지는 동방의 큰 활을 쓰는 어진 민족으로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 무제 중심으로 기록된 『사기』 에는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기록이 되기 시작했다. 즉 자신들이 중심에 있고, 그 변방에 있는 나라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 오랑캐 명칭으로 왜곡한 것이다. 특히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서는 한나라 이전에 쓰던 명칭과 오랑캐의 명칭을 구분하지 않고 써서 더욱 혼란을 초래하였다.
『환단고기』 에는 3세 가륵단군 때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가림토가 일본의 신대 문자가 되고, 세종대왕 한글 창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가림토는 존재하지 않은 문자다?反論길림시 송호상 교수는 “동이민족 논설 중 일부"에서 ‘가림토 문자를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산동성山東省 환대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加臨土 문자(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미터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 문자는 C14 측정 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문자는 한글과 똑같으며 지금도 인도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인도, 수메르가 서로 교류하였으니 이때 이후에 가림토가 전해졌을 것인데 인도에서 쓰는 가림토가 언제 전해졌는지 또 일본의 아히루 신대 문자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앞으로 좀 더 연구해야 한다.
세종실록 25년 12월 조에 “......기자방고전(其字倣古篆)”이라고 하여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하였으나 전자篆字에서는 한글 원형을 모두 찾기가 어렵다.
일본 사학자 고쿄 기요히코吾鄕淸彦는 그의 저서 『일본신대문자神代文字: 대마도에서 발견』 에서 “아히루 문자와 한글이 친자親子 관계에 있다.”는 것을 논하면서 “아히루 문자는 실크로드계의 문자”라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런고로 가림다加臨多 문자 즉 원시 한글이 고조선에서 창작된 문자인 이상 한글계의 아히루 문자가 대마도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쿄 기요히코의 연구는 한자 이전에 문자가 우리나라에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한글이 백지 상태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고 소위 한글의 전신인 원시 한글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오랜된 삼국유사 판본에는 ‘석유환국’ 부분의 국 자만 이라고 나와 있고, 그 뒤에는 일반적인 나라 국國이 또 나온다. 뒤에는 정자인 국國 자가 나오는데, 왜 굳이 석유환국昔有桓國 부분만 의 약자로 쓴 것인가. 애초에 가 因 자의 이체자異體字가 아닌가?反論이에 대해서는 『고조선 사라진 역사』 (성삼제, 2006)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1904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발행한 『삼국유사』 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2년 전 동경제대 사학과에서 기존에 있던 삼국유사 판본을 교정하여 발간한 것이다. 그래서 실수로 석유환국이라고 했을 확률은 적다.
그런데 두 책 모두 사학과 대학원 과정 교재로 사용된 책인데, 이마니시 류는 그 책을 활용하지 않고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임신가필본’을 축소해서 영인했다. 그것이 1921년 교토대학에서 발행한 『삼국유사』 인데, 당시 임신가필본(정덕본을 가필한 판본)은 덧칠한 티가 나고,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당시 최남선 선생 등은 석유환국을 석유환인으로 조작하려고 하는 의도가 보인다며 이마니시 류가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강단사학에서는 조작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정덕본(조선 중종 임신년에 제작해서 임신본이라고도 하며 목판본이다)과 그보다 오래된 석남본(필사본)이 있는데, 더 오래된 석남본에서 환인의 약자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본에는 囯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서론자들은 정덕본보다 오래된 고판본인 석남본에 석유환국 부분에 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이것을 빌미로, 자는 因의 약자라며, 원래 환인이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목판본은 잘못해서 오탈자가 생기면 안 되므로 더욱 신중히 해서 실수가 적은 게 특징인 판본이다. 오래된 것이 석남본이라 할지라도 후에 나온 정덕본이 오히려 원본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고판본인 석남본의 석유환국 부분에 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정룡, 이근식 공저인 <삼국유사 교감연구>에서는 분명히 이 나라 국國의 약자라고 했다. 게다가 고려대장경에는 자가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영어 번역도 함께 나오는데, 因은 cause, reason, by, because(of)라고 되어 있고, 口+土는 erect, proud, upright, bald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를 因의 이체자로 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자와 因자가 같은지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석유환인이든 석유환국이든 모두 역사 사실에 부합한다. 환국이라는 나라가 실재했다면 당연히 그 통치자인 환인의 존재도 성립하게 된다.
환국, 배달국의 존재에 대한 역사 기록은 숱하게 존재한다.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환국, 배달, 조선으로부터 나라가 이어져 왔다는 분명한 국통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환국, 배달, 단군조선을 우리의 뿌리 국가로 인식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던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환국, 배달, 단군을 계승했다는 확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처음 환국이 창립된 이래 단군 부여 삼한 삼국 고려 조선 및 대한민국을 거쳐 5천 년의 국가 주권은 한민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한국 강토에 근거해 서로 물려주면서 큰 난리를 겪어도 우뚝하게 독립하였고 민족의 광채를 보전하며 백 번 전쟁에 분발하여 시종일관하였고 전 국가의 인격을 보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절 선언문 1942.3.1.)
일본의 글자 조작질은 실제 역사를 신화로 돌리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이후 그들은 ‘단군신화’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배달국, 환국도 함께 신화 속으로 날려 버렸다.
‘단군 이야기는 몽고 침입 시기에 국난 극복의 목적으로 일연 스님이 만들었다’는 주장은 망설에 가깝다. 일부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에는 학문적 양심이 없다. 침략자를 옹호하는, 원수에게 영혼을 파는 얼빠진 행위도 비일비재하다.
사마천 『사기』 에는 환국, 배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대종교에서 1909년에 배달이라는 나라 이름도 지어낸 것이다?反論중국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세 가지 고유 필법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이 춘추필법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이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역사를 기록한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없는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 중국 역사 기록에도 ‘청구靑丘’의 기록은 등장한다. 청구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광대하게 넓히신 이후 옮기신 두 번째 수도의 이름이다. 배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청구’를 통해 배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발견된 홍산문화는 배달국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 형성의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는 문헌이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고학적 유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며 『환단고기』를 점점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삼국유사』 에는 요임금 시대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한다. 어떤 조직 체계가 없이 왕이 어느 순간 새롭게 나오는 게 아니다. 조직론적으로 보면, 앞선 국가 세력이 반드시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환국에 대한 명칭은 우리나라 다양한 고전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배달은 신시神市라는 명칭으로 많이 언급된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150쪽 참조)
『환단고기』 에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분초의 단위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反論환국의 중기 시대 이후라 할 수 있는, BCE 50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거석 문명, BCE 3500년경 지중해의 크레타섬에서 시작된 미노스 문명 등 고대 유럽 문명을 연구한 서양 학자들은, 고대인들이 지구가 1년 동안 자전하는 횟수가 365회인지 366회인지를 놓고 논쟁할 정도로 세밀한 천문 관측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4)
作曆(작력)하사 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이삼백육십오일오시사십팔분사십육초)로 爲一年也(위일년야)하시니 此乃三神一軆上尊之遺法也(차내삼신일체상존지유법야)니라.
(환웅천황이) 책력을 지어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바로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에 계시는 상제님[三神一體上尊]께서 남겨 주신 법도이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위 내용으로 볼 때 배달국 시대에도 깨달음(上尊之遺法)을 바탕으로 한 천문학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은 또한 달과 태양의 크기도 측정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도량형도 만들었다. 그들이 사용한 관측 단위는 지금과 다르지만, 그들이 잰 수치는 현대 천문학의 관측 결과와 거의 동일하게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석 유적지인 영국 스톤헨지의 거석들은 달과 태양이 지나가는 열두 곳의 주요 위치에 맞추어 정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고대인의 놀라운 천문 기술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태고 시대 인류는 신의 계시를 받아 내려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천지광명 속에서 무병장수하는 삶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 탐구를 바탕으로 놀라운 수준의 과학 문명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상생출판, 2012)
4) 미노스인들은 원의 각도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360도가 아니라 366도로 생각하였다. 영국의 거석문화에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구가 1년 동안 366번 조금 넘게 자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년의 길이는 365와 4분의 1일이지만, 실제로 지구가 그 시간 동안 자전하는 횟수는 366번이 조금 넘는다(크리스토퍼 나이트·앨런 버틀러, 『1세대 문명』, 30쪽). 지구가 공전 방향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생긴 이 차이를 이미 수천 년 전에 고대인이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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