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무량사 극락전은 통층구조의 2층 형식으로
장엄한 극락세계를 표현한 전각이다. 다소 빛바랜 단청과 함께 웅장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통해 정토세계를 잘
드러낸다. | 동양 최대 소조삼존불 등 성보 다수 김시습, 설잠 스님으로 말년 기거 예로부터
정토길 여는 ‘광명지혜’ 전해
무량(無量). 한없이 그지없고, 측정할 수 없는 만큼을 뜻하는 이 말은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이 한량이 없어 무엇으로도 셀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래서 무량이란 이름이 붙은 사찰은 보통 극락정토를 염원하는 이들이 이상향으로 구성한 곳이다.
부여 만수산(萬壽山) 기슭에 자리한 무량사는 바로 서방 극락정토를 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인 곳이다. 무량사가 위치한 산의
명칭인 만수(萬壽) 또한 무병장수와 함께 극락을 의미한다. 서방정토를 의미하기에 사찰에 흐르는 분위기는 장엄하면서도 고요하다. 퇴색된 단청을
그대로 놔두어 오히려 고즈녁한 분위기를 뽐낸다.
|
|
|
무량사에 보관된 보물 제1479호 김시습
초상 | 장중함 돋보이는 전각들 위용 드러내
무량사를 찾는 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은 입구에 있는 일주문이다. 마치 정토세상의 입구인 것 처럼 두 사람이 안아도 남음이 있는 큰
둥치의 기둥이 양쪽에 버티고 섰다.
이 일주문에 붙은 ‘만수산 무량사’ 편액에는 작은 재미가 숨어있다. 흰 글씨로 쓴 글머리에 아주 작게 한반도 문양을 새겨 놓았다. 이
문양은 사천왕문 편액에도 찍혀 있다. 무량사 편액은 부산 태종대 태종사, 통영 미륵산 관음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등 전국 유명사찰의 편액을
남긴 차우 김찬균이 쓴 것으로 편액 한쪽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왼쪽 교량을 건너고 꼬부랑한 길을 따라가면 드디어 무량사 경내다. 사천왕문 계단에 올라서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지 아래로 극락전에 앞서
석등과 5층석탑이 버티고 선다. 바로 보물 제233호 석등과 보물 제185호 오층석탑이다. 장중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모습이 느티나무 한 귀퉁이에
든 단풍물과 함께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등과 석탑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양식이 적절하게 조화된 고려전기석탑이라고 한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비슷하게 생겼고 1971년 해체 수리했다. 오층탑 보수 때 5층 몸돌에서 수정병, 다라니경, 향가루 등이 1층 몸돌에서는
고려시대 금동아마타삼존불이 출토됐다. 석탑의 부분재료들이 따로 만들어진 점이나 지붕돌이 얇고 넓은 점, 2층부터 그 높이가 점차 줄어드는 모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쏙 닮아 있다.
극락전은 규모면에서 다른 전각을 압도한다. 극락전은 밖에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안은 통층으로 천장이 높다. 이런 통층 형식은 국내에서는
흔치않은 형식으로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보전이 이러한 양식이다. 이렇게 2층을 올린 것은 기능보다 위엄과
장엄에 그 뜻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 안에 거대한 소조 삼존불(보물 제1565호)을 모셔놓고 있다. 가운데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셔놓았다.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의 규모다. 아미타 기도를 올리는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지자 사찰을 찾은 기도객들이 삼삼오오
극락전으로 모였다. 자식의 성공, 가족의 건강 등을 기원하는 모습이 옛 선조들이 무량사를 지은 모습과 닿아있었다.
|
|
|
김시습이 기거했다는 자리에 세워진
삼성각 | 신라 범일국사 창건… 5층석탑은 백제양식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5층 석탑이 백제양식이며 여기서 출토된 발원문 등이 백제시대 것 임을
감안해 백제시대 창건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사찰은 고려 초에 중창돼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웅진전, 명부전 등 불전과 30여 동의 요사와 12암자가 만들어졌다. 당시 60만평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무량사가 있는 현재 위치의 동쪽에는 사찰지가 발견돼 그 웅장함을 전한다. 하지만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됐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5층 석탑과 석등, 미륵 괘불 등의 국가지정보물과 사천왕문, 명부전, 영산전, 천불전, 산신각, 극락전 후불탱, 동종과
당간 지주 등이 현재 보존돼 있다. 무량사의 맞은편 산은 아미산이며, 또 주변에는 도솔천을 의미하는 도솔암 등 극락정토와 연관된 암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일대가 말 그대로 극락정토다.
생육신 김시습의 고고한 정신 살아있어
무량사는 또 조선 세조 당시 생육신의 한명인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와 영정이 있다. 김시습(1435~1493)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시를 지어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고한다. 세종은 이런 김시습에게 훗날 장성하면 나라의 일꾼으로 쓰겠다는 약조까지
했다. 하지만 21세 때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은 책을 불태우며 통곡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죽음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하나하나 수습해 노량진에 묻은 이가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김시습은 이후 9년 동안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등을 썼다. 머리를 깎은 그는 만행길에 올라 설잠(雪岑)이란 승명으로 명을
이어갔다. 전국을 유람하여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첫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세조 이후 세상이 바뀌자 김시습은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한 듯하다. 1481년 환속한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과 함께 그의 방랑이 다시
시작된다.
그는 말년에 무량사에 기거했다. 경내 구석의 산신각 자리가 김시습이 머물던 토굴이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 영정각에는 김시습의 초상이
걸려 있다. 보물 제1479호로 김시습이 그린 자화상으로 알려져 잇다. 미간에 주름이 졌고 시선 둔 곳은 알 수 없다. 김시습은 유불선을 넘나든
사상가였고, 자유로운 문장가였다. 세조의 패륜을 조소하고 당시 거침없는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전하고 있다. 무량사는 말년의 김시습에게
부처님의 자비가 담긴 안식을 전했을 것이다. 김시습은 죽으며 다비를 하지말고 절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3년 뒤 파보니 마치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여서 사람들이 모두 부처가 됐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후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를 세웠다.
무량사는 수많은 지식을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낮추며 드러내지 않은 김시습처럼 많은 성보를 갖고 있음에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산사였다.
무량사를 돌아보고 사천왕문을 빠져 나오니 일주문에는 ‘광명문’이란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꾸미지 않는 지혜를 한가득 안고 사찰 문을
나섰다.
|
|
|
동양 최대 규모의 무량사 소조
삼존불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을 지나 회덕 분기점에서 공주 방향으로 간다. 서공주 분기점에서 서천
공주 고속도를 따라가다 서부여IC에 내려 보령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간다. 외산면 소재지에서 무량사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대천IC나 보령IC에서 외산면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주변 볼거리
부여 방면
▲ 정림사지
대한민국 사적 제301호로 지정돼있으며 국보
제19호 5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인 석불좌상 등 유물이 남아있다. 5층석탑과 박물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문화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 있다.
▲ 부소산 낙화암
부소산과 낙화암은 백재왕실의 후어·이자 사비백제의 최후의 보루로 3000궁녀가
꽃처럼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곳이다.
▲ 궁남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무왕이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가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궁남지는 일본 정원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보령 방면 ▲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하루에 한번 갈라지는 바닷길로 유명하다. 매월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을 전후하여 2~3회
해변에서부터 석대도까지1.5km의 바닷길이 열린다. 해송의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운치를 더한다.
|
첫댓글 무량사 가 본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_()_
잠자코 헤아리니 卄年 세월 지나갔네.
어느 날 바람이 불어 님들과 가 볼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