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블로그에서도 몇 번 인용한 바 있지만, 중국인들 가정의 벼림빡('바람막'의 전라도 방언이라는데, 우리 어릴 적 경상도에서도 늘상 썼던 말이구만)에 가장 많이 걸린 액자의 글귀가 '난득호도(難得糊塗)'요, 그 다음으로 많이 걸린 게 '적선여경(積善餘慶)'이라고 한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 복이 오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의미래나 뭐래나...
장편소설『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Vikas Swarup, 강주헌 역, 문학동네, 2007)는 착한 일을 밥 먹듯이 하는, 아예 선한 일이 체화된(embedded) 주인공이 복을 받는 이야기를 한 치 빈 틈 없는 아귀 맞추듯 전후 관계를 교묘하고도 코믹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 이 소설은 인도의 빈민계층을 지칭하는 슬럼독(slumdog) 출신의 주인공이 갖은 고난의 여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백만장자(millianaire)가 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데...
소설은 주인공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방송국이 주최한 퀴즈 쇼에 출연, 12단계의 문제를 모두 맞혀 우승함으로서 백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이게 문제가 되어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는 데서 시작된다. 최하류층 출신에 학벌도 보잘것 없는 데다 직업마저 술집 종업원에 불과한 토마스가 어떻게 해서 갈수록 상금액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과 동시에 어려워지는 문제를 잘도 해결할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사기나 속임수를 쓴 게 확실하다는 경찰의 의심은 일견 당연한 반응이었을 터. 게다가 퀴즈 쇼의 후원사는 자신들조차 상상도 못한 막대한 상금을 거렁뱅이에 다름아닌 토마스에게 줄 수 없다는 생각에 경찰에 강력한 수사를 촉구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소설은 퀴즈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액수에 따라 12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1차 퀴즈 상금 1,000루피에서 마지막 열 두 번째 문제를 맞췄을 때 받는 상금 10억 루피로 장의 부제(副題)를 정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의 제목이 열 세 번째 문제라고 되어 있는 게 조금은 의아스럽지만, 내용은 방송국과 후원사의 얕은 속임수에 더하여 토마스의 아픈 과거사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숨가쁘게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흔히들 인간사를 논할 때 결정론(determinism)과 운명론(fatalism)이라는 2분법적 이론을 이야기하는데, 뭐 사상사를 역사적으로 더듬어 자세하게 논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턱도 없는 일이니 그건 차치하고...전자는 간단히 말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는 인과론(因果論)이고, 후자는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숙명론(宿命論)을 말함이라.
소설 속에서 주인공 토마스가 퀴즈 쇼의 모든 문제를 맞히는 데는 하나의 예외 없이 자신이 겪은, 그것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행을 베푼 결과에서 알게 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이름(람 모하마드 토마스)이 암시하듯 이름 속에 힌두식, 아랍식, 유럽식 이름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 그의 파란만장하지만 다채롭기까지 한 인생 역정(歷程)을 드러내고, 그것이 결국 엄청난 부를 움켜쥐는 퀴즈 쇼의 우승자가 된 것이다.
이야기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에필로그에서는 토마스의 변호를 맡아왔던 아가씨의 정체가 또 읽는 이들에게 시원한 결정론의 의의를 느끼게 해 주는데...토마스는 과거 이웃에 사는 남자가 술만 마시면 어린 딸을 폭행하는 모습을 보다가 그의 딸이 불쌍하다는 생각에서 술주정뱅이를 계단에서 밀어 죽이고 달아났는데(파란만장한 그의 삶에서 단 한 번 저지른 살인이라는구만), 그 여자 아이가 변호사가 되어 떠억하니 자발적으로 토마스의 변호를 맡고 있었으니...그래! 이 소설을 읽으면 더욱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느낀다. 착한 일을 하면 당대엔 아니더라도 후손에게 복을 준다는 적선여경(積善餘慶)이란 말도 있잖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