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45년(1960) 12월 20일 열반
‧ 원기 73년(1988) 대봉도 추서
#2일차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
‧ 1878년 10월 15일 경남 통영 출생
‧ 원기 8년(1923) 입문 출가(추정)
‧ 회상 초기 순교 / 수위단원 역임
‧ 법랍 37년
‧ 정식 법강항마위
‧ 원기 45년(1960) 12월 20일 열반
‧ 원기 73년(1988) 대봉도 추서
이타원 대봉도님의 생애를 보며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영남 지역 교화의 효시이시며 부산에서 저 두만강 넘어 만주까지 거침이 없으십니다^^;; 그 열정을 조금이나마 닮아가도록 합니다.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5편 법위 중>
출가위에 있어서 갑종 전무출신과 거진출진은 다름이 없이 모두 출가위이다. 그러나 재가에서 거진출진 하기란 더 어렵다. 출가는 전무(專務)했으므로 전체를 살핀다고 하나 재가하면서 전체를 살피고 전체에 미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두루 미치는가 안 미치는가 생각해 보라. 내가 어려서 정산 종사님과 주산종사님을 뵈오니 출가위이시더라. 교단 전체 일을 당신 일로 아시고 하시더라.
또 장적조·박사시화 할머니들도 생명을 내놓고 내 일로 알아서 하시더라. 좋으면 하고 낮으면 하지 않는 것은 출가가 아니다. 오해가 있더라도, 어느 부분의 일이라도, 버리지 않고 하는 것이 출가위이다.』
<이타원님 일화 소개>
부산교화의 효시인 이타원 장적조는 처음에 박창기의 중신을 서다가 종사님의 맏며느리로 점찍어 적극 추진하였다. 결혼을 성사시키고 나서 박광전-임영전 신혼부부에세 전무출신을 권유하였다. 그때부터 이타원은 세대전무출신을 구상한 것 같다.
박광전과 임영전의 결혼생활이 갓 시작된 어느 날, 장적조가 신혼부부에게 <전무출신 서원서>를 내라고 자꾸 부추겼다. 그래서 신혼부부는 직접 붓으로 전무출신 서원서를 두 장 작성해 조실을 찾아갔다.
그때, 종사님은 몸이 편찮아서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문을 들어서니 종사님이 “어떻게 왔냐”고 물어, 서원서 두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며 서원서를 열어본 종사님은
“응, 하나도 아니고 둘이가 다 한다고?”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허, 이런 경사가 어딨냐. 나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 이부자리 다 치워라”
얼마 뒤 영전의 전무출신 서원서는 반려됐다.
二陀圓 張寂照 大奉道는 1878년 10월 15일(음) 경남 통영에서 부친 장문중 선생과 모친 박 거창 여사의 11남매 중 둘째딸로 출생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타원 대봉도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고결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래서 성격이 남성적이고 활달하였다.
16세 되던 해 부모의 뜻을 따라 이웃 마을의 李氏 문중에 출가하여 풍족한 환경에서 10여년 을 지냈으나 남편과 이상이 맞지 않고 집안 살림의 구속에 묶여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구차스럽고 답답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를 원하였다.
30세 미만에 집을 떠난 이타원 대봉도는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때 10여년간 예수교와 보천교 등을 신앙하였다. 「훔치훔치 태을천상」을 외우며 강증산을 신봉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李萬甲의 소개로 봉래정사의 석두암에서 대종사를 뵙고 師弟之義를 맺었다.
다.
특별한 교직은 없었으나 혼자의 몸으로 원평․대구․부산․평양․청진․만주․서울 등을 순회하며 法音을 전하던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 그래서 그는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과 더불어 불법연구회 삼대여걸로 불리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십년 佛道를 신앙해 오던 양처사란 이가 불교의 타락상에 실망 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를 만나 열렬한 언사로 대종사의 말씀을 전하자 그는 감탄해 했다.
「어떻게 여자로서 이리 좋은 법을 설할까? 저 여자의 선생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양처사는 그 해 겨울 부산에서 총부까지 찾아와 대종사를 뵙고 석가세존을 뵈온 듯 감격하며 귀의하였다. 양처사란 바로 양원국으로 하단지부(현 당리교당)를 창립한 주인공이었다.
원평에서는 미륵불의 출세를 기다리는 많은 증산교인들을 계몽시켜 새 회상에 입문케 한 일 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구애가 없는 활달자재한 인품을 지녔다. 비록 여자의 몸이었으나 일체의 구속을 떨치고 대종사의 가르침을 전하는 使徒였다.
이타원 대봉도는 원기 16년 3월 여자수위단 坎方단원에 피선되어 대중의 신망을 받았다. 十 方一家의 살림을 위해 가정도 뒤로하고 험난한 길을 헤쳐 새 회상 불굴의 敎化者像을 보였던 二陀圓 張寂照 大奉道.
신병에도 불구하고 힘 미치는 대로 순교하면서 새 회상 창립의 높은 공덕을 쌓은 이타원 대 봉도는 혈심혈성의 굵고 큰 생애를 살다간 자랑스런 선진이었다.
원기 45년 12월 20일 노년의 수양을 즐기던 중앙수양원에서 많은 이들의 哀悼속에 거연히 열반했다.
원기 73년 9월 제124회 수위단회에서 2대말 聖業의 결산기를 맞아 그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 면서 大奉道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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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적조의 법명
장적조는 처음의 법명이 장풍(張風)이었다. 바람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돌아 다닌다는 뜻에서 준 이름이었다. 얼마 후 대종사는 다시 적조(寂照)라고 법명을 바꾸어 주었다. 너무 떠돌아 다니지만 말고 적적성성한 성품자리를 관조하라는 뜻에서였다.
교직 없는 순교무로
교직 없는 순교무로 각지를 돌며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일원대도 선양에 앞장선 개척자. 소태산대종사를 주세불로 받들며 한번 맺은 신의를 지키며 혈심혈성을 바친 이타원 장적조(二陀圓 張寂照,1878~1960)대봉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