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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김제 51코스 제2부
은파리 진흥경로당-옥포리 수로-창제리 신구마을-
심포리 거전마을-봉화산 봉수대-안하마을-심포항
20230524
1.김제평야 지평선 보리밭 황금물결
광활면 은파리 진흥경로당 옆 쉼터정자로 들어갔다. 동진강 동안(東岸)을 따라서 광활면의 은파리, 옥포리, 창제리를 거쳐 진봉면 심포리 동진강 하구로 광활방조제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 안쪽에 간척농지 '광활들'이 드넓게 펼쳐지고, 보리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쉼터정자에서 들녘의 황금 물결 풍경을 바라보며 길동무가 짊어지고 온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숨가쁜 가슴이 풀어진다. 들길을 따라가면서 여유가 없이 왜 이렇게 허둥지둥 허겁지겁 걷기만 할까? 조금 더 한가하게, 조금 더 사색하며 들길을 걸으면, 그 들길은 더욱 아름답게 빛나며 우리의 마음을 물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의 제한과 일행의 속도가 압박하는 통제줄에 걸려, 들길의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그냥 마구 내달리는 꼴이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쉼터정자에서 20여 분쯤 캔맥주 한 통을 비우며 숨을 돌린 뒤 은파리 진흥마을 들녘 농로로 나가 서해랑길 51코스 남은 거리를 탐방한다.
광활면 은파리 지역은 남쪽의 성덕면 남포리 남포들을 이어서 북쪽으로 이어지는데 동쪽과 북쪽으로 광활면 옥포리 지역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옥포리 북쪽에는 창제리 지역이 이어져, 광활면 은파리·옥포리·창제리에 걸쳐 김제평야의 노른자 '광활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광활들'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진 것일까? 그 역사를 알아본다. 이곳은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목적으로 이 갯벌이 간척되는데 동진농업주식회사가 앞장섰다. 1924년 동진농업주식회사가 9.5㎞의 방조제를 준공하여 간척지를 조성하였고, 이후 1927년과 1929년, 1932년에 걸쳐 여러 개의 방조제를 건설하여 죽산면·성덕면·광활면 일대에 거대한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소금기가 있는 간척지에서 소금기를 없애고 벼를 수확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용수 확보였다. 일본 당국은 미곡 생산에 중요한 동진강 유역의 관개용수 확보에 비중을 두고 운암댐 건설에 착수한다. 임실군 운암면의 섬진강 물줄기를 막아 그 물을 동진강 유역과 하구에 위치한 간척지까지 연결하고자 한 운암댐은 1928년 완공된다. 이렇게 하여 임실 운암댐의 물을 취수구를 통해 정읍 칠보산으로 넘겨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한 뒤 방류한 물을 동진강 유역과 하구에 위치한 간척지까지 연결되게 된다. 운암댐에서 간척지인 광활면까지는 직선거리로 40㎞에 이른다. 이 운암호의 물이 수로를 통해 정읍을 거치고 김제평야를 돌아서 이곳 '광활들' 간척지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수로를 관리한 것이 동진수리조합이다. 수로는 간선(幹線)과 지선(支線)으로 나뉘어 있었다. 간선에서 지선으로 물을 넣어 각 논으로 물을 대는 형식이었다. 용수를 통해 물을 공급하여 농사를 짓고 배수로 물이 빠져나오는데, 이 배수에 수문을 만들었으며, 두꺼운 판자로 문을 만들어 쇠파이프를 연결했다. 핸들로 수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하며 물 관리를 했다고 한다.(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조)
이렇게 하여 죽산면의 '죽산들', 성덕면의 '남포들', 광활면의 '광활들'이 드넓은 농경지로 변모하였다. 남파랑길 51코스에서는 죽산들, 남파들, 광활들을 거쳐간다. 지금 길손은 김제평야의 중심지인 '광활들'의 은파리 진흥마을을 지나고 있다. 진흥마을에서 동쪽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 방향의 광활면 면소재지 옥포리 일대를 조망하지만 구체적인 마을은 뚜렷하지 않다. 논에는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놓아서 흙빛 물이 펼쳐지고 비닐하우스 지붕 골재들이 들길에 늘어서 있다. 아마도 이 들녘에서 비닐하우스 대규모 농사가 행해지는 것 같다. 진흥마을의 즐비한 축사들을 지나 옥포리로 넘어갔다. 깜짝 놀랐다. 마을 사이에 옛 수로가 남아 있다. 그 수로를 타고 물이 흘러간다. 아름답다. 간선(幹線) 수로가 마을 옆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연상시켰다. 비교적 넓은 수로에 농업용수가 흘러가고 수로 옆에는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옥포리 수로 풍경은 환상적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베네치아 운하의 물길을 따라 곤돌라를 타고 흘러가는 몽환에 잠겼다. 연인을 찾아 밤에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곤돌라를 타고 달빛 물길을 따라가는 오셀로의 여인 데스데모나 모습도 어린다.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라면 옥포리는 물의 농촌이다. 수로의 농촌 옥포리, 환상에 잠겨 수로를 따라가다가 수로 다리를 건넜다.
은파리에서부터 느꼈던 것을, 옥포리 지역을 지나면서 이 지역의 취락 구조가 일자형(一字型)임을 뚜렷이 보게 된다. 그 이유를 알아 보니 간척지 역사와 맞닿아 있다.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는 간척지를 조성한 뒤 임의로 토지를 측량하고 구획하여 직사각형 농경지와 수로와 농로를 따라 같은 규모의 일자이간형(一字二間型) 가옥을, 마을 가운데 열촌형(列村型)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취락 구조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취락 형태인 괴촌(塊村)과는 다른 이질적인 마을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간척지의 역사 속에 이 지역의 문화가 숨어 있다. 옥포리 시농길을 따라간다. 왜 시농길이라는 도로명이 붙었을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간척지의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만들고자 농업시험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농업시험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지개량조합 광활출장소가 있다고 하며, 옥포리 시농(試農)마을은 농업시험장을 만든 곳이기에 마을 이름을 농업시험장을 줄인 시농(試農)마을로 지었다고 한다. 시농(試農)길은 그러한 역사를 지니고 태어난 길이다.
옥포리 시농길을 따라간다. 뒤돌아보면 멀리 중앙에 명량산이 가늠된다. 죽산면 대창리 원평천과 명량산 남과 북에 펼쳐진 죽산들이 어림된다. 그 앞 왼쪽 성덕면 남포리 신평천과 남포리 남포산 북쪽으로 펼쳐진 남포들도 가늠된다. 그 들녘길을 걸어 광활면 은파리로 들어와 농로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지금 옥포리로 넘어와 광활들의 시농길을 걷고 있다. 시농길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동진강 동안(東岸) 남쪽 은파리 학당마을에서 시작된 '광활방조제'가 옥포리, 창제리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드넓은 '광활들' 서쪽 들에는 누런 보리 이삭들이 물결치고 있다. 황금 물결을 이루는 보리밭은 풍요롭다. 보리밭 가장자리 짜투리 땅에서는 가지, 고추, 마늘 등이 자라고 농민들은 드넓은 들에서 바쁜 일손을 움직이고 있다. 김제평야의 풍요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 풍요한 들녘 풍경과는 달리 농민들은 실제적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예전에는 더했고 현재에도 풍요의 혜택을 일한 만큼 못 누리는 것 같다. 그 혜택의 결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신동엽(1930~1969) 시인은 4.19혁명 기념일을 맞이하여 농촌의 가난과 지배층의 부패와 향략을 보면서 이러한 조국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동학농민혁명과 4.19혁명의 알맹이 정신만 남기고 모든 껍데기를 갈아엎어야 하며 그 갈아엎은 땅에 보리를 뿌려 푸른 보리밭을 가꾸자고 한다. 그 보리밭이 '광활들'에 출렁인다. 조국의 기층 농민들이 일군 푸른 보리밭, 그 푸른 희망이 '광활들'에 철철 물결치고 있다.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을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신동엽의 '4月은 갈아엎는 달' 전문, 1966년 4월)
푸른 보리밭이 비단처럼 물결칠 그날이 오기까지 조국의 모든 균스러운 것과 껍데기는 갈아엎어야 한다. 왜 보리밭일까? 부패와 향략을 갈아엎은 땅에 시인은 왜 보리를 뿌리자고 하였을까? 왜 그토록 푸른 보리밭을 목마르게 외쳐댔을까? 보리는 곧 농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농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동엽 시인의 이 작품은 한흑구(1906~1979)의 '보리'와 연관하면 보리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학창 시절에 읽은,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로 시작하는 한흑구의 명문 '보리'는 보리를 노래한 최고의 작품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 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너,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苦楚)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한흑구의 '보리'에서, 1955년)
광활면 옥포리(玉浦里)에서 창제리로 넘어왔다. 창제리 지명은 ‘파란 바다를 막은 제방 덕택에 만들어진 간척지’라는 뜻의 창제리(蒼堤里)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창제리 '광활들' 농로를 따라가면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망졸망한 산봉들이 이어지는 산줄기가 '광활들'을 에워싸고 있다. 이 산줄기를 모악기맥(母岳岐脈)이라 이르는데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계(水界)를 이룬다. 모악기맥은 호남정맥 묵방산 근처에서 분기하여 모악산을 거쳐 진봉산(進鳳山)을 지나 봉화산(烽火山) 꼬리가, 만경강과 동진강이 합수하는 진봉반도 끝에서 서해 바다로 빠지며 맥을 다한다. 모악기맥 산줄기 동북쪽이 만경강과 만경평야, 서남쪽이 동진강과 김제평야이다. 만경평야는 모악기맥 산줄기 뒤에 있어 보이지 않고 김제평야는 동쪽 하늘 끝으로 아스라이 끝 간 데 없이 사라진다. '광활들' 농로를 따라 헐레벌떡 신구교를 건너 신구길을 따라 창제리 신구마을을 지난다. 할머니들이 지붕이 높은 보관창고 안에서 부추를 예쁘게 다듬으신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부추를 솔이라 이른다. 피를 맑게 한다는 부추, 부추김치와 부추전에 막걸리 한 사발이 그리워진다.
'광활들' 창제리 지역이 의외로 드넓다. 창제리 중심 지역은 동쪽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 주변에 자리하는 것 같다. 서해랑길은 '지평로'와는 멀리 서쪽으로 떨어져 수로 옆 농로를 따라간다. 북쪽 봉화산이 가까워지고 그 아래 진봉면 심포리의 거전마을과 길곤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광활들'을 에워싼 모악기맥의 산봉들을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이성산, 국사봉, 진봉산, 봉화산이라 확인하며, 우리가 도착할 봉화산 너머의 심포항을 가늠했다. 다 왔군. 모악기맥이 산줄기 생명을 끝마치는 만경강과 동진강 합수 지점, 진봉반도의 서쪽 끝자락이 왼쪽으로 들어오는군. '광활들' 서쪽 남북으로 흐르는 수로를 따라가는데 '광활들' 끝 지점에서 동서로 흐르는 수로와 배수갑문이 나온다. 그 수로 너머는 진봉면 심포리 거전마을, 마을 앞 쉼터에 팽나무 세 그루가 멋지게 푸른 잎을 펄럭이고 있다.
배수갑문교를 건너 광활면 창제리에서 진봉면 심포리로 넘어갔다. 팽나무 그늘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에는 거전마을 버스정류소, 앞쪽에는 화장실과 새만금바람길 이정목과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쉼터 앞 빈터는 고적하고 마을은 단정하다. 바쁜 농사철이어서인지 주민들은 보이지 않았다. 서해랑길은 곧바로 봉화산 봉수대 터로 올라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해랑길은 새만금바람길과 동행하여 봉화산숲길 출입구로 이어진다. 봉화산숲길을 걷지 않으려면 거전마을과 길곤마을을 거쳐 '지평선로'로 나가 안하마을 앞으로 이어가면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그렇지만 봉화산에서 광활한 김제평야 풍경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누려야겠지.
봉화산숲길로 들어서 소나무숲 우거진 능선으로 올라간다. 모악기맥 꼬리 언저리에서 모악기맥의 끝 산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약 1.2km 거리, 능선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김제평야 풍경은 압권이다. 광활한 김제평야는 끝 간 데 없이 아득히 펼쳐져 있고, 그 중심지 '광활들'을 지나온 들길과 수로와 마을들이 그리움으로 정답다. 정다운 저 풍경 속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가? 개펄과 간척의 역사, 농민들의 수난의 역사가 저 '광활들' 보리밭에서 자라고 있다. '광활들'은 일제강점기 김제시 진봉면 지역으로 동진강 하류의 개펄이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이 동원되어 동진강 하류 개펄에 방조제를 쌓아 개펄이 간척되었다.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는 이 간척지를 농경지로 조성하여 이주민을 모아 집단농장 체제의 마을을 만들고, 이주민들 대부분을 ‘개펄 땅’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소작농들은 초기에 수확량의 70%를 소작료로 내야 했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신세를 ‘개땅쇠(개펄 땅에 사는 소작농)’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말에는 당시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고통스런 삶이 고스란이 담겨 있다.(디지털김제문화대전 참조) 그들이 겪어낸 아픔이 보리밭 물결을 일으킨다. 비단 눈물처럼 보리밭은 물살을 이룬다. 길손은 멍해졌다. 먹먹해지는 가슴을 일으켜 일행의 뒤를 따랐다.
모악기맥이 끝나는 서해의 끝자락 진봉반도(進鳳半島) 봉화산 정상으로 오른다. 진봉반도(進鳳半島)는 김제시 진봉면과 광활면에 있는 반도로서 동쪽으로 만경강(萬頃江), 서쪽으로는 동진강(東津江)에 둘러싸여 부리를 내민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북부 진봉면은 올망졸망한 야산이 솟아 있고 남부 광활면은 지평선이 아득히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 지대이다. 모악기맥의 대미 봉화산 정상은 길곶 봉수대 터가 남아 있어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뚜렷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돌들을 흙으로 묻고 헬기장을 만들려고 하여 정상은 현재 헬기장 모습으로 남아 있다. 봉화산 정상에서는 북서쪽이 나무숲에 가려 새만금 지역이 살짝 들어오지만 남쪽은 김제평야가 훤히 조망된다. 김제 지역은 동진강·원평천(院坪川)·만경강 주변에 광대한 충적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호남평야의 중심이 된다.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김제·만경평야는 김제시 전체 면적의 거의 절반이 되는 광활한 곡창지대로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이 생산된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김제·만경평야를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부르는데, 외배미들은 너른 들, 곧 평야를 뜻하여서 이 말은 ‘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봉화산 정상에서는 김제평야만이 보이고 그 북동쪽 만경강 유역의 만경평야는 보이지 않는다.
진봉면(進鳳面)과 진봉반도(進鳳半島) 지명을 유래한 진봉산(進鳳山)은 봉화산 동쪽에 위치한다. 이 진봉산을 서해랑길 52코스에서 통과하며, 그 전망대에서 만경평야와 만경강, 새만금을 조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서해랑길 52코스를 새벽에 출발하니, 만경평야 지역을 통과할 때 날이 밝을지가 문제다. 봉화산 정상에서 아득한 슬픔과 희망을 품고서 봉화산 북쪽 심포항으로 내려간다. 봉화산 능선에는 아직도 때죽나무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날리고 있다. 서울 대모산의 때죽나무 꽃은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쪽 김제 봉화산의 때죽나무가 종 모양의 흰꽃을 수없이 피우고 종소리를 울리며 향긋한 내음을 날린다. 종소리는 김제평야로 날아가 암흑의 굴종을 씻어내고, 향기는 새만금으로 날아가 평화의 희망을 펼친다. 역사의 종소리와 향기는 굴종을 씻어내고 희망을 부풀려야 한다. 모악기맥 대미의 봉화산 남쪽의 광활들 간척지, 그 북쪽의 새만금 간척지는 모든 굴종을 씻어내고 자유를 향하여, 모든 희망을 품고 평화를 향하여, 보리밭처럼 출렁거릴 것을 믿는다. 길손의 가슴이 자꾸 부풀어진다.
안행산 자락을 내려와 안하마을 당산나무쉼터에서 서해랑길과 새만금바람길은 곧바로 심포항으로 가지 못한다. 전주-새만금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안하마을 방향으로 우회하여 심포항 목적지로 가야 한다. 안하마을을 거쳐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와 재회하였다. 그리운 '지평선로'와 오늘의 만남과 헤어짐을 짚어 보았다. 성덕면 남포리 남포들을 걸어와 성덕면 남포리 옛 남곡중학교 앞에서 '지평선로'와 처음 만났다. '지평선로'를 따라 남포1구, 2구마을을 거쳐 남포들녘정보화센터 앞에서 '지평선로'와 잠시 헤어졌다가 남포5구마을 입구에서 '지평선로'와 만난 뒤 헤어졌다. 그 뒤 남포5구마을을 거쳐 성덕면 은파리 지역으로 들어가 드넓은 광활들을 돌아가다가 옥포리, 창제리 지역을 길게 걸어와 진봉면 심포리로 들어왔다. 봉화산숲길을 거쳐 안하마을을 지나 안하마을 입구에서 '지평선로'와 세 번째로 재회한다. '지평선로', 그리운 지명이다. 땅의 끝과 하늘이 맞닿는 경계선,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지평선, 그 지평선을 '광활들'과 봉화산에서 만났다. '지평선로'에서 다시 '광활들'과, 그 동쪽으로 심포들을 바라보며 안하삼거리에서 '지평선로'와 헤어졌다. 지평선, 오늘 내 삶의 지평은 얼마나 하늘 끝까지 나아갔는가. 김제평야 저 먼 곳으로, 4.19혁명과 동학농민혁명 저 먼 시대로, 나는 얼마나 나아갔는가? 먹물의 관념만 채운 채 현실, 지금 이곳을 맴돌았을 것이다.
심포항으로 나아갔다. 만경강은 새만금 간척지로 인하여 그 하구는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다. 동진강 하구에 거전항이 있었는데, 새만금 방조제 축조로 거전항은 폐항되었으며 만경강 하구의 심포항 또한 앞날이 불투명하다. 심포마리나 조성사업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실천은 요원한 것 같다. 만경강 하구를 바라보며 노을의 만경강 풍경을 그려본다. 안도현 시인의 '만경강 노을'이 붉은 슬픔으로 만경강에 번진다. 만경강 노을은 피멍진 사랑, 배고픔의 추억으로 밀려든다. 만경강 노을이 운다. 그 깊은 울음을 내 어찌 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만경강 노을처럼 더 깊어져 이 모든 것을 품어야 한다.
"노을아/ 피멍진 사랑아/ 어릴 적 고향집 뒷방 같은 어둠이/ 들을 건너오는구나/ 그대 온몸의 출렁거림/ 껴안아줄 가슴도 없이 나는 왔다만/ 배고픈 나라/ 하늘이라도 쥐어뜯으며 살자는구나/ 내 쓸쓸함 내 머뭇거림 앞에서/ 그대는 허리띠를 푸는데/ 서른살이 보이는 강둑에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 것이냐/ 서해가 밀려들면/ 소금기 배인 몸이 쓰려/ 강물이 우는 저녁에/ 노을아/ 내 여인아"(안도현의 '만경강 노을'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87km 중 9.87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20분 중 2시간 40분
김제시 광활면 은파리 진흥경로당 옆 쉼터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며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신 뒤 출발한다. 10:39
은파리 진흥마을 광활7길을 따라가는데 축사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앞쪽은 광활면(廣活面) 은파리(銀派里) 진흥마을 일대이고, 뒤쪽은 옥포리(玉浦里) 회령(會寧)마을 일대라고 가늠한다. 뒤쪽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를 따라 남북으로 옥포리(玉浦里)의 회진(會進)·화양(華陽)1구·화양2구·회령(會寧)·광활(廣闊)·화신(華信)·시농(試農)·시흥(試興) 등의 자연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은파리(銀派里)는 해발 고도 2~3m 안팎의 낮은 평야 지대로,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간척되기 전에는 갯벌 지대였다. 자연마을로 선광(先光)·선진(先振)·학당(學堂)·용지(龍池)·군평(郡平)·진흥(振興) 등이 있다. 진흥(振興)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사답구(四沓區) 지역으로, 1932년 82가구가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지대가 낮고 유독 소금기가 많아 마을을 육성하기 위한 지원이 계속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옥포리(玉浦里) 회령(會寧)마을은 1930년 81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삼답구(三沓區)로 불리다가 1949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령으로 바꾸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농장이 있었는데, 농장 지배인의 못마땅한 행동에 참지 못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주모자가 잡혀 수모를 당하자, 마을 주민들이 창고에 모여 일을 수습하기 위해 회의를 자주 열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활면(廣活面) 은파리(銀派里)에서 옥포리(玉浦里)로 넘어와 광활8길을 따라간다.
광활면(廣活面) 옥포리(玉浦里)는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이도면에 속했던 갯벌 지역으로, 간척하여 진봉면 고사리에 편입하였다. 1949년 진봉면에서 광활면을 분할하고 옥포리라 명명하여 김제군 광활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가 되었다. 옥포리가 속한 광활면은 1924년 동진농조주식회사가 광활방조제를 만들어 조성한 간척지로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옥포리는 광활면의 중심지로 광활면사무소, 광활초등학교, 우체국, 농산물간이집하장 등이 들어서 있다. 시농마을에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농업시험장 자리에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조주식회사 광활출장소 등이 들어서 있다. 자연마을로 회진(會進)·화양(華陽)1구·화양2구·회령(會寧)·광활(廣闊)·화신(華信)·시농(試農)·시흥(試興)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물의 도시 베니스 풍경을 연출한다. 물은 농업용수인지라 탁하다.
옥포리(玉浦里)에는 자연마을로 회진(會進)·화양(華陽)1구·화양2구·회령(會寧)·광활(廣闊)·화신(華信)·시농(試農)·시흥(試興) 등이 있다. 회진은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회령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화양은 1930년 80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오답구(五沓區)로 불리다가 땅이 기름지다고 하여 화양으로 바꾸었다.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화양1구와 화양2구로 나누어졌고, 다시 화양1구에서 광활이, 화양2구에서 화신이 나누어졌다. 회령은 1930년 81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삼답구(三沓區)로 불리다가 1949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회령으로 바꾸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농장이 있었는데, 농장 지배인의 못마땅한 행동에 참지 못하고 시위를 벌이다가 주모자가 잡혀 수모를 당하자, 마을 주민들이 창고에 모여 일을 수습하기 위해 회의를 자주 열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뒤에 광활면 면소재지 옥포리의 광활마을이 보인다.
광활면(廣活面) 옥포리(玉浦里)의 광활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오답구, 육마을, 여섯가구뜸이라 하였다가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광활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므로 광활이라 하였다. 오답구는 일본인들이 편의에 따라 간척지를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붙인 이름이고, 육마을이나 여섯가구뜸은 마을에 여섯 가구가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주로 살았던 일본식 가옥인 터돋움집, 한 구역에 여섯 가구가 살아서 육마을이나 여섯가구뜸으로 불린 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가옥들이 겉모습만 바뀐 채 남아 있다. 화신은 1981년 화양2구에서 나누어진 마을로 ‘서로 믿고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시농은 1932년 62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육답구로 불리다가 1949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농으로 고쳤다. 일제가 광활간척지의 수확량을 높이려고 농업시험장을 만들고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고자 했는데, 이 시험장이 있던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흥은 시농의 인구가 증가하자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나누어진 마을로, ‘시농에서 나누어져 흥하는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물의 도시 베니스를 연상하게 한 수로마을이다. 이 수로가 광활면 간척농지의 젖줄이다.
동진강을 따라 길게 방조제가 이어지고 광활면 옥포리에 드넓은 간척농지를 펼쳐 놓았다. 중앙 뒤에 부안군 하서면의 석불산, 오른쪽 뒤에 부안군 계화면의 계화산이 어림된다.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밀려드는 조수(潮水)의 해를 막기 위해 만든 방조제는 해면 간척지에서 바다로부터 농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는데 간척 전공사비의 50~70%를 차지하며 간척지의 생명선이 된다. 축제선(築堤線)은 지반의 고저 및 양부(良否)·조위(潮位)·풍향·인접지의 배수 계통 등을 고려하여 단위 면적당의 제방 연장이 최소로 되도록 선정한다. 방조제의 구조는 지반의 상태, 간척 규모, 바람·조류·축제 재료·시공법 등에 따라 다르나, 한국에서 주로 행하는 형태는 다음과 같다. ① 성토(盛土)를 주제체(主堤體)로 하고 앞면을 급경사의 석축(石築)으로 보호한다. ② 성토를 주제체로 하고 앞면을 완만한 경사의 장석 등으로 보호한다. ③ 급경사의 돌쌓기를 주제체로 하고 누수 방지를 위해 배면(背面)에 성토를 한다. 제방의 높이는 그믐의 평균 조위보다 4~5m 높게 하고, 정폭(頂幅)은 최소 1.8m, 보통은 3~4m, 최대 6m로 한다. 제방의 안전성은 기초 지반의 지지력의 크기에 따라 좌우되므로 조사하여 그 시공법을 결정한다. 방조제는 1963년 12월 5일 이전까지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하여 관리되어 왔으나, 1963년 12월 5일 「방조제관리법」이 제정됨에 따라 국가 관리와 지방 관리 및 수익자 부담 관리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방조제 수는 화포방조제, 진봉방조제, 광활방조제, 대창방조제, 서포방조제 등 5개이다. 방조제 대부분이 1920년대에 준공되었으며, 1966년 12월 28일 국가 관리의 결정을 받아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 화포방조제는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지선(地先)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6년 준공되었다. 진봉방조제는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지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4년 준공되었다. 광활방조제는 김제시 광활면 은파리·옥포리·창제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4년 준공되었다. 대창방조제는 김제시 죽산면 대창리 지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7년 준공되었다. 서포방조제는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지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9년에 준공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옥포리 수로 다리를 건너 시농길로 들어왔다. 멀리 중앙에 명량산이 가늠된다. 오른쪽 뒤에 은파리 학당마을에서 시작된 광활방조제가 옥포리로 이어지고 있다.
광활간척지는 1923년 10월 일본인 아베 후사치로[阿部房次郞]이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 100만 엔 등 총 200만 엔을 들여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광활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만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를 농지로 만드는 데는 약 9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1,928정의 간척지를 관리하기 위해 1답구에서 9답구까지 나누고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자 격자 모양의 경지마다 일렬로 6가구씩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육마을 또는 여섯가구뜸과 같은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이 사는 면소재지에는 술집과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가옥은 터를 돋우고 유리창을 이용하여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지었으나 한국인들은 물이 올라오는 평지에 초가집을 짓고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볏짚을 엮어 처마 밑에 둘렀기 때문에 한낮에도 집안이 컴컴하였다. 광활방조제는 옥포리 시농마을 남쪽에서 창제리 신광마을 서쪽으로 뻗어 있는 제방으로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1924년 완공하였다. 광활방조제가 완공됨에 따라 은파리·옥포리·창제리 일대에 16.51㎢의 농지가 만들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활방조제가 동진강 동쪽 옥포리 지역을 감아돌고 있다. 간척농지에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왼쪽 뒤는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일대이고 오른쪽 뒤에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이 가늠된다.
김제시 광활면 은파리·옥포리·창제리에 있는 광활방조제는 1924년 김제시 광활면 일대 동진강으로 밀려드는 조수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동진농업주식회사가 건립하였다. 1924년 준공되어 다른 곳과 함께 국가관리결정을 받았는데, 1952년 9월 폭풍우로 제방 일부가 유실되어 구제방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1966년 6월 주민 부담으로 복구되어 같은 부분 238.02㏊는 1970년에 결정 변경되었다. 광활방조제의 구역 면적은 1,651.74㏊이며, 몽리 면적은 1,460.04㏊이다. 평균관수심은 2.2m이다. 제당 형식은 사석 및 수제공이며, 제당 길이는 9,500m, 제당 높이는 4m이다. 포용조수량은 1,994만 톤, 대안 거리는 8.9㎞이다. 유역 면적은 1,666㏊, 수혜 면적은 1,469㏊이다. 갑문은 5개소 18련(連)으로 거전갑문 8련, 군평갑문 2련, 학당갑문 4련, 선학갑문 2련, 선광갑문 2련 등이 설치되어 있다. 2016년 현재 광활방조제는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 지구 내 농가 호수 및 경지 면적은 총 1,136호에 논이 1,443.28㏊, 밭이 15.77㏊로 총계는 1,459.0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옥포 지역의 광활방조제가 오른쪽 창제리 지역으로 이어지며 넓은 간척농지를 조성하였다. 건너편 왼쪽은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 오른쪽은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계화산이다.
옥포리 시농길을 따라간다. 왼쪽 뒤에 광활방조제가 창제리 지역으로 이어지고, 중앙 뒤에 진봉면 심포리 봉화산이 보인다. 그 뒤에 심포항이 있으며 51코스 종점이다. 왜 시농길이라는 도로명이 붙었을까?
옥포리 시농(試農)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간척지의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만들고자 농업시험장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농업시험장을 줄인 시농(試農)이 되었다. 당시 농업시험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지개량조합 광활출장소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활면 옥포리에서 창제리로 넘어왔다. 농로에서 진봉면 심포리 봉화산과 진봉산, 그리고 국사봉(맨 오른쪽)을 조망한다.
창제리의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지만 ‘푸른 바다를 막은 제방 덕택에 만들어진 간척지’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창제리(蒼堤里)라고 이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일도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였다가 일제강점기에 간척하여 진봉면 심포리에 편입하였다. 1949년 용평·신광·금복 등 3개 마을을 병합하여 창제리라 하고 진봉면에서 분할된 김제군 광활면에 편입하였다.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용신·용평·신광·신흥·신구·구복 등 6개 마을로 개편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 창제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창제리 신구길을 따라 신구교를 건너 신구마을로 이어간다.
종점까지 약 5km가 남아 있다.
신구교를 건너 신구길을 따라 창제리 신구마을로 이어간다.
신구마을 앞 창제2길을 따라 신구마을을 통과한다.
신구(新龜)마을은 구복(九福)마을의 인구가 증가하자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구복에서 나누어져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활면의 지형이 거북과 같고, 신구가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므로 거북 ‘구(龜)’자를 썼다. 창제리는 일제강점기에 광활면을 포함한 김제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진봉반도를 간척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바둑판식으로 정리된 농경지에 다섯 내지 여섯 가구를 한 단위로 가옥들을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지금도 구복마을에 이 같은 일자형으로 배치된 가옥이 남아 있다. 창제리는 광활면에서도 바닷바람이 가장 강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겨울철에 불어오는 북서풍에 대비한 바람막이 시설이 마치 울릉도의 우데기처럼 처마 밑에 둘러쳐져 있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서비스 시설들은 중심지인 광활면 소재지에 집중 배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제2길을 따라 신구마을을 통과하여 창제리(蒼堤里) 들녘으로 나간다.
창제리 들녘 농로를 따라간다. 앞에는 왼쪽부터 진봉면 심포리의 봉화산, 오른쪽에 진봉산이 있다.
창제리는 일제강점기에 광활면을 포함한 김제평야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진봉반도를 간척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바둑판식으로 정리된 농경지에 다섯 내지 여섯 가구를 한 단위로 가옥들을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지금도 구복마을에 이 같은 일자형으로 배치된 가옥이 남아 있다. 창제리는 광활면에서도 바닷바람이 가장 강한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겨울철에 불어오는 북서풍에 대비한 바람막이 시설이 마치 울릉도의 우데기처럼 처마 밑에 둘러쳐져 있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서비스 시설들은 중심지인 광활면 소재지에 집중 배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는 진봉면 심포리의 진봉산과 명동마을, 중앙 뒤는 진봉면 고사리의 국사봉과 고사마을, 맨 오른쪽은 이성산인 듯.
창제리의 자연마을로 용평(勇坪)·용신(勇新)·신광(新光)·신흥·구복(九福)·신구(新龜) 등이 있다. 용평은 일제강점기에 칠답구(七畓區) 지역으로, 1931년 57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이봉춘이라는 장사(壯士)가 살았으므로 힘이 세고 용맹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용평이라 하였다. 용신은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용평에서 분리되어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광은 일제강점기에 팔답구(八畓區) 지역으로, 1932년 70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청년들이 많아 씨름대회가 열리면 항상 우승을 차지하니 더욱 새롭고 빛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광이라 하였다. 구복은 일제강점기에 구답구(九畓區) 지역으로, 땅이 기름져 광활면의 모든 복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구는 구복의 인구가 증가하자 1981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구복에서 나누어져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활면의 지형이 거북과 같고, 신구가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므로 거북 ‘구(龜)’자를 썼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제리 들녘 농로를 따라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이 들을 광활들이라 이른다. 중앙에 구복마을, 맨 왼쪽에 구복마을, 중앙 왼쪽 뒤에 신흥마을이라고 어림한다. 광활들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광활면의 모든 지역이 그렇듯이 바다를 메워 만든 간척지이다. 농업용수는 신평천(新坪川)에서 유입되는 관개 수로에 의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광활면 일대 갯벌의 대규모 간척공사에 전국의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해안 지형은 ‘개땅’으로 바뀌었고, 수평선은 지평선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간척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개척한 그 개땅에 소작인으로 눌러앉아 살면서 일본인들의 착취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은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들을 가리켜 ‘개땅쇠’라 불렀다. 광활들은 김제평야와 만경평야의 중심부로서 한국에서 가장 넓은 시야로 들판을 열어준다. 김제시 광활면 전체가 산이 없는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가을이면 유일하게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황금벌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서해안고속국도를 타고 김제 지역을 지날 때면 바둑판 모양으로 농지 정리가 되어 있는 끝없는 광활들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에서 광활면 창제리까지 논과 논 사이를 가로지르는 15㎞의 논둑길은 자동차로는 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지방도 702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광활들을 관통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제리 농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 봉화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진봉면 심포리 길곤마을, 맨 왼쪽에 거전마을이 있다. 길곤마을은 옛날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노활리'로 불렸으나, 언제부터인지 '길곤'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수로에 배수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건너편은 진봉면 심포리 거전(巨田)마을이다.
진봉면 심포리의 자연마을로 심포·명동·규동·전선포·안하·길곶·거전·심신성·남상·남하 등이 있다. 심포리 일대는 바다와 연결되는 갯벌이 발달하여 오래전부터 간척이 이루어져 왔고, 일제강점기에도 1924년 진봉방조제와 1926년 화포방조제가 완공되어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구분되어 관리하였다. 진봉산(進鳳山)에 있는 백제시대의 고찰 망해사(望海寺) 전망대에 오르면 군산과 부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872년 제작된 김제군 지방도를 살펴보면 심포리 주변은 거의 간석지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던 농가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약 20년 동안 진행된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해 심포리 앞 갯벌과 바다가 방조제 안쪽의 내수면지가 됨으로써 예전 포구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앞으로 간척 사업이 끝나면 이곳 주민들의 생업도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심포항의 경우 이미 포구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보상금을 받은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배수갑문교 앞 쉼터에 오래된 팽나무의 위용이 멋지다. 배수갑문교를 건너 광활면 창제리에서 진봉면 심포리로 넘어간다.
거전마을 버스 정류소에서 왼쪽으로 거전길을 따라 봉화산숲길 입구로 이어간다. 만약 봉화산숲길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오른쪽 거전길를 따라가서 지평선로로 나가 왼쪽 안하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안하마을 입구에서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심포리의 위치가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바닷가였기 때문에 예부터 포구로 이용되었으므로 깊은개 또는 짚은개라 하였다. 심포(深浦)는 깊은개의 한자 표기이다. 조선 말기 만경군 하일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흥리·규동리·남하리·안하리·길곶리·거전리·남상리 일부를 병합하여 심포리라 하고 김제군 진봉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가 되었다. 지리적으로 김제시 북서쪽 최북단 진봉반도 끝부분에 자리 잡아 좌우로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 하구를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만경강 하구에 있으면서 금강(錦江)·동진강과도 연결되어 있어 예부터 충청도와 전라도로 들어오는 외적을 쉽게 막을 수 있는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봉화산(烽火山)[82m]에는 봉수대를 설치하여 외적들의 움직임을 한양까지 알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대의 확실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버스 정류소 유리벽에 붙은 김제시 안내지도 중에서 서해랑길 51코스 탐방 지역만을 살펴 보았다. 진봉반도가 새의 부리 같다.
심포리 거전마을 앞에 새만금바람길 종점 이정목과 새만금바람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진봉면 심포리의 자연마을은 심포·명동·규동·전선포·안하·길곶·거전·심신성·남상·남하 등이 있다. 심포리 일대는 바다와 연결되는 갯벌이 발달하여 오래전부터 간척이 이루어져 왔고, 일제강점기에도 1924년 진봉방조제와 1926년 화포방조제가 완공되어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구분되어 관리하였다. 진봉산(進鳳山)에 있는 백제시대의 고찰 망해사(望海寺) 전망대에 오르면 군산과 부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872년 제작된 김제군 지방도를 살펴보면 심포리 주변은 거의 간석지였고, 어업과 농업을 겸하던 농가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약 20년 동안 진행된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인해 심포리 앞 갯벌과 바다가 방조제 안쪽의 내수면지가 됨으로써 예전 포구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앞으로 간척 사업이 끝나면 이곳 주민들의 생업도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심포항의 경우 이미 포구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보상금을 받은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흔적들이 바람이 되어 돌아오는 새만금바람길. 거리 10km, 해안길, 4시간. 진봉방조제에서 마음이 탁 트이는 김제평야와 새만금간척지의 드넓은 모습을 볼 수 있고, 중간지점에 위치한 망해사에서 꽃피우는 아름다운 경치, 일몰을 즐길 수 있으며 심포항에서 고요한 바다소리는 거친 숨소리를 편안하게 한다.(설명안내판)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일대에 조성된 바닷길 새만금바람길은 자연 생태와 농촌 풍경이 잘 어우러진 유서 깊은 김제시 진봉면 일대 바닷가에 자연을 느끼며 건강을 증진하고, 아울러 농경문화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2011년 7월부터 사업비 8,000만 원을 들여 그해 11월 15일 완공하여 개장하였다. 새만금바람길은 진봉면사무소를 기점으로 진봉방조제 0.5㎞, 전선포 4㎞, 망해사 1㎞, 망해사 전망대 0.3㎞, 두곡서원 0.5㎞, 심포항 1㎞, 안하마을 쉼터 1.3㎞, 거전마을 종점 1.5㎞에 이르는 총 10㎞ 구간 1개 코스이다.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다. 자연과 농촌 체험을 콘셉트로 조성된 새만금바람길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적과 관광지를 연계하여 조성되었다. 아울러 새만금 사업 현장 인근에 접하여 새만금바람길 탐방과 더불어 새만금 사업현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물론 광활한 김제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진봉면사무소에서 진봉방조제 방면으로 조금 이동하면 새만금바람길이 시작된다. 심포항 입구에서는 새만금 관련 공사로 우회로로 안내한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길 찾기는 쉽다. 특히 보리가 익어가는 5월과 벼가 익어가는 10월에는 황금들판이 펼쳐진다. 주변 볼거리로 지금의 해군 기지 역할을 한 전선포, 만경강 하류 서해에 위치하여 고군산열도를 바라보고 있는 망해사, 정몽주(鄭夢周)·강원기(康元紀)·성전림 등을 배향하는 두곡서원, 일몰이 일품인 심포항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배수갑문교를 건너 심포리 거전마을로 들어왔다. 팽나무 아래 쉼터에서 숨을 고른 뒤 오른쪽 봉화산숲길 입구로 진행한다.
진봉면 심포리 거전(巨田)마을은 마을 앞 갯벌이 큰 밭처럼 생겼다고 거전(巨田)마을이라 불리는데, 실제로 새만금 내부 개발이 완료되면 넓은 갯벌이 농경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거전포장마차 앞을 통과하여 봉화산숲길 나들목으로 이어간다.
봉화산숲길로 들어가 봉화산 봉수대 방향으로 이어간다. 정상에 봉화대가 있어 봉화산(烽火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화산숲길은 6.9km 봉화산, 심포항, 진봉산, 망해사, 전선도제방, 국사봉, 니성산으로 이어진다.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봉화산 숲길의 능선을 따라 봉화산 봉수대로 이어간다. 봉화산에 무덤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봉화산숲길은 새만금바람길 구간에 속한다. 봉수대 1km, 바람길종점 0.6km 지점이다.
오른쪽으로 동진강이 흐르고 중앙에 명량산과 남포산이 가늠된다. 드넓은 간척농지 '광활들'이 펼쳐져 있다.
위의 사진보다 좀더 서쪽으로 바라보았다. 맨 왼쪽에 남포산과 명량산, 오른쪽 동진강 건너편에 부안군 산봉들이 보인다.
봉화산에 무덤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옛 무덤이 방치되어 있다. 석조물로 보아 이 지역의 호족세력 무덤 같다.
아랫마을은 진봉면 심포리 거전마을이다. 건너편은 광활면 창제리, 옥포리 지역으로, 김제평야의 중심지 광활들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다. 거전마을은 진봉면 서쪽 맨끝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앞쪽의 넓은 갯벌이 마치 '큰 밭'처럼 생겼다 하여 '거전(巨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서씨 제각이 옛날에는 서당이었는데, 약 200여 년 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중앙의 수로를 따라왔다. 아래 거전마을 오른쪽에 거전마을 버스정류소가 어림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수로 건너편은 광활면 창제리 일대로 중앙에 흐르는 수로 중앙에 보이는 마을이 광활면 창제리 신구마을이며 중앙 맨 끝에 죽산면 대창리 명량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광활방조제에 의해 간척된 간척농지 광활들이 남포들과 명량산 뒤 죽산들로 이어진다. 김제평야의 핵심인 죽산들, 남포들, 광활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이곳이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김제평야이다,
광활들과 남포들이 광대하다. 중앙 끝에 죽산들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동진강이 휘감아 흐르고 있다.
봉화산은 모악기맥 대미를 이루는 산봉이다. 모악기맥은 서해 바다로 풍덩 빠지며 그 맥을 마친다.
봉화산의 산줄기는 호남정맥 초당골[막은댐]을 지나 모악산기맥 분기점에서 전라남도 광양시의 백운산까지 뻗어가는 호남정맥에서 분기되어 북쪽으로 달리는 모악기맥이 뿌리이다. 모악기맥은 만경강(萬頃江)과 동진강(東津江)을 가르며 엄재, 국사봉, 화율봉, 장근재, 모악산, 유각치, 묘고산에 닿는다. 묘고산에서 서쪽으로 구성산(九城山) 줄기를 갈라놓고 북쪽으로 달리며 매봉산, 천잠산에 이르면 방향을 서쪽으로 꺾는다. 승반산(升盤山), 두악산(斗岳山), 국사봉(國師峰), 망해사가 있는 진봉산(進鳳山)을 지나 봉화산에서 맥을 다한다. 봉화산의 물줄기는 모두 서해로 합류하여 새만금 지역으로 들어간다. 봉화산은 높이 85m로, 남서쪽에 거전마을이 위치하고, 북동쪽에 심포항(深浦港)이 위치한다. 동쪽으로 지방도 702호선이 지나고 있다. 진봉반도 서남쪽 육지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서남쪽은 서해바다인 새만금이고, 서북쪽은 만경강 하구, 동남쪽은 동진강 하구이다. 동북쪽은 만경강 연안에 봉화산처럼 50~60m의 올망졸망한 산들이 줄지어 있고, 동쪽은 진봉의 넓은 들녘과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봉화산 능선을 타고 봉화산으로 올라왔다. 봉화산 산줄기는 서쪽으로 벋어내려 서해 바다로 빠져들어 맥을 끝낸다.
봉화산 정상에 길곶 봉수대 터가 남아 있어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뚜렷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돌들을 흙으로 묻고 헬기장을 만들려 했다고 한다.
서해를 바라보는 봉화산(火山)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주춧돌과 자연석으로 쌓았던 담장의 흔적이 뚜렷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돌들을 흙으로 묻고 헬리포트를 만들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대의 상단좌대는 가로 6m. 세로 10m의 직사각형이며, 서북쪽과 동북쪽은 능선이 있고 좌우는 절벽이다. 정상의 넓이는 330㎡ 정도 된다.
봉수대는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이르자 일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다 하여 계화도로 옮겼다는 설이 있다. 봉수는 횃불(봉)과 연기(수)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신호를 하였다. 봉수대에서는 평상시에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셋이 국경을 넘어오면 넷, 우리군사와 적군이 싸우면 다섯개의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봉화산 정상에서 서쪽 새만금을 조망하였다.
새만금방조제는 전라북도 김제시, 군산시, 부안군을 연결하는 방조제.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하구 일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에 총길이 33㎞의 방조제를 축조해 총 면적 401㎢의 토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김제시의 사업 구역은 광활, 죽산, 만경, 청하, 성덕, 부량, 진봉 등 7개면이 포함된다. 새만금 방조제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알려졌던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32.5㎞]보다 500m 더 길어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가 되었다.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게, 더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에서 예부터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아울러 일컫던 금만평야에서 ‘금만’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봉화산 정상에서 김제시 광활면 창제리, 옥포리, 남포리 일대 광활들과 남포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봉화산에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봉화산 정상을 뒤돌아보며 하산한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길곶 봉수대는 황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져 있어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로 들어오는 적선을 곧바로 탐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4 만경봉수조에 “길곶 봉수는 현 서쪽 29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부안현의 경계 화도에 응해 있고, 북으로는 옥구현 사자암에 응해 있다[吉串烽燧在縣西二十九里南應扶安縣界火島北應沃溝縣獅子巖].”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도입과 함께 일찍부터 설치되어 조선시대 내내 주요 통신수단의 하나로 이용되었으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혁파된 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심포리 길곶 봉수대 터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사이 황해에 고개를 내민 듯한 진봉면의 끝 봉화산[84m] 정상에 있다. 1984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김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의 일환으로 봉수대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물이 1985년에 『김제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로 간행되었다. 봉화산 정상에 올라가면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음직한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돌무덤처럼 쌓여 있는데, 그 중에는 불에 그은 흔적이 있는 돌들도 상당수 남아 있다.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세종 때 처음 마련되어 갑오개혁 때 폐지되기까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통신수단의 하나였다. 특히 심포리 길곶 봉수대는 서해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세워져 있어 외적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새만금바람길 안내도가 최근에 새롭게 설치된 것 같다. 위치를 확인하는 좋은 안내도라고 생각한다.
봉수대 0.2km, 안하마을 0.7km 지점으로 왼쪽은 구병영시설, 오른쪽은 거전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서울 대모산에서는 때죽나무꽃이 모두 지고 없는데, 남쪽 김제 지역에서는 때죽나무꽃이 은은한 향기를 날린다.
직진하면 길곤마을,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심포항과 안하마을로 이어진다.
봉화산 능선에서 북쪽 심포항 방향으로 넘어가면서 남쪽의 광활면 창제리 드넓은 광활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길곤마을은 직진 0.3km, 심포항은 왼쪽으로 1.9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팽나무가 멋진 당산나무쉼터에서 왼쪽 심포항으로 이어지는데 공사 관계로 오른쪽 안하마을로 이어간다.
당산나무쉼터로 내려가면서 동쪽의 진봉면 심포리 안하(雁下)마을과 심포들을 바라보았다.
당산나무쉼터로 내려가면서 만경강 하구 새만금방조제를 조망하였다. 오른쪽 만경강 건너편은 군산시 옥서면 지역인 듯.
새만금 간척 사업은 국토의 외연적 확장과 농어촌 발전 기반 조성, 수자원 확보, 지역 종합 개발, 간척 농지 개발 및 쾌적한 복지 농어촌 도시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진행되어 왔으나 대규모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갯벌 생태계 파괴, 수산 자원의 고갈, 해양 오염의 증가 등 여러 가지 환경 문제가 발생하는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최근 김제 지역에서는 새만금 지구의 행정구역 설정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새만금 간척 사업 전에 바다는 공유 수면으로 3개 시·군의 어민이 자유롭게 어로 활동을 하여 해양 경계선이 별의미가 없었으나, 최근 새만금 지구의 방조제 공사가 완공되어 육지로 변함에 따라, 김제시는 방조제 구간을 제외하면 37㎞이던 해안선이 사라져 바닷길이 막히고 내륙 도시로 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최근 새만금 지구의 행정구역이 결정되는 시점에서 설정 기준을 해양 경계선을 적용할 것인지, 육지 경계선을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 군산·부안 지역과 갈등을 빚고 있다. 지금의 해양 경계선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설정하면 군산 71.1%, 부안 15.7%, 김제 13.2%로 설정된다. 김제시에서는 지난 2006년 4월 새만금 방조제의 끝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새만금 지구는 더 이상 바다가 아니고 담수호를 가진 육지나 다름없으므로 해양 경계선은 효력을 상실함이 마땅하고, 하천이나 산으로 설정하는 육지 경계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포항 0.7km 지점인데, 공사 중이라 곧바로 심포항으로 이어지는 길 대신에 안하마을 방향으로 우회한다.
새만금 방조제 사업은 국토 확장과 우량 농지 조성, 수자원 확보, 종합 관광권 형성 등의 측면에서 다양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반면 개발로 인해 방대한 영역의 갯벌과 해양 생태계가 파괴될 것을 우려하는 환경 단체의 목소리와 사업 경제성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담아 새만금 사업을 지역 개발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의 기회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만금 사업이 지역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세계적인 명품 도시로 발전하는 바탕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대형 병원과 학교 등 기본적인 인프라와 편의 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포항으로 곧바로 가지 못하여 아쉬움을 달래며 새만금방조제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1991년 11월 28일 새만금 간척 종합 개발 사업의 기공식과 함께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4개[1호~4호 방조제] 공사로 나뉘어 진행되기 시작했고, 4호 방조제[1991~1994], 3호 방조제[1991~1994], 1호 방조제[1991~1998], 2호 방조제의 순으로 준공될 예정이었다. 4호 방조제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섬인 야미도(夜味島)와 육지인 비응도동을 연결하는 11.4㎞ 구간으로 평균 높이 20m, 평균 밑너비 290m로 1994년 7월 물막이 공사를 완료하였다. 3호 방조제는 전라북도 옥도면 신시도와 야미도를 연결하는 2.7㎞ 구간으로 평균 높이 16m, 평균 밑너비 198m로 1994년 7월 물막이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와 함께 신시도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배수 갑문인 신시 배수 갑문 공사가 이어져 2006년 12월에 준공되었다. 홍수 때에 담수호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것으로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문 10련을 제작·설치하는 공사였다. 1호 방조제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와 가력도를 연결하는 4.7㎞ 구간으로 평균 높이 2m, 평균 밑너비 201m로 1998년 12월 준공되었다. 이와 함께 가력도에 축조된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문 8련을 제작·설치하는 가력 배수 갑문 공사가 이어져 2003년 12월에 준공되었다. 2호 방조제는 가력도와 신시도를 연결하는 9.9㎞ 구간으로 평균 높이 35m, 평균 밑너비 290m로 2006년 4월 21일 물막이 공사를 완료하였다. 새만금 방조제는 2차례의 공사 중단 끝에 2006년 4월 21일에 최종 끝막이 공사를 순수 국내 기술력으로 완료하였다. 이후 방조제 단면 보강 공사가 이루어지며 2010년 4월 27일 완공하여 외곽 방조제 준공식 행사를 거행하였다. 내부 개발은 202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며, 전라북도 부안군은 4개 면[계화면, 동진면, 하서면, 변산면]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과 새만금바람길 임시노선은 안하(雁下)마을을 우회하여 심포항으로 이어진다.
안하마을 지명이 목너머→갈너머→안하의 순서로 바뀌었다. ‘목너머’는 기러기의 목처럼 긴 안행산에서 길곶으로 넘어가는 고개 너머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갈너머’는 7월 중순쯤 바닷물이 넘치면 마을이 떠내려가 다시 다른 곳으로 마을을 옮기곤 했던 당시 마을 뒷산의 이름이 갈매기산이었기 때문에 갈매기산 너머 마을이라고 부르던 것이 줄어서 된 이름이다. ‘안하’는 안행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기러기 ‘안(雁)’자와 아래 ‘하(下)’자를 써서 표기하였다. 안하는 심포항(深浦港) 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진봉산(進鳳山)과 봉화산(烽火山) 사이에 형성된 낮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바닷물이 넘치면 마을이 자주 유실되곤 하였다. 지금은 심포방조제가 축조되어 조류로 인한 피해의 위험성이 낮아졌다. 마을 뒤에 솟은 안행산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막아 주고, 남쪽으로 일제강점기에 간척한 광활면의 넓은 평야지대와 연결되어 있다. 마을 앞 동쪽으로 만경읍에서 시작되어 진봉면을 거쳐 남쪽으로 광활면까지 연결된 지방도 702호선이 지난다. 수십 척의 어선들이 드나드는 어업의 중심지로 안행산 북쪽 기슭에는 수산업협동조합 진봉분소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복지회관 오른쪽 뒤의 산이 안행산이며, 안하(雁下)마을 이름이 안행산(雁行山)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왼쪽의 산이 안행산이며 안하마을 당산나무쉼터에서 심포3길을 따라 안하마을로 내려왔다.
안하마을에서 보건진료소답게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건물 같다.
심포보건진료소 앞을 거쳐 심포3길을 따라 국도 702호선 '지평선로'로 나간다. 왼쪽 뒤는 광활면 창제리 구복마을, 창제리 '광활들'이 드넓다.
심포보건진료소 앞을 거쳐 심포3길에서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로 나왔다.
진봉면이 자리 잡은 진봉반도는 암석 해안으로 봉화산(烽火山)[82m]·진봉산·국사봉(國士峰)[55m]·니성산[61m] 등이 솟아 있다. 망해사(望海寺)를 중심으로 한 진봉산 주변은 수려한 자연 해안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서북쪽 해안의 산지를 제외한 지역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갯벌을 이루고 있었으나, 1915년에 이완용이 간석지 개간을 착수하였고, 1930년 본격적으로 제방을 축조하여 넓은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옛 지도인 비변사인(備邊司印) 방안지도, 『여지도(輿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을 살펴보면, 진봉산은 높이 72m의 낮은 산임에도 크게 그려져 있고, 『해동지도』에는 당시 만경현 전체가 넓은 평지이기 때문에 높고 큰 산이 없음에도 진봉산의 규모가 웅장할 정도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만경현의 읍치와 고을의 풍수적 명당성을 강조한 표현 방식이자 진봉산의 장소성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방도 702호선 '지평선로'를 따라 앞에 보이는 안하삼거리로 이어간다.
진봉산 주변 해안선을 따라 지방도 702호선이 이어져 있다. 면소재지는 고사리이다. 관공서 및 주요 기관으로는 우체국, 파출소, 금융 기관,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초등학교 등이 있다. 진봉면은 이웃한 광활면과 더불어 간척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으며, 진봉산 망해사 전망대에서 진봉면 전체의 모습은 물론, 새만금 간척사업이 이루어진 고군산군도와 군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김제시의 다른 면 지역에 비해 전주·익산·군산과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봉면 심포리 안하삼거리에서 서해랑길 임시노선은 왼쪽 심포항으로 이어간다. 앞에는 심포들이 펼쳐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진봉산(進鳳山)[72m]의 이름을 따서 진봉면(進鳳面)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만경군 상서면(上西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일도면(下一道面) 부흥·규동·심포·남하·남상·안하·길곶·거전 등 8개 리, 하이도면(下二道面) 석소·석치·인향·고사·종야 등 5개 리, 북면(北面) 대덕·전중·광덕·화양·옥산 등 5개 리, 남이면(南二面) 모산·나시 일부를 병합하여 김제군에 신설한 진봉면에 편입하고 심포·고사·상궐·가실·정당 등 5개 리로 개편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진봉면 남쪽에 개간한 넓은 평야 지대를 광활면으로 분할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의 진봉산 아래 심포마을과 안하마을 앞쪽의 간척농지를 심포들이라 이른다.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들. 심포마을은 진봉산 남쪽의 마을로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이란 의미로 ‘깊은개’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깊은 포구라는 뜻의 심포(深浦)로 고쳤으며, 심포들은 이 심포에서 유래하였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의 주요 들녘에는 심포와 안하(雁下) 사이의 간석지를 막아서 만든 상무간척지가 있다. 진봉산과 안행산 사이의 해변과 만경강가에 제방을 쌓아서 농경지를 보호하고 있다. 심포들은 대부분 방조제를 쌓아서 조성된 간척지로, 1924년 진봉방조제를 막아서 1075.5정보의 농경지가 조성되었으며, 1926년 화포방조제를 막아서 392.3정보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거전(巨田)은 마을 앞 갯벌이 큰 밭처럼 생겼다는 뜻인데, 실제로 새만금 내부 개발이 완료되면 넓은 갯벌이 농경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전선포(戰船浦)는 미녀봉과 국사봉 사이의 배가 드나들던 포구로 군수 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군항이었다. 외적이 침입할 때 봉화대의 신호에 따라 전함이 출동하여 외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안하는 안행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어선이 드나들던 김제 지역 어업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수협의 어판장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평선로' 안하삼거리에서 심포5길을 따라 심포항 방향으로 이어간다.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1공구 중 심포항-안하삼거리 농도309호선 이설공사가 2024년 12월까지 진행된다. 뒤쪽에 심포항과 심포6길 횟집단지 건물이 보인다. 왼쪽으로 돌아가면 회전교차로가 나온다.
회전교차로 건너편 심포항 윗길 심포6길 입구에 서해랑길 김제 51·52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가드레일 난간에 52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새만금바람길 이정목 왼쪽 가드레일 난간에 52코스 시작점 표지, 중앙에 서해랑길 김제 51·52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만경강 하구에 심포항이 있다. 만경강 건너편 산은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지역의 화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만경강(萬頃江)은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김제시를 지나 서해의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만경강 유역의 수리 시설과 치수사업은 우리나라 8대 오지로 불리는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1923년 동상저수지를 축조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동상저수지 아래에 20m를 높여 대아저수지를 축조하였다. 1925~1930년에는 직강(直江) 공사, 1935년 경천저수지 축조, 1930~1940년 봉동-삼례의 고산천 정비, 1964년 김제시 백구면 등에 제수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이 들어오는 구간을 축소시켰다. 1973년에는 직강 공사로 인하여 만경강 주변의 일부 행정구역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강의 길이는 완주군 동상면 밤티에서 김제시 진봉면 국사봉 옆 강의 하구까지 81.75㎞로 확정하였다. 유역 면적이 1,504.35㎢, 유로 연장이 81.75㎞이다. 만경강의 지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천호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화평천은 81.37㎞, 모악산 원안덕에서 발원하는 삼천은 76.5㎞, 완주 슬티에서 발원하는 전주천은 70.5㎞, 만덕산에서 발원하는 소양천은 67㎞ 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과 새만금바람길 정코스는 이 위쪽 길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
왼쪽 가드레일 난간에 서해랑길 52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52코스는 심포6길 횟집단지 거리를 따라간다.
서해랑길 김제 52코스 안내도에는 51·52코스가 함께 그려져 있다. 51코스 제2부 거리는 9.87km, 2시간 40분이 걸렸다. 51코스 전체 탐방 거리는 23.87km, 6시간 20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김제 51코스 탐방을 마치고서 서해랑길 김제 51·52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만경강 하구 건너편에 군산시 옥서면 일대가 가늠되며 새만금방조제가 뒤쪽에 이어지고 있다.
전라북도 내륙을 흘러내리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 바다와 마주치는 진봉반도 끝 쪽으로 봉화산[85m]이 뾰쪽하게 나와 있다. 이곳의 동진강 하류에 있는 어항이 거전항(巨田港), 만경강 하류에 위치한 어항이 심포항(深浦港)이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어항이었으나, 연안 어업의 쇠퇴와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지금은 몇 십 척의 어선만 드나들고 있다. 심포항은 수천만 평에 이르는 심포 갯벌의 배후 항구로 드넓은 갯벌에서 채취하는 조개 집산지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심포백합[생합]은 지역 특산물로 인기가 높은 고급 조개이다. 몇 년 전까지 심포 갯벌은 체험 학습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다. 예전에는 어업권으로 인해 외부인들의 조개 채취가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보상이 마무리되어 누구든지 조개를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 백합 생산량의 60% 이상이 동진강과 만경강이 흘러드는 김제시와 부안군 일대 갯벌에서 채취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나고 바닷물 반입이 줄어들어 갯벌이 많이 쌓이고 수면에 얇은 기름막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만경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생활하수로 인해 방조제가 막히면서 심포항에 축적되고 있어 고깃배들은 포구 인근 바다에 들어오면 바다와 통하는 입구를 막고 산소를 공급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싱싱한 활어를 공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자 일부 횟집에서는 양식 활어를 내놓기도 하면서 횟집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야외에서 생합을 구워 먹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강 건너편은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 지역이며 산은 화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만경강(萬頃江)의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만경은 백제의 두내산현(豆內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만경현으로 개칭되어 김제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으며, 1914년 김제군에 합병되었다. 만경의 경(頃)은 ‘백만 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지금의 고산천]과 남천(南川)[지금의 삼천과 전주천]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만경의 신창진은 근원이 고산의 남천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흘러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고 만경현을 지나 북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신창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사수(泗水)’로 기록되어 있다. 만경강 유역은 전주시·군산시·익산시·김제시·완주군 등 4개 시, 1개 군에 이른다.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티마을에서 발원하여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국사봉까지 이르는 뱀 모양의 하천으로, 전라북도 북부 평야 지대의 젖줄이자 생명수이다. 김제 지역의 만경강 구간은 김제시 백구면에서 부용천(芙蓉川)이 만경강으로 합류되는 구간으로 매우 짧다. 만경강 유역의 분수령은 북쪽은 실질적인 금남정맥, 동쪽은 호남정맥, 남쪽과 서쪽은 모악기맥[호남정맥 분기점-국사봉-모악산-매봉산-천잠산-성덕산-진봉면 봉화산]이다. 아울러 실질적인 금남정맥은 북쪽으로 금강, 호남정맥은 동쪽으로 섬진강, 모악기맥은 서쪽과 남쪽으로 동진강의 분수령이 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김제만경 너른 들,모악기맥 끝자락 능선길에서 비단눈물의 금빛 보리밭을 바라보고,
베네치아같은 옥포리 수로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만경강 노을" "보리" 등 가슴 시린 시도 와 닿고
은파리,광활들,징게맹게 외배미들,지평선로,목너머마을,갈너머마을.....정겨운 이름들,
대모산님의 열정에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꿈마님 감사합니다.
먹물의 난삽한 글을
상세히 읽어 주시고
정성껏 댓글 주신 마음에 감동합니다.
서해랑길을 통해 우리 국토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단순한 감상을 넘어 우리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려 하니
긴 서사적 글이 되고 맙니다.
서해랑길은 짧은 감상을 적기에는 부족하고
너무 많은 체험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거저거 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