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죽은 것이 확실한 영양공의 딸에 후선 낙왕부의 해홍군주, 거기다 반란 진토인 수괴의 딸까지…. 도대체 놈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지?”
호영은 홍대보의 집에 상주하는 귀호기의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오늘 백호나한이 한 일을 가지고 쏟아낸 정보들은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했다. 대규모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병기를 만드는 능력, 그리고 원주 중경의 호궁은 물론 나머지 중원십일주(中原十一州) 제궁(帝宮)에까지 진상되는 향당 석밀을 만드는 향장자가 백호나한의 사람이 됐다는 것. 그리고 반역의 무리인 후선의 실세 중 실세인 강무산의 양녀와 각별한 관계라는 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란, 반란인가?”
“…!”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건대 반란이라는 결론밖에는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자신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 보란 듯이 정보를 흘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우리가 있다는 것을 백호나한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귀호기주께서 쓰시던 거처의 하인을 한 명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아무래도 백호나한이 우리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것은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 하남천원군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십중팔구 모든 실권은 백호나한이 장악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비록 하남천원군 대원수인 금영월 아래에 있는 무장들이 그를 견제하고 있지만 백호나한은 그들을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남례성은 이미 백호나한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
호영은 귀호령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귀호령는 귀호기주였던 홍대보가 공식적인 신분 때문에 움직이지 못할 때 대신 귀호기를 이끌던 인물로, 편의상 귀호령이라 부르지만 공식적인 서열은 귀호 7호였다. 귀호령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백호나한이 그러한 비밀을 우리에게 흘린 것은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백호나한의 입김이 닿아 있는 군사들만 줄잡아 6만이 넘습니다. 거기에 반란 진토인들이 가세하고 후려의 강무세가와 손을 잡으면 사실상 남례성은 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니 상(上)께는 있는 그대로 보고하고 제가 백호나한을 만나보겠습니다.”
“음~! 과연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주력해야 할 것은 귀림의 그 물건이다. 그가 눈치를 채고 있다 하더라도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사실 그 문제도 백호나한과 걸려 있습니다.”
“…!”
어느새 호영에게 자신의 위상을 정립한 귀호령은 호영의 질문을 받자 귀호기주 홍대보가 비명에 간 후 자신이 나름대로 살펴본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수개월 전, 백호나한은 한 진토인 부족을 토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을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추적하던 주작의 무녀로 보이는 여인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백호나한의 행방이 묘연해진 시기에 그녀 또한 함께 사라졌습니다.”
“아니, 백호나한이 알고 있는 것을 그보다 오래 있었던 귀호기가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여인이 주작의 무녀라는 것은 확실한 얘기인가?”
“설마 그 물건을 노리는 남례 일족의 하수인으로 생각되던 우르하 부족이 주작의 무녀를 보호하고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남례 일족도 그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치밀했으니 우리가 간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지난 일. 어쨌거나 앞뒤 정황으로 볼 때 바로 그녀가 주작의 무녀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백호나한과 함께 모습을 보인 뒤로 물건을 노리며 귀호기주를 심하게 견제하던 봉수 태수가 그에게 무척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행방이 묘연했던 그때가 물건을 찾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건가?”
“….”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귀호령을 보고 당초 했던 생각을 바꾸었다.
“역시 자네 생각대로 백호나한과 접촉해보는 것이 좋겠어. 자네가 책임지고 그를 한번 떠보게.”
“존명!”
***
여인천궁의 총사 냉심소수(冷心素手) 교석심(巧釋深)은 소궁주 설화가 회궁한 뒤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소궁주 되는 자가 사사로이 궁을 빠져나가 벌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그러나 궁주는 물론 장로들까지 소궁주가 벌여놓은 일에 춤을 추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가 한 일은 궁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파문당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궁주는 물론이거니와 사부인 대장로 교운파파(敎云婆婆) 치호연(置呼然)까지 그 수인 계집애를 두둔했다. 소궁주는 뻔뻔스럽게도 자기 남편의 요구를 당연하다는 듯 여인천궁에 요구했다. 교석심이 보기에, 지금 궁(宮)이 돌아가는 꼴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비록 총사라는 지위에 있으나 궁주가 직접 나서고, 후계자인 소궁주가 설쳐대니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교석심에게도 소궁주 설화를 중심으로 행사되는 궁의 일에 굳이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사저, 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로?”
자신의 거처에 어느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던 교석심에게 궁도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교석심은 눈길을 여전히 화폭에 그려진 난화(蘭花)에서 떼지 않고 물었다.
“아마도 부공촌의 대장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부공촌을? 흥! 언젠가 궁도 옮기자고 하겠군.”
“대사저 말대로 아마도 분궁(分宮) 문제도 같이 거론되는 것 같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
“소궁주가 그러더라고요. 서쪽 바다 어딘가에 해진(海陣)을 설치하고 거기에 철방과 분궁을 함께 세운다고 하던데….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몰라요.”
교석심은 소궁주 설화의 계획을 전해 듣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본래 여인천궁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유야무야 무시되는 바람에 사문화되어 있는 궁규(宮規)지만 지금도 여인천궁 조사전(祖師殿)에 어엿하게 명문화되어 있는 궁규였다. 그런데 궁의 후계자라는 이가 남편을 가지고 있고, 그 남편의 뜻에 따라 궁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석심은 그 즉시 거처에서 나와 궁주의 처소를 찾았다.
“어머? 대사저.”
“궁주님을 뵈러 왔다.”
“예, 지금 기다리고 계셔요?”
궁주 상유란을 지척에서 모시는 다하(茶夏)는 교석심의 냉기가 풀풀 날리는 기세에 움찔하며 궁주에게 그녀가 왔음을 알렸다.
“교 대사저가 찾아왔습니다, 궁주.”
“석심이가?”
여인천궁주(女人天宮主) 섬섬옥수(纖纖玉手) 상유란(桑楡蘭)은 교석심이 왔다는 다하의 말에 그녀를 만났다. 교석심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 다소 자유분방한 소궁주 설화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설화의 남편인 백호나한에 대해서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설화가 가져온 그의 요구는 교석심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입장에선 궁이 외부인의 손에 움직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총사 교석심, 궁주님을 뵙습니다.”
“일어서거라. 너와 나는 이런 사이가 아니질 않느냐?”
“하지만 오늘은 여인천궁의 총사로서 궁주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두 참! 그래 무슨 일이냐?”
상유란은 교석심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부공촌의 철방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들었습니다.”
“그럴 생각이다.”
“그리고 그곳에 분궁을 세운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분궁? 아! 그 이야기로구나. 사실은 분타나 총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화가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로 있어야 해서 분타가가 분궁으로 불린 것뿐이다.”
궁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여인천궁의 후계자가 머무는 분타는 곧 분궁이었다. 그리고 소궁주가 계속 그곳에 머문다면 결국 분궁이 아니라 이궁(移宮)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리고 무산곡(巫算谷)은 은둔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지만 이미 세상에 나선 이상 이곳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궁주!”
“설화가 그러더구나. 여인천궁이 세상에 나서면 자연스레 손님이 많아질 것이고, 그럼 무산곡에 외인들이 머물게 되는 수도 많다고….”
“….”
“나도 여인천궁이 강호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무산곡에 잡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아 허락해줄 생각이다.”
“하지만 궁주님, 만일 그렇게 되면 여인천궁은 상공의 여인천궁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해진(海陣)이란 것은 상공이 만들려는 것이지, 우리 여인천궁의 것이 아닙니다.”
“….”
겉으로 보기엔 분명 그랬다. 그러나 설화가 백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장로들과 상유란은 상공(上公) 백호나한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려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이번에 항구 요새를 건설한다는 것도 사전에 생각해볼 시간이 없어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상공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여인천궁이 그 일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상공은 그것과는 관계없이 일을 추진할 것이 분명했다. 우습게도 이번에 여인천궁에서 상공의 계획에 참가하는 것은 오로지 상공에게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교석심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확실히 석심이 네 말이 옳다. 처음 설화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상공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설화를 위해 궁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경에서 생활하기도 했지. 생각해보면 설화가 아니면 누리기 힘든 호강이 아니겠니?”
“….”
확실히 그랬다. 교석심이 궁내에 입지를 마련하고 영향력을 가지게 된 계기도 궁주와 장로들이 오랫동안 외유를 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궁내의 대소사를 맡아보면서부터였다.
“석심아!”
“말씀하십시오, 궁주.”
“그때는 상공도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단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의 뜻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1천이나 되는 고수 집단을 이끌고 있다. 거기다 무시할 수 없는 재력과 강시지존이라는 친구까지 있다. 그리고 설화의 추측 불가능한 무공은 바로 그에게서 나왔다.”
“….”
“비록 여인천궁이 상공에게 끌려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면 상관없지 않겠니? 상공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믿고 도움을 청하는 것인데….”
여인천궁주 상유란과 교석심의 인식 차이는 사실 분명했다. 상유란은 백호나한과 오랜 기간 같이 지내보았고 설화의 진정한 신분을 알기에 그가 설화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석심은 백호나한이 설화를 매개로 여인천궁을 지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