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째(2012년 10월 12일) 2012년 10월 12일 오후 2시 30분(한국시간) <인천국제공항> 이륙 → 터키 이스탄불 <아타투르크공항> 10월 12일 오후 8시 30분경 도착(터키시간) (6시간차)
10월 12일 오후 9시(현지시간)경 이스탄불 <GRAND SENOL HOTEL>
2일째(2012년 10월 13일) 2012년 10월 13일 여행을 하기 위하여 숙소를 떠난다.
베이짓 사원 이스탄불 대학 이스탄불 도서관 전차
그랜드바자르 KAPALI CARSE
지하물 저장궁 : 532년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황제때 지어진 <지하 물 저장궁>에 왔다. 이곳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인데 인구는 많고 강수량이 적어 이런 시설이 많이 필요했으리라. 이외에 발견된 시설만도 수 십개 된다고 한다. 높이 8m의 기둥들이 4m 간격으로 336개 서 있어 있는데 10만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거대한 물저장고다. 기둥 전체 표면에 눈물모양 조각이 있는 특이한 것도 있고, 기둥 2개는 메두사얼굴을 거꾸로 뒤집어 받침돌로 괴고 있다. 저장된 물의 음용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물고기를 키우고 있는 데 그 규모나 화려함이 마치 궁전과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된 괴물로 사람이 보면 돌로 변한다하여 그리스인들이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메두사 머리를 돌기둥아래 물밑에 묻어 놓음으로써 로마는 이제 모든 잡신 등을 몰아내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관광할 수 있도록 통로 길을 만들기 전에는 배를 타고 다녔다 하는데 1963년 007시리즈 2탄 ‘From Russia with Love’의 촬영지였단다.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 : 비잔틴제국(동로마)의 성당양식과 오스만제국의 이슬람양식이 섞여 있는 소피아 성당은 바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아스탄불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고 있을 때인 서기 325년 콘스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은 것을, 532년~537년에 걸처 유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그 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 이 성당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이름을 알려오다가 1455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를 압도하는 높은 천장과 현란한 문양의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화(聖畵)와 이슬람의 상징물들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길이 81m, 폭 70m 규모에 기둥도 없이 직경 33m의 거대한 원개(圓蓋, 돔 지붕)가 만들어져 있는 이 건물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데, 935년 이후부터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아야 소피아 성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성(聖)”은 그리스어로 “아기아”이며 터키어로는 “아야”로 발음한다.
화칠이 벗겨진 부분을 자세히 보면 황금 빛이 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분으로 입혀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중앙의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를 중심으로, 요한네스 2세 황제와 아레네 황후의 모자이크 그림으로 각각 성금주머니와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다.
한곳만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고, 이슬람 사원으로 바낀 후 다른 그림들에는 천사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이상한 문양으로 바뀌었다.(첫번째가 정상 그림)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면서 내부 곳곳에는 둥근 원판에 알 수 없는 글들이 씌여 있는데, 알라신과 모하메드, 알라 등 이슬람교 성직자들의 이름이라 한다.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세례요한의 벽화 이 그림은 최후의 심판에서 성모마리아와 세례요한이 탄원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모나리자에서 보듯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예수의 눈이 따라 다닌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그리스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이 그림 위에 화칠을 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림을 깨뜨리지 않고 그림 위에 화칠만 했다. 그래서 그 화칠이 벗겨지면서 원래 그림이 나타나고 있다. 후에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화칠을 벗겨내려 하자 그림들이 함께 떨어져 나가고 있다. 두 사람이 예수에게 인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다. 위 그림의 원래 그림은 아래 그림과 같다.
벽면의 좌우대칭 데칼코마니 대리석 장식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손가락돌리는 기둥
원형경기장 히포 드럼 광장 : 술탄 아흐메트 맞은편에는 비잔틴 시대에 전차경주를 하던 원형경기장인 히포드럼 광장이 있다. 이곳은 “U"자형태의 큰 경기장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콘스탄틴 기둥, 분수대 등 유적들이 있다. 고대 도시의 심장부로 술탄 아흐멧 광장이라고도 불린다. 10만 명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경기장이엇던 히포드럼은 서기 196년 로마 황제 세비류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다. 그 후 4세기 무렵에는 콘스탄누스 황제에 의해 검투 경기가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대전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 군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광장에 있던 대부분의 유적이 이때 파괴되어으나 다행히 디킬리타스, 오르메 수툰, 셀팬타인 기둥 등 세 개의 귀중한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히포드럼은 길이 500m에 넓이 120m로 로마에 있는 시쿠스 맥시무스 경기장 다음으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히포드럼)이었다고 합니다. 비잔틴 시대에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경기장이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 기둥 : 히포드럼의 남쪽 끝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르메 수툰(Orme Sutun)"이란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 기둥은 콘스탄틴 7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실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10세기에 세워졌다. 높이는 32m이며, 외부는 청동이 입혀져 있었는데, 지금처럼 이 기둥이 상처투성이가 된 것은 13세기 제4차 십자군들에 의해 표면을 장식하고 있던 청동판들을 모두 약탈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티 기둥은 1894년 지진으로 부서졌으나 최근에 복되었다.
세 마리의 뱀 기둥(서펜타인 기둥) :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서펜타인 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13m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기둥과 솥은 높이가 8m로 기둥은 뱀 세 마리가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모습으로 원래는 3개의 뱀의 머리가 솥을 받치고 있었는데 지금은 머리 부분이 잘려나가 5m 정도만 남아 있다. 물론 솥도 보이지 않는다. 1700년대 초까지는 뱀 머리와 솥이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취객에 의해 머리가 부러지고 뱀의 머리 한 개는 터키 박물관에, 한 개는 영국 대영박물관에, 나머지 한 개는 행방불명이라고 한다. 기원전 480년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바로 유럽과 아시아간에 벌인 최초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자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으로부터 획듯한 청동무기를 녹여 이 솥과 솥을 떠받치고 있는 뱀들의 기둥을 만들어 델피의 아폴론 신전의 동쪽 입구에 세웠던 것이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기며 이 기둥을 델피에서 이스탄불로 옮겨와 히포드럼 광장에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당시(1204) 베네치아인들에게 약탈당해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정면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룩소르의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 세웠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인데, 당시 왕족들의 일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기둥은 4세기 로마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스탄불로 옮겨 온 것이다. 원래는 높이 60m에 무게가 800톤이나 되어 1/3 정도 되는 위부분만 가져온 것이다. 대리석 받침대 4면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을 황제가 지켜보는 장면, 황제가 외국 사신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장면, 전차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과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 전차경기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히포드럼 광장에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서기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에 지금의 위치에 세워졌다.
불루모스크-술탄아흐마드 사원 :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이슬람 건축의 대표격인 이 사원이 1000년의 시차를 두고 서 있다. 건물외관이 파란색일 것으로 상상했는데 연한 회색을 띤 대리석건물이다.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파란색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개의 아름다운 첨탑이 있는데 이는 건물의 위계상 최고인 왕립 사원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당초 술탄은 아야소피아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으라면서 첨탑을 황금(터키어로 ‘알튼’)으로 만들라고 명했는데 건축가가 재정형편상 어려워 머리를 짜내 숫자 6(터키어로 ‘알트’)으로 말했다고 주장하여 지었다고 한다.
토프카피 왕궁 박물관 :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위용을 이 박물관에 전시된 보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와 84캐럿 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앞에서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궁전의 오른쪽에는 음식을 만들던 곳이라고 하는 데 커다란 굴뚝들만이 남아 있다. 유목민들은 냉장보관이 어려워 고기를 반드시 구워먹는다고 한다. 굴뚝의 수나 크기로 보아 왕실의 규모가 매우 컷으리라. 왕실 안뜰에 왕의 여자들이 거처하는 금남의 집<하렘>이라는 곳이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선 관광 : 대리석을 뜻하는 영어 마블의 어원은 희랍어 마르마라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바야흐로 태양은 동쪽 아시아반도에서 해협을 지나 서쪽 유럽반도로 지고 있었다. 유럽반도에는 노을이 지고 있고 햇빛에 반사되어 아시아반도는 훤하다. 보스포러스해협은 국제법상 주인이 없는 ‘공해’라 한다. 대교는 상당히 길다란 다리인데 중간부분에 다리를 받치는 지주 없이도 튼실히 버티고 있다. 바닷가에 오스만투르크시대의 여름별장 <트라앗>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가장 비싼 호텔로 국빈을 모신다고 한다. 이곳 바다는 풍랑이 일지 않아 주택들이 바다에 최대한 가까이 즐비하다. <벨베르베르 궁전>도 보인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단다. 제우스가 이오의 아름다움에 반해 겁탈한 후 이오를 소로 변하게 하고, 헤라, 아르고스, 헤르메스가 나오는 이야기. . 멀리 높은 언덕에 <갈라타탑>이 보인다. 옛날에 제도아상인들이 자치구로 사용하면서 감시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픈득클르 자미 (Findikli camii) : 오스만제국 때 위대한 건축가 '시난'이 건축한 이슬람 사원입니다.
돌마바흐체 궁전 : 이스탄불의 베르사이유 궁전이라 할만 합니다.
갈라타사라이 대학교, 카바타쉬 에르켁 고등학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시켜주는 보스포러스 1대교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맞이하는 일몰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
크즈 클레시탑 : 비운의 공주가 갇혀 죽었던 슬픈 사연이 있던 곳, 터키어로 "크즈"는 처녀, "클레시"는 탑을 뜻한다. 이곳을 다스리던 왕이 딸이 16세되기 전 독사에게 물러죽을 거라는 신탁을 듣고 딸을 바다 한 가운데 풀이 없는 이탑에서 16년 동안을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 딸의 16세 생일날 왕이 선물로 과일바구니를 보냈는데 그 안에 독사가 숨어있다가 딸을 물어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고급식당으로 프로포즈할 때 이용한다. 처녀의 성이라고도 불리움
3일째(2012년 10월 14일) 맑음
유럽반도에서 아시아반도로 넘어간다. <카파도키아>로 가는 8시10분 국내선비행기를 타기위해 오늘 일정은 6시 30분에 집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육로로는 12시간 걸리는것을 비행기로는 1시간 20분이면 된단다. 버스는 보스포러스대교 위를 시원스레 달린다. 우리는 미리주문한 빵도시락을 먹었다. 한 도시안에 유럽과 아시아가 있고, 1,800여년간 수도로서의 과거와 현재가 있고, 이슬람풍속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적이고 폐쇠적인 통제와 성적 눌림이 있는 반면 다양한 민족의 여인들의 분방함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검은천으로 온 몸을 가리고 눈만 내놓고 다니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머리에 히잡만 두른여인, 탱크탑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도 보인다.
강수량은 적고 뜨거운 태양볕 때문에 들판의 호박은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있다. 크기는 단호박만 한데 호박씨만 먹는다고 한다.
에브라노스 동굴식당 : 내부가 분위기 있었다. 먼저 와인으로 건배한 후 수프, 샐러드, 바게트, 볶은밥에 쇠고기항아리캐밥을 얹은 음식이다. 점심먹은곳
식당 주변 전경
카파도키아지방은 베드로전서에 전도여행지로 기록되어 있어 주로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진 지명이며 행정구역상 지명은 아니라고 한다. 페르시아어로 ‘카팟투카’이며 명마가 태어나는 곳을 뜻한다고 한다. 길가의 언덕에 새겨진 말 그림이 보인다.
데린구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 : 1965년까지 데린구유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데린구유를 일반인이 관광하기 시작한 것은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 유적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985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데린구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깊은 우물 이라는 뜻이며, 데린구유는 지하동굴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최대 3만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지하도시라고 한다. 전체 면적의 일부만 관람이 가능하며 지하도시 안에는 평상시 사료 및 추수한 곡식을 저장·보관하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 저장소도 있다.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지하 온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자연 환기 통로 및 환기구가 있다. 동굴 중간 중간에는 침입자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돌문도 놓여 있다.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통행 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이다. 모임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다. 3만여명 수용 가능하며 이 지하 도시는 열악하지만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 성찬 및 세례식을 갖는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었다. 지하 터널의 깊이는 120m(높이 20층)이며 거미줄 같은 좁은 미로이다. 또한 적이 쳐들어왔을 때, 긴급하게 타 지하도시로 피신 할 수 있도록 이 곳에서 9km나 떨어진 카이막클리 지하도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하도시의 놀라운 비밀 한가지는 음식을 만들거나 불을 피워도 그 연기가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통해 분산되기 때문에 외부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지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지상에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등재 표지판, 입구와 환기구 뿐이다.
입구는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터널
침입자로 부터 방어하기 위한 둥근 맷돌 모양의 큰 돌문
십(十)자가로 동굴이 되어 있다.
죄수를 처형하는 곳(위 양쪽에 고리가 있어 죄수를 묶어 놓음)
우물 터
고해성사 하는 곳
가축 먹이 통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여 소 같은 가축도 기른것으로 보인다.
우치히사르 : ‘위로 솟은 요새’라는 뜻인데 주변에 <비둘기계곡>도 파노라마같이 펼쳐져있다. 괴뢰메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성화를 벽에 그리고 비둘기똥을 발라놓으면그림 보존이 오래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가까운 이곳에 비둘기를 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둘기 계곡을 배경으로 한컷~
괴뢰메 야외박물관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지형이 푹 꺼진 곳에 위치해 있어 피신하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다. 비둘기 집처럼 수 많은 석회동굴속에 수도승들의 거쳐가 창문처럼 구멍구멍 나있다. 관광객에게 개방하기 위해 계단을 만들어 놓은 동굴에 올라가 보니 방, 식당, 시품저장고 등이 별도로 있으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와 12제자들의 벽화도 남아 있다.
동굴 안에 있는 벽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나 몰래 찰칵 했다.
파샤바흐 장군바위 : 마치 스머프집과 같이 치솟은 석회암 위에 화산재가 굳어진 응회함이 지붕처럼 얹혀 있다.
ALTINOZ HOTEL : 10월 14일 밤을 보내는 곳 |
출처: 푸른솔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