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3) 재미 한인으로
이 창 재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의사인 아내의 신분으로 가족(나와 세 아들)의 미국 입국 사증을 발급 받아서 6월 말에 하와이와 LA를 거쳐 7월 초에 MSP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나의 미국 이민은 군사독재통치의 한국으로 부터 정치망명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 이었다. 그리하여 미주에서 뿐 아니라 유렆 일본 등지에 나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반독재정권의 인사들이 나에게 연락 해 오고, 미네소타를 찾아 오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미주 각지에 나와 있는 민주투쟁선배들, 4.19 동지들, 그리고 6.3 후배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처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각 도시에 사는 동지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러다가 1979년 4월에 DC에서 재미반독재세력이 집결하여 <한국민주혁명당>을 창당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본의 하니게 당 대표에 선출되어 나는 또 다시 재미 반독재투쟁의 일선에 서게 되었다.
1979년 10월 하순에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우리 동지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귀국을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미국을 등에 엎은 보안사 전두환의 등장으로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을 비통하게 TV로 지켜만 보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좌절감에 빠져서 하루 하루를 지내든 나는1981년 8월 하순, 미네소타 한인 천주교회에서 주최한 성령 세미나에서 <오순절 아침의 은총>으로 새로 태어나, 민주화 운동가에서 신앙운동가로 변신하였으며, 그후 지난 30년간 나름대로 민족의 화해,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헌신해 왔다.
1986년 9원 하순, Saint Paul - Minneapolis 대교구에서 Permanent Deacon 에 서품되었고, 교회가 인정하는 오순절 세미나의 봉사자로서 동분서주,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어디에나 달려가는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1991년 이후 대교구 원주민 사목실에서 24년간 (퇴직할 때 까지) 봉사성직자로 봉직하면서, 오순절의 은총을 전파하기 위하여 미주내 각 도시 한인 공동체를 주류하면서 수백회의 오순절 세미나 봉사팀에 참여하였고, 후반에는 전국 봉사회(KSC)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면서 민족통일의 염원을 간직한채 1990년 부터 민족의 화해와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4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였고, 조선천주교도연맹과 조선기도교도연맹의 대표 성원들과도 교류하였다.
2002년에는 Korean Service Committee 회장에 피선되어 미주 한인 가톨릭 오순절 운동을 선도하면서 동시에 Guadalupe 성모님(Mexico City, Mexico)를 통한 선교 운동에 투신해 왔다.
나는 이제 생애의 마지막 나날에 오순절 운동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부흥케 하고, 민족의 화해와 남북통일을 성취하여 점차 우리 민족이 동방의 선민임을 만방이 알게 되는 세계사적 과제가 하느님의 섭리라는 점을 가까이 그리고 멀리 선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