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과 명월의 말이 나란히 걷는다. 풍악산(금강산의 가을 山名) 유람 길에 올랐다. 잠자리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양곡은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어젯밤의 서너 번의 방사로 기진맥진한 상태다. 명월도 사타구니가 얼얼하여 걷기조차 거북하지만 추호만치도 내색이 없다. 사내에게 지기 싫어서다. 또한 그녀는 사내를 맞을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 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여근속(女根谷)에서 백제군을 섬멸한 역사를상기시켰다.
양곡이 ‘30일 동거’ 후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여 특히 잠자리에 신경 쓰고 있다. 명월은 양곡의 ‘30일 동거’는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고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친구들한테 고백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개성에 온지 30일 후에 개선장군처럼 한양에 나타나 번듯한 요릿집에서 한턱내며 “나는 역시 인간이었다.”라고 일갈 하려는 배포를 무참히 꺾으려는 속내다. 가을의 금강산은 풍악산으로 불린다. 늦 단풍이 붉게 타고 있다. 바람이 쌀쌀하다. 어젯밤에 태상주 술기운에 둘은 밤새는 줄 모르고 욕심껏 육체의 향락을 즐겼음이 지금은 과욕이었다는 것을 둘은 한 몸처럼 느끼고 있다. 그들은 박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말고삐를 돌렸다.
명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녀 엊저녁에 대감께서 너무 깊이 사랑해 주셔서 더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풍악산은 다음에 구경하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감이 어떠하실 지요?” “그래도 되겠느냐?” 양곡은 방금 본인이 하려는 말을 명월이 대신해준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고 입에선 단내가 풀풀 풍겼다. 자칫하다가는 말 등에서 떨어질 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다. 하지만박연폭포까지 와서 그냥 바람처럼 떠나갈 명월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물줄기가 골짜기를 갈 듯 뿜어내니/ 용추에 떨어지는 백 길 물소리 우렁차라./ 솟아 내리는 물줄기 쏟아지는 은하수인가 싶고,/ 노한 듯 가로 드리운 물줄기 바로 흰 무지개일세./ 소쿠라지는 물벼락 온 골짜기에 가득하고,/ 물보라는 부서지는 옥인 양 갠 하늘에 사무치네./ 유람객이여, 여산폭포가 낫다는 말은 하지 마오./ 천마산의 박연폭포 우리나라의 으뜸이라오.’ 황진이의 《박연폭포》다.
그들은 풍악산으로 가려다 천마산의 박연폭포 늦가을 단풍에 취하여 있다 귀가 하였다. 그들의 온몸에선 늦가을 단풍향이 향수처럼 풍겨 나왔다. 명월의 특이한 선향(仙香 )과 단풍향이 어우러진 향이 양곡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구었다. 방에 들어서자 양곡은 명월을 힘껏 쓸어안았다. 양곡은 내일 한양으로 갈 몸이다. 명월은 양곡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뜨거운 입김엔 어젯밤 열정의 단내가 얼굴을 감쌌다. “명월이 나하고 한양에 가지 않으련? 개성보다 한양이 명월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예약연구를 더하여 이론을 만들어 놓으면 후세가 그것을 배우지 않겠느냐?” “소녀를 소실(小室)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초롱초롱하면서도 가을 호수같이 평온하였다.
표정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猛禽類)눈초리로 변하였다. “그런 뜻이 아니고 개성도 좋은 고장이고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이 있어 유명한 도시이긴 하지만 조선의 중심은 역시 대궐이 있는 한양이지. 그곳에 가서 명월의 명성을 더욱 높였으면하는 생각이지... 내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네!” “뜻은 고마우시나 소녀는 개성의 몸으로 태어나 고려여인의 이름을더럽히지 않으렵니다.” 명월의 진지함이 흡사 출사표를 던진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표정이다. “내 알았느니라... 너의 미색과 학식이면 한양에 가면 이곳보다 더 뜨겁고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의향을 물어본 것 뿐이니라...” 양곡의검은 마음을 첫마디에서 알아차렸다.
사내들은 마음에 드는 기생을 노류장화(路柳墻花) 쯤으로 보고 소실로 집에다 앉혀 놓으려는 심보를 명월은 숱한 사내들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던 것이다. 명월의 싸늘한 표정을 등 뒤로 느끼면서 양곡이 지필묵을 주섬주섬 챙겼다. “지금 떠나시려고요?” “가려하느니라...” 양곡답지 않은 풀죽은 목소리다.
명월은 말 등에 실린 거문고를 연두(몸종)에게 가져오라 하여 자신이 곡을 만든 곳을 타며 창을 불렀다.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 꽃잎이 날아가면 뒤 집에 떨어지나!/ 낙양에 사는 계집애들은/ 얼굴이 시들까봐/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긴 한숨을 내 쉰다네./ 금년에 핀 꽃지고 나면/ 얼굴 다시 여위리니/ 그 누가 와서 보여주리.’ 이백(李白)의 《늙음을 서러워하며》다.
명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와 거문고에 떨어졌다. 그때다. 명월을 젖먹이가 어미를 바라보듯 바라본 양곡이 갑자기 지필묵이 싸인 보따리를 들고 “진이야! 나를 예성강까지 배웅을 해주면 어떠하겠느냐?” 라는 말을등 뒤로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느새 해는 지고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의 하늘엔 벌레 먹은 사과모양의 달이 기우뚱하게 떴다. 말 두 필이 준비되었다. 양곡은 대명천지에 명월관을 나서고 싶지 않아 계획적으로 밤에 길을 나서는 것이다. “대감! 왜 제 기명인 명월을부르지 않으시고 본명인 진이를 부르셨습니까?” “기명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궁금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진이는 기명으로 부르는 것 보다 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려서 내 앞으로는 그리 부르기로 마음먹었느니라... 명월이란 기명은 너무 멋스럽고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쉽게 다다가기가 어려우니라. 하늘에 두둥실 떠 있으면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명월을 품을 수 있겠느냐? 앞으론 네 본명을 부르고 내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진이로 부르도록 입소문을낼 것이니라...” 그 후 명월이란 기명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예성강에 그들이 도착하자 나룻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다. “내 한양에 가 정무를 처리하고 곧 다시 올 것이니라.” 진이는왼손 약지의 은가락지를 뽑아 양곡에게 건넸다. 나룻배의 횃불이 강 건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한 진이는 밤이이슥해서야 명월관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