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모나파의 창시자. 처음엔 구형 바이올린ㆍ비올라 등을 만들었지만, 그후 서서히 브레시아파의 작품을 탐고하면서 바이로린의 패턴을 개량해 갔다. 그러나 그이 작품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상당히 서투른 솜씨가 가해져 버렸기 때문에 융기ㆍ형ㆍ니스 등이 브레시아파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그래도 그 직립한 브레시아파의 f자 구멍만은 남아 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는 프랑스의 샤를 9세를 위하여 수십 개의 아름다운 장식을 단 악기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그가 만든 진짜 작품이 극히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 안토니오 아마티와 지롤라모 아마티(I)(1577~1628/1561~1630)
안토니오와 지롤라모는 각각 안드레아의 장남과 차남이다. 그들은 공동으로 작업을 하여 최초로 '아마티스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패턴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부친 안드레아의 것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초기의 것이 후기의 것보다 융기가 크다. 그들이 만든 악기의 수는 적지만 잘 보존되어 있다.
악기는 대부분 형이 많고, 언저리를 깊게 파냄으로써 판의 융기를 높게 보이게 했다. 뒤쪽은 대개 한 매의 판으로 만들어졌다. 형 안토니오가 사망할때까지 이 두 형제가 함께 계속 작업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예를 들어 데 피코렐리는 그것을 긍정하지만, 하트에 의하면 두 사람의 작풍은 분명히 다르다고 하였다. 또한 힐은 1590~1630년 사이에만 이들이 함께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 지롤라모 아마티(II)(1649~1740)
N. 아마티의 3남이며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올린 제작을 했다. 그의 작품은 작풍 면과 소리 면에서 부친의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 대부분 대형이며 거기에는 두 f 자 구멍의 사이가 벌어져 잇고 판의 융기는 적은 것이 많다.
☆ 니콜라 아마티(1596~1684)
아마티가 중에서 유명한 제작자. 지롤라모 I세의 아들. 1645년경까지 그의 악기는 아버지의 작품을 닮았지만 그후에는 끊임없이 개량해갔다. 그이 가장 훌륭한 걸작은 1660년에서 1684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두 종류의 악기가 있지만, 대형이고 통체의 각이 예리하게 돌출되어 있는 쪽이 인기있었던 것 같다. 옆판의 높이는 아마티 형제의 것보다 높게 만들어졌다. 판의 융기는 판의 가장자리를 약간 두껍게 하였는데 보통 높이로 보이게 하였다. 소용돌이 무늬는 크지는 않지만 보기 좋은 모양이다. 소리는 그 이전의 어느 아마티의 것보다도 풍부하고 강력하며 동시에 그 음색에는 아마티 특유의 부드럽고 매끈함이 살아 있다.
옛부터 그이 바이올린은 스타이나의 것과 함께 가장 많이 찾는 것이이었다. 그러나 독주자가 넓은 홀에서 연주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오늘날의 악기로서는 음량 면에서 미흡한 면이 있다. 하지만 실내악용으로서는 오늘날에도 일급품이다. 또한 현재에도 첼로는 독주용으로 많이 찾고 있다.
☆ 안드레아 과르네리(1626~1698)
크레모나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그 라틴어식 명칭인 구아르네리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이올린 제작자 집안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 A. & G. 아마티의 제자였는데, 구후 1641년경 N. 아마티의 제자가 되어 A. 스트라디바리 등과 함께 수업하였다.
A. & G. 아마티의 훈도를 받고 있을 무렵, 그의 작품은 대형 모델로 만들어졌지만 그 뒤에는 오랫동안 니콜라의 패턴으로 만들었다. 1670년경에 그의 f자 구멍은 성격을 바꾸었다. 판의 융기도 적어졌고 소용돌이 무늬도 더욱 특징 있는 모양으로 되었다.
이것이 어쩌면 스트라디바리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따른 것인지는 몰라도, 역시 그의 독자적인 면을 잃지는 않앗다. 의 악기 중 몇 개는 굉장히 아름답게 만들어졌지만 양호한 상태의 것은 극히 드물다. 비올라는 3개가 알려져 있는 데 그것들은 치수나 작풍이 마치니의 것과 같다.
☆ 라올로 알바니(1630~1695)
최초 크레모나에서 니콜로 아마티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의 악기는 대형이 양질의 니스가 칠해져 있다. 아들도 1970년까지 바이올린 제작을 계속했다.
☆ 지우제페 과르네리(I)(1666~1733)
안드레아의 차남. 델 제스와 구별하기 위하여 필리우스 안드레이(안드레아의 아들)라고 불렀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수업하였지만 작품은 특징이 있고 몇 개는 델 제스의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소리는 그렇게 강력하지는 못하다. 어떤 것은 스트라디바리의 팬턴을 모방하여들어진 것도 있다. 그의 악기 수는 대단히 많으며 또한 작품도 우수하다.
소형이 많고 동체 허리 부분의 폭이 좁으며, f 자 구멍은 보통 것보다 낮은 위치에 있고 중간 부분이 팽배해 있다. 아주 잘 만들어진 바이올린에는 더욱 이름이 알려진 '델 제스'의 상표가 붙었다. 그는 또 첼로도 만들었다. 그의 세 아들 중 피에트로만이 제작자가 되었다.
☆ 지우제페 과르네리(II)(1698~1744)
잔 바티스타의 차남. 그러나 잔 바타스타 자신은 바이올린 제작자는 아니었다. 지우제페 1세와 구별하기 위하여 '델 제스'라고 부렀는데, 이것은 그의 상표에는 모두 십자가의 마크와 성인의 문자인 I.H.S(Iesus Homminun Sal-vator)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A. 스트라디바리의 제자였다고도 하는데 그 자풍은 다르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어느 제작자와도 전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가 누구에게서 수업하였다고는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다만 때때로 안드레아의 아들 지우제페의 것과 닮은 데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였고, 만년에는 감옥에 들어가 옥중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하다가 그 생애를 마쳤다고도 전해 진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 대개 가짜라고 생각되는 수많은 조잡한 바이올린을 설명하기 위하여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제작 연대는 크게 나누어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에는 한결같이 G.P.마티니나 N.아마니의 것을 모방만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독창성을 보이지 않았다.
제 2기에 들어와서는 소형 패텬으로 되었으며, 판의 융기도 적고 온화한 모양이되었다. f자 구멍은 잘 파졌고 그 모양이 상하로 뾰족한 독특한 것이다. 또한 황색 또는 적갈색의 니스도 탄력성이 좋고 양질이어서 스트라디바리의 것과 필적할 만하다. 이 시기에 그는 겉판을 거의 전부 하나의 소나무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부 물들임이 지워져 버린 것도 있지만 대개 어느 판에나 같은 물들임이 배어 있다. 동일 제목을 사용하였음이 확실히 인저오디는 겉판이 붙어 있는 C.베르르곤지지의 세 개의 바이올린이 오랫동안 '델 제스'의 작품이라고 여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1735년 이후에는 파가니니가 사용한 바이올린 등이 제작되었다.
제 3기로 들어가면 그의 작품은 형태와 겉모양이 계속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항상 독창성이 있는 솜씨를 보인다. 어는 작품이나 스트라디바리의 걸작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것들이지만 작풍 면에서는 상당히 다르다. 대형 패턴으로 만들어졌으며 훌륭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스트라디바리의 것보다 약간 진하고 두텁게 칠해져 있다.
소용돌이 무늬는 색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 특징적이고 상감은 깊이 박혀져 있다. 이 무렵의 f자 구멍은 그렇게 뾰족한 모양은 아니며 상당히 커졌다. 소리는 강력하고 부드럽고 풍부하다. 현재 진짜 그의 작품에는 바이올린이 수십 개, 비올라가 약 십여 개 알려져 있지만 첼로는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 피에트로 과르네리(I)(1655~1728)
안드레아의 장남. 크레모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680년까지 살다가 그후 만도바로 옮겼다. 지롤라모 아마티의 제자였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악기는 아버지나 형제가 만든 것과는 다르지만 크레모나를 떠나기 전에 만든 악기에는 그들의 이름이 써진 상표가 붙었다.
그의 악기는 대형이고 판의 융기는 높으며 재질이 좋다. 겉판은 나이테의 폭이 넓고 고른 것을 사용하였고, 두 f 자구멍 사이 폭이 넓으며, 판의 각은 품위가 있고 아름답게 되어 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큰 결점이 있다. 판의 두께는 정확
하게 깍아 냈지만, 지나치게 얇게 처리했다.
그래서 소리가 둔해지기 쉽고, 또 판의 장력이 너무 약해져서 당겨진 현의 장력이 높을 경우 소리의 높이를 유지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악기가 파괴되기 쉽다. 그러나 악기는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피에트로 과르네리(II)(1695~1762)
지우제페 1세의 아들이며 안드레아의 손자다. 크레모나에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만도바에서 일을 하다가 뒤에 베니스로 옮겼다. 만도바 시절에는 백부인 피에트로 밑에서 수업한 듯하다. 또한 작품도 그의 영향을 받아 대단히 훌륭하다. 판의 융기는 상당히 크고 니스는 훌륭하며 소리도 좋다. 나뭇결이 아름다운 단풍나무를 사용하였고, 장밋빛을 띤 황금색이 빛나는 호박색의 니스를 칠한 훌륭한 첼로가 있다.
☆ 프란체스코 루제리(1645~1720)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자 집안인 루제리가에서 처음 나온 제작자. 루제리는 가끔 브레시아의 로제리와 혼동하게 되니 주의를 요한다. 그는 N. 아마티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N. 아마티의 악기를 잘 모방하였지만 그의 작품은 대형화되었고, 판의 융기도 조금 더 높다. f자 구멍은 약간 짧고 크지만 대단히 아름답다.
상감의 폭은 넓다. 때때로 그는 첼로의 뒤판을 포플러 나무로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아름답게 잘 울린다. 그의 첼로는 다소 큰 패턴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그렇게 많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중 몇 개는 대단히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또한 그 재료나 니스도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의 악기는 아마티의 작품과도 많이 닮아 때때로 아마티의 작품으로 매매되고 있다.
☆ 지아신토 바티스타 루제리(1666~1698)
프란체스코의 아들. 그의 작품은 아버지의 것과 꽤 닮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는 평가되지 않는다. 그는 첼로를 몇개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대형이고 융기가 적고 결이 적은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양질의 진한 갈색 니스가 칠해져 있다. f자 구멍이나 소용돌이 무늬는 아마티의 것보다 폭넓게 만들어졌다. 그가 만든 첼로는 소리가 좋다.
☆ 빈젠조 루제리(1690~1735)
프란체스코의 아들. 브레시아에서 작업을 하였다고도 한다. 많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만들었지만 그 작품들은 약간 거칙고 정밀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그는 루제리가 최후의 바이올린 제작자이다.
☆ 카를로 베르곤지(I)(1676~1747)
바이올린 제작자의 가계로서 최초의 베르곤지. 그는 스트라디바리의 제자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똑같은 모형을 만들었다. 그도 역시 N.아마티의 제자였다고도 한다.
오모보노 스트라디바리가 1742년에 사망한 뒤, 그는 안토니오가 소유한 도구와 재료들을 상속받았다. 그의 바이올린은 융기가 적은 평평한 모델로 초기의 스트라디바리의 작품과 닮았다. 뒤에 그는 대형 패턴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아름답게 완성되었지만 특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훌륭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악기들을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작게 변조되어 원상태의 작품을 보기란 극히 드물다.
☆ 미켈 안젤로 베르곤지(1715~1765)
가를로(I)의 아들. 그의 악기는 아버지의 작품에는 미치지 못한다. 융기가 적고 평평하며 곡선은 과장되어 있다. 니스도 딱딱하고 두텁게 칠해져 있다. 그러나 콘트라베이스는 대단히 훌륭하며 모양도 좋고 소리도 강력하다.
☆ 니콜라 베르곤지(1740~1782)
미켈 안젤로의 장남. 아버지 작품과 닮은 모델을 만들었고 아주 훌륭하게 완성된 것도 있다. 그러나 너무 특징이 없고, 니스도 빈약하게 칠해져 엷고 볼품이 없다. 많은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 조시모 베르곤지(1750~1777)
십중 팔구는 미켈 안젤로의 차남이며 니콜라의 아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중의 몇 개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형과 같이 아버지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 카를로 베르곤지(II)(1750~1820)
미켈 안젤로의 3남. 얼마 안되지만 너무 가치 없는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그것들은 직립하고 모양이 나쁜 f자 구멍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오히려 기타와 만돌린 제작을 주로 한것 같다.
☆ 로렌조 과다니니(1690~1745)
피아젠사에서 태어나 크레모나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다. 뒤에 밀라노로, 다시 피아젠사로 이사하였다. 크레모나 시대에는 A.스트라디바리의 제자였다. 그의 악기는 보통 소형의 패턴으로 만들어졌으며, 판의 융기 상태는 비교적 적다. 소용돌이 무늬는 스트라디바리의 것처럼 잘 새겨져 있지는 않지만, 소리 만은 풍부하고 강력하다. 그의 악기 중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있다.
☆ 코마소 발레스트리리(1720~1790)
처음 크레모나에서 작업을 하였지만, 뒤에 만도바로 이사하였다. 스트라디바리의 제자였다고도 하고, 피에트로갈레리의 제자였다고도 한다. 그는 주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그러나 제작 수가 적었던 첼로가 더욱 소중히 여겨진다. 그는 두 종류의 니스를 사용하였는데, 하나는 가다니니의 것을 꼭 닮았고, 다른 것은 더욱 부드럽고 빛이 진하다.
☆ 지오반니 바티스타 세루티(1750~1817)
로렌조 스트리오니의 제자이며, 1790년에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스트리오니의 방식으로 대단히 훌륭한 악기를 만들었다. 그 수는 500개 가까이 된다. 그는 또한 N.아미티의 모형을 만들어 황색 또는 적생에 가까운 니스를 칠했다. 그의 악기는 정성들여 마무리되어 있다. 첼로도 높이 평가된다.
☆ 지우제페 세로티(1783~1860)
지오반니 바티스타의 아들이며 후계자이기도 하다. 그는 뛰어난 제작자이며 잘 제작된 바이올린을 파리와 그밖의 지방에서 전시하였지만 아버지만큼의 평판은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헌 악기 수리 작업에 주력하였다.
☆ 로렌조 스토리오니(1751~1801)
크레모나 황금기 최후의 명인으로 불린다. 훌륭한 악기를 남겼지만, 그래도 그 작품에는 지난날 크레모나의 제작 기술의 쇠퇴 징조가 보인다고들 한다. 그에게는 훌륭하게 만들어진 갈레리 델 제스의 패턴 악기가 있는데, 그것들은 진짜 델제스의 것과 가끔 혼동된다. 작품은 융기가 적고 f자 구멍은 거의 같은 모양의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이며, 니스는 붉은색을 띤 황색의 것이 많다. 겉모양은 좋지만 소용돌이 무
늬나 상감 등에는 그다지 정성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높이 평가 되고 있다.
☆ 엔리코 세루티(1808~1883)
365개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 밖에 첼로도 몇 개 만든 것 같다. 작품의 결과는 좋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오케스트라 주자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호박색의 니스가 칠해져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바이올린은 1881년에 밀라노에서 전시되었다.
☆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
알렉산드르 스트라디바리와 안나모로니 사이의 아들. 출생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훼티스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수집가 사라브에 백작이소유하였던 1736년에 만들어진 바이올린에 친릴로 'anno aetatis 92'라고 덧붙여 썼다는 것들로 생각해 볼 때, 보통 안토니오는 1644년경 출생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출생지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사망한 해는 1737년이며 크레모나의 성도미니코 사원에 매장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옛부터 내려오는 이름인 "Stradivari'라는 한 집안의 자손이며, 12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젊어서 N.아마티의 제자가되어 1667년까지는 그곳에서 일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티가 사망한 이후 그 도구와 형 등 모든 것은 안토니오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가 만든 초기 작품에는 아마티의 상표가 붙었고, 또 1666년경의 작품에는 모두 'Nicolai Amatialumnus'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 자신의 이름이 상표에 표기된 ?는 1690년 이후부터이다. 그의 악기 제작 연대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우선 제 1 기는 1666년부터 1685년경까지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아마티의 표준 크기 패턴과 많이 닮았고, 뒤에 만들어진 작품에 비하여 융기가 많은 편이다. 이들 악기는 'Stradivarius amafise'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그후 계속해서 악기 개량에 힘썼다.
1685~1695년경까지의 제2기에는 주로 'Long Pattern'으로 알려진 아마티 형과는 상이한 모양의 악기를 만들었다. 이들 악기는 판의 융기가 훨씬 적어진 대신 컸으며, 동체의 길이나 판의 각이 짧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담하고 큰 f자 구멍 등은 마치니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그후 1695년경부터 그의 독자적인 모델의 황금 시대인 제3기에 접어든다. 판의 두께나 윤곽의 선이 매우 정밀하며, 니스는 색ㆍ질ㆍ투명감도 우수하고 소리도 아주 훌륭하다. 재료를 엄선하여 선택하였고, 겉판은 나이테의 폭이 고른 것을 사용하였다. 또한 악기 내부의 칸막이나 안 붙임은 포강의 제방에 있는 아주 가벼운 버드나무가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의 악기는 줄감는 곳ㆍ지판ㆍ텔피스 등의 부품을 떼면 60~275그램 정보밖에 안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여 그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현악기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제자를 많이 두지 않았지만 그중에는 A.갈리아노ㆍ로렌조ㆍ잔바티스타ㆍ가다니니 등이 있다. 안토니 사후 그의 미완성 작품은 그의 아들들과 C.베르곤지 등에 의하여 완성되어 스트라디바리의 상표를 붙였으며, 친필로 'Subdiscip-lia Stradivari'라고 덧붙여 썼다. 또한 그는 1667년에 프란체스카 훼라보시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 중 프란체스코와 오모보노 둘만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 프란체스코 스트라디바리(1671~1743)
안토니오의 아들이며 제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음이 확실하지만, 작품의 결과는 아버지의 것만큼 우수하지는 못하였다. 악기들은 대형이고, f자 구멍은 독특한 모양을 하여 아마티 형제의 것과도 조금 닮았다. 니스는 적과 적갈색이며 질은 아버지의 것과 유사했다. 소리는 크고 아름답다. 그의 악기에는 아버지의 상표가 붙은 것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