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을 제쳐두고 행세하는 시자(侍者)라면 ...
“참 나는 만법의 근원이다.
나라에 임금이 있어 신하가 그 명을 따라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듯이
참 나가 있음으로써 오관을 통해 움직이는 내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는 나는 안 보이는 나의 신하로서,
시자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 나를 나로 알지 말고 참 나를 발견하라는 것이요,
모든 것을 참 나인 주인공에 일임하라는 것이다.
시자는 시자일 뿐이니 주인을 믿고 따르면 그뿐,
주인을 제쳐두고 제가 나서서 주인 행세를 하는 한
고통과 액난은 끊이지 않고 나를 따르게 마련이다.”
어느 누구라도 병을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늙는 것을 즐겁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그걸 피할 수도 없다.
태어난 것은 다 늙고 마침내는 죽는다.
고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나 사망선고를 받아 놓고 있다.
삶이란 매 순간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내게만 찾아오는 양 두려워한다.
이 순간 지구상에서 수천 수만이 죽는데도
그것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어보았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내가 죽어 참 나로 거듭난 사람이요
죽음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노·병·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깨달은 이 처럼 참 나로 살아야 한다. 그 길 밖에 없다.
시자(侍者)의 삶에서 벗어나 주인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
주인의 삶은 언제나 창조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삶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찬 삶이다.
거기엔 노·병·사 따위가 붙을 자리조차 없다.
그래서 가르침은 거짓 나를 버리고
참 나를 발견해 참 나로 살라고 강조한다.
이왕에 한 세상 살다 가는 것인데
주인으로 살아야지 시자로 살아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임금으로 살아야지 신하로 살 건 뭔가.
노·병·사가 붙지 않는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이지
싫다면서, 두렵다면서 노·병·사를 껴안고 살 건 뭔가.
그럼에도 우리들은 시자의 삶을 고집한다.
어리석게도 거기에 집착한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하면서도 스스로 시자이기를 원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참 나인 주인을 만나 주인으로 살려면 버려야 한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나다, 내 것이다 하는 생각 좋다 싫다하는 생각을 놓아야 한다.
그런 분별심과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죽기를 각오한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죽음이 발붙일 곳을 잃듯이
노·병·사에 대한 분별을 놓아 버리면
삶은 그 순간부터 시자를 부리는 주인의 삶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시자인 이 거짓 나를
참 나로 알고 있기 때문에 놓으려고도 버리려고도 하질 않는다.
보이지 않는 나, 주인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다는 것은 깨닫기 전이면
어느 누구라도 완전한 앎이 아니다.
고작해야 글줄이나 조금 읽었고 한 줌 밖에 안 되는 경험을 통해
이 거대한 세계의 한 모퉁이, 좁쌀 만 한 부분을 아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을 다 아는 양
제 스스로 관념의 벽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산다.
주인을 믿기는 커녕 시자로서도
아주 어리석은 시자임을 자처하며 산다.
그러기에 고통과 액난이 끊이지 않고 내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이다.
참 나인 주인을 무조건 믿는 것만이 나를 해방시켜 준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맹목(盲目)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겠다는 의지이다.
배우려하지 않는 제자에겐 스승도 가르칠 게 없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