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천주교 111개 성지 순례
수원교구 ⑨ 양근 ◎간략설명 :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퍼져나간 순교성지 ◎주 소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연락처 : T(031)775-3357, F(031)775-3358(양근 성지) ◎홈페이지 : http://www.yanggeun.org(양근 성지) ◎미사시간 : 평일(화-토) : 오전 11:00 주일 : 오후 2:00 ◎교통편 : [승용차] 구리, 덕소를 지나 양평읍 양근대교 직전 좌측에 월드컵 주유소 지나면 우측에 양근 성지 표지판 보인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약 100m 진입하면 우측에 양근 성지가 있다. 오반역에서 가까움
▶ 양근 성지는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한강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또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 마을 또는 한감개에 살고 있던 권철신에게 세례를 베푼 후 천주교 신앙생활(아침 기도, 저녁 기도 등)을 실천한 곳이다.
또한 양근 성지로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이 가성직 제도(또는 모방 성직제도)로 신부의 역할을 하면서 미사와 견진성사를 2년간 집전하던 곳이다. 그래서 양근 성지를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이곳 양근 성지는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 베드로, 권 데레사 동정 부부와 20여 명의 순교자들이 태어나거나, 신앙을 증거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다.
한국 교회는 양근 성지와 관련있는 순교자 조용삼 베드로(1801년 순교), 홍익만 안토니오(1802년 순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802년 순교), 조숙 베드로·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1819년 순교)를 '하느님의 종 125위'로 선포하고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굿 뉴우스 홈페이지에서]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양근이라는 말에서 양제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튼튼한 근원, 기초란 의미로 더욱 놀라운 것은 양근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양근 성지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의 평자와 양근군의 양자가 합해져 오늘날의 양평군이 되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몸소 조과(朝課, 아침기도), 만과(晩課, 저녁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숙은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그곳에서 함께 부활 축일을 보냈다.
양근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양근 성지와 관련 있는 순교자 조용삼(趙∼, 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독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802년 1월 30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조숙(베드로)와 권천례(데레사, 1819년 8월 10일 이후 순교, 동정부부)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양근 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양근 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2003년 전담신부 발령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양근 성지는 대형 십자가와 기념성당, 한강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고, 2010년에는 순교자 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순교 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정자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마련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1년 5월 7일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및 시설 축복식을 거행했다.
양근 성지는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 운동의 거점이자 복음전파의 출발점이었던 성지의 의미를 살려 소공동체 봉사자 및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선교사들을 위한 훈련도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순교한 곳으로서 참다운 부부애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과 피정에 힘쓰고, 평신도 사도직과 순교자들의 신앙과 행적을 본받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9일)]
◆ 대감마을과 주어사 - 교회의 요람지
1779년 겨울, 권철신과 제자들이 주어사를 찾은 이유는 대감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때 이벽이 주어사 강학 모임을 찾아가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오도록 했으며, 1784년 가을 무렵에는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가 창설되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이 대감마을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앵자봉 너머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점차 교회사에서 잊혀져만 갔다. 또 초기 교회의 인물 중에서는 정약종, 유항검만이 훌륭한 순교자로 남아 있을 뿐, 이벽과 권일신의 신앙 증거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이존창 등은 배교자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 신앙을 버렸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말한 "만리 밖의 성현"은 과연 누구였는지? 슬프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
양근 지방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권철신(權哲身,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 전주 초남(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양근에서 살던 윤유일(尹有一, 1760~1795, 바오로)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로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00년 5월 윤유오(尹有五, ?~1801, 야고보), 유한숙(兪汗淑, ?~1801, 일명 사겸) 등 7명이 체포되었고, 양근의 권상문(權相文, 세바스티아노, 1769~1802)은 1800년 6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0월에는 경기 감영(현 적십자 병원 자리)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예비 신자 조용삼( ?~1801, 베드로)은 1801년 3월 27일(음 2월 14일)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신유박해 당시 조정에서는 해읍정법(亥邑正法)의 영을 내려 모든 지방 신자들을 거주지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윤유오 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은 1801년 3월 11일에 판결을 받고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이어 윤점혜(尹占惠, 1778~1801, 아가타)는 5월 22일에 판결을 받고 5월 24일(양력 7월 4일)에 양근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12월 26일에 판결을 받고 양근으로 압송되어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에 순교하였다.
한편 교회측 기록에는 1801년 3월에 양근에서 순교한 신자가 모두 13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윤유일의 삼촌 윤관수( ?~1801, 안드레아)는 양근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801년 5월경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잔인하였던 양근 군수 정주성에 의해 이재몽(1747~1801)·이괘몽 형제와 두 딸, 김원성, 윤점혜와 활동한 이 아가타 등이 양근에서 처형되었고, 10월 초에는 양근 출신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趙東暹, 1739~1830, 유스티노)의 아들 조상덕(趙尙德, ?~1801, 토마스)이 옥사하였다.
이와 같이 양근 지방은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다. 이곳 성지에서 우리는 윤점혜 아가타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 양평 지역의 천주교 사적지
○ 양근 관아터
○ 참수터
○ 감옥터
▒ 대감 마을에 대한 이견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던 마을은 양평군 강상면 대감 마을이 아니고, 양근면 갈산리(葛山里)로, 현재도 갈산리로 부르며, 양평읍 사무소와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대감 마을은
물안동 권씨 선영(先塋), 즉 선산(先山)이 있는 곳으로, 이모씨(李某氏)네가 늘 대대로 내려오면서 권씨네 시향제를 차렸었다고 한다.
강북의 양근면 양근리에 연결된 바로 상류지점인 갈산 옆을 흐르는 물결이 늘 맑고 잔잔하여, 노 젓는 배를 대기 쉽고, 또 권씨네 형제들이 사는 양근리에 붙은 갈산리에 많은 선비들과 손님들이 오고 가므로 갈산 나루까지 있던 강북의 갈산(葛山), 양근(陽根), 덕곡(德谷 : 감호정(鑑湖亭)이 있던 마을)마을의 앞 강물을 감호(鑑湖)라고 불렀고, 그 마을들에 사는 이들이 자연스레 맑은 감호에 거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감호정은 현재 양근 성지가 있는 일대의 어느 지점이다.
▒ 감호암(鑑湖岩)
○ 도곡리
조동섬 유스티노는 명례방 사건이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용문사에서 8일간 침묵 피정을 하였고, 1800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년 2월 12일 양근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 금부로 이송 되어서는 2월 26일 배교후 30년 유배형을 받는다.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를 간 조동섬 유스티노는 그곳에서 배교를 깊이 뉘우치고, 무산까지 찾아온 정하상 바오로에게 신앙교육과 한문 교육을 가르치고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적극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
조상덕 토마스는 아버지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 하면서 양근 관아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사한다.
수원교구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전담 권일수 신부는 "양평 강변에서 우연히 '감호암(鑑湖岩)'이라 쓰여진 바위를 발견했다"면서 "그동안 감호가 양근리 일대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이 바위로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생가터가 양근임이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녹암(권철신 호)이 거처하던 곳은 감호라고 불렀다'고 했다. 양근리 일대는 강이 거울처럼 맑은 호수같다고 해서 '감호'로 불렸다. 하지만 그동안 권씨 형제 생가터는 양평군 대석리로 알려져 왔다. 대석리 효자산에서 두 형제 무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가터가 양근리라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안동 권씨 후손들과 일부 학자들은 대석리는 권씨 선산이었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양근리었다며 생가터 '대석리설'을 반박했다. 하지만 '양근리설'을 확증할 구체적 사료가 없었는데 이번에 감호암이 발견된 것이다.
또 권철신이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했다는 감호정(鑑湖亭)은 이 감호암 위에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권 신부는 "감호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라며 "양근리 일대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관련이 깊고 초기 순교자를 배출했던 성역임이 확실해진만큼 양근성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권 신부는 이와 함께 감호암과 양근성지, 양근대교 아래 순교터, 생가추정터를 연계해 배를 타고 순례하는 성지순례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권철신·일신 형제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은 천주교를 처음 들여온 이벽이 천주교를 알리기 위해 제일 먼저 찾은 이다. 학식과 덕망이 높아 따르는 선비와 학자들이 많았던 권철신이 천주교 신자가 되면 저절로 선교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벽은 권철신 집에 머무르며 천주교를 전했다.
권일신과 함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로 건너가 각 지역에 신앙을 전파했다. 초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이들은 모두 권철신의 제자거나 권철신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그 후 3세기경에 이르러 동정녀들은 공식적인 축성식을 갖게 되고, 또한 동정녀들의 모임도 주교가 직접 관할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동정녀들의 모임은 여자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교회 창설 이후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기 전까지 많은 동정녀들이 나타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한국 교회 최초의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때 동정으로 순교하여 성녀(聖女)가 된 김효임(金孝任)·김효주(金孝珠) 자매, 이인덕(李仁德), 이경이(李瓊伊) 등이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동정녀들이다.
■ 순교자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순교자 권 데레사(1784∼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순교자 조용삼 베드로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순교자 홍익만 안토니오 ( ?∼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순교자 조숙 베드로 (1787∼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까페에서 *** 양근
경기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T : 031) 775-3357 F : 775-3357 미사 : 주일 오후 2시, 화-토:오전11시(월요일미사없음)
양근 성지는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한강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또 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 마을 또는 한감개에 살고 있는 권철신에게 세례를 베푼 후 천주교 신앙생활(아침 기도, 저녁 기도 등)을 실천한 곳이다. 또한 양근 성지로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으며,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이 가성직 제도(또는 모방 성직제도)로 신부의 역할을 하면서 미사와 견진성사를 2년간 집전하던 곳이다. 그래서 양근 성지를 천주교회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이곳 양근 성지는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 베드로, 권 데레사 동정 부부와 20여 명의 순교자들이 태어나거나, 신앙을 증거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다. 한국 교회는 양근 성지와 관련있는 순교자 조용산 베드로(1801년 순교), 홍익만 안토니오(1802년 순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802년 순교), 조숙 베드로,권 데레사 동정부부(1819년 순교)를 '하느님의 종 125위'로 선포하고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 출처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寒國천주교주교회의저)
마음관리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동상 순교자 신앙 고백
동정 순교자 윤 점혜 아가다 동상 순교자 권복 프란치스코
양근 성당 전경 순례자 하느님 감호정
수원교구 도보성지 순례길 성전 봉헌 기념 조형물 본당 1층에 있는 순례자 하우스 2층 성당 올라가는 길 성당 정문 성당 내부
성당 입구 천정 십자고상 성모님상
십자가의 길
" 나를 따르라."
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 직암 권일신 하비에르 동상
녹암정
오밋다리 양근 성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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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토니오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안토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