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과 동일한 배경지 입니다
남파랑길 19코스 4부 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의 침입에 의해 시작된 임진란은 1592년 5월 7일(음력) 이순신장군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만에서침략 행위를 하던 왜선 50여척 중 26척을
격침시켰으며, 왜군 4080명을 전사하는 이 옥포대첩은 임진왜란 해전 첫승전지를 기념하는 표지석 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이어진 임진왜란 격전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다
㉠ 옥포 해전(玉浦海戰)은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 당포 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가메이 고레노니였다.
일본군선 21척은 모두 격침된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목을 베었다,
㉢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와
대립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전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한다.
지나왔던 옥포1동주민센터를 뒤돌아 보고~
임진왜란 거북선 2호 조형물
현재 복원된 대부분의 거북선이 1795년 정조 어명에 의해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인 반면, <임진란 거북선 2호>는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여러 역사기록들을 고증하여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을 복원한것이라 한다
임진란 거북선 2호는 길이 25.6m, 폭 6.85m, 높이 6m, 중량 122톤 목선으로 내부에 천자총통 6개,
지자총통 7개, 현자총통 7개, 황자총통 5개, 승자총통 5개 불랑기 5개, 호준포 5개가 비치되어
있으며, 노는 좌우에 각각 7개씩 있다
임진왜란 격전지
임진왜란 거북선 2호 내부 모습
충무공 이순신 영정과 제복차림의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몇초간씩 입체적으로 바뀐답니다
남파랑길에서 쬐끔 벗어나 있는 옥포대첩기념공원 전시관을 탐방하느라 35분 정도 늦어저
나홀로 제일 꼴찌로 대우조선해양복합업무지원단디 앞에서
장승포시외버스정류장까지 도롯길 보도를 따라 8km 지루하게 걷습니다
대우조선해양오션플라자 건물
대우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안내문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아주천 따라 걷습니다
아주천을 잠시 걷다가 뒤돌아 보고~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정문
뒤돌아 보고~
일운터널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동문 앞 횡단보도
뒤돌아 보고~
뒤돌아 보고~
해성중고등학교 입구엔 도로확장과 고갯길을 낮추면서 노거수를 보호하고자
배 모형을 꾸며 조화를 이뤘군요
도로 확장과 고갯길 높이를 낮추면서 노거수를 보호하고자 배 모형으로 조형의 미를 살렸군요
두모로터리
1963년 6월 초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보리수확을 못하고 있던 중 6월 19일 <태풍 셜리>의 영향으로
6월 24일, 25일 양일간 500mm의 기록적인 폭우로 6월 25일 오전 08시 5분경 장승포동
474번지(속칭, 굴세미골)에 주택 6동 12세대가 완전 매몰되는 산사태가 발생하여 주민 61명이
사망하고, 대피 지시를 하던 경찰관 9명이 순직하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였다. 여기 추모비를 세운다
계묘년 그해 하늘이 그렇게 울었습니다
소나기로 울었고, 석 달 열흘을 숨어버린 태양이 그리워 울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헤매던 그 해 유월 스무닷새 날 아침
여덟시 설움에 지친 굴세미골 산 덩어리가 목구멍까지 차 오른 참았던
설움을 핏덩이로 토하며 절규로 쓰러진 그날
여기 이곳에
하늘만을 믿고 땅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예순 한 분의 선한 사람들과
사명을 다하여 쓰러저간 아홉 분 경찰의 영혼을 추모합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부디 영면하소서~
시인 원순련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 앞
남파랑길 19코스 종점이자, 20코스 시작점 안내판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시작되는 남파랑길 20코스 이정표는 능포봉수대까지 거리를 알려주고 있네요
남파랑길 19코스 1 ~ 4부는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
감사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여도권관(呂島權管)으로서 이순신(李舜臣)의 지휘 아래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참전하여
왜선 1척을 쳐부수고, 당포해전(唐浦海戰) 때도 크게 활약하고, 제3차 한산해전(閑山海戰)과
1594년 3월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에도 참전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문벌이 낮고 중앙에 밀어주는 세력이 없어서 벼슬이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올랐을 뿐이었다.
이순신이 조정에 계문(啓文: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서 왕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 포상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하였다.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영에 속한 영등포(永登浦:거제도)의 만호로 재임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수군이 밀려오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밑에서 적선 10여 척을 격파하였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朴泓)이 적의 기세에 겁먹고 병사들과 도주하자 좌수영의 병사들도 거의 흩어져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원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하여, 5월 초에
이순신의 함대가 도착하여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가 합동작전을 펴자, 우치적은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선봉에서 싸웠다. 특히 옥포 해전, 적진포 해전, 합포 해전 때는 제일 먼저 적선에 올라타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해내는 등 용맹을 떨침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지휘 아래 일본수군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원균
및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崔湖) 등은 전사하고 그는 겨우 탈출하였다.
1598년 조선의 수군과 일본 수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죽이는 등 용맹히 싸워 큰 승리를 거뒀다
이영남(1563~1598) 장군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17년(1577)에 별시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선조 25년
(1592) 율포권관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원균의 막하 장수로써 소비포권관, 강계부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왜군에 의해 동래성이 함락된 후 도망가려 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여
연합함대를 결성하게 되었고, 그 후 옥포·사천포해전, 한산대첩 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선조 31년(1598)에 가리포첨사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였다.
김완(金浣, 1546년 ~ 1607년)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올랐다.
1591년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 첨절제사(蛇渡僉事)로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 등 에서 이순신이 참전한 주요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워다.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자 권준과 같은 장수들이 사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보좌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방장이 되어 전투 중 일본 수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일본으로 압송됐지만
탈출해 귀국하였다. 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받고,
함안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고향인 경북 영천군 임고면 삼매리에는 이 충무공과 김완을 추모하기 위해 동인각(東麟閣)이 세워져 있다.
동인각(東麟閣)은 정조 9년(1785년) 5월 소실되어 정조 11년(1787년) 재건되었다
임진왜란 격전지
ㅁ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다
㉠ 옥포 해전(玉浦海戰)은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 당포 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가메이 고레노니였다.
일본군선 21척은 모두 격침된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목을 베었다,
㉢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와
대립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전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한다.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에 세워진 충장공 정운장군 동상은 입니다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에 쌍충사에는 충장공 정운장군과
충렬공 이대원 장군 동상에 세워저 있습니다
충장공 정운(1543년 ~ 1592년) 장군
충렬공 이대원(1553 ~ 158년7) 장군
약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