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란진-해남 구간 답사기
어란 여인상을 답사한 일행은 온 길을 30미터쯤 되돌아 나왔다(10:50). 갈래 길을 만나면 오른 편이 조금 전에 온 길이다. 반대쪽, 즉 왼편(북쪽 방향)으로 가야한다. 인적이 드믄 좁은 산길의 좌우에는 이름 모를 희귀종인 듯한 남해안 특유의 식물들이 많다. 숲이 우거진 낮은 언덕을 넘으면 멀리 동쪽으로 백사장이 보인다(11:20). 백사장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하산하면 바닷가이고 마을의 입구 쯤 되는 곳이다. 이 사장은 발이 빠르다. 가장 먼저 해변으로 내려왔다. 낮은 방조제 위를 두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디 가시는 길인가요?”
현지인을 보고 이 사장이 반가워 말을 걸었다.
“굴 캐러 가오.”
“연로하신데 그런 일을 하시네요.”
“그라지. 야든 넘었는디. 지금까지 쭈욱 이렇게 살았어.”
할머니들은 외지인을 반기고 멀어져갔다. 10분 쯤 지나서 모든 일행이 해변으로 내려왔다. 선두의 금오랑과 이사장은 20분쯤 더 가다가 휴식할 장소를 찾았다.(11:40) 1시간 걸으면 10분 쉬는 것이 순례자건강수칙이다.
“해남까지 가려면 중간에 버스를 타야 하지? 버스는 송지면사무소에 가면 분명히 있어.”
검암이 금오랑에게 정보를 주었다. 어차피 걸어서는 못 간다. 걷다가 버스를 만나면 타야 한다. 그런데 금오랑이 시계를 보니 12시10분, ‘해남 발 버스는 15시30분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고 좀 더 걸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송지면은 저 동쪽이니 우리는 조금이나마 해남이 있는 북쪽으로 걷자.”
금오랑이 북동으로 뻗은 곧은길을 가리켰다. 그 길의 우측(동편)은 산정천이다. 갯벌인 듯 보이지만 바다가 아니고 내다. 만조시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 곳이므로 뻘이 형성된 것이다. 강둑의 갈대가 바람을 따라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선두의 기수를 맡은 미세스 강의 태극기가 갈대와 함께 펄럭였다.
아름다운 뚝방길은 77번 국도와 만난다(12:30). 금오랑은 이제부터 버스가 오면 타고 간다는 마음으로 정거장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빠르게 걸었다. 후미와 1km 정도 벌어졌다.
“시골에는 대략 2km마다 버스 정거장이 있어. 그런데 여기는 이상하다.”
금오랑은 이사장에게 버스정거장이 안 보인다고 의아해 했다. 마침 길가에 식당이 보였다.
“주인장 계셔요? 해남 가는 버스 정거장 얼마나 더 가야 있나요?”
“여기는 버스 없습니다.”
“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조금 더 언덕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아가세요.”
일행이 지금까지 걸은 77번 국도는 신작로다. 버스는 마을 사람들을 태워야하므로 구 도로로 다닌다. 77번 국도를 걸은 45분이 힘든 시간이었다. 좌우는 벌판이고 인가도 없다. 송지면소재지로 갔다면 쉽게 버스타고 해남을 갔을 터이다.
일행은 미야지(저수지)를 우회해 버스정거장을 찾았다. 벽에 붙은 안내를 보니 해남 가는 버스는 매시 22분에 있단다. 지금이 1시15분이니 마침 잘 된 것이다. 답사자들은 정거장 옆의 정자에 앉아 각자 지참한 마지막 먹거리를 전부 내 놓았다.
“아저씨, 여기서 해남까지 버스로 얼마나 걸리나요?”
정자 앞,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회원의 질문에 답했다.
“한 시간 더 걸립니다.”
“네? 그렇게 오래 가요?”
“마을마다 다 쉬면 그렇소.”
“야, 이거 참, 택시 불러 타고 갈까?”
“해남이 30km 안 되는 거리인데 1시간은 너무했다. 40분이면 간다.”
제포의 계산이었다. 버스는 30분쯤 도착했다. 요즘은 시골 버스도 교통카드로 결제가 된다. 버스는 신나게 달렸다. 정거장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으면 그대로 달린다. 14시05분에 해남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회원들은 각자 표를 끊었다. 제포가 앞장서서 식당(진미061-535-2343)을 골랐다. 답사자들은 세수를 하고 다리를 뻗고 막걸리로 목을 추기면서 남도의 음식을 즐겼다. 평범한 점심식사인데 반찬이 맛나고 푸짐했다.
우등버스를 타고 가면서 금오랑이 회계보고를 했다.
<수입: 회비 65,000*11명=715,000. 지출: 729,000. (지출내역: 2일. 이진 중식 90,000+땅끝 막걸리 2,000+택시3대 60,000+석식 181,000+야식 12,000+숙박 160,000+ 3일. 조식 88,000+중식 86,000.) 차액 14,000 주최 측 지원. 왕복 교통비, 현지 버스비는 각자 부담>
“아, 이제 명량과 우수영을 가면 수군재건로는 마지막인가?”
“전라남도가 정한 구간은 마지막 맞는데, 우리는 선유도까지 간다. 우수영은 11월말이나 12월 초에 가자.”
수군재건로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가 개발하는 구간은 전라우수영까지이다. 그러나 금오랑은 선유도까지를 수군재건로라고 생각한다. 선유도는 전라북도이니 전남이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수군재건로(육로와 해로)
5. 춥고 배고픈 일본군은 지구전으로 전환
충무공은 섬에서 섬으로 개구리 뛰듯 선유도까지 후퇴했다. 육지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포구에 정박할 수 없다. 명량에서 소진한 화약, 포탄, 화살을 육지의 저장고에서 확보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섬에서 만들어야 한다. 수군을 재건한다 함은 배를 건조하고 인력과 병참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무공은 일본군과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충무공은 명량대첩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진을 옮겼다. 하루에 30km 이상 북으로 후퇴했다. 진을 옮긴 날자는 아래와 같다:
우수영9.15/16명량대첩,북행시작: 당사도9.16/17-어외도 9.17/19-칠산도바다,법성포, 홍농바다9.19/20-위도9.20/21-선유도9.21-10.1 아산 고향이 불탔다는 소식 듣다.-10.3남행시작: 법성포10.3/10.8-어외도10.8/10.9-우수영10.9/10.29-보화도10.29/1598.1.4. (이후 9.14까지 8개월10일간 일기 없음).11월17일기 끝. 11월19일 노량해전 전사.
10월1일, 충무공은 선유도에서 고향 아산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큰 아들 회를 작은 배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알아오게 했다. 사실은 9월말 경 막내아들 면이 일본군 특공대와 싸우다 전사했는데, 충무공은 14일에나 그 소식을 듣는다. 그때는 충무공이 우수영까지 다시 내려와 있을 때였다.
이즈음 전황은 일본군에게 불리했다. 이원익의 농민군 8,000은 서울을 출발해 직산으로 내려갔다. 청주에서 북상하는 가토 기요마사를 저지하겠다는 목적이다. 명군 마귀는 보병과 기병 8,800으로 수원에서 히데모토를 저지하고자 대기했다. 일본군은 조선의 청야전략과 6년 전쟁으로 물자가 고갈된 조선에서 춥고 배가 곺았다. 9월7일 마귀의 선봉 해생이 이끄는 기병2,000과 히데모토의 선봉 나가마사(흑전장정) 보병3,000이 충돌했다.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는 명군은 200명이 죽자 북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전사29명뿐이었지만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들도 더 싸워봐야 큰 전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에게 보급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이다. 보급로 길목마다 조선 의병이 가로 막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6일에는 남해에 이순신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일본의 보급함대가 서해로 북상해야하는데 명량에서 막혔다. 우수영을 점령했어도 이순신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육군은 일본함대의 사정을 듣고 보급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총알이 없으니 칼로만 싸워야 한다.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산 전투 후 철수를 시작한 일본군은 10일에 해남까지 내려와 불태우고 경상남도 남해안으로 철수했다. 그들 수많은 왜성을 쌓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귀국을 허락하기 전까지는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격적 작전을 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어에 유리한 성을 구축하고 최소한으로 물자와 탄약을 소모하면서 지구전을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