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제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바로 윗 형이자 넷째 아들 이방간을 제압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이방원이 정치적 실권은 장악했으나 그때까지도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태조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가 있었다.
즉 이방원이 정치적 실권은 장악했으나 조금은 불안정한 형세였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은 박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박포는 제 1차왕자의 난이 성공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다가 귀양을 갔다.
박포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성계 넷째아들 방간이 방원에 대해 가끔 불평을 늘어 놓자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방간에게 거짓 밀고했다.
방간은 박포의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여 거병 했다.
어찌보면 박포라는 사람에 의해 제1, 2차 왕자의 난의 일어난 것이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했다. 이방간, 박포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박포란 사람도 참 불행했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킬 원인을 제공하여 첫 번째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공을 인정받지 못해 불평하다 귀양을 간다.
그에 대한 불만으로 일으킨 두 번째는 실패하여 사형을 당하고 만다.
신하들은 이방간도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청하지만 이방원은 이복 동생 두 명을 죽인 것에 대한 부담으로 동복형제인 이방간은 죽이지 않고 귀양 보낸 것으로 제 2차왕자의 난은 막을 내린다.
이방간은 세종때도 보호를 받는 등 이방원보다 더 오래 살아 남아 천수를 누린다.
이로써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방원의 정치적 실권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방원은 세자가 된다.
원래는 세제가 되어야 하지만 이방원과 하륜일파는 이방원을 정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세자가 되게했다.
즉 난이 평정된 뒤 방원의 심복 신하인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게 했다.
이어 11월 정종이 스스로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 초 사회적인 영향력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추진하던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제도 개혁의 결과 사병이 혁파되었다.
또 고려관직을 그대로 이어왔던 도평의사사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립되었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 때의 왕권 강화 기반을 조성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
태종(太宗)!
일반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진 황제나 왕에게 붙이는 묘호이다.
국가를 창건했기 때문에 붙는 태조란 묘호와 다른 점은 국가의 창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상 국가의 창건자에 준하는 공적을 세워야 받을 수 있는 묘호다.
대부분 건국 초기의 극심한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궤도에 올려놓아 이후 수백년간 왕조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굳건히 한 군주에게 태종이라는 묘호가 붙는다.
만만치 않은 반대세력을 굴복, 제거시키는 과정에서 숙청 등 상당한 진통을 겪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태종이란 묘호를 가진 군주는 대체로 강한 의지를 지닌 강력한 군주이다.
보통 창건자인 태조의 아들인 군주에게 태종이라는 묘호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왕조의 창건시 태조와 함께 국가 창건에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은데다가 왕조의 창건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흔히 야기되는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교통정리 및 왕조의 체제를 제대로 형성해야 하는 막대한 책무가 이 2세대 임금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건국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말이 이래서 생긴 말이다.
창건자가 어렵게 나라를 세웠더라도 그 아들 세대에서 왕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한 사례도 꽤 있다.
중국 진나라와 수나라가 대표적이다.
실제 태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 중에는 왕조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나라를 안정기에 올려 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반드시 제2대 임금이라고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는 것은 아니며, 다른 묘호를 받는 경우도 많다.
제3대 임금이나 그 다음대의 임금도 태종의 묘호를 받을 수 있다.
바로 조선 태종 이방원이 이에 해당된다.
사실, 이방원의 경우에는 조선 2대 왕 정종이 조선 숙종 때까지도 묘호를 받지 못할 정도로 왕으로 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은 사실상 조선의 2대 국왕 자격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우리나라와 중국 역사 상 태종의 묘호를 받은 많은 군주들 중에 아버지가 정한 후계자를 죽이고 즉위한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 조선 태종 이방원, 명 영락제 주체, 이 세명이다.
형제를 죽이고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이 셋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모두 명군으로 불리우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