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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의 일주일⑪
닷새째 날 (2월 17일) 마드리드, 그림에 체하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러나 마드리드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저는 완전히 해이해진 기분이 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드리드 폴라리스 민박 6인실 도미토리룸은 여지까지 묵었던 모든 곳을 합친 것보다 깨끗하고 따뜻하고 쾌적했고, 집 음식 같은 한식아침밥을 먹으며 뜨거운 물로 목욕을 실컷 하니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 풀려버렸던 것이지요. 더구나 제 곁에는 저의 친구 에바양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심적인 안정감과 온 몸의 편안함에 못이긴 저는,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 ‘우리 톨레도는 월요일날에나 가자’라며 하룻동안 마드리드 구경을 하자고 꼬셨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뒤에는 처음으로 10시까지 늦잠을 잔 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마드리드 왕궁을 구경하기 위해 외출했습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마드리드 왕궁 광장에는 초봄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봄 바람에 실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알함브라의 추억’ 선율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런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모습도 잠시.
레알 마드리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역시, 관광지 구경은 이른 아침이 좋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북적거리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매일매일 늦잠을 잘 텐데 어째서 내가 아침에 그렇게 늦장을 부렸던 걸까, 새삼스레 한탄하며 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왕궁홀 입구. 계단 위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너무 경박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왕궁 자체는 장엄하다기보다는 발랄한 분위기였습니다. 1764년이라는 비교적 근대에 와서 완공되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새로운 건물이라는 느낌이 전해집니다. 물론, 베르사이유 궁이나 다른 유럽의 왕궁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종종 이곳이 왕정체제라는 걸 잊어버리는 저 같은 외국인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는 현재도 쓰이는 왕궁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유럽에서 실내장식이 가장 아름답다는 마드리드 왕궁 내부 인테리어. 왼쪽은 벽이 온통 도자기로 장식되있는, 짙은 녹색과 하얀색의 대비가 시원스러운 방. 오른쪽은 은은한 풀색 실크로 벽을 도배하고 상큼한 하늘을 천장에 프레스코로 그린, 봄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방. 어떻습니까?
공개된 방 중에서 가장 화려했던 중국식 방. 수놓은 황금비단과 대리석으로 온통 치장돼있고, 천장에는 도자기로 중국풍 인형을 빚어 네 귀퉁이마다 장식해놓았습니다. 하지만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그저 별스런 오리엔탈 취미로 보일 뿐….
입구의 다소 경박한 취향을 지나고 나면, 내부의 고급스러운 실내장식들이 관광객을 압도합니다. 다행히 천장의 프레스코화 역시, 왕궁홀 입구 계단 위의 발랄하다 못해 위엄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름조차 어마무려한 <왕좌의 방>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일부. 샤랄라한 천사들의 샤방샤방한 자태가 마음에 듭니다.
접견실 천장 프레스코화의 일부. 등근육이 알흠다운 청년…. 내 취향이야!
최고급 실크와 대리석으로 치장한 방은 저마다 풍부한 색채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왕궁에 세이렌 장식이라니, 이채롭습니다.
동양풍 방 중 하나. 극동태생인 제가 보기에는 우습기만 한 장식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채의 조화가 뛰어나서 사진기에 담아왔습니다.
이국적인 장식과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색배합, 대리석 바닥, 핑크빛 천장이 어우러져 오히려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연회실 벽의 테피스트리 한 장. 남자가 여자를 더듬고 있는 음란한 내용의 테피스트리입니다. ‘늬들은 이런거 보면서 밥이 넘어가냐?!’
레알 마드리드 옆에 붙어 있는 왕실 무기박물관은 역대 왕들의 갑옷과 칼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무기와 갑주들을 보며 나눈 대화는 대부분 무기에 대한 고찰과 중세기사의 파괴력, 그리고 RPG에 대한 것…
볼거리가 쏠쏠한 왕궁무기박물관
그렇습니다. 두 역사물 RPG 플레이어가 나눈 대화라는 게 뭐 다 그렇지요.
무기박물관까지 구경하고 짧은 왕궁구경을 끝마친 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유럽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
그러나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하던 저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 격침당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스페인을 여행하는 여성들은, 처음에는 ‘스페인 위험하지 않나요?’라고 반신반의하다가도, 일단 두 곳만 들어갔다 나오면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스페인은 천국이야!’라고 외치게 됩니다.
유럽연합 중에서도 특히 물가가 싸기로 유명한 스페인에서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쇼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일부러 쇼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강행군을 해왔으나, 이제 여유롭고 융통성있는 여행만 남은 시점….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쇼핑을 하기에 이릅니다.
지름신 강림!
발단은 ‘50% 세일’이라고 써있는 ZARA(우리나라에서는 ‘자라’라고 읽지만, 스페인에서는 Z를 쎈 S로 발음하므로 ‘싸라’라고 읽는 것이 맞습니다) 매장 앞에서였습니다. “친구야. 미안한데 우리 한 번만 구경하고 가자.”라고 말하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저는, 그러나 싸라의 겨울시즌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인채 겨우 2유로에 팔리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는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름에 세월가는 줄 모르고... 프라도 미술관 폐관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쌓인 옷들 중에서 제 몸에 맞는 사이즈가 없다는 엄청나게 슬픈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아무리 옷 값이 싸고 옷들이 널려 있으면 뭘 합니까. 이미 저에 앞서 사냥에 들어갔던 수많은 여성들이 적당한 옷들을 다 채가고, 남은 것들은 유럽의 비만한 여성들에게 맞을만한 특대 사이즈 밖에 없는 걸요.
아아. 완전히 낙담한 저는, 제 손목을 붙잡아 끌고 나가는 친구에게 “지금 나의 심정은 엘도라도의 황금을 눈 앞에 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인디아나 존스와 같아!”라고 분노했습니다. 엉엉, 나의 엘도라도가, 나의 엘도라도가…멀어져 간다!!
친구의 우정어린 손길에 끌려 간신히 유혹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저는, 이번에는 배고픈 위장에 호소하는 레스토랑의 역습이 펼쳐집니다.
여러 문화가 복합되면서 수세기에 걸쳐 음식문화가 발달한 스페인은, 향토요리들이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더구나 쌀이 주식이고 고추와 마늘 등도 많이 들어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 입맛에도 잘 맞지요. 위장의 호소에 기꺼이 굴복한 우리는 아무 레스토랑에나 들어갔습니다.
두 개의 런치세트를 시켜서 각각 고기요리와 빠에야로 메인요리를 시키니 우선 따끈따끈하게 갓 구운 빵이 서빙됩니다. 이어 나온 빠에야와 고기메뉴는 그 근사한 맛으로 저를 황홀경에 빠뜨렸습니다. 역시나 스페인! 맛에 있어서는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모든게 단돈 10유로(약 1만3천원)!
허겁지겁 먹다가 간신히 정신차리고 남긴 음식사진. 이미 접시는 초토화 돼있군요. 건너편 그녀는 누구와 전화통화 중이게요~?
“훌륭하다. 훌륭하다!”라고 외치며 음식을 집어먹는 저에게, 친구는 이 나라의 독특한 관료제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스페인이 신기한 점은, 상점이 반드시 바겐세일 하도록 법적으로 지정해놓고 바겐세일 기간까지 세세하게 만들어 놓는다는 점이야. 또 고급 레스토랑은 할인된 가격으로 점심을 팔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어.”
오오. 실로 골 때리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전 좋습니다! 이 나라 관료들이야말로 진정 자기네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자들임이 틀림 없습니다!
아무튼 매일 점심, 이처럼 할인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런치셋트 이름이 바로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 오늘의 요리)’입니다. 레스토랑 앞에 개시해 둔 메뉴판을 잘 찾아보면 메뉴 델 디아를 파는 가게를 찾을 수 있는데, 이런 가게에 들어가면 전채에서 시작해 부요리, 주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코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음료포함. 더욱 놀라운 것은 음료로 와인을 주문하면, 우리나라처럼 소심하게 잔 와인을 서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당 병 한 병을 통째로 갖다 준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이후 매번 점심을 먹을 때마다 혼수상태였습니다. 와인은 도수가 낮기 때문에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법이지만, 매 점심마다 반주로 와인을 한 병씩 들이켜다보면 취하긴 취하되 완전히 취한게 아니라 은근히 취기가 오르면서 적당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취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의 그림감상은 그야말로 주(酒)님을 영접해 영혼이 한껏 고양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거지요. 다행히 친구는 물을 주문해서 정신상태가 말짱했습니다.
마침내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간 우리는 입장하자마자 관광안내 지침서에 나온대로 2층으로 올라가 고야방부터 둘러봤습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약 3박 4일을 스페인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만 구경하고 바삐 지나갔던 이후로, 정확히 20여년만에 다시 이 곳에 온 셈입니다. 전시구조는 20년 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고야방에 고야의 전기와 흑색시대 그림이 나란히 전시돼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림을 나눠서 걸어놨습니다.
20년만에 다시 본 마하는 여전히 젊고 아름답더군요.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는 여전히 한 공간에 걸려 있었지만, 어릴 때 보았던 위치와 많이 차이가 났습니다. 예전에는 까마득히 위를 올려다보아야 벽 위의 마하를 보았던 것 같은데. 기억 속에 남아있던 그림의 위치가 차이나는 것에서 역산하여,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이 그림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야, <옷 벗은 마하> 출처 구글
이미 루브르 미술관에서 수 많은 여체를 보고온 뒤였고 루벤스의 풍만한 그림들은 그냥 아름답게 받아들였는데도요. 어린 저는 <옷 벗은 마하> 앞에 서는 순간 까닭모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마치 사과를 먹자 불현듯 자신이 벗은 몸이라는 걸 인식한 이브처럼.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었었지요. “엄마,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옷 벗은 여자를 그린거야? 창피하게.”
하지만 어쩌면, 루벤스의 그림들과 <옷 벗은 마하> 사이에 흐르는 외설적인 뉘앙스 차이를, 어린 시절의 저는 이미 미묘하게 인식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20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앞에 선 저는, 단지 나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위해 붓을 들었던 루벤스와는 다른 자세로 고야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여성을 타자의 시선으로 물화(物化)해서 그 아름다움만을 드러내 보이기에는, 이 익명의 여인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도발적이며 자기색이 뚜렷합니다.
유례가 없을만큼 자기 주장이 당당한,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숱한 미술가가 그린 누드모델들은 ‘저 여자 누구야?’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될만큼 밋밋하지만 고야의 <옷 벗은 마야>만은 그 모델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여인. 훗날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의 모태가 된 여인.
한 가지, 어릴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옷 입은 마하>였습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는 같은 여성을 그린 것이라고들 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닮지 않았습니다. 두 그림 사이에는 연대상의 간격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고야, <옷 입은 마하> 출처는 역시 구글
2층의 전기 고야관을 나와서 앞으로 직진하니, 그림의 방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중에는 압도적으로 종교화의 수가 많은데-이 역시 종교열이 타오르는 스페인답지 않습니까!- 특히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어지는 시기의 걸출한 종교화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방 하나에 들어가면 수많은 명화들이 그야말로 덕지덕지 걸려있습니다. 그토록 훌륭한 작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몇 십 개씩이나 한 벽을 뒤덮고 있는 걸 보는 건 여간 힘든일이 아닙니다. “저기, 에바야, 우리 좀 쉬었다 가자.”
‘아니 벌써?’라는 표정의 친구.
하지만 나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명치 끝이 송곳으로 누르는 것 처럼 따끔거리고 현기증과 위액 역류현상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장 혹은 위쪽이 탈이 난 것 같군요. 에바양이 ‘무슨 일이야?’라고 묻기에 곰곰히 생각한 끝에 대답했습니다.
“나, 그림에 체했어.”
네. 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림에 체했습니다. 전시실을 들어갈 때마다 수많은 기표와 기의와 이미지와 색채의 향연이 안구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두뇌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라피스라줄리의 찬란한 푸른색, 에메랄드의 장엄한 녹색, 눈부신 금색과 붉은색과 온갖 귀중한 안료로 색을 낸 엄청난 색채의 향연이 눈을 압도했고, 수많은 작품들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뇌는 초가열상태였습니다.
동시에 그 많은 그림들은 한꺼번에 머리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저마다 이야기를 지껄이며 자신을 피력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것은 소곤소곤 말을 걸고, 어떤 것은 쩌렁쩌렁하게 일장연설을 하고, 어떤 것은 엄한 목소리로 훈계하고, 어떤 것은 언제까지나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그림도 있지요. 그 그림들 하나하나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림들의 자기주장에 치인 저는 프라도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한기를 느껴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명화를 실물로 접하는 일은 상상 외로 굉장히 큰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요구합니다.
아무리 생생한 사진으로 보아도, 원작을 눈앞에 두고 감상하는 만큼의 감흥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오직 그림을 눈 앞에 두고 볼 때만, 오롯이 그 그림의 정수가 눈에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린 수백 년 전의 대가들은, 그림이 사진으로 보여질 것을 예상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이 언제까지나 ‘성당의 한쪽 벽에 걸려서, 수 많은 신자들이 우러러보며 예배를 올리는’ 그러한 용도로 쓰일 것으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런 점은 특히 바로크 시대의 성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성화 앞에 서면, 이 성화는 등신대 비율로 눈과 비등한 위치에 놓고 보는 그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림이 맥 없어져버리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이 그림은 완벽하게, 보는 사람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리라 짐작하고 그려져있습니다. 빛, 그림자, 시선, 대상을 표현한 붓터치, 모든 것이 아래에서 그림을 올려다볼 때 비로소 생생하게 보이도록 표현됐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부터, 이 그림은 약간 어두운 곳에 걸릴 것이며 (성당 안은 대개 어둡고 촛불이 그 안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광원이지요) 또한 자연채광을 받더라도 그 빛이 위쪽에서 떨어질 것 (성당 안의 채광창은 대개가 천정쪽에 위치합니다)을 염두에 두고 그렸습니다. 관람자는 그림보다 아래에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방 안에 들어선 감상자는, 마치 자신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듯 검은 배경에서 은은하게 떠오르는 예수를 볼 수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마치 이곳이 2천년 전 바로 그 겟세마네 동산인 양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 때, 저물어가는 햇살이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면서 그림에 빛을 드리웁니다.
감상자가 서서 볼 때, 감상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예수의 두 발 부분이기 때문에, 감상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에 머뭅니다. 바로 그 때 발에 박힌 못의 머리 부분이 마치 방금 전 망치가 두드리고 지나간 것처럼 반짝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서서히 스며나오는 피가, 아래쪽의 십자가를 적시고 뚝뚝 떨어지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발에 박힌 못은 지금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인양 그림에서 가장 생생하고 뚜렷하게 그려져 있어서, 마치 화폭을 뚫고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손을 대면 만져질 것 같은 못과, 그 밑에 뚜렷한 양감으로 표현된 두 발. 그 전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프라도 미술관의 대스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역시 실제로 보았을 때 새로운 것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그림입니다. <시녀들>을 화집에서 수 없이 볼 때는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그림 앞에 서자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벨라스케즈, <시녀들>. 구글검색.
가장 놀란 것은 이 그림이 중앙 대상체(마르게리따 공주)에 생생하게 핀을 맞추고있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점점 더 흐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장 바깥 쪽에 위치한 난쟁이에 이르면, 그림은 찰나적인 빛을 포착해둔 것처럼 형태가 없는 색채만을 잔상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찰나를 스냅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경쾌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는 화집으로 그림을 볼 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림 앞에 섰을 때, 저는 ‘어떻게 저렇게?’라며 놀랐습니다. 이런 현상은 중심부에 촛점을 맞춘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즉, 촛점이 하나인 렌즈로 사진을 찍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자연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는 두 눈을 갖고 있으며 양미간은 벌어져 있기에 하나의 렌즈로 볼 때와는 다르게 사물을 보지요. 더구나, 화가가 대상을 눈 앞에 세워두고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려나간다면 초점을 중심인물에게 뒀다가도, 이후 눈을 옮겨 주변부를 그릴 때는 주변부로 초점을 이동시킵니다. 때문에 화가는 인물 주변부를 처리할 때도 윤곽을 주게 마련입니다.
벨라스케즈는 특히 그림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던 화가로도 유명하죠. 그런데 어떻게 벨라스케즈는 마치 누군가가 슥, 훑어보고 지나가거나 아니면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낸 것처럼 그 한순간의 찰나를 화폭 속에 완벽하게 담을 수가 있었을까요? 마치 그림 너머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순간 저는, 필경 벨라스케즈가 렌즈에 정통한 인물이거나 사진기의 초기형태를 알고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안구의 작용과 거울에 대해 달통한 인물일거라고 추측했지요. 그러나 당시의 저는, 사진기의 발명이 어느 시기였으며 17세기 렌즈가 어디까지 발달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이를 그냥 추측으로 남겨둬야 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시녀들>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관련 미술서적들을 뒤적이며 공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16-17세기에 이르는 시기동안 그림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렌즈와 거울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유리 제조공과 화가가 같은 직인 길드에 속해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거울과 렌즈가 크게 발달했던 네델란드는 스페인의 속령이었기에 벨라스케즈는 렌즈의 존재를 분명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벨라스케즈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럽에는 이미 카메라 옵스큐라와 초기 형태의 카메라 루신다가 있었습니다.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명화의 비밀>에서 광학기술을 그림에 사용한 화가 중 하나로 벨라스케즈를 지목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벨라스케즈가 광학기술에 능통하다는 사실은 이 그림 속에 ‘거울’이라는 요소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 앞에 섰을 때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흥미를 느꼈는데, 이는 바로 거울에 관한 연상작용 때문이지요. 이 그림은 대기원근법으로 그려졌다고 배우게 됩니다만,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그림에 대해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그림 앞에 선다 하더라도,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가거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즈가 광학기술의 보조적인 도움을 받았다 한들 <시녀들>의 위상은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벨라스케즈는 순간을 사진처럼 찍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상상력을 불어넣기 위해 광학기술을 보조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당시의 카메라 옵스큐라로는 이 정도의 대작을 그려낼 수 없었다고 하니, 벨라스케즈가 갖고 있는 천부적인 자질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벨라스케즈의 상상력은 어디서 발휘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벨라스케즈가 이 그림을 ‘거울 앞’에 비춰가며 그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건 익히 들어온 말이니 우선 그렇다고 치자구요. 마르가리따 공주는 우리를 쳐다보며 포즈를 취하고, 공주의 정면을 그려야 할 화가 벨라즈케즈는 공주 뒤에 서서 우리를 응시하며 꾸준히 화폭에 손을 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응당 거울이 있는 쪽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벨라즈케즈는 오른손에 붓을 들고 있으며 마르게리따 공주는 오른손을 내밀어 병을 잡고 있지요? 거울에 비쳤다면 응당 왼손에 붓을 쥐고 있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왕과 왕비 부처의 모습에 집중해보아도 곱씹어보면 곱씹어 볼 수록 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방 저편의 정면에 걸려있는 거울에는 국왕부처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국왕부처가 그림 안에서 실제로 있는 위치는 어디겠습니까? 바로 우리 관람자가 있는 위치입니다.
실제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아 마땅할 국왕부처는 이 그림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림 밖에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비로소 그들은 그림 속에 머물 공간을 허락 받습니다. 그들은 유령같은 모습으로, 부유하듯 거울 안에 스잔하게 비칠 뿐입니다. 환영처럼.
<시녀들> 앞에 놓여있으리라는 가상의 거울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 비평가들은 이 그림의 전복된 상상력 때문에, 실은 벨라즈케즈가 그리는 것이 마르가리따 공주가 아니라 그들 앞에 서 ‘있을’ 국왕부처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겠지요. 그러나 벨라즈케즈가 그린 작품목록 중에서 국왕부처를 그린 그림은 한 점도 없으므로, 이것은 기대에 찬 전망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잠재적으로 이 그림은, 관람자를 국왕의 위치로 올려놓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 그림은 평화로워보이는 공주의 그림이 아니라 대단히 위험하고 혁명적인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들게 됩니다.
물론 이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는, 이 그림이 마르게리따 공주의 아버지인 펠레페 4세의 개인집무실에 걸려 있었으므로 감상자와 감상자의 신분은 정확히 일치했다고 지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이 그림의 소실점, 즉 화폭 네 변의 꼭지점에서 선을 대각선으로 그어 X자로 교차시켰을 때 중앙에 오는 한 점은 국왕부처가 비쳐지는 거울 앞이 아니라, 거울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비껴난 문으로 모아집니다. 전통적으로 소실점의 위치는 감상자가 그 곳에 섰을 때 그림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를 의미합니다. 즉, 벨라스케즈는 펠레페 4세의 관람석으로 거울 옆을 예비해 놓았다는 소리가 됩니다. 이것이 의도적이었다면-이 그림의 감상자가 펠리페 4세라고 가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유령같은 환영과 나란히 서게 됩니다! 즉, 그는 그림 안에서도 밖에서도 마땅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그림 안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왕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일까요? 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 그림의 운명은 시대로 인해 변했습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이 그림 앞에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명의 일반 관람객들은 펠레페 4세의 신분으로 격상됩니다. 이제는 그림 앞에 선 제 자신이 벨라스케즈의 그림 속에서 치기어린 권력욕과 권력을 전복하는 예술가적 혁명성마저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더이상 불온한 상상이 아닙니다.
벨라즈케즈는 어쩌면 이 그림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림 한 장은 당시 스러져가던 왕가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 합니다. 펠리페 4세가 파탄난 왕실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벨라스케즈에게조차 그림비용을 지불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왕가의 마지막 운명을 짊어지고 있던 마르게리따 공주도 훗날 정략결혼의 도구로 팔려가고 결국 일찍 죽었지요.
유령처럼 흔적도 없고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도 못하는 국왕부처와, 눈부신 햇살을 받고 있지만 찰나처럼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무감동한 공주, 낡은 왕실의 습속에 묶여 어울리지도 않는 구시대적 옷을 입고 있는 주변인물들, 유령같은 국왕에 비해 현실적인 영향력을 끼치는-복도에서 들어오고 있는 귀족.
말년에 펠리페 4세가 그토록 신임하던 벨라스케즈를 두고 “평생 나를 속인, 권력욕에 가득찬 교활한 화가”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거울과 거울이 되쏘는 이미지들을 순서대로 쫓아가다가 이내 혼란을 느끼고 한동안 가만히 그림을 응시했습니다. 재현의 재현, 공간과 공간과 공간의 중첩.
아아, 이것이, 이 그림이 바로 ‘인상주의’를 탄생시키게 했던 위대한 첫 날갯짓인가.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문과는 달리 가장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 그림은 오히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 3부작이었습니다. 뒷면에는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고 앞면의 세 패널에는 그 유명한 아담과 이브의 동산, 쾌락의 정원, 지옥이 그려져 있는데 너무도 정밀하게 그려진 탓에, 인터넷이나 일반 화집에서 보는 그림들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아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쾌락의 정원 앞에는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지요.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4살난 어린아이가 개미집에 물을 흘려넣으며 즐거워하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조그마한 생물체를 내려다보며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미숙한 권력자의 쾌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감정을 부추기는 것도 능력이긴 합니다만, 굳이 그렇게 천박한 감정을 들춰내야 할까 싶어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은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발을 옮겨보니 보쉬의 그림 말고도 초현실적인 그림이 몇 개 있습니다. 달리의 그림 1점과, 시대는 다르지만 보티첼리의 그림 3연작도 그렇지요.
프라도 미술관 1층에 있는 보티첼리의 3연작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습니다. 가기 전에도 보티첼리의 ‘여자사냥’ 그림 연작이 프라도에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실제로 가서 보고 느낀 기괴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 기사가 계속해서 여자들을 사냥하는 그림이 연달아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도망다니고, 아무래도 같은 사람인 듯 복장과 행색이 똑같은 기사가 계속해서 여자들을 죽이고 있지요. 중앙 그림에는 여자의 등을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는 장면이 여과없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그림에서는 연회석에서 마치 여흥이라도 벌이는 듯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여자를 참살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그림의 세부
넋이 나간 여자와 벌거벗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사냥개. 들이닥치는 기사. 사냥개가 물어뜯은 엉덩이에는 벌써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이거 무슨, 연쇄살인범 이야기 아닐까? 귀족이었던 어느 연쇄살인범을 고발코자 보티첼리가 그림으로 그려 넣은거 아닐까? 여하튼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가기 전부터 그림의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던 저는 함께 간 친구에게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해설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페인어에 박식한 친구는 그림 밑에 스페인어로 씌여진 설명서를 읽으면서 “음…단어가 너무 어려워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데카메론>에 나왔던 이야기를 모티브로 그려진 그림이래”라고만 하는군요.
순간 제 머릿속을 빛의 속도로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데카메론>? 그 14세기 이탈리아판 <썬데이서울>?! 거기에 이런 잔혹한 이야기가 나왔던가? 유럽의 유구한 스와핑 역사를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읽은 기억이 없는걸요.
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던 저는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새삼스럽게 <데카메론>을 뒤적여봤습니다. 그리고 찾아냈습니다. 제가 만약 그림의 제목만이라도 알아냈다면 덜 수고롭게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보티첼리 그림의 제목은 <나스타지오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Historia de Nastagio degli Onesti)>로, 3연작이 아니라 본래는 4연작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그중 3점이 걸려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로 <데카메론> 다섯째 날, 여덟번째 이야기로 실려 있습니다. 저처럼 기억을 못하시는 분이나, 혹은 아직 <데카메론>을 못 보신 분들의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이 이야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옮겨 적겠습니다.
라벤나 가문의 유서깊은 귀족 출신인 나스타지오 델리 오네스티는 더 높은 신분의 귀족인 트라베르사리 집안의 처녀를 연모해 사랑은 얻지 못하고 헛되게 재산만 낭비합니다. 주변의 지인들은 영혼과 재산을 낭비하지 말고 휴양이라도 다녀오라고 권유하고, 이에 나스타지오는 숲으로 가 캠핑하며 놀러 다닙니다. 나스타지오는 마침 칼이 없었으므로 나뭇가지를 꺾어 그에게 대항하려 하나, 기사는 말합니다.
“나스타지오여,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과 같은 도시에 살았던 사람으로, 당신이 지금 트라베르사리 가문의 처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열렬히 이 여인을 사랑했소. 그러나 여인이 보인 냉혹한 태도 때문에 나는 절망해 자살했고, 영겁의 죄를 받았소. 이 여인 역시 살아 생전 보인 잔혹함과 나의 죽음을 기뻐한 죄로, 죽은 후 저주를 받았소. 이제 나는 이 여인을 쫓아가 내 자신을 찔렀던 칼로 여인을 죽여야 하고, 여인은 영원히 나를 피해 달아나야 하오. 내가 죽이면 이 여자는 되살아나고, 나는 매주 금요일 이 시각에 이 여인을 계속 뒤쫓게 돼있다오.”
기사는 이어 주저하지 않고 여인을 참살한 뒤 그 심장과 내장을 꺼내 뒤에 쫓아오는 흰개와 검은개에게 던져줍니다. 아니나다를까, 여인은 다시 살아나서 도망가고, 기사는 쫓아가지요. 나스타지오는 놀라움에 몸을 떨다가, 참으로 사특하다고 할만한 기지를 발휘해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이용하기로 마음 먹지요. 나스타지오는 친척들에게 ‘그녀를 잊겠으니 마지막으로 트라베르사리 가문의 사람들과 친지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금요일 오후 숲 속에 근사한 만찬회를 엽니다.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이 악녀는 당해도 싸다오.” 블라블라블라.
알고 보니, 그림의 전모는 이다지도 생각보다 덜 그로테스크하고 조금 더 희화적인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 이 이야기에 나오는 오네스티와 트리베르사리 가문은 실제로 이탈리아 라벤나 지역에서 오래도록 실존한 명문가입니다.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을 뿐더러, 오네스티 가문은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할 정도로 여러 문학에도 이름을 내밀고 있지요.(카말돌레 수도회의 창립자인 오네스티 가문의 로무알두스가 나옵니다.) 보티첼리는 단테의 <신곡> 삽화를 그린 적도 있는데, 어쩌면 이러한 인연으로 오네스티 가문이 출연하는 <데카메론>의 오네스티 이야기도 그림으로 그런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여하튼간에 여자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더군요. 요즘 뇌입어 뉴스 덧글란에 가보면 ‘한국여자들은 눈만 졸라 높고 잘난 척해서 졸라 재수없삼’이라는 찌질한 쵸딩들이 많습니다만, 옛날 고리짝 이탈리아에서도 ‘주변 여자들이 상대해주지 않아’ 고민하던 젊은 청년들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해서든 순종적으로 구애에 굴복시키기 위해서 이 같은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라벤나 여자들은 모두들 무서워서 젊은이들의 구애를 쉽게 승낙했다’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데카메론>을 썼던 보카치오는 당시 여성들의 기를 그런 식으로 죽여서라도 순종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인지, 이야기집 속에는 트라베르사리의 아가씨 말고도 구애를 물리쳤다가 곤혹을 치르는 아가씨들의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보카치오 씨의 비뚤어진 애정관이 아닐까나.
하지만 실제로는 보카치오 씨가 여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비참하게 말년을 보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자를 위협하지 마세요. 여자와 고양이는 구슬려야 하는 법이랍니다.[웃음]
아래쪽과 2층 미술관에 너무 정열을 쏟은 나머지, 우리는 그만 프라도가 문을 닫을 때까지 모든 곳을 다 둘러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재빨리 고야의 흑색시대를 둘러보기 위해 위로 올라갔습니다. 꽤 오래전 고야의 흑색시대 작품을 보았던 때의 기억이 있어, 고야의 그림들은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여유를 두고 보지 못해서 속속들이 그 감정을 맛보지 못한 것은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고야의 그림에서 ‘악마적인’ 인격을 느낀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인간적인, 한없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림이란 무엇일까요. 대체 그림은 무엇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움직일까요. 부랴부랴 흑색시대 그림들을 말타고 꽃구경하듯 둘러보고 난 뒤, 우리는 쫓겨나다시피 프라도 미술관을 나왔습니다.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문득 어딘가에서 노랫소리와 함께 수많은 인파들이 거리를 지나가 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 무슨 행진 하나봐! 우리 가보자.”라며 에바양과 손을 잡고 뛰어가니 점점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장행렬도 눈에 띕니다. 요정차림을 한 귀여운 여자아이들이나 늑대인간 분장을 한 남자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중년인 분들도 바이킹 복장이나 마녀옷차림을 하고 행렬에 끼어 다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친구는 이런 점이 신기한지 거듭해서 감탄하더군요.
한국에서도 물론 일부 젊은이들이 만화축제에 모여서 코스프레를 하는 문화가 있기는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자유롭고 거리낌 없이 코스츔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문화는 없으니까요.
마드리드 구시가의 중심부라 할 수 있을 키벨레스 광장 앞에 이르니 수많은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로 엄청난 카니발 행렬이 지나가고 있더군요.
거대 공룡이 춤을 추며 지나가고 광대들은 공굴리기를 하며 지나가고, 춤을 추는 유쾌한 신부들, 삼지창을 든 악마들이 손을 흔듭니다. 행렬 중간중간에 거대한 폭죽이 공중에서 터지고, 연주를 하거나 춤을 추며 다양한 사람들이 한껏 멋을 부리며 행렬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 정체불명의 인형탈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 우. 커다란 트레일러를 타고 연주하는 밴드
마드리드에 거대 사마귀 출현! 퍼레이드 중간의 사마귀 로봇. 이 촬영은 모두 에바양이 한 것입니다. 행렬 마지막에는 시민들도 함께 춤을 추며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우리도 같이 끼어들어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광장까지의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결국 행렬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고 계속 전진해서, 중간에는 돌아 나와야 했지만. 숙소로 돌아오며 우리는 가슴이 설?습니다.
오늘이 마드리드의 카니발인 것이 확실해지자, 오늘 새벽에 열린다는 파티 또한 카니발 뒷풀이인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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