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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강은영선생님의 회고록입니다. 그동안 혼자서 신문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서귀포의 옛모습을 그리워 하곤 했는데, 그런저런 옛모습이나 풍습들을 알아두면 해설사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되겠기에 글모음 란에 올립니다.-
어린 날의 추상(追想) - 4 | ||||||
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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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운동회 때 내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았던 강 선생님은 그때가 이십대 초반이었다. 선생님은 내 오빠들하고도 형님 아우 하는 선후배 사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어른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제주 교육을 책임지는 총수 자리에까지 오르셨다. 교육자의 길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신 선생님은 제주교육의 산 증인이시다. 인연은 참 묘하다고 할까. 선생님 부인이신 양 ○○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과정일 때(그때는 서귀포에 여학교가 없어서 여자 고등학원이라 했음)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이다. 두 분은 그때 부부의 연을 맺어 나도 선생님 결혼식에 참석 했었다. 또한 선생님 형님은 서귀중학교 3학년 때 내 담임 선생님이셨다. 음악 선생님이셨던 담임선생님은 타계 하셨지만, 초등학교 운동회 때 내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았던 선생님 내외분께는 같은 제주 하늘아래 살면서 아직까지도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다시 태어나도 교육자의 가겠다.고 하신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생님 가정에 언제나 무탈하심과 만수무강을 기원 드린다. 예전 서귀포 초등학교 앞은 거의가 논이었다. 가을이 되어 누렇게 익은 벼를 추수할 때면 5~6학년 어린 학생들도 벼 베기를 거들었다. 그런 일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나도 왼손에 한 움큼의 벼를 잡고 낫으로 벼를 베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낫질에 왼쪽 장지 손가락이 상처를 입었다. 누군가 얼른 논두렁의 쑥을 뜯어다 상처를 싸매주어 지혈은 했으나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우리 집도 시골의 논농사는 병작을 주었다. 벼를 수확하는 날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간다. 그때 소작인은 하얀 곤밥(쌀밥)에 고깃국을 끓이고 옥돔까지 구워서 지주(地主)들에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 당시엔 웬만큼 잘사는 집들도 쌀이 귀한 때라 주로 보리밥을 먹을 때였다. 아무거나 잘 먹지 않는 나를 어머니는 그런 때라도 흰 쌀밥을 먹이려고 했었을 게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중, 보릿고개를 겪은 이들이 제법 많았다. 나는 부모님 덕에 배를 곯아본 적은 없다. 병작은 주인과 소작인이 똑같이 나누는 제도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들에게 고생했다며 타작한 벼를 훨씬 더 많이 건네주었다. 그 넉넉함에 몇 번이나 고마워하는 그분들을 보며 내 마음도 흐뭇했다. 어머니의 그때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축축해지는 눈언저리가 떨려온다. | ||||||
첫댓글 정말 잘 올리셨어요. ~
저도 신문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서귀포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랬었구나 했어요.
말로 들었는데 글로도 읽으니 더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