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한 짓'
복사: 시민 언론 민들레
임종업
입력 2025.10.05 11:00
수정 2025.10.05 13:13
."당신들은 잘못없다, 있다면 나라꼴 이렇게 만든 자"
본서로 연행하던 보도연맹원들 강가에서 풀어주며....
1960년대 중반 어느 해 이맘 때다. 누에고치를 바치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충주 시내를 갔다. 평일일 테니 초등학교 입학 전이고 따라간 게 아니라 딸려갔을 거다. 등급판정을 위해 테이블에 풀어헤친 고치 짐은 희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다. 동시에 훅 끼쳐오는 번데기 냄새의 이질감이라니. 최고등급은 못 받은 걸로 기억한다. 나방이 되어 나가며 구멍이 뚫린 거, 누에 똥으로 오염된 거 골라내고, 똥이 조금 묻은 거는 백묵 칠을 했어도, 다른 집에 비해 원체 씨알이 잘았다. 우리 집 꺼 대개가 그랬다.
누에고치 수매현장. 괴산군청 제공
아버지는 주머니가 오랜만에 두둑한 터 아이와 함께 국밥 한 그릇 드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북적이는 수매장 마당을 헤치고 나오다가 아버지를 놓쳤다. 마당을 몇 바퀴 돌았을까. 아버지는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와 말을 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쳤을 때 내 눈높이로 내려보낸 그의 시선은 한참 낯설었다. 잠간 기다리라며 사라졌던 사내의 손에는 커다란 과자봉지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곧바로 나한테 건네졌다. 상표도 맛도 기억에 없지만 한 아름이었다는 건 생생하다. 그때껏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그맘때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게 틀림없다. 충주시 고치 수매장은 시를 품은 중원군을 함께 관할하는지라 수매하는 날은 양잠농가들이 총집결하였고 자연스럽게 만남의 장이 섰다. 한두 번 더 낯선 남자를 보았지 싶다. 그때마다 내게 뭔가 안겨주었던 것 같다. 뚜렷이 기억이 남지 않은 것은 첫 번째 기억이 워낙 강했던 탓이 아닐까. 다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나를 두고 눈꼬리에 자글자글 주름이 지도록 웃던 사내의 얼굴은 선하다.
한아름 과자와 주름 잡힌 웃음
나는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몰랐고, 애들은 아버지의 말상대가 아니었다. 커가며 논에 피사리를 할 때, 보리 짚, 콩 낟가리를 쌓을 때 등 아버지와 가까이 할 기회가 많았고, 겨울 밤 새끼를 꼬거나 소 덕석을 짤 때 여유시간이 많았으나 집안 분위기 자체가 남자끼리 곰살맞은 대화를 나누는 거 자체를 남세스러워했다. 엄마 상대가 편했다. 국수를 써는 옆에서 군것질 국숫꼬리를 기다릴 때, 밑이 누를까 부뚜막에서 죽 솥을 저을 때, 가시나무 군불을 지피거나 할 때 주고받는 대화가 더 많았다. 그 말밥에서 아버지는 종종 지아비보다 남정네로 묘사되었고, 내게 아버지는 동종의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툰 농부였다. 행랑채, 잠실, 비닐하우스를 짓는 일, 하천부지를 개간해 논으로 만드는 일, 괭이나 조선 낫을 벼리러 대장간에 가는 일, 풋싸리로 잠박을 짜거나 잘게 썬 볏짚으로 누에섶을 만드는 일은 재밌어 하신 듯하나 정작 씨 뿌리는 시기, 중간 거름을 하는 시기, 피사리 하는 시기를 놓쳤다. 남들은 보리를 베고 바로 콩을 심는데, 때를 놓친 아버지는 메밀 씨를 뿌렸다. 남의 벼논은 곱상했는데, 우리 논은 웃자란 피로 볼썽사나웠다. 농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이들을 커갔다. 칠남매는 줄줄이 학교를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벌렸다. 돈 되는 누에를 치고 담배, 고추를 심고, 참외 수박을 키웠다. 나중에는 밭 전체에다 사과나무를 심었다.
아버지 돈! 나는 기성회비나 학용품 값이 필요하다는 건 아침 숟가락을 놓으며 떠올렸고, 중학교 진학해서 그런 습관은 그날그날 차비를 태우는 것으로 바뀌었다. 푼돈 차비는 그렇거니와 참고서값서껀은 미리 대기한 것이 아니었으니 자식들의 벌린 손이 난감했을 거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대답은 내일 주마, 또는 좀 기다려 봐라, 였다. 촌에서 돈 나올 구석은 농산물을 파는 거 밖에 없었는데, 여분의 곡물 외에 나오는 철이 제한된 고추, 참깨가 고작이었다. ‘내일 주마’는 불편한 미스터리였다. 과자의 비밀이 풀린 건 내일 주마 미스터리가 풀린 즈음이었다. 대학 진학해서 나는 학비, 하숙비 등 큰 목돈이 필요하고, 그 돈의 소종래를 알아야 할 나이가 되면서 과자와 내일 주마도 궁금증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또는 갓 난 아이일 적에 그만 두었기에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퇴직경찰 친목회인 경우회에서 정기적으로 우편물이 왔고, 부부싸움 중 튀어나온 ‘불명예 퇴직’을 둘러싼 입씨름에서 짐작하기는 했다. 집문서 따위를 보관한 캐비넷에서였나, ‘이승만 대통령 각하 하사목’이란 팻말이 박힌 묘목을 돌보는 제복의 남자 사진에 눈길이 갔다. 내 편에서는 사진이 문답 단초가 됐지만, 아버지로서는 나를 남자 대 남자 말상대가 되었다고 판단했지 싶다. 아버지는 상남자였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중원군 면 단위 지서 차석이었다. 엄정면 또는 소태면이지 싶은데 지서에 구금된 사람들을 충주경찰서로 인계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이른 바 ‘보도연맹’ 등록자들이다. 이들 10여 명을 포승으로 줄줄이 엮어 지서를 나섰다. 당시 차편이 아예 없었는지 중간 집결지가 따로 있었는지는 모른다. 충주행 나루터로 가다가 방향을 틀어 인적이 드문 강가로 갔다. 일행은 의아해하는 한편 두려워했을 테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전시에는 사실상 일선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이 있었다고 했다. 사상범을 사살했다고 해서 문제 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도 했다.
당신네한테 잘못이 없다, 있다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승만이다, 이런 요지의 말을 하고 아버지는 그들을 풀어주었다. 빈손으로 충주서로 간 그가 어떻게 보고했는지를 나는 모른다. 애초 연행 대상자가 없다고 했는지, 중간에 놓쳤다고 했는지. 헌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풀어준 사람 중 하나가 제 발로 다시 들어왔거나, 다른 경로로 묻어 들어왔거나, 자신의 관할지역 청년 하나가 유치장에 있더라는 것. 아버지는 그 청년을 끌어내 뺨을 후려갈기며 이 자식아, 내가 시킨 일 하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 라고 호통을 쳤다. 시퍼런 서슬에 다른 경찰이 시비를 걸지 않았고, 그 청년은 방면됐다. 유치장에 갇혔던 사람들은 경찰인력이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모두 사살됐다.
어린 나에게 과자봉지를 안긴 사내는 당시 아버지가 풀어준 보도연맹 등록자 중 한 명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이 일로 아버지는 훗날 빨갱이 혐의로 감찰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결과는 무혐의로 무마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몇 해 뒤 불명예 퇴직과 연결됐지 싶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비리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말을 아껴 자세한 내용과 전말을 알 수 없으나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어서 보도연맹원 방면으로 윗분들한테 찍혔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짐작은 아버지의 또 다른 비상한 전력을 알기 때문이다.
갑자생 아버지가 20대였을 때 폭행상해 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아마 살미 지서가 아닐까 싶은데, 그곳 일본인 경찰간부를 때렸다고 했다. 징병될 나이가 다가오면서 전과자는 열외라는 말을 듣고 일을 벌인 것이다. 그 일로 조사과정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소의 거시기를 말린 물건으로 만든 몽둥이인데, 타격하면서 살에 착착 감겨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몇 개월 형을 살았다. 출소 뒤 보람도 없이 징병돼 동남아 전선 투입을 앞두고 제주도에서 해방을 맞았다.
또 다른 비밀 '내일 주마'
아버지는 경찰을 그만 두고 농사를 지었다. 당연히 서투를 수밖에. 뜻대로 되지 않는 농사에 잦은 부부싸움도, 은근한 주사도 이해가 간다. 시시로 돈을 요구하는 아이들에게 내일 주마, 며칠 뒤 주마 말하고 그가 간 곳은 경찰서 또는 지법원 앞. 고소 고발, 또는 재판 건으로 각종 서류 작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다. 대개는 대서소를 이용하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대서소 일을 대행해주고 구전을 받았다. 대서소서 넘치는 일을 의뢰받은 건지, 상대적으로 싼 값에 가로챘는지 모른다. 경찰에서의 경험을 살려 불법 알바를 한 셈이다. 빈 주머니로 집을 나와 대서소 거리 모퉁이에서 오가는 사람을 살피다 혹시 서류가 필요하냐며 접근하거나, 아는 대서소에서 혹시 일감이 있냐고 물어보고 다녔을 아버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보름 전 부모님 산소 벌초하러 가렸더니, 고향에 사는 여동생 부부가 말끔해진 묘 사진과 함께 내려올 필요 없다고 문자했다. 오빠를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인지, 오면 되레 자신이 번거로울 거라는 생각인지 아리송하다. 어쩌면 나만 안다고 여겨온 아버지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추억 한아름 /즘생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꿈에도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정겨운 내 고향 충주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다정다감한 마음으로 읽다.
작가님의 선하신 인품에 마음이 따듯하다.
추점 내 외가도 누에고치를 길렀는데 누에들은 뽕 잎을 깨끗이 닦아주여야만 밥을 먹었다.
꿈틀대는 모습이 징그러워 보여 못 먹던 뻔데기가 나중에 먹어 보니 얼마나 맛있던지...
허락도 없이 퍼오고...나무라시면 기꺼이 삭제하오리다.
좋은 향기를 널리 퍼트리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