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주지 정도 스님
성보박물관·적멸보궁 조성해 천년고찰 품격 더 높일 터!
탄성스님 은사로 10대 출가, 스승의 일상 여여함에 탄복
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않듯, 대중법문·불사 하나도 ‘신중’
유네스코 등재 7개 사찰 중, 법주사만 성보박물관 없어
사찰·지자체·문화재 전문가, 7인 추진위 구성해 논의·결정
발굴·학술 검토 마무리 되면 능인전 자리에 배향각 조성
“박물관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가름하는 기준”이라는 정도 스님은
“문화재 차원의 유물을 넘어선 성보를 보관·전시하는 박물관인 만큼
크나큰 공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8년 6월의 마지막 날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낭보가 속리산에 날아들었다.
승원에 포함된 산사(승원)는 모두 7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그리고 법주사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등재 이후 3년 만에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
(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한국문화유산으로는 13번째이고 충북에서는 최초 등재였다.
여명의 붉은 빛이 미륵대불 이마에 내려앉을 즈음
산사가 품어온 국보도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현존 한국 유일의 목탑(木塔) 팔상전(捌相殿·국보 55호) 풍경 소리가
고즈넉한 도량에 퍼져 가면 석련지(石蓮池·국보 64호)는 돌 속의 연꽃을 피워 낸다.
그리고 이내, 햇살에서 떨어져 나온 금빛 한 줄기가
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국보 5호)을 밝히는데,
1000여 년의 세월을 버텨 온 두 마리 사자는 1000여년의 미래도 끄떡없다는 듯
우람한 근육질의 허벅지를 당당하게 내 보인다.
한국이 자랑하는 국보, 그것도 무려 세 점을 한 공간, 한 찰나에 볼 수 있는 건 법주사뿐이다.
국보 3점, 보물 13점을 품은 법주사는 ‘보물 사찰’로 회자되고 있다.
몇 걸음의 품만 더 들이면 마애여래의좌상(보물 216호), 대웅보전(보물 915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1360호), 원통보전(보물 916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1361호), 철솥(보물 1259호) 등의 보물들과 만날 수 있다.
국보 3점, 보물 13점을 안은 법주사가
‘보물사찰’, ‘성보사찰’, ‘야외 박물관’으로 회자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개 사찰 중
성보박물관이 없는 산사는 법주사뿐이다.
소장할 만한 문화재가 없어서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아니다.
전적류를 포함한 불교 유물만도 400여점이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그 범위를 법주사 소속 말사로 확대하면 3000여점에 이른다.
성보박물관 건립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예산을 확정 받지 못해
차일피일 미뤄져 오늘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충북도와 보은군이 움직였다.
특히 보은군은 2019년 사업 일환으로 성보박물관 건립 계획을 확정했다.
정부·지자체 예산으로는 180억원이 책정됐다.
2016년 3월 신임주지로 임명된 법주사 주지 정도 스님의 역할이 컸을 터다.
정도 스님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정상혁 보은군수의 역할이 컸다”고 공을 돌렸다.
그러나 성보박물관 건립 필요성에 대해서는 힘주어 말했다.
통도사 사리 1과를 봉안한 세존사리탑.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 속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통합종단 출범을 전후로 한
조계종의 내적 불안 등이 점철되며 많은 성보가 유실되었습니다.
사찰 품을 떠난 성보는 미술품으로 격하돼 관람 대상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절에서 사라진 성보가 골동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을
사찰·정부 모두 인식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순천 송광사 16국사 진영(보물 1043호) 도난(1995.1.27) 사건이 불거졌습니다.
교계 안팎으로 우리 문화의 정수가 담긴 문화재 보존 필요성 여론이
서서히 대두되는 때였던 터라 성보박물관 건립은 교계의 화두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조계종은 사건 발생 직후 ‘송광사 성보도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상금 포스터까지 제작하는 등 조속한 사건 해결을 위해 대응했다.
아울러 성보 도난 방지대책 수립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예방책 마련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성보박물관 건립을 지원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법주사가 구상 중인 성보박물관이 궁금하다.
“저 혼자, 법주사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닙니다.
문화재청, 도·군청, 문화재위원이 추천한 5명과 저와 실무진 등
7인으로 구성된 ‘법주사 성보박물관 추진위원회’를 꾸렸습니다.
설계에서부터 전시 콘텐츠, 관련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반 사항을 추진위에서 논의·결정할 것입니다.”
특히 설계는 전적으로 전문가의 고견을 수렴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추진위는 국내 박물관은 물론 해외 박물관도 참고할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심도 있게 접근하려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한옥 지붕 형태의 기존 디자인에서 벗어나
현대 건축을 접목한 성보박물관을 세워보려 노력 중이라는 점입니다.”
정도 스님 나름의 희망사항이 있다.
‘대형괘불 전시 공간 확보’가 대표적이다.
‘대형 화면에 거대한 부처님의 독존상을 배치해 웅대함과 성스러움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 법주사 괘불탱화(1766년 조성)는 보물 1259호로 지정돼 있다.
“12m 이상 되는 괘불을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유일합니다.
전국 사찰의 괘불을 교환 전시하고 있습니다.
법주사도 가로 579cm, 세로 1349cm 대형 괘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통도사 괘불전(중앙홀) 전시대 규모의 공간을 꼭 확보해야 한다고 추진위에 요청했습니다.”
성보박물관이 들어설 자리는 서너 곳 정도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다.
“법주사 성보박물관인 만큼 가능한 일주문 안으로 들어와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도량 깊이 들어서서도 안 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법주사 도량 경관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물관 규모와 산사 주변 경관을 충분히 비교 검토해 최종 확정할 것입니다.”
불자들에게는 신심을 일반인들에게는 한국문화의 정수를 전하는 고품격 성보박물관이 기대된다.
금오 스님 부도전 옆 마애여래의좌상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사리각과 능인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능인전 바로 뒤편에 세존사리탑(충북유형문화재 16호)이 있다.
고려 말의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법주사를 참배한 후
통도사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1362)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사리가 세존사리탑에 봉안됐다고 한다.
“법주사 어른 스님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내려온 말씀이 있습니다.
세존사리탑을 친견할 수 있는 배향각이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의 대웅전보다 더 컸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석존사리탑을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지금의 능인전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과의 논의 끝에 능인전 주변 발굴조사를 결정했다.
1차 발굴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었지만
2차 발굴(2017.10)에서는 기둥을 세울 수 있는
초석 3기와 사리각 끝 부분임을 보여주는 기단 1기가 발견됐다.
“발굴조사가 좀 더 이뤄지면 전각의 규모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주춧돌로 봐서는 앞면 7칸의 전각이니
법주사 대웅전 규모(앞면 7칸·옆면 4칸의 2층)에 준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향각이 1층이었는지, 2층이었는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학계의 고증이 마무리되면 지금의 사리각은 철거하고 그 자리에 능인전을 이전하려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능인전 자리에 배향각을 신축할 계획입니다.”
명실상부한 적멸보궁을 조성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설악산 봉정암, 동해 낙산사, 오대산 적멸보궁, 팔공산 갓바위, 남해 향일암 등에 준하는
기도처가 충청도에는 없다. 정도 스님이 구상하고 있는 배향각이 신축되면
법주사는 이곳 충청 땅에 새로운 ‘기도·신행’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주지 임기가 1년 정도 남았으니 성보박물관 건립·적멸보궁 조성 불사를 서두를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박물관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보박물관은 한국불교의 문화수준과 그 역량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문화재 차원의 유물을 넘어선
성보를 보관·전시하는 박물관인 만큼 크나큰 공을 들여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흔적’은 사리입니다.
사리를 향해 합장을 하는 건 2500여년 전의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리는 그 자체로 법이요,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이러한 대작불사는 주도면밀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만 누릴 향유가 아니라는 의미일 터다.
법주사 주지로 취임한 후 법문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가 궁금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축하 인사말을 하라면 언제든 하지만, 가능한 법문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연유를 여쭈어 보니 강남 봉은사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당시 주지 스님의 인연으로 봉은사에서 법문을 하게 된 정도 스님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법(法)을 모르는 사람이 법상에 앉는 건, 저와 부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저 또한 법을 모르니 이 법상에 앉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다만, 봉은사의 요청을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점만은 분명하게 밝히며 사과드립니다.’
가슴에 새긴 선·경구를 부탁드리니 서산 대사의 시 한 편을 전했다.
눈 내린 들판 걸을 때(踏雪野中去)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걸어가는 내 발자국 (今日我行跡)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불사 하나, 법문 하나도 쉬이 보지 않고 신중을 기하는 그 이유를 알 듯하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정도 스님의 은사가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상임위원장 겸 총무원장을 역임한
탄성(呑星) 스님이라는 사실이 스쳐갔다.
공림사로 걸음 했다가 부목거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탄성 스님 어디 계십니까?” 물으니
“탄성은 나요!”라는 대답에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법당 마루 닦는 일은 물론이고 해우소 청소도 솔선수범했던 선지식이었다.
정도 스님이 기억하는 탄성 스님은 어떤 모습일까?
정도 스님은 “여여(如如)한 도인”이셨다고 술회했다.
말년의 탄성 스님은 몸이 아파 당시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의사에게 물었다. “제 병이 무엇인지요?” “암입니다! 수술하셔야 합니다.”
병상으로 돌아 온 탄성 스님은 걸망을 챙겼다. 제자들이 만류하자 한 마디 일렀다
“병명을 모를 때 병원을 찾는 것이야. 암인 줄 알았으니 됐다. 돌아가자!”
절로 돌아온 탄성 스님은 1주일 동안 기도 정진했다고 한다.
“기도 정진이 끝나자 병원을 찾기 전과 똑같은 일상을 보내셨습니다.
새벽예불 빠지시는 법이 없고, 절 앞마당 비질도 그대로 하셨습니다.
심한 통증이 밀려올 때면 제자들은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드리고자 기왓장을 데워 드렸습니다.
큰스님은 그 기왓장을 가슴에 안으시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음, 이 정도 통증이면 나도 좀 힘들다!’ 그게 전부입니다.
저녁예불 시간 다가오면 그 기왓장도 내려놓고 법당으로 향하셨습니다.”
불사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인 건 서산 스님의 시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탄성 스님이 내어 보인 일상의 여여함 속에 깃든 가르침을
스스로 챙기기 시작한 그 언젠가부터 샘솟았을 터다.
적멸보궁·성보박물관! 가슴 뛰는 대작불사가 법주사 도량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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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스님은
- 1976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탄성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 1979년 법주사 대교과 졸업.
문경 봉암사에서 수선안거 이후 12안거 성만.
- 1996년 중앙승가대 졸업. 충주 창룡사 주지.
- 조계종 13,15,16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 2016년 조계종 5교구본사 법주사 주지.
2019년 2월 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