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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네농장 이야기 ☆ 스크랩 나룻배의 고장 북삼리
㈜친구^^ 추천 0 조회 20 09.07.13 09: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누런 물이 지나간 물 맑은 둠밭나루

나룻배의 고장 북삼리

 

 

군남댐 공사로 흐려진 물이 징파나루로 들어왔다. 큰물이 지고나자 물은 맑아 졌다. 낚시하는 사람이 보이고 다슬기를 잡는 아이들도 있다. 왜가리 한 마리 물 위에 한참을 앉았다가 사라진다. 물속으로 암초가 있는 모양이다. 맑은 물이 파도치는 나루라는 뜻의 징파(澄波)나루다. 우왕 11년 징파나루 물이 3일 동안이나 누렇게 흐려졌다. 그 맑은 물이 누렇게 변했으니 고려도 수명이 다한 것이다. 물빛이 변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녹조가 와도 좋지 않고, 적조가 와도 좋지 않다. 지방이, 농촌이 어려워지자 개발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이 늘어났다. 농촌은 사라지고 그렇게 세워진 지방은 도시의 부속물이 된다. 물은 더러워진다. 물이 누렇게 됐다는 사실적 기사는 하늘이 고려를 버렸다는 강한 정치적 뉘앙스를 담고 있다.

 

물이 맑아 징파나루라 했다는 기록은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둠밭이다. 두메에 있는 밭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둠밭을 한자로 옮긴 것이 둔전이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이두식으로 옮긴 것이 징파다. 맑을 징(澄)은 지금은 징으로 읽지만 옛말로는 둥이다. 즉 둥파가 되는데 파는 밭을 이르므로 둠밭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임진강 맑은 물을 사랑해서 맑은 파도 징파를 선호했지만, 내지는 그런 상상을 촉발하도록 한자를 골라 붙였지만 둠밭도 충분히 정감어린 이름이다. 비 내린 다음 날 징파나루의 물은 이름처럼 맑았다. 갈수기에 댐 공사까지 겹쳐 누런 물이 흐르던 때와는 완연히 달랐다. 햇빛에 여울물이 반짝이고 물 가운데 왜가리는 섬처럼 고요하다.


나룻배의 고장 북삼리에 도시사람들이 찾아왔다. 서울 중랑구 동서울농협이 주선한 도시 주부들이 농촌을 체험하기 위해 북삼리를 찾았다. 도시주부들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비탈밭에서 고구마를 심고 감자밭을 맸다. 주부들은 점심시간이 됐다는 주민들의 성화에도 밭을 다 매지 못했다며 일손을 놓지 않았다. 어설픈 농촌체험은 않겠다는 분위기다. 마을은 활발히 도시와 접촉하고 있다.

북삼리는 1972년 입주가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전에는 북쪽에 속했고 전쟁이후에는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정책적인 입주에 따라 강원도 화전민과 소양강댐 수몰민이 우선 입주했고 차차로 고향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본토박이보다 외지인이 많다.

임진농협 안정훈 차장은 젊은 시절 징파나루를 마차를 싣고 건너다니며 농사짓던 추억을 들려준다. 나루 상류로 조개못이라고 제법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메워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강가에는 부엉이가 사는 부엉바위가 있고 삼거리 섬말은 홍수가 지면 강물이 돌아 섬이 되었다. 왜 임진농협인가? 미산면, 왕징면, 군남면 3개면이 합쳐 하나의 농협을 만들었다. 어느 한 지역 이름을 쓸 수 없어 3개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을 찾다보니 임진농협이 됐다고 한다. 소식이 순식간에 전해지는 지금 같은 시절이었다면 특정지역이 임진이란 이름을 독점해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탈밭은 율무를 주로 심는데 연천에서 생산되는 율무가 전국의 60%를 점한다고 안 차장은 말한다. 지난해 임진농협에서는 40킬로그램 포대로 2만3천 포대를 수매했다. 밭에는 참깨와 율무, 콩을 돌려짓는다.

 

   

 

체험마을을 운영하는 박영관 씨의 어머니인 조복순(62)씨는 서울 출신으로 아랫마을 무등리로 시집왔다가 북삼리에 들어왔다. 조씨의 남편이 이곳 출신이었다. 조씨는 70년대 잠시 파주 장파리로 이주해 임진강 북방 민통선 농사를 짓기도 했다. 넓은 땅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왕징에는 지뢰가 많아 소가 죽기도 하고 나물하던 아주머니가 발목을 잘리기도 했다. 그래도 장파리 만큼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입주는 진상리에서 시작돼 무등리, 북삼리, 그리고 중면으로 확대됐다. 9평짜리 집을 지어주었는데 방 둘에 마루, 부엌 하나로 구성됐으며 모두 1백호를 지원했다. 땅도 일정한 면적씩 분배를 했는데 4년간은 도지 없이 농사를 지었다. 땅 주인들이 나타난 뒤로는 일정하게 도지를 주었는데 땅을 떼이는 경우도 있었다.

 

김종복(72)씨는 동중리에 살다 10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 왕징이고 백학이고 원당리까지 전쟁으로 묶은 땅을 개간하러 다녔다. 지뢰를 전문으로 캐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며 일했는데 지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는 벌이가 괜찮았다. 김씨는 이북에 대해 같은 동포이니 갈라먹는 것은 좋지만 그냥 퍼주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웃집 박병임씨의 모친은 원래가 개성사람이다. 피란생활을 하다가 고향 가까운 데로 온다는 것이 북삼리로 오게 됐다. 노인의 집은 처음 지을 당시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그냥 저냥 고쳐가며 살고 있단다. 하얀색이 칠해진 블록벽돌집은 노인의 고단한 생을 보여주는 듯했다. 경의선 시루리역이며 진서면, 진동면 동파리 등등의 고향 마을 이야기를 꺼내자 이름만 들어도 반갑다며 거듭거듭 인사한다. 도랍산(도라산을 말한다) 경치가 선하다고도 했고, 개성을 한 번 가고 싶은데 관절이 안 좋아 관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하기도 했다.


징파나루는 허미수의 고향이다. 북삼리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민통선 안 강서리에 미수의 은거당 집터가 있다. 임금이 노학자를 위해 직접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묘지도 가까운 언덕에 자리해 있다. 묘지는 골짜기 사이에 잔잔하게 펼쳐진 강서리 들을 편안히 내려다본다.

묘 앞 문인석은 키가 훤칠했고 색이 까맸다. 부인의 묘를 뒤에 두고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묘역 내 다른 묘들도 같은 구조로 조성돼 있었다. 미수는 학자였음에도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여럿 전하는 인물이다.

미수는 비범한 재주가 있어서 축지법으로 식전들이 금강산을 다녀오기도 하고 손을 놀리지 않고도 숟가락질을 했다. 임진강 물이 넘치는 곳에 비석을 세워두면 물이 넘치지 않았다. 비석을 세워 동해 해일을 막았다는 척주동해비에서 파생된 이야기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정적이었던 송시열에게 극약을 처방해 병을 낫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우쟁이라는 흔하지 않은 물고기가 있다. 곡우에 상류로 올라가 여울에 알을 낳는다는 모래무지를 닮은 민물고기다. 두우쟁이를 임진강에서는 미수개미라고 부르는데 미수가 즐겨먹던 물고기라고 한다. 징파나루는 미수가 자주 들러 미수나루라고도 부른다. 무술년 임진강을 유람한 미수가 배를 내린 곳도 징파나루다.

 

 

 

지금 나루에는 북삼교 다리가 섰다. 강에는 나룻배가 아니라 어선이 뜬다. 나루를 지키던 오래된 느티나무는 몇 해 전 벼락으로 모양이 크게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푸른 잎을 피우고 있다.  군남댐을 빠져나온 물은 여울로 빠르게 흘러 북삼리 쪽 기슭을 공격한다. 바위에 부딪친 물은 방향을 바꿔 돌면서 기슭을 침식시키고 바닥을 퍼 올려 깊은 소를 만든다. 이곳에서 백인걸이 낚시했다는데 '휴암조대'라는 글자가 바위에 음각돼 있다. 모래, 자갈을 싣고 흐르던 물은 유속이 느려지는 곳에다 자갈을 내려놓고 다시 여울이 되어 흐른다. 북삼교 아래로 높은 바위벼랑이 있다. 부엉이가 산다는 부엉바위다. 풍수학적으로는 고양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건너 마을 사람들은 이 고양이에 눌려 가문을 떨치지 못하다가 바위의 고양이 눈 부분을 거적으로 가려둔 뒤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적이 삭아 없어지자 가문도 쇠퇴했다고 한다.

 

부엉바위 위에는 허브빌리지라는 현대식 정원이 올라 앉아있다. 전 대통령 전두환의 아들 전재국 씨가 주인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은 곳이다. 전두환은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고도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며 이를 납부하지 않고 있다. 그런 중에 그 아들이 대규모로 땅을 구입했으니 국민들은 공분했다. 풍수학은 부엉바위 머리를 누르는 가문에는 어떤 미래를 안겨줄까? 노인들은 이 영험한 바위에는 절대 올라가지 않았고 지날 때 마다 허리 굽혀 절을 했다고 한다. 정원은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 그대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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