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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스승
이상적인 한국인상, 김교신
한 인물의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고 난 다음에 시작되어야 한다고 칼라일이 말하였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은 후에 그 삶의 의미가 더욱 높이 평가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교신이란 인물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한국 기독교에 김교신과 같은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힘썼던 선배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겨레의 근대사에 참된 종교를 회복시켜 민족의 혼을 깨우치려 하였던 두 인물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과 교사 김교신이었습니다.
만해는 해방을 1년 앞두고 타계한 민족 시인이자 스님이었습니다. 김교신은 해방을 넉달 앞두고 하늘나라로 간 민족의 교사이자 민족적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김교신은 그의 삶과 사상에 비하여 너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그를 위험시 혹은 이단시하여 평가절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업적은 겨레의 정신사에 길이 남아야 하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아야 할 내용이기에,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으며 한국교회 전체가 그의 삶과 사상을 다시 되새겨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9절에 이르기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김교신의 삶의 하나의 누룩이 되어 먼저 한국교회 안에서 퍼져 나가게 되고 나아가 우리 겨레 전체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헌신함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과제라 확신합니다.
이상적 한국인상
김교신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한국인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이상적 인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상'일 것이다. 이 선비상은 영국의 신사상, 독일의 장인상, 중국의 군자상, 일본의 무사상에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터하면서 우리가 고이 가꾸어 온 이상적 인간상이다. 선비상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이다.
그런데 '선비'라고 할 때 그것이 갖는 한계성을 긍정적인 면보다는 더욱 크게 부각시켜 '선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흠집내기도 한다. 특히 일본관학의 식민사관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크게 부각시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깎아 내리려 한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피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선비' 상에 대하여도 심하게 헐뜯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선비'의 부정적인 측면은 첫째 그것이 계급적 지칭이라는 데 있다. 사농공상이란 봉건적 신분질서 안에서 선비는 지배계급이었고, 그러기에 봉건질서 계승을 위한 보수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비생산성을 든다.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민중의 희생 위에서 여가를 즐기는 유한계급이며, 그러기에 그들의 논의가 또한 하나도 생산과 결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파당성이다. 선비는 지나치게 명분만을 내세워 파당을 형성하고, 그러기에 늘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해서, 선비는 조선 500년의 역사에 주인공 노릇을 했으면서도, 그것이 신라기와 고구려기처럼 진취적이지 못했고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건설적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관적인 그릇되고 왜곡된 선비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펼 수 있다. 선비상이 갖는 긍정적인 특질, 즉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을 들고서 말이다. 학자적 기질이란 삶을 진리 자체를 묻는 데 바치는 생애를 이름이며, 예술적 기질이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생애, 그리고 지사적 기질이란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살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들에 묻히는 재야적 생애를 이름이다. 이러한 세 기질이 그의 인격 속에, 삶 속에 맥박칠 때 우리는 이것을 선비라고 일컫는다.
조선조 500년 중에서 우리는 이런 좋은 의미의 선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학자적 기질이 가장 크게 나타난 선비로서는 이퇴계를 들 수 있고, 예술적인 기질이 크게 나타난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여성에 나타난 신사임당을 들 수 있으며, 지사적 기질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민중의 삶 속에 나타난 동학 농민군의 전봉준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선비상이 지니는 한계성 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장점 또는 긍정적인 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우리 민족이 지금도 '선비'라는 말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점과 긍정적인 면을 피부로 느끼고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정한 선비는 그러기에 한 계급적 지칭도 아니요, 비생산자도 아니며, 파쟁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계급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요,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생산자며, 진취적으로 관여하는 창조자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 온 민족, 온 민중의 정신적 유산이요 소유이어야 한다.
김교신은 위에 든 선비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온몸에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전통적 선비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두 가지 기질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 기질과 눈물 많은 다혈기적 기질이었다. 그의 이 다섯 기질은 선생에 있어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선생의 온 활동, 온 생활에 응고되어 나타났다.
학자적 기질
선생은 학자적 기질의 소유자였고, 꼼꼼하게 사리를 밝히며 원리.원칙을 잘 책기는 일면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그로 하여금 직관적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위에 터하는 문학의 세계보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에 터한 자연과학의 세계에 보다 친근감을 갖게 했다. 문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적성에는 자연과학적 학문이 맞다는 뜻에서다. 선생이 처음에 동경고사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뒤에 자연과학에 보다 가까운 지리.박물과로 전학한 것도 이런 기질에서였다고 풀이된다.
무교회클럽이 학자들의 모임이라든가 또는 학자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세인들은 곧잘 하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특히 김교신과 함석헌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오산고보 학생들을 골방에 모아 놓고 과외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독창적인 관점에서 강의하였거니와 김교신은, 전 158호에 이르는 "성서조선"과 전 6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이 증명하듯이, 일개 중등학교 교사로서는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그의 신앙의 소치이겠으나 그 신앙을 학문적으로 다듬어 나가는 그의 학자적 기질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특히 그의 이런 기질은 그의 담당과목인 지리수업 방식에 잘 나타나 있다. 교과서의 내용은 50분 수업 중 20분 정도로 끝내 버리고, 처음 10분간은 시사적인 이야기, 나중의 20분간은 지리와 관련된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다. 40 전후의 나이로 이렇게 자유자재하게 수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의 덕택이며, 그의 학자적 기질의 교육적 발로라 할 것이다.
그의 지리수업 방식은 참으로 특이했다 한다. 당시의 지리 교과서에는 한국의 지리에 관한 내용은 극히 적은 양이었다. 그는 교과서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지리를 많이 다루었고, 지리시간은 가히 철학시간이자 세계사시간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의 관련에서 참고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학생들의 끝없는 흥미를 촉발하고 학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별로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이 아니었는데도 지리과에 학문적 관심을 퍽 많이 갖게 했을 뿐더러, 그의 시간에는 인생철학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한다. 제자들은 이런 수업방식을 최선의 방법이덨다고 지금도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저서 "조선지리 소고" 같은 내용을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젊은 영혼들의 가슴은 얼마나 흐뭇하며 자랑스러웠을까. 우리도 충분히 추측하고 남음이 있다. 이런 방식은 천성적으로 교사로 태어난 그의 인격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 의식적으로 짜낸 것 같은 -좋은 의미로- 면도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여러 곳에 이런 방식을 저녁에 회상하고 메모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제 4학년 지리시간에 노량진 6충신묘와 양주 덕양산의 권율 도원수의 사적을 다루었고(1937.9.7), 하와이 몰로카이 섬과 신부 다미앙을 말하면서 우리 소록도 이야기를(1937.10.11), 북부 중국의 자원의 전부보다 곡부산 공자가 더 크다는 것(1939.2.13), 지리수업을 한 시간 쉬고 -저들이야 알 리가 만무하지만- 인생의 목적을(1940.1.31), 청년들과 함께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대통령 재취임 연설을(1940.6.29) 다루고 있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학문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학문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학문이 몸에 배인 교사에게서 표출되는 것이지, 결코 기교나 연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기질
중등교사로서 수업, "성서조선" 주필로서 원고집필과 발간사무, 그리고 경성성서연구회의 강사로서 성경강의, 이렇게 그는 일인 3역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과로의 탓인지 그의 눈은 늘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을 때가 많았다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성서조선"의 발간사무는 육체적인 고통과 노력을 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감, 회의심이 늘 따르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달이 발간할 원고가 될 때마다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며, 조판이 된 후에도 몇 번식 교정을 봐야 하고, 또 책이 되면 독자들에게는 자기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송해야 하며 시내의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자전거로 배달해야만 했다. 시내의 독자들에게 왜 직접 배달했는지, 그 이유를 자신은 피력하지 않았지만 아마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과 이왕이면 따뜻한 마음으로 전해 주자는 사랑에서 이리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가 갖은 고생 끝에 새 책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시내 독자에게 전해 주며, 시국이야기, 신앙이야기를 자전거를 받쳐 놓은 채 문간에서 나누는 광경을 상상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가슴도 훈훈해진다.
이런 고된 생활에 그 자신도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러기에 그는 "제소와 패소"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둘째 제소: 한 사람 몫의 직분을 가진 자가 일주의 6일간을 근무하고서 주말 휴가를 가질 것은 생명 부지상 절대로 필요한 일인 것을 당신도 아시는 바일 뿐이오리까. 여호와 당신께서 제정하신 법칙이 아니오니까. 주간 6일을 벌써 힘에 넘치게 지치고서 또 주일을 쉬지 못한 지도 대략 십여 년. 그동안 우리의 외침을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못난 것을 이용하셔서 장터에 나가 피리 불라 하셨으나 어디 춤추는 인간 하나 있습디까? 일주일 내내 교단에 섰던 자가 일요일에까지 강의하는 것은 그 내용의 여하는 논할 것 없이 그 행위 자체가 피를 뽑아 주는 일이요, 살점을 분배하는 일이 아니오니까? 그런데 누가 들으러 왔댔습니까?
심문: 네가 나를 믿기 전보다 지금은 얼마나 약해졌느냐. 피로로 인하여 얼마나 감수된 듯하냐.
답신: 입신 이전에는 허약해서 약병만 차고 다니던 것이 근 20년내로 큰 병에 누워 본 일이 없고, 짐작컨대 어떤 사회에 가든지 저와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편일까 합니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 (1939년 10월)
이 "제소와 패소"라는 글은 하나님께 두 가지 따지자는 글이었다. 제 1소는 "그 비용을 저축했더라면 자녀교육에 염려 없을 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믿어지는 돈과 노력으로 "성서조선"을 발간해 왔으나 진정한 독자가 없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따진 것인데,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과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올시다"는 자답으로 패소하고 마는 내용이고, 제 2소는 위의 글에서 보듯이 일은 고되었지만 도리어 건강하게 되었다는 자답으로 역시 패소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렇게 바쁘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는 늘 자연의 즐거움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여유를 갖고 살았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예술적 기질의 단적인 표현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 의 일기의 거의 전부에 이런 마음의 여유가 보인다. 다음에 가장 대표적인 일기 하루분만 소개한다.
산기슭을 아침에 떠나 인쇄소 - 총독부 - 정릉리(원고) - 인쇄소 - 총독부 - 양정학교 - 인쇄소 - 북한산 기슭, 이렇게 뛰어 다녔다. 2월호의 정기일 발송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잡지 발송용의 겉봉을 쓰려니 어깨가 매우 오그라지는 듯 아팠다. 피로가 축적된 까닭인가? 사람의 비열하고 추잡한 일면을 보고 심화를 일으키다. 그래서 밤 10시경부터 동네 움집에 나가 자정 넘도록 한담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다시 달빛에 눈을 밟으면서 오전 2시 넘도록 시냇가를 오르내리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내 손에 일장검 짚은 것이 없으나 내 영혼이 별들을 향해 긴파람, 큰 한소리 아니하지 못한다. 건달이 도리어 호유하듯이 분망한 오늘밤에 시간적으로 크게 호유한 셈이다. (1939년 1월 31일[화], 맑음)
이렇게 바쁘고 갖가지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늘 자연의 미를 찾고 창조의 섭리를 음미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과 예술적 문장을 듬뿍 남겨 주었다. 그가 당시에는 인적 드문 북한산 기슭 정릉리에 거처를 정한 것도 이런 예술적 기질에서였다.
지사적 기질
그는 지사적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명문인 동경고사 출신이며 입신영달의 기회가 많았는데도 굳이 민족사학을 골라 교직에 투신한 것도, 또 수틀리면 그담둘 생각으로 언제나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것도, 또 그를 회유하기 위해 관립사범학교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꾄 총독부 학무국 관리에게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것도, 또 민족사학인 양정고보 재직시에도 감투 쓰기를 싫어하고 늘 '평교사'로 임하려 한 것도, 또 "성서조선" 독자 중세서도 소록도의 환자들을 가장 사랑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원조의 손길을 뻗친 것도, 또 학생들을 한치 한오리의 어김도 없이 명분대로 다스려 두 날이 다 시퍼렇게 선 '양칼'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도, 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위해서 뛰어든 것도 다 이런 지사적 기질의 표현이다. 신앙적 지사 최태용(崔泰瑢)을 찬미한 다음의 일기 한 토막이 그의 이런 기질을 웅변하고 있다.
오후 2시에 다니엘서 공부를 필하고 동일 오후 6시부터 최태용씨의 환영회를 본사에서 열다. 최형은 지금부터 16,7년 전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당시의 동창학우들과 같이 출세하였으면 현금은 상당한 지위나 재산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서 얻은 것이 없을 뿐더러 다소의 소유까지도 주 예수를 위해 없애버리고 지금은 '몸뚱이'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육탄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던짐이 되고자 한다.
예언자는 고향에 용납 안된다고 하지만, 조선에서도 전도사처럼 쓸쓸한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비행사가 고국을 방문할 때와 소녀가 공회당에 공연할 때와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서 귀국할 때에 민중들은 마치 구세주를 맞는 슷이 하였다마는 독립전도자 하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길바닥에서 아사한들 40만 경성부민에게 무슨 아픔이 되며 2천만 민족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1인보다 2천만이 가련하여 못 견딜 일이다. 반도에 기독교가 포교된 지 반세기에 처음으로 외국세력이나 조직, 기관 등에 의지함이 없이 조선 스스로가 비치는 전도자 하나가 섰다. 금후의 반도 영계에 처음으로 기골 있는 사람을 보리라. (1933년 6월 4일 [일])
김교신이 이렇게 찬양한 최태용은 뒤에 후꾸모도(福元唯信)로 창씨개명하고 앞장서 친일 훼절하여 그를 크게 실망시킨다. 당시의 관립고보 졸업생들이 총독부 식민지 관리나 되고, 판검사나 되고, 의사나 되어 세속적 행복을 구하며 개인적 입신영달을 꾀하는 모습에 언제나 분개하였다. 그의 일기의 도처에 이런 비판의 말이 나오고 있는데, 1934년 3월 15일자의 일기에는 그것이 아주 구체적,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강습소 선생을 구하는 데가 많지만 그 박봉을 감수할 사람이 없으며 농민학교 선생을 구하는데 농사의 경험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며, 중등학교 교사를 초빙하려 하여도 70원보다 80원, 80원보다 90원, 이렇게 월급을 계산하며, 또 도시로만 가기를 원하여 의주보다 평양, 평양보다 경성으로 쏠려 교육적 사명은 찾을 길이 없고, 사람들은 타인을 이용하려고만 들지 타인을 위해 일할 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러기에 '취직'이라 하면 '직무에 취임한다'는 뜻이 아니요, 먹을 것을 덮친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일자리는 많고 사람은 많이 필요한데 모두 자기 중심의 세속적 욕망만 채우고자 하고 있으니 어디 천거할 사람이 하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기도 했다.
소위 일류명사 또는 저명인사들을 대하기를 그는 아주 싫어했다. 물론 이승훈 선생처럼 신앙의 투사이자 서민적인 냄새가 피부로 느껴지는 분은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일한답시고 돈이나 거둬 자기 배나 채우고 글 쓴답시고 환상적인 꿈이나 비도덕적인 야욕장면이나 그려내고, 전도한답시고 부흥집회나 전문적으로 쫓아 다니며 일시적으로 종교적 감정이나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대전도사들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명사들을 비꼰 글이 1935년 3월 26일자 일기에 해학적인 필치로 담겨져 있다. 자기에게는 보약과 명사는 금물인데, 자기는 생래적으로 보약을 먹지 못할 팔자이고, 또 명사들을 대하면 흉금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사는 도리어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흉금이 열리는 사람들은 도리어 회개한 세리와 창기와 빈자와 병자들이라, 자신은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재야적 기질이 잘 담긴 말이다.
종교적 기질
선생은 종교적 기질이 풍부했다. 그가 종교가임이 이것을 증명하기에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도 여겨지나, 그의 종교적 기질은 직업적 종교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 특질을 역시 이 자리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종교적 기질이란 무엇인가? 우선 절대적 가치기준을 이 세상에서 구하지 않고 저 세상에다 두는 기질을 말하며, 또 모든 가치 및 활동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는 삶의 ㄱ 기본적 자세를 말한다 할 수 있다.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자 교육철학자였던 쉬프랑어는 "생의 형식"이란 명저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여석 가지로 유별하고, 이 여섯가지 작용 중에서 어느 작용이 그 사람에게 가장 힘차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적 특질 또는 인간 유형이 생긴다고 논하였는데, 우선 그 6가지 유형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실현,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정치적 유형, 2. 실용성, 물질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유형, 3. 환상적 자기세계, 새로운 미의 형식을 추구하는 심미적 유형, 4. 진리탐구, 우주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론적 유형, 5. 동포에의 봉사, 공동체에의 참여를 삶의 동기로 하는 사회적 유형, 6. 양심의 명령에의 순종, 신 또는 절대자에의 귀의를 기하는 종교적 유형이다.
그런데 쉬프랑어는 이 6가지 유형, 또는 6가지 유형의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종교적 가치라고 말했다. 이런 쉬프랑어의 분석에 덧붙여 종교적 기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요약, 정리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며 창조주의 부름에 귀의하며, 모든 가치를 이에 따르게 하는 삶의 기본적 자세라 할 수 있다. 김교신은 이런 관점에서 참으로 종교적 기질로 삶을 일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치 해바라기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보듯이! 그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기도 속에 살았는가는 그가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이웃 약사사(현재에는 봉국사로 잘 알려지고 있는 정릉동 소재 사찰) 계곡에 가서 냉수로 목욕하고, 스님들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자신도 기도, 찬송한 나날의 경건한 사색과 생활이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다음 두 일기가 그것을 또한 잘 말해 주고 있다.
오후 짙은 안개에 흐림. 우리가 보는 은하보다 5만배나 더 큰 은하가 발견되었다고. 그 세로는 5천만 광년, 가로는 2천만 광년인데, 우리 지구에서 1억만 광년의 거리에 서로 있다고. 우주는 크고 넓다. 하나님의 능과 지와 애를 누가 능히 헤아려 내랴. (1937년 11월 12일 [금])
새벽 5시의 우리 마당은 오리온좌로 차일을 하고 천랑으로 등을 달고 북한 연산으로써 병풍을 두룬 것 같다. 인생이 무엇이관대 그 머리 위의 하늘이 저다지도 찬란하고 그 좌우의 산령이 이다지도 엄숙한고! (1938년 10월 17일 [월], 쾌청)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격정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 무레사네 >(물에 산에)라는 등산 클럽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인 식물채집도 겸하여 학생들을 들로, 산으로, 바다로 인솔하고 다녔는데, 한번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진 북한산 계곡에서 어찌나 감동했는지, 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중에, "이놈들아, 너희들도 느껴라, 울어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창조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되어 울고픈 격정을 금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도 중추의 달이 유혹적이라고 서재를 뛰쳐나가 공중에 솟은 달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물 속에 잠긴 달을 굽어 찾기도 했고, 또 가을벌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면서, 이 은혜가 자기 혼자에게만 주어진 듯, 내 살림 오늘 하루도 이로써 족하도다 하면서 자정이 지나도록 하늘을 바라보며 환희에 젖기도 했다.
눈물이 헤푼 기질
슬픔이나 기쁨이 극에 다다를 때 우리는 운다. 그러나 이렇게 감동이 극에 다다를 경우란 우리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우리는 서러움이 북받칠 때 울기 쉽지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김교신은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고, 더욱 그것은 슬픔이나 기쁨보다는 어떤 순수한 강렬한 감동을 억누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라디오에서 심청전을 듣다가도, 자녀의 전학수속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도, 학업성적과 품행이 나쁜 학생을 타이르다가도,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다가도, 산에 가다가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1939년 5월 14일자 일기에는 새벽 4시 반에 깨어 시편 42, 43편을 주해하고자 정독하다가 감동되어 눈물로서 손수건 두 장을 다 적셔 버렸다고도 적고 있다. 다음에 눈물을 다룬 일기를 하나만 들어 본다.
등교 수업. 제 4,5학년 생도들은 오늘 저녁 8시 반 등교하여 밤 새면서 야외교련하게 되다. 귀도에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또 시내에서 미국유학생 모씨를 만다 그곳 소식을 많이 듣다. 산기슭에 돌아와 묘포를 김매고 거름주다. 저녁에 새로 두 시까지 원고 쓰기. 이번 10월호의 권두문은 눈물의 점철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소외 패소"를 쓸 동안은 여러 차례 펜을 던지고 호곡하였다. 인간인 나로서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고 형용할 것이나 신앙에 눈 뜬 때의 나는 은총이 내 잔에 넘쳐 소리쳤다.
이 양극의 조화된 감정을 무엇이라 형용해 내랴? 자정 지난 후 때때로 멀리 군가 들려 오니 밤새면서 행군하는 경성중등학교 생도 연합교련대가 경성 동부를 공략함인 듯. (1939년 9월 22일 [금] 맑음)
김교신 선생에게 경기중학교에서 배움을 받은 심리학자 김성태(金聖泰)는 선생님의 눈물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히 감격이 아니고,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몸소 느끼고 합일되어 그 참모습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안타까워하여 도맡아 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생각된다.
충무공도 좋은 경치, 밝은 달밤이면 이에 도취하여 슬퍼서 잠 못 이루는 대목이 그의 일기에 자주 나온다. 매슬로우(Maslow)는 황홀경이 그리고 외경의 감정이 합친 어떤 신비적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특징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아몰각적이고 초월적이며 자아향상을 느끼는 사람됨이라 하겠다. 유교에서는 의로운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는 성현의 인격의 특징을 호연지기가 충만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ㅑ 선생의 울음이 헤푼 성향은 단순한 그의 기질적 특성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선생이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직감하여 이에 몰입하였던 그의 인격의 진지한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닉가 본다.(외솔회 "나라사랑" 제 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 1974년, 87쪽)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이제 김교신 선생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일제시대 <성서조선>지의 주필, 한국 무교회주의 그룹의 걸출한 지도자, 손기정씨의 양정고보 시절 담임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성서를 한편으로는 조선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44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하는 열정으로 자신을 불살랐다. 그의 일기를 읽다보면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난다. 이미 읽었던 글이고 익히 아는 내용인데도 새삼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힘들고 둔해져 있을 때면 그의 글을 다시 손에 쥐곤 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살아있을 당시에는 실패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일기에서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그 날은 몸이 아픈데도 할 수 없이 교직원 정구대회에 선수로 뛴 날이었다. '응원단이 주는 과실과 샌드위치를 감식(甘食)하면서 생각하니, 10년 써도 샌드위치 한 조각 주는 사람 없는 성서조선 원고 쓰는 일보다 매우 유리한 듯 하다.' 그런가 하면 모 잡지사에서 온 '여성의 행복'이라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이유를 적고 있다. '10여 년 이래로 팔리지 않는 글만 써 오던 사람이 갑자기 팔릴 만한 문장을 쓸 수 없으니 우리 의견대로 인쇄한다면 잡지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생각하고 단념.'
나는 이런 일기를 그냥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깊은 고독이 가슴 저리도록 다가 왔기 때문이다. 힘들지만 새벽에 산에 올라 하나님께 부르짖고는 '성령의 큰 파도에 흔들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하산'하여 묵묵히 그 고독의 길을 다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동지의 위대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34년 동기성서연구회에서 있던 일이다.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김교신은 그 강의를 들으면서 '빛이 이 반도를 비춘 지 반세기에 비로소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반만년의 사관이 제시되었건만 2000만 중에 그것을 들은 자가 20명 미만이고 <성서조선>지를 통해 읽을 자 200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한탄하였다. 함석헌은 후에 자신을 '바보새'라고 칭했다고 한다. 새끼에게 먹을 것 하나 제대로 물어다 주지 못하는 실패자임을 한하면서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패자인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위대한 사람들인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별 볼일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중요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살았다. 김교신은 소록도의 나환자에게서 너무나 감동적인 서신을 받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손양원 목사님이 계신 부산의 한 병원 교회에서 그의 글을 통해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맛본 나환자 문신활은 동료 4명과 함께 김교신 선생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환자의 모습으로 참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서울에서 배회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소록도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돈이 없으니 무료로 <성서조선>지 1, 2 부를 좀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쓴 것이다. 이에 김교신은 '소록도의 나인들만이 우리의 문둥이요 우리는 저들의 문둥이다. 오 문둥아!'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우리 문둥아! 안심하고 요구하며 대담하게 명령하라. 주 예수로 인하여 나는 그대들의 종이다.'
우리 민족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던 5월을 넘기면서 과연 누가 성공자인가를 묻게 된다. 힘없는 자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들의 종으로 사는 사람! 아, 그렇게 성공하고 싶다!
박득훈 목사 : 기윤실 건강교회운동 운영위원장
근대 지리학과 현대지리학의 가교 역할
우리나라 지리학은 풍수지리 실학 지리지 편찬 지도 제작 등과 같이 조선시대의 전통지리로 맥을 이어왔으나 구한말에 전래된 근대지리학은 수용될 기회도 없이 일제강점으로 단절되고, 해방을 맞이한 후 바로 현대지리학의 다양한 조류에 편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을 메워주고, 현대지리학의 수용을 용이하게 한 근대지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최남선과 김교신이다.
최남선의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김교신에 대해서는 그의 종교적 업적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김교신은 자신의 종교관과 민족관, 그리고 그가 몸 바쳐온 지리교육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라는 논문을 쓴 지리학자이다. 이것은 1934년 <성서조선(聖書朝鮮)>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그의 지리사상과 조선에 대한 지리관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학 논문이다. 지리학자로서의 김교신을 그의 논문과 일기를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교신은 19세기 서구 지리학의 목적론적 사고에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지리학 사조와 맥을 같이한 진보적 지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이라는 땅을 두 가지 상이한 입장에서 접근했다. 그 하나는 땅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나온 감정적 접근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과학적 접근이다. 이러한 입장이 그가 기독교적 목적론에 바탕을 둔 서구의 근대 지리사상을 쉽게 수용하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김교신의 지리사상에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이 컸다. 우치무라 간조는 미국유학 당시 그곳에서 활동한 유럽 지리학자 기요(Guyot)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요는 "인류의 미래는 자연 그 자체 내에서 결정되어진다. 따라서 자연 즉 지구는 인간을 교육시키는 장(場)"이라고 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목적론적 결론을 도출한 지리학자이다.
김교신이 조선지리를 해석하는 기본 틀도 이와 거의 유사하지만 이러한 해석에 내재하고 있는 환경결정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연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20세기 초반이후 현대지리학의 새로운 사조인 가능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지리적 환경은 단지 주어진 것이고 인간이 선택적으로 이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역적 특성이 형성된다는 것이 가능론의 골격이다.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반도정체론에 대한 그의 반론의 바탕을 이룬다.
둘째, 김교신은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함에 있어서 정치지리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국가의 응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단위와 정치적 단위가 일치해야 된다라는 것이라던가, 조선의 위치와 정치적 운명의 관계를 역사라는 테두리 속에서 설명하려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조선지리소고"에서 위치와 관련된 조선의 운명에 대한 언급은 역사에 대한 지리적 축으로서의 조선반도의 위치를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영국의 정치지리학자 맥킨더(Mackinder)의 심장이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는 조선의 반도적 위치에 대하여 낙관적 해석을 했는데, 이는 일본의 압박을 당하는 조선민족을 계몽하고, 국토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한반도라는 위치를 효율적인 것으로 만들려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위치에 대한 자각과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서 만이 반도정체론의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그는 지리학 방법론으로 비교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적용하고 실천했다. 비교연구란 일반화를 추구하기에 앞서서 지역의 개별적인 양상을 조사한 후, 그것을 유사한 지역과 비교하여 일반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경험적 연구는 인간과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관찰을 전제로 하여, 인간과 자연이 결합된 총체와의 관련을 우연한 것으로부터 법칙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구체화시키는 데 목적을 둔다. 실제로 조선지리소고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조선의 지리적 특징을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기술했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일반 법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지리적 현상의 설명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 방법으로는 답사를 통해 관찰 조사하고, 간접적 방법으로는 대축척지도를 이용하고 분석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답사와 지도를 통해서 지리적 현상을 관찰하도록 지도했다. 현대지리학에서도 이러한 작업은 필수적 탐구 절차이다. 그래서 김교신은 양정고보에 재직하고 있을 때 '물에 산에'라는 답사반을 만들어 매주 일요일에 답사를 실시했고, 답사가 있었던 날에는 평생 써온 일기장에 '무레사네'라는 제목으로 답사지역과 내용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보더라도 그가 답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의 국토는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조선인의 정신이 이 땅에 깃들여 있고, 조선인의 마음, 조선 민족의 생활의 자취가 고스란히 국토 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조선의 국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답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답사의 또 다른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밖에 그의 지리학자로의 업적은 다양하나 결론적으로 그는 근대지리학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현대지리학 사조와 맥을 같이한 선구자적 지리학자였다. 한편 그는 계몽적 목표를 가지고 학생들로 하여금 국토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불러일으켜 애국애족 사상을 고취하려한 실천적 지리교육자였다. 지리학자로서, 그리고 지리교육자로서 그의 업적은 해방 후 한국 지리학계에 확산된 현대지리학의 다양한 접근 방법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된다고 본다.
이은숙 : 상명대 지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