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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강병호 | 지희네 집에서는 늘 달콤한 냄새가 났 다. 파스텔 빛깔의 솜사탕 같은
냄새. 지희의 생일파티 준비를
하느라 집안 은 어수선했다. 언니와 오빠는 풍선 을
불고, 엄마는 세모 모양 펠트로
가 랜드를 만들고 있었다.
"어이, 막내딸. 와서 이것 좀
봐 봐."
지희 아빠가 벽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 었다. 빗물이 스며들어 누렇게
얼룩 진 지희의 방을 핑크색 방수페인트로 칠하고, 벽이 너무 휑하다며 아빠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빠를 제 외한 모두가
말렸지만.
“이거 뭐
같아?”
빨간색의 찌그러진 동그라미 아래에 실처럼 늘어진
초록. 무얼까. 풍선? 지수는 다른 식구들의 표정을
살폈다. 절대 알아맞히지 못할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풍선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풍선처럼
보이니까.
“글쎄요……. 꽃……일까요?”
“우하하하하! 역시 막내딸은 안목이
있다니까. 다들 풍선처럼 보인다지
뭐야. 아니 이게 어딜 봐서
풍선이라는 거지? 이건
양귀비꽃이야. 꽃 중에 제일 예쁜
꽃이지. 우리
지희처럼.” 지희네는 가족의 생일에 모두가 모여 파티를
했다. 벌써 몇 해째 쓰고 있는 때
묻은 가랜드를 걸어놓고, 수술이 다 떨어진 고깔모자를
쓰고,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인
후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초라한 생일파티였지만, 지수는 시끌시끌하고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좋았다.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코끼리들은 어떻게 뽀뽀를
하는지 알아?” 아빠가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썰렁한 농담은 지희네 아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코, 끼리.” 아빠 혼자서 묻고, 답하고, 우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어깨를
으쓱하고, 언니는 고개를
젓고, 엄마는 입술을 다문 채
빙긋이 웃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케이크 위에 열두 개의 초가
꽂혔다. 작은 촛불이 식구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축가를
부르고, 지희가 소원을 빈 후 촛불을
끄고, 폭죽이
터졌다. 지희가 선물 상자를
풀었다. 지수가 준비한 선물은 스마트
워치였다. “이렇게 비싼 걸 그냥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지희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희가 엄마께 받은 시계를
잃어버려서 너무 속상해하는 것 같아서요. 스마트 워치가 그 시계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희에게 선물한 스마트 워치는 아빠가 택배로
보내온 추석 선물이었다. 지난 6월, 지수의 생일에 보내온 스마트
워치와 브랜드와 모델명, 색깔까지 똑같은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어서
지수는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얼마나 바쁘고 무관심하면
딸에게 무엇을 선물했었는지 잊어버릴 수 있는 걸까. “고마워, 지수야. 정말 마음에 쏙
들어.” 말은 그렇게 해놓고, 지희는 금세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 시계 잃어버려서 정말
죄송해요.”
“엄마는 정말
괜찮아.”
“엄마에게 정말 소중한
건데……. 제가 괜히 욕심을
부려서…….” 엄마가 지희를 꼭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시계 같은 건 없어져도
괜찮아. 그때의 추억은 우리의 기억
속에,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엄마 속엔 곰 한 마리가
산다. 컴컴한 굴속에서 온순하게
잠을 자던 곰은 이따금 깨어나 짐승의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엄마를, 엄마의 주변을 엉망으로
흔들어놓는다. 엄마의 방문을 열자 향수
냄새에 숨이 막혀왔다. 방안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밀폐된 방에 고여 있는
지독한 향수 냄새만이 곰이 부린 난동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
속에 곰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 집을 나간 후부터였을까. 아니면 엄마의 곰을 견디지
못하고 아빠가 집을 뛰쳐나가 버린 걸까.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지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수는 상자 앞에 우두커니
앉았다. 지수가 훔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아니었다. 이 물건 속에 깃든
추억, 그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끈끈한 가족의 온기였다. 지수는 아빠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가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나갔다.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아빠에게 들었던 가장 무서웠던
말. 그 말 속에는 엄마와 엄마를
둘러싼 모든 것, 지수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을 다시 듣게 될까 봐
지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늦은 밤,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는
지수를 보고 지희 엄마는 깜짝 놀랐다. 마당의 벤치에 앉아서 지희
엄마가 끓여준 핫초코를 마시다가 지수는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 사이사이에 지수는
가슴을 조여 오는 것들을 쏟아놓았다. 집을 나간 아빠와 어두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곰과
지수가 훔치고 싶었지만 훔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지희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전
그냥…….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갖고 싶은 건
지희의 엄마, 지희의 가족이었던 것
같아요.” 지희 엄마의 따뜻한 팔이 지수의 어깨를
감쌌다. “참 재미있지
않니? 지희는 항상 너를
부러워하거든. 네가 지희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여유롭다는 건
정말 복된 거야. 지난번에 지희 아빠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그땐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들었어. 쌀은커녕 라면도 살 돈이
없었지. 그래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밀가루를 샀단다. 라면 한 개 값이면
밀가루로는 온 식구가 먹을 수 있으니까. 아침에는 칼국수를
해먹고, 저녁에는 수제비를
해먹었지.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텅 빈
냉장고를 열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다 찢어져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았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단다. 그게 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지.” 지수가 울음을 그치고 난 후에도 지희 엄마는
지수의 어깨를 계속 토닥였다. 하늘에서 별들이 내려와
지수의 어깨 위에 입맞춤하고 가는 것 같았다. 지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수는 어깨를 두드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