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끄신 하느님, 나의 신앙 여정(1-2)
<오빠의 긴 투병생활, 거룩한 여행>
모질게도 긴 병상의 삶이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한 번 자리에 눕자 두 평짜리 작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 보지 못하고 지냈다. 안정을 해야 된다 하여 식사도 누워서 했고, 대소변도 받아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결핵환자는 꼭 그런 식으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방법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섭생을 잘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도 환자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당장에 필요한 것은 절대 안정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번 자리에 누운 오빠는 일어나서 앉아보지도 걸어보지도 못한 채로 18년을 살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정신은 명료했다. 전염의 우려가 있다며 가족과도 격리되어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으로 오빠는 옮겨졌다. 늙으신 어머니가 그 모든 시중을 홀로 드셨다.
상경 후 얼마동안은 안양에서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오빠는 그곳에서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다. 박봉의 주머니를 털어 남에게 베풀며 살았다고 한다.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대주는 등 불우한 동료와 주민을 도왔다. 자신을 위해서는 쓸 돈이 없었는지 오빠가 늘 낡은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 오빠를 찾는 주위의 발길도 뜸 해졌다. 적막하고 단조로운 나날 속에 항상 누워만 있었지만 나름대로 철저하게 규칙적으로 살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그렇게 오래 목숨이 이어지는 것이 기적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오빠가 보여주는 한결같은 평화였다. 그 오랜 세월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환자 특유의 짜증도 없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 네 오라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성불한 사람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위해 신부님과 신자들의 방문이 있었다. 신부님을 모시고 온 구역식구들도 오빠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곤 했다. 워낙에는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사람이었는데 병상의 오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예수님 성모님께서는 오빠에게 무슨 일을 하셨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이런 일이 한번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빠의 신비체험이었는지 약물 부작용이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오빠가 서울로 와서 아직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였다. 올케언니가 나를 부르더니 “작은 아씨, 삼촌이 이상하세요. 좀 올라가 보세요.”했다. 내가 얼른 오빠 방으로 가보니 항상 누워만 있던 오빠가 무슨 기운이 났는지 일어서서 성모상을 쓰다듬으며 엉엉 울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와 주실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평소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진 오빠를 보고 놀란 나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살고 있던 큰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언니를 보자 흑흑 느껴 울며 “오빠가! 오빠가!”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래? 왜 그래? 영진이가 죽었니?” 물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아니, 오빠가 미쳤어!” 하였다. 허둥지둥 집으로 온 언니는 이상해진 오빠를 보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아버지는 신경정신과 박사인 당신 조카를 오라고 하여 오빠의 이런 행동에 대해 상담을 하셨다. 이야기를 들은 사촌 오빠는 최근에 새로 들기 시작한 약물에 의한 환각 증세 같다고 말하였다. ‘싸이클로쎄린’이라는 신약이 원인이었을 거라는 결론이 나자 앞으로 이 약은 복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몰라도 오빠의 흥분상태는 갈아 앉았고 그 이후로 오빠는 더 이상 어떤 정신과적인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평온해 진 것 같았다.
오빠는 그날의 일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단지 성화가 그려져 있는 작은 접시를 내게 주며 잘 간직 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그날 성모상에서 빛이 나와 그리로 들어갔다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 접시는 한 동안 내가 갖고 있다가 잘못해서 그만 깨뜨리게 되었고 미련 없이 나는 그것을 버렸다. 오빠가 한 말을 내가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해서 충신동에서 살고 있던 작은 언니는 오빠의 약 심부름을 주로 하였고, 나는 오빠 부탁으로 명동성당에 가서 경향잡지 등 교회서적들을 사다 주었다. 그 중 더러는 읽어보라고 오빠가 책을 내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추어만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곤 했다. 오빠는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오빠의 신앙을 내 것으로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결혼, 오빠 곁을 떠나다>
그러는 중에 나는 남편을 만나 시골 종갓집의 맏며느리가 되어 친정을 떠나게 된다. 세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가 멀다시피 닥쳐오는 집안 행사, 손에 물 한 번 담그지 않고 살았던 내가 눈만 뜨면 하루 종일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쉴 새 없이 말씀하시고 쉴 새 없이 움직이시는 에너지 넘치는 시어머님,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정서가 다른 식구들과 부대끼며,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긴 채, 나는 내 의지도 생각도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약국을 차려 볼 생각으로 점포 달린 집을 장만했으나 그곳을 아버님과 친구들을 위한 경로당으로 쓰시도록 했다. 매일 아침이면 경로당 난로에 연탄불을 갈아 넣어드리고, 가끔 그분들에게 식사 대접도 해 드려야 했다. 약국을 하겠다는 마음을 접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계속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약국을 했으면 사는 동안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롭기는 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는 주위의 비난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후회의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전개도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내가 선택해서 도달 한 ‘오늘’에 나는 감사하고 있고, 지나간 시간 모두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잠들었을 때를 빼곤 단 한 시간도 혼자 있을 수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니 친정부모와 오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득문득 오빠 간병에 매달려 꼼짝 못하시는 불쌍한 엄마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지만 설날이나 부모님 생신 때를 제외하고는 찾아뵙지도 못하고 오빠도 만나지 못하였다. 우리 아이들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오빠의 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병이 옮을까 봐 보여주지 못하고 오빠를 떠나보낸 것이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는다.
<오빠의 죽음>
1978년 7월 17일, 8순 노모의 애끓는 통곡 속에서 오빠는 괴로운 일생을 끝냈다. 임종하기 전 두 달간의 오빠가 겪었던 고통은 심한 호흡곤란과 요통으로 극에 달했다. 오빠의 인내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오랜 병상생활이었지만 침상에 침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고 용의주도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울면서 외치셨다. “영진이 얼굴 예쁜 것 좀 봐라!”
나이 53세, 병을 얻은 지 30년, 자리에 꼬박 누워서만 18년이었던 ‘유영진 안드레아’가 걸어온 지상에서의 거룩한 여행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가 누워 있던 이부자리를 걷고 약 봉투와 머리맡의 휴지통을 치우니 고상과 성모상, 그리고 수십 권의 책만 남아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처자식도 없었고,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도 없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끝낸 자리가 너무나 빨리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렇게 살다 가는 인생도 있단 말인가!”
아현동 성당에서의 장례미사 때 젊으신 보좌신부님은 현세의 고통과 인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내세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강론을 하셨다.
내세의 삶! 그 말씀이 나에게 강하게 꽂혔다.
아현 성당 묘지에 작은 오빠를 묻고 내려온 후 하루 이틀 날이 자날수록 며칠 전까지 있던 사람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오빠의 몸은 차디차게 굳은 채로 땅 속에 누워 있지만 그의 고결했던 정신, 다정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옳고 선하게 살았음에도 그가 겪은 가난과 고독, 오랜 세월 동안의 병고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서 누구한테 받아야 하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은 끝나고 마는가? 아니면 그 너머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가? 개신교 학교에서 성경말씀과 설교를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나는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 루카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