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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아서
- 외국의 생명수탐색담 및 <니샨샤만>과의 비교연구
김 환 희*
1. 머리말
서사무가 <바리공주>는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사무가이다. 국문학자 홍태한이 네 권으로 편찬한 서사무가 바리공주 전집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부터 2004년까지 수집된 이본이 모두 88편에 이른다. 광포 서사무가인 <바리공주>는 현재도 ‘진오기굿’에서 구송되는 서사무가일 뿐만 아니라, 학자들이 “한국 신화의 지평”을 넓혀준 살아있는 신화, “가장 완벽한 스토리”를 갖춘 무가, “위대한 민족의 서사시”로 평가할 정도로 문화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민족의 문화유산이다.1) 하지만 <바리공주>는, 다른 서사무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무교(巫敎)를 연구한 여러 분야의 학자들--문화인류학자, 국문학자, 교육학자 등--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듯이,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인 무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선입관 때문일 것이다. 우리 옛 민중들의 신앙이었던 무교(巫敎)에 대한 편견이 싹트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무교를 천시했던 것, 일제강점기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의 무교를 미신타파정책으로 박해했던 것, 서구사상과 기독교의 유입으로 무교가 미신으로 간주되어 온 것 등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2)
이러한 편견은 최근 한국인들이 전통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문화유산의 계승 전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에 웅진출판사가 그림책으로 꾸며진 한국전래동화집에 <바리공주>를 넣어서 출간하였고, 1998년에는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바리」가 공연되었다. 또 1999년과 2000년에는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바리 잊혀진 자장가」와 국립극장의 총체극 「우루왕」이 무대에 올려졌다. 2000년 이후에는 장선우 감독과 박재동 화백이 「바리공주」를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 위해 <바리방>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실크로드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시인 김선우가 <바리공주>를 새롭게 고쳐 쓴 장편소설 바리공주를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독특한(?) 장르로 출간하였다. 또 지난 5년간 서정오를 비롯한 여러 동화작가들이 <바리공주>를 전래동화로 ‘다시쓰기’를 하였다.3)
이처럼, 오랫동안 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바리공주>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들이 최근 부쩍 늘어가는 추세이다. 이렇게 <바리공주>의 문화적․예술적 가치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리공주>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곤, 서대석, 김진영, 홍태한, 김헌선 등의 학자들은 전국 여러 지역의 강신무와 세습무가 구연한 <바리공주>를 수집하였고, 자신의 연구결과를 논문 또는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다. 하지만 <바리공주>에 대한 연구는 거의 국내에 전승되어 온 이본들의 비교연구에만 치우쳤을 따름이고 아직 비교문학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문학적인 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바리공주>가 지니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바리공주를 비교문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논문으로는 <바리데기>와 독일의 생명수 설화를 비교한 주종연의 논문4)과 내가 2002년에 발표한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본 <바리공주>와 서구유럽의 생명수 설화」라는 논문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5) 이 두 편의 논문 외에 <바리공주>를 만주신가(滿洲神歌)인 <니샨샤만>과 비교한 논문을 몇 편 더 발견할 수는 있다. 김헌선, 서대석, 곽진석이 그러한 비교연구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바리공주>와 <니샨샤만>이 유사한 서사구조를 지닌 저승여행담이라고 보았다.6)
주종연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문학자들의 비교연구가 <바리공주>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저승여행담에 국한된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대부분 한중일 삼국의 문화관계에 치우친 탓이 아닐까 싶다. 비교의 영역을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으로 확장한 학자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비교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국문학자들이 비교의 영역을 유럽과 러시아로 확장할 경우 훨씬 많은 유사설화를 발견할 수 있을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바리공주>가 우리나라 무당들의 조상신(祖上神)에 관한 설화라고 해서 국문학자들이 비교연구의 대상을 동북아시아 지역의 설화 및 무가에 국한시키고 있는 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방식은 <바리공주>의 서사구조가 여실히 보여주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소홀히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공주> 속에는 동북아시아지역의 무가에서 발견되는 저승여행담의 서사 구조와 유럽 및 러시아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생명수탐색담의 서사 구조가 모두 내재되어 있다. 국문학자들이 바리공주를 세계광포설화인 생명수탐색담과 비교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로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바리공주>와 유사한 생명수탐색담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대표적 민속학자 스티스 톰슨은 생명수탐색담이 아시아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톰슨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우리나라에 <바리공주>라는 생명수탐색담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7) 어쨌든 톰슨이 주장한 것처럼 아시아 지역에서 <바리공주>와 유사한 생명수탐색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이나 일본에 <바리공주>와 비슷한 생명수탐색담이 있을까 싶어서 영어와 우리말로 번역된 중국설화집을 여러 권 수집해서 읽어 보았고 일본의 대표적인 설화집도 두루 살펴보았다. 영어와 우리말로 번역된 중국설화 선집에서는 생명수 설화를 단 한편도 찾을 수 없었다. 일본설화의 경우, 일본 구비문학자들이 서구 유럽의 생명수 설화에 상응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설화가 있기는 하다. 일본학자들이 생명수탐색담으로 간주하는 <나라배 따기>와 <젊어지는 물>이라는 설화는 외국의 유사설화에 비해서 서사적인 완성도가 많이 부족하다.8) <나라배 따기> 설화에는 세 아들(딸)이 등장을 하는 데 그들은 병든 어머니가 깊은 산 속에 있는 신비한 배(山梨, なら梨)를 먹고 싶어 하자 차례차례 구약 여행을 떠난다. 선약을 구한 아들이 막내라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 생명수 설화와 유사하지만, 이야기 속에 형제간의 갈등이나 약수지기와의 만남과 결혼이라는 모티프가 등장하지 않는다. 또 <젊어지는 물>이라는 설화는 산에 갔다가 목이 말라 맑은 샘물을 마시고 젊어진 할아버지와 샘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아기가 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설화에 ‘신비의 물’이 등장하기는 해도 <바리공주>와는 서사구조가 확연히 다르다.9) 일본에 <바리공주> 내지 <바리데기>와 유사한 생명수탐색담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를 일본설화문학에 문외한인 내가 쉽사리 단정짓기는 힘든 문제이지만, 내가 조사한 자료에 의거해 볼 때,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리공주>는 이러한 일본의 설화보다도 또 만주신가 <니샨샤먼>보다도 유럽과 러시아의 생명수탐색담과 더 유사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10) 부친의 발병, 막내의 생명수 탐색 여행,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등장, 이성 약수지기와의 만남, 아이의 출산, 형들의 시기와 질투, 막내의 고난과 시련, 부친의 회복 등의 화소들은 <바리공주> 뿐만 아니라 유럽 및 러시아 지역의 생명수탐색담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바리공주와 유사한 생명수탐색담으로 내가 찾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모두 15편인데 한 편만이 하와이 전설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럽과 러시아의 설화들이다. 15편의 생명수탐색담을 국가별로 분류해 보면, 프랑스 1편, 이탈리아 1편, 아일랜드 3편, 스코틀랜드 3편, 러시아 3편, 독일 1편, 영국 1편, 그리스 1편, 하와이 1편 등이다.11) 하와이 설화 1편을 제외한다면 15편의 설화가 모두 유럽 문화권의 생명수 설화들이다. 그 가운데 절반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같은 켈트문화권에서 전승되어 온 설화들이다. 또 웨일즈와 그리스의 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찾는 영약이 생명수가 아니라 황금사과 또는 마법의 흙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나라의 설화도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생명수탐색담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같은 유형의 설화로 볼 수 있다.
<바리공주> 설화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설화를 가까운 일본에서도 발견하기 힘든데, 머나 먼 켈트 문화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대 유리 전문가이면서 고대 사학자인 요시미즈 츠네오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책에서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굴된 황금보검, 상감옥, 팔찌가 트라키아에 정착해 살고 있는 로마화한 켈트족의 왕이 선물한 것일 거라고 추정한다.12) 또 츠네오는 켈트족과 신라인이 교역을 하는 데 있어서 흉노가 중간 다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언뜻 생각하면 황당한 것 같지만 츠네오가 고대 유물과 세공법을 오랫동안 연구해서 얻은 결론이니만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츠네오의 추측대로 켈트족과 신라인들이 서로 교역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리공주>와 켈트 설화의 유사성을 우연의 일치로만 치부하기는 힘들다.
본 논문에서는 유럽의 켈트문화권, 러시아, 몽골 지역에서 수집된 생명수탐색담과 <바리공주>를 비교함으로써 <바리공주>가 지닌 세계적인 보편성과 한국적인 특수성을 탐색해 볼 생각이다. 아울러 <바리공주>와 <니샨샤만>에 대한 국문학자들의 비교연구도 살펴볼 생각이다.
2. 생명수탐색담의 보편적인 서사구조와 <바리공주>
<바리공주>를 외국의 생명수 설화와 구체적으로 비교하기 전에 아르네와 톰슨이 정리한 생명수탐색담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르네와 톰슨의 세계 설화 유형론에 따르면 생명수탐색담은 <유형 551 아버지를 위해 영약을 찾아 나선 아들들>(Type 551 The sons on a Quest for a Wonderful Remedy for their Father)에 해당하는 설화이다. 아르네와 톰슨은 <유형 551>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막내 자식이 독수리 (난쟁이)와 여러 마법적인 물건 덕분에 성공한다. 형제들이 영약을 빼앗아 가진다. 공주가 아이의 아버지를 찾는다.” 또 스티스 톰슨의 설화학원론(The Folktale)이라는 책에서는 생명수탐색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생명의 물>의 플롯은 병을 낫게 하는 마법의 물, 또는 다른 신비한 약을 찾아나서는 탐색에 대한 것이다. 병든 또는 앞을 볼 수 없는 왕은 세 아들을 탐색에 내보낸다. 다른 설화에서와 같이, 두 형은 동물들이나 노인에게 무례하고, 막내만이 친절하게 대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막내는 형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하게 된다. 막내 아들은 생명(또는 젊음)의 물을 얻을 뿐만 아니라, 마법의 정원에 도착하여 잠들어 있는 공주를 발견한다. 그는 공주 옆에 누웠다가, 떠나올때 그의 이름을 써서 남겨두고 돌아온다. 다른 설화에서처럼 형들이 그에게서 생명의 물을 빼앗고, 그를 우물이나 동물들의 굴 속에 쳐넣지만 여우나 늑대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공주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찾아온다. 형들의 술책을 극복하고서, 공주는 주인공을 발견하게 되고, 그와 결혼하게 된다.
즉, 생명수 설화에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화소로는 막내아들의 성공적인 구약여행, 조력자의 신물(神物), 형제의 배신, 아이의 탄생, 공주의 방문 및 결혼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스티스 톰슨은 이러한 유형의 설화가“아시아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북미와 남미에 모두 전해져 있다”고 말한다.13) 이는 <바리공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또 아르네와 톰슨은 <유형 551> 설화의 서사적인 구조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요목으로 정리하고 있다.14)
I. 탐색의 물건
병든(눈먼) 왕이 마법의 치료약 또는 청춘의 물을 찾아오라고 명한다.
II. 세 아들
세 왕자는 영약을 찾아 나선다. 두 형은 여행 중에 만난 동물(노파, 난쟁이)에게 불친절해서 영약을 구하지 못하지만 셋째 아들은 친절해서 동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III. 탐색의 성공
(1) 호의적인 동물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영웅은 마법의 정원에 이르고 그 곳에서 잠자는 공주를 만나서, 그녀 옆에 눕는다. 출발할 때에 자신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서 공주의 곁에 놓는다. (2) 그는 생명 (젊음)의 물을 구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다.
IV. 배신하는 형제들
(1) 영웅의 형들이 생명수를 훔치고 그를 우물 또는 늑대의 굴에 던져 넣는다.
(2) 그는 자신이 먹이를 준 늑대 또는 여우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헤쳐 나온다.
V. 대단원
공주는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형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자신을 찾아 온 공주와 결혼한다.
<바리공주>는 주인공이 여성 영웅이기 때문에 약수지기가 남성이 되었을 뿐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1937년에 일본인 학자가 처음으로 채록한 <바리공주> 무가이면서 오늘날의 굿판에서 구송되는 전승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재본을 중심으로 <바리공주>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조 시대의 어느 대왕이 강신무의 예언을 무시하고 폐길년에 결혼한 뒤에 여섯 공주를 낳는다. 중전이 신이한 태몽을 꾸어서 왕자일 것이라 기대하고 일곱째 아기를 잉태하였는 데 또 딸이었다. 분노한 대왕은 일곱째 공주를 후원에 버렸다가 까막까치의 도움으로 아기가 목숨을 연명하자 다시 아기를 옥함에 넣고 금거북 자물쇠를 채워 사해용왕에게 진상 보낸다. 아기는 유사강 까치여울 피바다에 버려졌다가 금거북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버려진 아기는 어느 천궁으로 보이는 바닷가에서 다달아 석가세존에게 구출된다. 하지만 석가세존 역시 여자이기 때문에 바리를 제자로 삼지 않고 떠돌이 비리공덕 할아비와 할미에게 맡긴다. 바리공주가 십오세가 되었을 때 대왕과 왕비는 병이 든다. 문복을 하니 무당은 양전마마가 한날 한시에 승하하리라고 예언한다. 병든 대왕의 꿈에 청의동자가 나타나서 하늘이 아는 아기를, 옥황상제가 점지한 아기를 버린 죄로 부부가 죽을 병에 걸린 것임을 알려주며, 살아나기 위해서는 버린 칠공주를 찾아다가 무상신 약려수 (봉내방장 무장승의 양현수)를 구해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왕은 바리공주를 찾도록 신하에게 명한다. 한 충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궁에 들어가 바리공주를 찾는다. 바리공주는 처음에는 부모를 만나러 가길 거절하나 결국 손가락에 떨어진 피를 합쳐 친자확인을 한 후에야 부모의 부름에 응한다. 바리공주는 부모를 대면한 뒤에, 여섯 언니들과 신하들이 가기를 거절한 서천서역국으로 약수를 구하러 남장을 하고 홀로 떠난다. 중도에 석가세존을 만나 영험한 신물(神物)인 라화를 받는다. 바리공주는 신물을 이용해 저승 세계의 여러 지옥을 통과하면서 많은 원령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고 서천서역국에 이른다. 무장신선(무장승)을 만나 약물 값으로 아홉해--나무하기 삼 년, 물 긷기 삼 년, 불 때기 삼 년--동안 일을 해주고 혼인을 한 후 아들 일곱을 낳아주고야 바리공주는 비로소 약수와 약꽃을 얻어 가족과 함께 병든 부모를 구하러 돌아온다. 이승으로 돌아오는 중에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여러 유형의 배를 만난다. 이승으로 돌아오니 이미 부모는 승하하여 상여가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리공주는 관을 열고 약수와 약꽃으로 부모를 회생시킨다. 회생한 국왕이 바리공주에게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해도 이를 거절하고 바리공주는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 만신의 인위왕 (인도국보살)이 된다.15)
이러한 줄거리를 지닌 배경재본과 2004년에 윤혜진이 구송한 「바리공주」는 관용구까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무가가 서로 유사하다.16) 또 1966년에 김태곤이 채록한 서울 지역의 강신무 문덕순의 「말미」를 살펴보아도 몇 대목이 다소 다르긴 해도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거의 동일하다. 즉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서울과 경기 지역 및 중부권 지역에서 강신무들의 <바리공주>는 서사적 전개와 구조가 거의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 같다. <바리공주>를 아르네와 톰슨이 언급한 <유형 551> 설화와 비교해 보면, 그 서사구조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인공과 배우자의 성별이 바뀌었고, 바리공주가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다를 뿐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또 동해안 지역의 <바리데기> 무가와 <유형551>의 서사구조를 비교하더라도, 약수지기가 반려자의 왕국을 방문한다는 화소만이 빠져있을 분 나머지는 유사하다. <바리공주>에서 'IV. 배신하는 형제들‘ 이라는 단락은 보편적인 서사구조에서 다소 벗어난 모습으로 전개된다. 대부분의 <바리공주> 무가에서 막내와 다른 자매들 사이에 갈등관계가 형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자매들이 <바리공주>를 의도적으로 배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해안 지역에서 전승되어 온 바리데기 무가 가운데는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에 대한 언니들의 적개심이 다른 나라의 생명수탐색담보다 더 지독하게 표출된 이본이 있기는 하다. 동해안 무당 송명희의 무가를 보면 언니들은 약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를 죽이라고 명한다. “저년을 당장 단 칼에 처참하라 하는데 그 나라의 시광이를 불러대네 옛날에 시광이라 하면 지금은 형무소 사형장 한 가지이듯이 옛날에도 죄인을 죽일 죄인을 죽이는 시광이라는 사람이 있는갑심더 사람을 죽이는 백정이 있는 갑심더 시광이를 불러다가 베리데기를 작두위에 올려 놓고 단칼에 처참하라는 어명을 내리니 시광이가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절하리오.” (바리공주전집2 175쪽). 언니들이 보이는 이러한 적개심은 바리데기 무가가 <유형 551> 설화와 같은 범주에 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3. 켈트 문화권의 생명수탐색담
외국 생명수 설화 가운데서 <바리공주> 또는 <바리데기> 무가와 가장 비슷한 설화는 유럽의 켈트 문화권과 러시아 지역에서 발견된다. <바리공주>와 가장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닌 설화들로는 아일랜드 신화 「에린 왕과 쓸쓸한 섬의 여왕」, 아일랜드 설화 「세상 끝의 우물」(더글라스 하이드의 채록본), 웨일즈 설화 「영국 왕과 세 아들」, 이탈리아 설화 「잠자는 여왕」 등을 꼽을 수 있다. 17) 「잠자는 여왕」은 이탈리아에서 채집된 설화이기는 하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왕과 <눈물 섬>의 백성들이 수면 상태에 빠지게 된 이유가 켈트의 대표적인 여신인 모르간 르 페이 (Morgan le Fay)의 마법 때문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켈트 문화권으로부터 유입된 설화라는 생각이 든다. 웨일즈 설화인 「영국 왕과 세 아들」의 경우에는 왕자가 부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찾아 나선 선약은 생명수가 아니라 황금사과이다. 하지만 선약이 황금사과라는 것이 다른 생명수탐색담과 다를 뿐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거의 동일하다. 이 네 편의 켈트 설화에 등장하는 공통적인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막내가 생명수를 구한 영웅이다.
(2) 노인 또는 노파가 조력자로 등장해서 신물(神物)을 준다.
(3) 조력자로부터 받은 신물 또는 액막이를 이용해 생명수가 있는 곳으로 간다.
(4) 영웅은 생명수(또는 황금사과)를 지키는 잠든 여인과 결합한다.
(5) 귀환길에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
(6) 구약 여행에 실패한 두 형들이 선약을 빼앗고 동생을 모함한다.
(7)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죽이거나 천민으로 만들려 한다.
(8) 잠든 여왕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낳은 아들을 발견한다.
(9) 잠든 여왕은 아들의 아버지를 찾아 원정길을 떠난다.
(10) 잠든 여왕의 방문으로 진실이 밝혀져서 막내는 부왕과 화해하고 형들 은 처벌받는다.
(11) 영웅은 왕권을 계승하지 않고 약수지기의 나라에서 산다.
(12) 금 또는 은 모티프가 등장한다.
이러한 화소들 가운데서 잠든 여왕을 무장승으로 바꾸어 이야기를 다시 꾸미면 켈트 생명수탐색담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바리공주>와 비슷해진다. 즉, 막내의 구약여행, 형제 간의 갈등, 무정한 아버지,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길안내, 조력자가 준 신물, 약수지기와 영웅의 결합, 아들의 출산, 고통 받는 존재의 구원, 약수지기와 아들의 여행, 금 또는 은 모티프 따위의 공통점을 <바리공주>와 켈트 생명수탐색담에서 두루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화소가 배열된 시간적인 순서 및 지엽적인 화소의 차이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부왕이 영웅을 버린 시기가 <바리공주>에서는 유아기라면 켈트 생명담에서는 선약을 구해 온 다음이다. 또 서울 지역의 <바리공주>에서는 언니들이 바리공주에 대한 적대감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영웅의 귀환과 약수지기의 방문이 <바리공주>에서는 동시에 일어난다면, 켈트 생명수탐색담에서는 시간적 간극을 두고 일어난다.
켈트 문화권의 생명수탐색담 가운데서 <바리공주>처럼 영웅 서사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설화는 「에린 왕과 쓸쓸한 섬의 여왕」이다.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은 대부분 부왕의 발병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영웅의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세 형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부왕이 어떻게 발병하게 되었는지, 세 왕자의 어머니는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바리공주>처럼 영웅의 탄생부터 상세히 기술하는 생명수탐색담을 외국의 설화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영웅의 탄생을 그린 외국 생명수탐색담으로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채록된 구전 신화 「에린 왕과 쓸쓸한 섬의 여왕」 단 한 편 뿐이다. 18) 이 설화는 주인공인 ‘쓸쓸한 섬의 왕자’의 신이한 출생과 성장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켈트 생명수탐색담 가운데서 서사적 완결성과 켈트족의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이야기이다. 「에린 왕」은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설화인데다 서사적인 구조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줄거리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에린 왕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해질 무렵에 흑돼지를 만난다. 하루 종일 아무 짐승도 잡지 못한 왕은 그 흑돼지를 따라서 언덕과 계곡과 해변을 누빈다. 흑돼지는 바다로 들어가자 왕은 목숨을 걸고 수영을 한 끝에 돼지가 사라 진 섬에 들어가게 된다. 황량한 섬에는 황금길이 깔려 있는 거대한 성이 있고 왕은 그 성의 벽난로에서 옷을 말리면서 테이블에 놓여 진 음식을 먹는다. 에린 왕은 황금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데 한 밤중에 어떤 여인이 들어온다. 그 여인은 질문을 해도 침묵만을 지킨다. 그 섬에는 드루이드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다. 해질 무렵에 난로 가에 앉아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이 나오고 밤에는 전날 만난 침묵하는 여인이 나타난다. 그 다음 날 왕은 전날에 본 정원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또 다른 정원을 보게 되고, 정원의 출구를 차지 못한 채 여행을 한다. 성에 돌아 온 왕에게 전날과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사흘 밤을 보낸 여인과 보낸 왕은 마침내 함께 잠을 잔 여인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여인은 자신이 왕을 유혹한 흑돼지이면서 ‘쓸쓸한 섬’의 여왕이라고 소개한다. 자신과 두 자매가 어느 드루이드의 마법에 걸려 있는 데, 에린 왕과 자신 사이에 태어날 때 왕자만이 구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왕은 ‘쓸쓸한 섬’의 여왕이 내주는 배를 타고 에린의 성으로 돌아가고, ‘쓸쓸한 섬’의 여왕은 9 개월 후에 아들을 낳는다. 여왕은 아들을 훌륭한 청년이 될 때까지 양육한다. 왕자는 매일 절반은 현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또 다른 절반은 드루이드의 마법 전술을 배운다. 어느 날 여왕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왕자에게 자신의 친구인 에린 왕이 에린을 침략한 스페인 왕과 전쟁을 하다 내일 죽기 때문에 너무 슬프다고 말한다.
‘쓸쓸한 섬’의 왕자는 어머니의 마법의 힘을 빌려 다음날 새벽에 에린 왕국에 도착한다. 왕자는 스페인 왕과 하루 휴전 협정을 맺은 후에 그 다음날 새벽부터 황혼까지 에린 땅을 침략한 스페인 왕과 그의 무수한 군사들을 홀홀 단신으로 싸워 물리친다. ‘쓸쓸한 섬’의 왕자가 에린의 성에서 베풀어지는 축하연에 참석하자 에린의 여왕은 옆방으로 끌고 가서 왕자에게 잠자는 약을 먹인 후 창문 밖 어두운 바다 속으로 밀어 버린다. 나흘 낮과 밤을 수영을 해서 겨우 바위 위에 이르게 된 왕자는 석달 동안 해조류를 먹으면서 연명하다가 지나가던 선박에 의해 구조되어 ‘쓸쓸한 섬’으로 돌아온다.
그 후 삼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왕자는 또 다시 에린 왕을 위해 싸우러 가게 된다. 왕자가 죽인 스페인 왕의 아들이 왕권을 계승한 다음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에린 왕을 죽이러 온 사실을 알고 ‘쓸쓸한 섬’의 여왕이 슬픔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왕자는 유쾌한 바람과 장어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리는 밤바다를 건너서f 에린의 땅에 도착한다. 스페인 왕과 하루 휴전 협정을 맺은 후에 그 다음날 새벽부터 황혼까지 스페인 왕과 부하들을 홀홀 단신 대적해서 모두 죽인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에린의 두 왕자들은 무서워서 숨어 버린다.
‘쓸쓸한 섬’의 왕자가 이기자 에린의 여왕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 싸워 이긴 것으로 말한다. 여왕은 닭 피를 입에 물은 채 침대에 누웠다가 피를 뱉고는 말한다. “내 심장에서 나온 피예요. 터버 틴티 여왕의 불타는 우물에서 길러온 물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어요.” ‘쓸쓸한 섬’의 왕자는 여왕의 두 아들이 같이 간다면 약물을 구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 젊은 왕자는 불타는 우물을 찾으러 동쪽을 향해 떠난다.
길을 떠난 왕자들은 황금대야에 머리를 담그고 황금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여인은 ‘쓸쓸한 섬’의 왕자에게 “어서 오거라. 내 누이동생의 아들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 래 딱하게도 이곳까지 왔단 말이냐.” 왕자는 터버 틴티의 물 세 병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모는 물을 구하려면 불의 강과 터버 틴티의 마법을 통과해야 되는 데 여태껏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고 조카의 여행을 만류한다. 여행의 위험성을 깨닫고 겁먹은 첫째 왕자는 중도에 포기하고 ‘쓸쓸한 섬’의 왕자는 둘째 왕자와 함께 떠난다. ‘쓸쓸한 섬’의 왕자는 황금대야에 머리를 담그고 황금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 큰 이모를 만나게 된다. 큰 이모는 그 여행을 만류하지만 조카가 듣지 않자 그 다음날 여행의 위험성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준다.
이모는 터버 틴티 섬의 여왕이 거대한 성에서 살고 있고, 각양 각색의 크기와 형태를 지닌 거인과 야수와 괴물로 이루어진 여왕의 군대가 성과 불타는 우물을 지키고 있다고 알려 준다. 이모는 여왕과 부하들에게 졸음이 찾아 와 한 번 잠이 들면 중간에 깨지 않고 칠년 동안 잔다는 사실, 성 안의 12 개의 방에 여왕의 시녀가 자고 13번째 방에 여왕이 잔다는 사실, 7년간의 잠에서 깨어나면 그 다음 칠년간은 깨어 있는 상태로 산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또 그들이 잠들어 있을 때 성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할 수 있지만 불의 강과 독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성에 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쓸쓸한 섬’의 왕자는 모든 새들을 불러 모으는 능력을 지닌 이모 덕분에 독수리를 통해 터버 틴티의 사람들이 전날 잠이 들기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된다. ‘쓸쓸한 섬’의 왕자는 이모의 조언을 따라서 마구간에서 이모가 준 굴레를 흔들 때 앞으로 나온 더러운 비루먹은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 사이 에린 여왕의 두번째 아들은 여행을 포기한다. 비루먹은 말은 ‘쓸쓸한 섬’의 왕자의 아버지가 에린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왕자는 말이 들려주는 조언대로 행동해서 불의 강과 독나무 숲을 무사히 통과한 후 바람의 속도로 달리는 말의 잔등에서 몸을 날려 열린 창문을 통해 성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간다.
그 성에서 잠들어 있는 거인과 야수와 괴물을 통과한 ‘쓸쓸한 섬’의 왕자는 아름다운 미인들이 누워서 자는 방을 차례차례 통과한 후에 13번째 방에 들어가서 황금 바퀴가 달린 황금 침대에 누워 자는 여왕을 발견한다. 이 방은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져서 휘황찬란한 빛이 가득하다. 왕자는 여왕의 황금 침대 발치에 놓인 불타는 우물을 발견 한 후 6일 낮과 밤을 여왕의 소파에서 지낸 후에 세 병에 약물을 담고는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먹고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쪽지를 남긴 채 성을 떠난다.
왕자는 다시 열린 창문을 통해서 비루먹은 말을 타고는 독나무 숲과 불의 강을 통과해 돌아온다. 이모의 집 가까이에 오자 말은 드루이드의 지팡이를 꺼내서 자신의 몸을 네 쪽으로 잘라달라고 부탁한다. 비루먹은 말은 자신은 마법에 걸린 네 명의 왕자가 변한 것이고 네 왕자들이 마법에서 풀려나면 ‘쓸쓸한 섬’의 왕자의 두 이모도 마법에서 풀려나기 때문에 함께 ‘쓸쓸한 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자는 말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네 왕자와 이모들을 마법에서 풀려나게 해 준다.
에린 왕의 첫째 왕자는 약수를 ‘쓸쓸한 섬’의 왕자로부터 빼앗아서 마치 자신이 구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쓸쓸한 섬’의 왕자는 이모와 함께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7년의 세월을 다시 보낸 어느 날 터버 틴티의 여왕은 깨어난다. 깨어난 여왕은 자신의 곁에서 놀고 있는 ‘이마에는 금과 뒤통수에는 은’을 지닌 아들을 발견한다. 분노에 사로잡힌 여왕은 맹인 현자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한 끝에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아들의 아버지를 찾아서 행렬이 7마일이 넘는 자신의 거대한 거인 군단과 호위대를 이끌고 에린 왕국으로 온다. 터버 틴티 여왕은 자신의 회색말을 이용해 에린의 두 왕자가 자신의 성에 들어 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 둘을 죽인다. 결국 에린 왕은 전령을 보내서 ‘쓸쓸한 섬’의 여왕과 왕자와 이모들을 에린 왕국으로 오게 한다. 자신의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낸 터버 틴티 여왕은 비단 허리띠로 에린의 여왕을 고문해서 첫째 왕자가 정원사의 아들이고 둘째 왕자가 양조장 주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백 받는다.
터버 틴티 여왕은 에린 왕에게 ‘쓸쓸한 섬’의 여왕과 결혼할 것을 제안하고, 두 쌍의 결혼식이 올려 진다. ‘쓸쓸한 섬’의 여왕은 에린 왕과 결혼해서 바닷가의 성에서 살고, 터버 틴티 여왕은 거인과 야수와 괴물을 드루이드 마법에서 풀어 준 다음에 ‘쓸쓸한 섬’의 왕자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간다. 여왕은 ‘쓸쓸한 섬’의 왕자를 터버 틴티의 왕이면서 황금 방의 군주가 되게 한다.
이 설화는 제레미어 커틴이 편찬한 아일랜드 신화와 민속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포함된 대부분의 설화들은 제레미어 커틴이 1887년에 아일랜드의 서부 지방에서 가서 채록한 이야기들이다. 커틴은 아일랜드 구전문학 전통이 소멸해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나머지 고대 아일랜드 언어인 게일어를 사용하는 이야기꾼들을 만날 수 있는 오지(奧地)로 직접 찾아가서 설화를 채록하였다. 커틴에게 게일어로 이야기를 들려 준 사람들은 영어를 모르거나 영어를 알더라도 조금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그가 채록한 설화는 켈트 구비문학의 전통을 잘 계승한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서구 생명수 설화의 줄거리가 단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린 왕」의 줄거리는 매우 복잡하다. 이 설화에는‘쓸쓸한 섬’의 왕자가 어떠한 부모 밑에서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또 누구로부터 교육을 받았는지가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어 영웅서사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물론 「에린 왕」의 서사적인 분위기, 서술적인 상황, 등장인물의 성격 등이 <바리공주>와는 매우 다르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서사적 디테일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린 왕」과 <바리공주> 의 근본적인 서사구조는 비교해 볼 만한 여러 공통점을 보여 준다.
우선 부모를 위해서 생명수를 구하러 떠난 영웅의 탄생과 성장과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드루이드의 마법에 걸려서 흑돼지로 변했던 ‘쓸쓸한 섬’의 여왕과 에린 왕의 사생아로 태어난 영웅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왕자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섬에서 드루이드(Druid)의 마법과 전술을 익히고 현자로부터 학문을 배우면서 영웅으로 성장한다.19) 이러한 출생과 성장과정은 바리공주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바리공주를 가졌을 때 중전은 황룡과 청룡을 비롯한 여러 신이한 동물이 등장하는 태몽을 꾸었고, 바리공주는 비리공덕 노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날짐승도 길짐승도 들어 올 수 없는”신비로운 공간에서 자란다. ‘쓸쓸한 섬’의 왕자와 바리공주는 모두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노현자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란 것이다. 신이한 출생, 아버지의 부재, 현자의 양육, 신비로운 공간에서 보낸 유년기 등의 화소가 양쪽 설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둘 다 가부장적인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부왕(父王)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자란 것이다.
「에린 왕」과 <바리공주> 가 지닌 또 다른 공통점은 영웅을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모두 부모라는 점이다. ‘쓸쓸한 섬’의 왕자가 성장했을 때 여왕은 아들을 두 번씩이나 사지로 내몬다. 여왕은 아들에게 에린 왕국으로 가서 막강한 스페인 군대를 물리치라고 요구한다. 왕자는 홀로 스페인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거두지만 에린 왕비의 계략에 속아서 바다에 빠진다. 왕자는 석 달 동안을 무인도에 표류해 홀로 살면서 해초로 연명하다 겨우 구조되어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지만 삼년 뒤에는 또 다시 전쟁터로 내몰린다. ‘쓸쓸한 섬’의 여왕은 에린 왕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비통해 하고, 그런 어머니를 보다 못한 아들은 전쟁터로 다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런 아들에게 “그럴 생각이면 바로 이 밤에 즉시 떠나거라”하고 말할 정도로 ‘쓸쓸한 섬’의 여왕은 비정한 어머니이다. ‘쓸쓸한 섬’의 왕자가 터버 틴티 우물의 약물을 구하기 위해서 험난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에린 왕비의 음흉한 계략 때문이다. 하지만 친어머니인 ‘쓸쓸한 섬’의 여왕이 에린 왕국의 안녕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왕자는 굳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에린 왕비를 위해 구약여행을 떠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쓸쓸한 섬’의 여왕이 아들을 사지로 내몬 것은 드루이드의 마법에 걸린 자신과 언니들이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쓸쓸한 섬’의 여왕이 에린 왕을 유혹한 것도 자신이 갖게 될 아들이 장차 언니들과 자기 자신을 구원해 줄 영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리공주의 부왕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십 오 년 전에 자신이 내다버린 칠공주를 다시 찾아서 저승이나 다름없는 서천서역국으로 가게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외에도 <바리공주>와 「에린 왕과 쓸쓸한 섬의 여왕」은 여러 유사성을 보여준다. ‘쓸쓸한 섬’의 왕자와 바리공주가 생명수 탐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조력자로부터 받은 신물(神物) 때문이었다. 바리공주는 석가세존으로부터 큰 바다와 지옥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해 줄 라화와 금주령(금지팡이)을 하사받고, ‘쓸쓸한 섬’의 왕자는 큰 이모로부터 불의 강과 독나무 숲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비루먹은 말’을 선물 받는다. 여성 영웅은 남성 조력자로부터, 또 남성 영웅은 여성 조력자로부터 죽음의 강 내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신물을 받은 것이다. 바리공주가 받은 금주령과 ‘쓸쓸한 섬’의 왕자가 받은 비루먹은 말은 모두 다 생명수의 세계로 가는 데 있어서 ‘탈것’의 역할을 한다. 또한 약물이 있는 ‘불타는 샘’을 찾기 위해 ‘쓸쓸한 섬’의 왕자가 떠난 방향은 동쪽이고, 바리공주가 무장승의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서 떠난 곳은 서쪽이다. 즉 서쪽에 위치한 켈트인들은 동쪽으로 가야 생명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동쪽에 위치한 우리 민족은 서쪽에 가야 생명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웅의 성(性)이 다르기 때문에 조력자의 성과 약물이 있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바리공주>와 <에린 왕>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서사 구조는 사진의 음화와 양화에 비유될 수 있는 그런 구조이다. 그리고 영웅이 생명수를 구한 후에 자신의 부모만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귀환 길에 고통받는 여러 영혼들을 구한다는 설정이 비슷하다. 바리공주는 저승 바다를 떠도는 혼령들이 극락왕생 할 수 있도록 축원을 드리고, ‘쓸쓸한 섬’의 왕자는 드루이드의 마법에 걸려 고통받는 여러 사람들--어머니와 이모들, 또 ‘비루먹은 말’로 변했던 네 명의 왕자들--을 구원해준다.
<바리공주>와 「에린의 왕」이 보여주는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양성적인 이미지가 이야기에 풍부하게 발견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금이 중요한 모티프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약수지기와 영웅의 결합으로 신성한 아이가 태어나고, 인물들이 양성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금, 결혼, 아이는 한국과 세계의 여러 문화상징사전과 분석심리학이론을 참조해 볼 때 모두 ‘양성성’ 내지 ‘자웅동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바리공주 무가에 등장하는 양성적인 상징물 내지 모티프--금거북, 금줄달린 은지게. 금주령, 금장군, 바리공주의 남성복장, 주인공의 양성성, 그리고 결혼--는 음양의 조화 내지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추구하는 무속적인 세계관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에서 음양의 조화 내지 여성성과 남성성의 합일을 가장 잘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물질은 ‘연금술의 금’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서구에서도 일차적으로는 금은 남성성, 태양, 불 등을 상징하고, 은은 여성성, 달, 물을 상징한다. 하지만, 분석심리학과 연금술의 상징체계에서 금의 상징성은 남성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석심리학자들은 중세 연금술사들이 추구하는 ‘연금술의 금‘을 ’보통의 금‘과 차별화하고 있다.20) 서구의 연금술사들은 서로 대립되는 속성의 물질--유황과 수은--을 통합해서 금을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의 금‘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할 때 옛이야기의 상징체계를 빌려서 여성과 남성의 성관계 또는 국왕과 왕비의 결혼으로 인해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따라서「에린의 왕」에 등장하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상징물은 양성성과 관계되는 모티프로서 인간 내면의 대극성이라 볼 수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불타는 샘'과 ’금 이마와 은 뒷머리를 가진 아이‘ 의 모티프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물과 은, 남성성을 상징하는 불과 금의 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기(自己)의 전일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 <바리공주>와 「에린 왕」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양성적인 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이다. 배경재가 구송한 <바리공주>를 보면, 무장승이 청혼을 할 때, “그대가 압흐로 보면 여자의 몸이 되여 보이고 뒤로 보면 국왕의 몸이 되여 보이니 그대하고 나하고 백년가약을 매저 일곱아들 산젼바더주고 가면 엇하뇨”라고 말한다 (서사무가 바리공주 전집, 142쪽). 문덕순본에서도 무장승은 청혼할 때 “석 삼년 아홉해 넌짓 되니 그대의 상이 남누하여 뵈아 앞으로는 국왕의 기상이요 뒤으로난 여인의 몸이니 그대와 날과 천상 배필이니 일곱 아들 산전 받아 주소”라고 말한다 (서사무가 바리공주 전집1, 170쪽). 즉 바리공주는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존재, 남성적인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쓸쓸한 섬‘의 왕자는 홀로 스페인 군단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영웅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영웅은 아니다. ‘쓸쓸한 섬’의 여왕인 자신의 어머니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효자일 뿐만 아니라, 마법에 걸린 이모들의 조언에 충실히 따르는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과는 대조적으로는 ‘불타는 우물’을 지키는 잠자는 미녀 터버 틴티 여왕은 깨어있을 때는 그 어떤 존재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호전적인 무사이다.
4. 러시아와 몽골의 생명수탐색담
러시아의 생명수탐색담은 켈트 문화권의 설화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비슷하다. 내가 찾은, 영어와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러시아 생명수 설화는 모두 세 편이다. 아파나세프가 쓴 「청춘의 물, 생명의 물, 죽음의 물」과 「대담한 기사, 청춘의 사과, 생명수」, 마샤 홀이 번역한 「청춘의 사과와 살아있는 물」이 그 세 편이다. 이 세 편의 설화 가운데 아파나세프의 「청춘의 물, 생명의 물, 죽음의 물」과 마샤 홀의 「청춘의 사과와 살아있는 물」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하다.
세 왕자가 병이 든 아버지를 위해서 생명수 (또는 청춘의 사과와 생명수)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두 형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구약 여행을 자진해서 포기한다. (또는 여행 중에 만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침대에 누웠다가 지하 감옥에 갇힌다). 셋째 왕자는 여자의 유혹을 이기고 바바야가의 도움을 받는다. 바바야가는 왕자에게 마법의 물건(약초와 공 또는 천리마)을 준다. 바바야가가 준 신물(神物) 덕분에 왕자는 생명수와 청춘의 사과가 있는 성에 무사히 도착한다. 성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군단이 자키고 있다. 여전사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선약을 훔친 셋째 왕자는 성의 지배자인 아름다운 처녀를 범한다 (또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그 처녀는 잠에서 깨어나서 왕자를 추격한다. 왕자를 따라 잡은 여전사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왕자를 죽이지만 왕자의 잘생긴 모습에 반해서 약물로 다시 살려 낸다. 왕자는 여전사의 청혼을 받아들인 후에 귀환 길에 오른다. (또는 왕자를 따라 잡은 여전사는 그와 하루 종일 전투를 벌인 후에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선약을 구해서 귀환 길에 오른 셋째 왕자는 도중에 위기에 처한 두 형을 구해 준다. 하지만 두 형은 막내 동생의 선약을 빼앗고는 그를 구덩이 (또는 골짜기)에 처넣는다. 깊은 골짜기 밑으로 떨어 진 왕자는 어느 지하 왕국에 이르게 된다. 폭풍우가 불고 천둥이 치는 어느 날 나무에 앉은 새끼 새들이 비를 맞고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왕자는 자신의 옷을 덮어 준다. 왕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한 어미새는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왕자의 소망을 들어 준다. 어미 새 덕분에 지상에 올라 온 왕자는 부왕에게 가서 진실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부왕은 형들의 말만 믿고 셋째 왕자를 추방한다(또는 왕자가 부왕에게 가지 않고 방랑의 삶을 택한다). 3년 뒤에 셋째 왕자와 정혼한 여전사가 쌍둥이 아들 둘과 군대를 이끌고 와서 부왕에게 생명수를 훔친 자를 내놓지 않으면 왕국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막내 동생을 음해한 두 왕자는 조카의 채찍에 맞아서 쫓겨나고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부왕은 막내아들을 다시 찾아 행복하게 산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러시아 생명수탐색담은 우리가 살펴 본 「에린 왕과 쓸쓸한 섬의 여왕」과 공통점이 많다. 셋째 왕자를 돕는 조력자가 나이든 여자이고, 신물(神物)로 말 또는 공이 등장을 하고, 약수지기가 잠든 여전사-여왕이고, 형들의 질투로 위기에 처하는 것 등이 동일하다. 러시아와 켈트 문화권의 생명수탐색담이 보이는 차이점을 들자면 여전사가 쌍둥이 아들을 낳은 것, 셋째 왕자가 형들의 계략에 속아 본의 아니게 지하왕국을 여행하게 된 것, 새끼 새를 구해주고 어미 새의 도움을 받은 것 등이다.
영어와 우리말로 소개된 몽골 설화집을 살펴보면 <바리공주>와 비슷한 생명수탐색담을 찾기 힘들다. 체렌소드놈의 몽골민간신화에는 다섯 편의 생명수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 데, 대부분 소나무, 잣나무, 노간주나무, 전나무와 같은 상록수 나무가 늘 푸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유래담이어서 <바리공주> 설화와는 이야기 구조가 전혀 다르다. 자식이 생명수를 구해 부모를 살리는 몽골설화로는 제레미어 커틴의 남 시베리아 여행--몽골인의 종교와 신화(1909)에 수록된 「훈쿠바이와 둥근머리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21) 생명수 모티프에 초점을 맞춰서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웅 훈쿠바이(Húnkuvai)는 칸이 잃어버린 둥근머리 말을 찾기 위해서 험란한 장정을 떠난다. 부르칸(Burkans) 신에게 기도해서 얻은 천마를 타고 훈쿠바이는 둥근머리 말을 훔친 티무르 칸의 나라로 가서 그와 무시무시한 결투를 벌인다. 그는 결투로 티무르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티무르의 생명이 있는 백산(Sehir Mai, White mountain)으로 간다. 백산의 기슭에는 생명수를 구하려다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해골이 놓여 있다. 천마의 도움으로 백산 꼭대기에 올라간 훈쿠바이는 생명수를 구한 후 그 수많은 해골을 소생시키고, 티무르의 생명이 들어 있는 13마리의 종달새들을 죽인다. 훈쿠바이는 칸의 둥근 머리 말을 되찾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샤만산에서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재산을 가로 챈 숙부를 만난다. 원정 중에 두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숙부로부터 전해들은 훈쿠바이는 그의 권유로 술을 마시다가 산 속에서 독살 당한다. 신이한 능력을 지닌 훈쿠바이의 아내는 남편이 살해당한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쌍둥이 아들들을 샤먼 산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의 밑둥치에 있는 구멍에 숨겨 놓는다. 훈쿠바이의 아내는 새끼 양 두마리를 불에 태운 후 뼈를 자루에 담아서 호수에 넣는다. 숙부가 쌍둥이 아들의 행방을 묻자 불태워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가 믿지 않자 호수로 데려 가서 불에 탄 양의 뼈를 보여 준다.
소나무 밑둥치 구멍 속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후라긴과 이스베긴--는 급속히 성장을 해서 활과 화살을 스스로 만들어 새와 토끼를 사냥해서 식량을 마련한다. 세번째 날에 73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망가타이를 만난다. 망가타이에게 살점을 뜯어 먹히고 있던 쌍둥이 형제를 지나가던 부자 상인이 구해준다. 상인은 80마리의 말을 망가타이에게 주고 쌍둥이 형제를 집으로 데려 와 양자로 삼는다. 쌍둥이 형제는 양아버지의 보살핌으로 힘센 영웅으로 성장을 한다. (중략) 두 형제는 위기에 빠진 토다이 칸의 나라를 구해주고 칸의 두 딸과 결혼을 한 후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쌍둥이는 자신들의 신분을 숨긴 채 어머니를 찾아 간다. 불구의 몸으로 하녀처럼 일하며 살아 온 어머니가 두 아들의 소식을 묻자 쌍둥이 형제는 시치미를 뚝 뗀 채 괴물에게 잡아먹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비보를 접하고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쌍둥이 형제가 아버지의 사악한 숙부와 그 가족을 처형하자 하늘에서 두 마리의 말과 마구가 내려온다. 쌍둥이는 부르칸 신에게 사흘 낮밤을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백산을 향해 북서쪽으로 떠난다. 백산에는 신비한 치유력을 지닌 생명수와 붉은 낙엽송이 있었다. 쌍둥이 형제는 산에서 사경을 헤매는 거대한 독수리 칸 헤르딕(Khan Herdik)를 만난다. 그들은 낙엽송 껍질과 생명수를 섞은 물을 뿌려서 독수리 대왕의 목숨을 구해준다. 집으로 돌아 온 형제는 죽은 어머니의 입 속에 낙엽송 껍질을 넣고 생명수를 뿌려서 어머니를 소생시킨다. 어머니는 다시 젊어지고 불구가 된 눈과 손과 발이 다시 치유된다.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에 대해서 알려주기를 망설이지만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려는 두 아들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후쿠바이의 원정(遠征)과 죽음이 기록된 책을 건네준다. 쌍둥이 형제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샤먼산을 향해서 간다. 이끼가 낀 아버지의 뼈를 수습한다. 형제는 아버지의 엄지 발가락뼈를 제외한 모든 뼈를 수습한다.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여우의 흔적을 발견하고, 여우가 발가락을 먹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여우는 늑대의 먹이가 되고, 그 늑대는 검은 곰의 먹이게 되고, 그 검은 곰은 호랑이의 먹이게 되고, 그 호랑이는 사자의 먹이가 되었다. 형제는 사자를 찾아서 죽이고 그 배에서 아버지의 엄지 발가락을 꺼낸다. 모든 뼈를 수습한 후에 생명수에 붉은 낙엽송 껍질을 빻아 만든 가루를 섞어 뿌린다. 생명수를 처음 뿌렸을 때는 아버지의 뼈에 살이 돋아나고, 두번째 뿌렸을 때 아버지는 마치 잠이 든 것 같았고, 세번째 뿌렸을 때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다.
두 쌍둥이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여러 날 축제를 벌인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훈쿠바이와 둥근머리 말」은 생명수 탐색이 설화의 중심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외국설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 몽골 설화는 다른 나라의 생명수탐색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이 몽골 설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바리공주 및 다른 생명수탐색담 속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홍익인간의 모습을 한다는 점이다. 훈쿠바이는 수많은 해골을 소생시켰고, 그의 쌍둥이 아들은 독수리 대왕을 구해 주고 죽은 부모를 소생시켰다. 둘째, 이 설화에서 생명수를 구해 부모를 살리는 영웅은 바리공주와 마찬가지로 생부와 생모 곁에서 자란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양부모의 품에서 자란 존재라는 점이다. 셋째, 부모의 생명을 구하는 데는 생명의 물(生命水)만으로는 부족하고 생명의 나무(生命樹)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여러 모티프--쌍둥이 형제, 죽어가는 새를 구원한 영웅, 생명수(生命樹)--는 앞서 살펴본 러시아 생명수 설화에도 등장하는 화소이다. 또 쌍둥이와 생명수(生命樹)라는 모티프는 서울지역의 <바리공주> 무가와 아주 관련이 없는 모티프는 아니다. 바리공주의 아들이 일곱 쌍둥이였고, 바리공주가 부모를 구할 때 사용한 영약이 생명수뿐만 아니라 숨살이꽃, 뼈살이꽃, 살살이꽃이라는 생명초였다는 사실이 몽골설화와 비슷하다. 특히 우리가 살펴 본 생명수 설화 가운데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을 살린 인물은 바리공주와 훈쿠바이 부자(夫子)들 뿐이다. 몽골인과 우리나라 옛사람들의 내세관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5. 만주신가 <니샨샤만>과 <바리공주>의 유사성 및 차이점
<바리공주>와 <니샨샤만>과의 유사성은 이미 여러 국문학자들이 충분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들의 견해를 간략히 정리해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성백인이 번역한 <니샨샤만>의 즐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22)
옛날에 로로라는 마을에 발두바얀이라는 부자가 살았다. 발두바얀은 15세 된 아들이 사냥에 나갔다가 죽은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다가 기자치성 드리고 선행을 한 끝에 나이 50세에 두 번째 아들을 낳게 된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서르구다이 피양고(막내)라고 지었다. 이 아들 역시 헝랑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죽고 만다. 비탄에 잠겨있는 발두바얀의 집에 허리가 굽은 늙은 노인이 나타나, 니샨이라는 여자무당이 재덕이 커서 죽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노인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발두바얀은 그 샤먼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발두바얀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젊은 무당 니샨에게 점괘를 보아달라고 청한다. 점괘를 본 니샨은 그의 아들이 짐승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염라대왕이 귀신을 보내서 아들의 혼을 데려 간 것이라고 말한다. 발두바얀이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하자, 니샨은 망설이다가 발두바얀의 집으로 굿을 하러 온다. 니샨은 남수고(男手敲)를 칠 신창인( 神唱人)인 ‘나리 피앙고’를 데려와 줄 것을 요청한다. 나리 피앙고의 북소리를 들으면서 니샨은 서르구다이 피앙고를 구하기 위해 닭과 개와 장과 종이를 어깨에 메고 저승여행을 떠난다.
니샨이 어느 하천에 도착했을 때 얼굴과 몸이 일그러진 사공이 독목선(獨木船)을 저으며 나타난다. 니샨의 명성을 알고 있던 절름발이 사공이 강을 건네주자, 니샨은 세 덩이 장과 세 뭉치 종이를 주면서 하천을 건넌 사람에 대해서 묻는다. 사공은‘몽골다이 낙추’라는 염라대왕의 친척이 서르구다이 피앙고의 혼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니샨은 다시 붉은 내가 있는 곳에 당도하게 되는 데, 그곳에는 나루터도 배도 사람 그림자도 없는 곳이다. 니샨은 신주(神主)에게 기도를 드린 후에 남수고(男手敲)를 물에 던져서 강을 건넌다. 강주인에게 세 덩이 장과 세 뭉치 종이를 공전으로 준다. 니샨은 관문을 지키는 철귀(鐵鬼 )와 혈귀(血鬼)에게 세 덩이 장(醬)과 세 뭉치 종이를 주고 또 다른 관문을 거친 후에 몽골다이 낙추를 만난다. 니샨은 낙추로부터 염라대왕이 서르구다이 피앙고를 자식삼아 키우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니샨은 주문을 외워서 큰 새를 불러내서 염라대왕의 성에서 놀고 있던 서르구다이 피앙고를 납치해 온다. 이 사실에 화가 난 염라대왕은 낙추를 꾸짖고, 낙추는 죄를 면하기 위해 니샨을 뒤좇아 가서 협상을 벌인다. 니샨은 염라대왕의 진노를 덜기 위해서 닭과 개를 낙추에게 주고, 낙추는 그 대가로 서르구다이 피앙고의 수명을 구십세로 늘려 준다.
니샨은 피앙고를 데리고 오다가 저승에서 가마에 불을 때고 있는 남편을 만난다. 기름 솥에 불을 때던 남편이 구해달라고 애걸하자, 니샨은 남편의 뼈와 살이 모두 부서져 구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남편이 앙심을 품자, 니샨은 큰 학을 시켜서 남편을 풍투성에 버린다. 니샨은 돌아오는 도중에 복신(福神)을 만나서 저승의 형벌과 법도를 전해듣고 저승세계의 여러 곳--생령(生靈)이 태어나는 곳, 죄인들이 머무는 풍투성, 선을 베푸는 자들이 가는 곳--을 구경한다. 니샨은 복신에게 인사를 한 후에 붉은 내(河)에 이르러, 내 주인에게 공전을 준 후에 남수고(男手敲)를 던져서 그것을 타고 내를 건넌다. 그 후 다시 절름발이 사공이 있는 나루터에 도착해서 독목선을 타고 귀가 한다.
발두바얀의 집에 니샨이 돌아 온 것을 안 신창인 (神唱人) 나리 피앙고는 스무 지개의 물을 니샨의 코언저리에 붓고 사십 통의 물을 얼굴 주위에 붓고 향을 잡아 빌어서 니샨을 깨운다. 깨어 난 니샨이 교설을 한 후 다시 쓰러지자 나리 피앙고는 향을 코 주위에 피워서 니샨을 다시 깨운다. 정신을 차린 니샨은 서르구다이 피앙고의 빈 몸에 혼을 불어 넣어서 회생시킨다. 회생한 서르구다이 피앙고는 물을 한 사발 달라고 해서 마신 후 ‘잠 한번 크게 자고 한참 동안 꿈을 꾸었소“라고 말한다.
그 후 니샨은 발두바얀으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고 큰 부자가 된다. 저승세계의 형벌과 법도를 본 니샨은 정직하고 공평하게 살지만, 자신이 남편을 구하지 않고 풍투성에 버린 사실을 전해들은 시어머니로 인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분노한 시어머니는 관원에게 고소하고, 니샨은 관원에게 자기가 한 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한다. 태종황제는 신모(神帽), 요령, 남수고 등을 가죽상자에 넣어서 철끈으로 묶은 후에 향촌의 우물에 버리라고 명한다. 서르구다이 피앙고는 선행을 베풀고 그 덕에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줄거리를 지닌 <니샨샤먼>은 신이한 능력을 지닌 여성이 저승세계를 여행한 후에 죽은 자를 살린다는 점에서 <바리공주>와 유사한 서사구조를 지녔다. <니샨샤만>과 <바리공주>를 비교한 대표적인 국문학자는 서대석이다. 서대석은 <니샨샤먼>과 <바리공주>의 공통점으로 “여성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 위하여 저승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서대석은 두 이야기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대해서 더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23) 첫 번째 차이점으로 서대석은 니샨이 무속서사시적인 인물이고, 바리공주가 영웅 서사시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즉 바리공주는 무당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위업을 달성한 데 비해서, 니샨은 자신의 신통력을 이용해서 염라대왕을 제압하고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점으로 서대석은 저승세계에서 만난 남편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니샨은 과부로 등장해서 저승에서 남편을 만나지만 그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고 풍투성에 던짐으로써 결혼과 출산을 거부한 여성인데 반해서, 바리공주는 처녀로 저승세계를 여행해서 약수를 지키는 신선과 결혼해서 여러 명의 아들을 낳은 여성으로서 결혼과 출산을 통해서 다산을 실현한 존재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서대석은 “<니샨샤먼>은 늙은 부모가 젊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로서 자연적인 질서를 중시한 사회 윤리를 반영하고 있는 데 비하여, <바리공주>는 어린 처녀가 늙은 부모를 살려내는 이야기로서 효행이라는 사회 윤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서대석이 지적한 이 세 가지 차이점 가운데서 두 번째 차이점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머지 견해에 대해서는 수긍하기가 힘들다. 우선 바리공주를 ‘보통의 인간’으로 본 그의 견해에 무리가 있다고 본다. 바리공주는 비리공덕 부부와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보통의 인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울 무가권의 <바리공주>를 보면, 바리공주가 어린 시절에 자란 곳은 날짐승도 길짐승도 들어오기 힘든 곳이었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글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상통천문 하달지리(上通天文 下達地理) 육도삼략(六韜三略) 모두 무불통지하여 모를 것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바리공주가 보이는 이러한 신이한 면모에 대해서 서대석 자신도 또 다른 논문에서 “바리공주가 스스로 타고난 초월적 능력이 있음을 의미하며, 신화적 영웅과 일치하는 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24) 또 바리공주는 약수를 구하러 서천서역국으로 여행을 할 때도 이미 무쇠 지팡이를 한 번 짚을 때마다 천 리를 갈 정도로 초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바리공주가 여행 중에 석가세존으로부터 낭화 (또는 라화)와 금주령이라는 신물(神物)을 받아서 바다를 건너고 지옥을 통과하기는 하지만, 바리공주는 지옥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을 왕생천도한다.25) 또 서대석은 세 번째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니샨샤먼>이 늙은 부모가 젊은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질서를 중시한 사회 윤리를 반영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생각할 나름이 아닐까 싶다. 이미 죽은 자의 혼을 이승으로 또 다시 데려 온다는 것을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적인 질서를 부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대석 이외에도 김헌선이 <바리공주>와 <니샨샤먼>을 비교한 적이 있다.26) 김헌선은 「<바리공주>의 여성신화적 성격 연구」라는 논문에서 <바리공주>와 <니샨샤먼>을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는 데, 텍스트 자체를 꼼꼼하게 읽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연구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하다. 텍스트를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양유수와 물통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김헌선은 두 서사시의 공통점으로 저승에서 돌아와 이승에서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내용을 거론하면서, “저승에서 가져온 양유수를 뿌려서 살리는 장면과 많은 물통을 가져와서 교설을 해서 죽은 이를 살리는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니샨샤먼>을 잘 읽어보면, 물통 때문에 깨어 난 자는 죽은 서르구다이 피앙고가 아니라 니샨 샤먼이기 때문이다. 남수고(男手敲)를 치면서 니샨의 저승 여행을 도왔던 신창인(神唱人) 나리 피앙고는 저승에서 이승으로 귀환한 니샨을 깨우기 위해서 물통의 물을 사용한 것이다. 서르구다이 피앙고를 소생시킬 때 니샨은 그 어떤 물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저승에서 데려 온 혼을 빈 몸에다 붙여 넣어 주었을 따름이다.
<니샨샤먼>과 <바리공주>에서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여성이 저승여행을 감행해서 죽은 자를 살려 냈다는 것과 이승과 저승을 왕래할 때에 물의 세계를 건넜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니샨은 저승여행을 할 때 절름발이 사공이 노를 젓는 독목선을 타고 강을 건너고 그 다음에는 남수고를 타고 붉은 하천을 건넌다. 또 바리공주는 부처님이 준 신물(神物)을 이용해서 바다를 육지로 만들면서 저승으로 가고, 그곳에서 다시 이승으로 올 때에도 황천강, 유사강, 피바다 등을 지나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만주인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모두 강 내지 바다를 건너야 저승세계를 간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저승세계에 가기 위해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것이기에 새삼 동북아시아의 특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 두 서사시에서 동북아시아적인 특성을 찾자면 죽은 자 또는 병든 자를 살리기 위해 저승 여행을 한 인물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프시케가 저승여행을 하기는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외에 다른 공통점으로는 산신령 내지 예언자의 이미지를 지닌 노인의 등장, 저승에 있는 남편과의 만남, 새 또는 동물의 조력 등을 들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화소들 역시 <니샨샤먼>과 <바리공주> 뿐만 아니라 외국의 많은 유사 설화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화소들이어서 동북아시아의 무속 서사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또 저승에서 니샨과 바리공주가 공통적으로 남편을 만나기는 했지만, 이 만남을 공통된 화소로 보기에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니샨은 저승에서 남편을 만났을 때 소생시켜달라는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풍투성으로 던져버리지만,27) 바리공주는 서천서역국에서 혼례를 올린 남편이 자신을 따라서 이승으로 온다고 할 때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니샨샤먼>과 <바리공주>을 비교할 때, 내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두 서사시가 담고 있는 영혼관과 세계관의 차이이다. 서대석과 김헌선은 니샨이 초월적인 조력자의 도움없이 자신의 주술과 보호령에 의해서 영혼을 구하고 염라대왕을 제압했기 때문에 니샨이 바리공주보다 초월적․주술적인 능력이 훨씬 크다고 보았다. 나로서는 이 두 학자의 견해에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는 니샨이 좀더 ‘보통의 인간’에 가깝고, 바리공주가 훨씬 초월적인 존재인 것 같다. 니샨이 뛰어난 주술적인 힘을 지닌 무당이라면, 바리공주는 초월성과 신성성과 자비심을 두루 갖춘 무조신(巫祖神)이다. 우선, 니샨은 저승여행을 시작할 때나 끝마칠 때나 남수고(男手敲)를 치는 나리 피앙고의 조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무당이다. 즉 니샨은 혼자의 힘으로 저승과 이승을 왕래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둘째, 니샨의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 저승의 강을 건널 때에도 절름발이 사공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니샨이 서르구다이 피앙고의 행방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 사공이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니샨은 저승세계에서 인간이 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끔찍스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구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고객이 의뢰한 영혼만을 이승에 데려 왔을 따름이다. 또 니샨이 이승에 돌아왔을 때 종래의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도 저승세계에서 혼령들이 자신의 죄에 따라서 어떠한 형벌을 받는 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 니샨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이기는 해도 지옥에서 신음하는 죄인의 고통을 덜어 주고 죽은 혼령을 극락왕생하도록 이끌 수 있는 신의 경지에 오른 자는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리공주는 지옥에서 신음하는 혼령, 떠도는 혼령을 구원할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바리공주가 석가세존으로부터 라화와 금주령을 받아서 큰 바다를 육지로 만들면서 홀로 저승세계에 이르렀다는 점과 지옥에서 라화를 흔들어서 모든 죄인을 구한 점을 고려할 때 바리공주야말로 지장보살에 버금가는 광대한 신통력을 지닌 ‘만신의 몸주’이다. 더군다나 주술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바리공주는 니샨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니샨은 죽은 지 오래된 남편이 살려달라고 했을 때 뼈와 살이 썩어서 살릴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바리공주는 서천서역국에서 얻어 온 약수와 약초로 죽은 지 오래 되어서 뼈와 살이 다 썩어 버린 아버지를 살려 낸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니샨과 바리공주의 인격과 삶이 매우 다르다. 서대석도 지적한 바이지만, 니샨은 남편을 풍투성이라는 지옥에 던져 버린 아이없는 여성이고, 바리공주는 저승세계에서 결혼한 남편과 일곱 아들을 데리고 이승으로 귀환할 정도로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여성이다. <니샨샤먼>에서는 니샨 샤먼과 가부장적인 사회는 극도의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그 갈등관계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다우르 족의 샤머니즘을 연구한 캐롤라인 험프리가 <니샨 샤먼>의 여러 이본들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니샨은 오만하고 까다롭고 대담하고 용기있는 인물이다. 특히 니샨은 당대의 사회적 규범에 강하게 저항한 주체적인 여성이다.28) 험프리는 니샨이 당대의 사회 규범을 거역한 양상을 다섯가지로 정리한다. 자신의 시어머니 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노인을 공경하지 않았고, 북을 치는 나리 피앙고와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성의 정조를 지키지 않았고,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을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지 않았고, 아이를 가져야 하는 여성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고, 저승에서 고통 받는 남편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 간의 신뢰를 저버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니샨은 가부장적인 사회질서를 거역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 간 현대적인 여성이라 평할 수는 있어도, 사회와 개인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좀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지닌 초월적인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바리공주>에도 강렬한 여성주의적인 요소를 읽을 수 있지만, 그 양상은 <니샨샤먼>과는 매우 다르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전승본을 보면, 바리공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부처의 제자도 될 수 없었다. 국왕의 자손으로 버림받은 바리공주는 대왕의 부름을 받고 쉽사리 응하지 않고 저항하고, 석가세존과 무장승에게 자신을 대군으로 소개하면서 그들이 규정한 성별의 차이를 무시한다. 하지만 바리공주와 일련의 초월적인 남성과의 대립관계는 구약여행을 통해서 극복이 된다.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낫게 하기 위해서 약수를 구하러 떠남으로써 부왕과 석가세존의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바꾸어 놓고, 남편인 무장승으로 하여금 아내의 나라에 오기 위해 별천지를 떠나게 만든다. 즉 바리공주는 자신을 핍박하고 버린 존재들을 ‘큰 마음’으로 껴안음으로써 그들을 변화시키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병들어 가는 사회를 치유해서 새롭고 풍요로운 사회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바리공주를 유교의 가치덕목인 효를 실천한 인물 , 그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신으로 좌정한 종속적 영웅으로 본 일부 학자들의 시각은 편협한 것 같다. 바리공주는 지옥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을 왕생천도하고 방황하는 혼령들을 극락왕생 시키기 위해서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모두 버린 존재이기에 ‘효의 화신’이 아니라 지장보살에 버금가는 ‘자비의 화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6. 맺음말: <바리공주>의 보편성과 특수성
외국의 생명수탐색담과 <바리공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화소로는 부모의 발병, 막내의 효행, 형제간의 반목,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등장, 유혹자인 약수지기(우물지기)와의 만남, 약수지기와의 결혼, 아들의 탄생, 귀환하는 영웅의 선행, 아버지의 처형명령, 약수지기의 방문, 그리고 부모의 회생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화소들은, 그 양상과 배열순서가 각 이야기마다 다르기는 해도 , 많은 생명수탐색담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있다. 각 문화권의 생명수탐색탐이 보여주는 이미지, 상징, 모티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텍스트를 치밀하게 대조하면서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상세하게 언급하기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문 또는 책을 통해 발표할 생각이다. 본 논문에서는 <바리공주>와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의 서사구조가 지니는 유사성과 상이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을 따름이다. 이 글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살펴본 자료를 바탕으로 <바리공주>와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특성과 <바리공주>가 지니는 한국적인 특수성에 대해서 몇 가지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자.
<바리공주>와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을 살펴보면 생명수 또한 선약을 구한 영웅들 가운데 상당수는 남자든 여자든 가부장적인 지배집단에서 소외된 인물들--사생아, 탕아, 바보, 버림받은 자식--로서 모두가 막내들이다. 바리공주 뿐만 아니라 생명수 설화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들이, 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부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 또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영웅과 약수지기들은 양성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남자들은 여성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고, 여자들은 남성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많은 영웅들이 생명수를 얻을 때에 약수지기인 이성(異性)과 성관계를 갖고 그 결과 아들을 낳는다. 결혼, 금, 아이와 같이 ‘양성성’ 내지 ‘자웅동체성’을 상징하는 모티프와 양성적인 이미지를 지닌 영웅이 생명수탐색담과 <바리공주> 에 보편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보편적 특성은 생명수탐색담과 <바리공주>에 인류의 집단무의식이 투영되어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인류의 문명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집단은 가부장적인 권위를 지닌 남성들이고, 그러한 사회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국왕이다. 그러한 국왕이 병들거나 시력을 상실해서 가부장적인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병든 국왕과 위기의 왕국을 치유해 줄 영웅들이 대부분 그 사회의 영향권 밖에서 자라거나 또는 그 사회 속으로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주변인들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분석심리학의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생명수를 구한 영웅들은 가부장적인 문명사회의 집단의식이 강요하는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기--아니마(anima, 남성 속의 여성성) 또는 아니무스(animus,여성 속의 남성성)--에 본능적으로 충실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생명수탐색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양성성의 모티프는, 문화적인 특수성이 낳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기초한 조선왕조와 서구사회의 심층구조 속에 똑같이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극을 초월해서 ‘자기 전일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열망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바리공주>가 보여주는 첫 번째 특수성으로는 구약여행을 감행한 인물이 여성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서구의 생명수탐색담의 영웅은 거의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병든 부모를 위해서 생명수를 구하는 딸에 관한 이야기로는 고작 스코틀랜드 설화 1편과 인도 설화를 1편을 발견할 수 있었을 따름인데, 두 설화는 모두 생명수탐색담의 보편적인 서사구조를 온전히 갖추고 있지 않다. 「어떤 우물의 물을 마시고 싶어 한 여왕」 이라는 스코틀랜드 설화에서는 어느 여왕이 병이 나자 자신의 세 공주를 시켜서 어떤 우물에 가서 약물을 길어 오라고 시킨다.29) 첫째와 둘째 공주는 각각 그 우물에 갔지만 그 곳에 사는 흉측한 개구리가 물을 길어 가고 싶으면 자신과 결혼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약물을 구해 오지 못한다. 셋째 공주는 개구리의 청혼을 받아들여서 약물을 구해 오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의 변이형에 해당된다.30) 여성이 생명수탐색담의 주인공인 또 다른 설화로는 인도의 뱀신 바수키의 딸 니왈 다이(Niwal Dai)에 관한 펀잡 지방의 전설이 있다.31) 바수키의 딸 니왈 다이는 나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병을 고쳐줄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서 신비의 우물로 여행한다. 니왈 다이도 바리공주와 마찬가지로 병든 아버지를 구할 생명수를 얻기 위해 그 우물의 주인과 결혼을 한다. 우물지기와의 결혼이라는 보편적인 화소가 이 두 설화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생명수탐색담으로 보기에는 보편적인 화소들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외국의 생명수탐색담 가운데서, <바리공주>처럼 여성 영웅이 다른 세계로 가서, 그것도 저승세계로 가서, 온갖 모험과 고초를 치루고 생명수를 구해오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바리공주>의 두 번째 특수성으로는 바리공주의 성품과 모험이 보여주는 비폭력성과 ‘음양의 조화’를 들 수 있다. 바리공주는 성품이 담대하고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인물은 아니다. 구약여행을 하면서 바리공주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그 어떤 살생도 하지 않는다. 서구 생명수탐색담의 영웅들의 경우, 여행을 하면서 거지 노파나 난쟁이에게 친절하고,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과 위기에 처한 새끼새를 구원해주는 선행을 베풀지만, 바리공주처럼 철저하게 비폭력적이지는 않다. 특히. 러시아 생명수 설화의 경우, 인물들의 호전성과 폭력성은 유난히 돋보인다. 구약여행을 하면서 셋째 왕자는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들 (거인, 사공, 용 등등)을 가차없이 죽이고, 약수지기 여왕도 군단을 이끌고 살상을 거침없이 행하는 무서운 여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영웅과 약수지기의 성적인 결합에 있어서도, 서구의 경우, 남성 영웅들이 생명수를 몰래 훔치고 잠든 약수지기 여왕을 겁탈하는 방식을 취하는 반면에, 바리공주와 무장승의 결합은 쌍방합의에 의해 평화롭고 조화롭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합궁은 한국의 무(巫)가 추구하는 바가 천지인(天地人)의 조화 내지 ‘조화로운 음양 질서’에 잘 부합된다. 이는 서구 생명수탐색담에서도 만주신가 <니샨샤먼>에서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한국적인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리공주>가 보여주는 세 번째 특수성으로는 바리공주가 논공행상으로 주어진 왕국을 사양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서울과 경기 지역의 강신무들이 구송한 여러 전승본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 난 대왕이 바리공주에게 “죽은 부모를 살렸으니 국가 반을 떼어주랴 만호봉을 내어주랴”하고 제의했을 때, 바리공주가 “국가 반도 나는 싫소 만호봉도 나는 싫소 소녀 부모 슬하에서 치럐를 모르고 호의호식 못하얏으니 만신의 인위왕이 되겠나이다.”라고 답변한다.32) 부왕이 주려는 왕국을 거절하는 대목은 동해안 지역의 세습무들이 전승해 온 <바리데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기에 이를 <바리공주>와 <바리데기> 모두에 나타나는 한국적인 특성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서구 유럽의 생명수 이야기 속의 영웅들이 대부분 성공적인 구약여행으로 주어진 왕국과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은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대왕의 제의를 거절하고 “만신의 인위왕”이 되고 싶다고 한 바리공주의 선언을 “이 세속세계의 왕보다도 강력한 저승의 사령과 신령의 왕이 되겠다”는 대단한 선언, “친부모에 대한 보살핌의 차원을 넘어선 깨우침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세계개혁자”의 선언이라고 보았다.33) 서울과 경기지역 전승본에서 나타난 이러한 바리공주의 면모는,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의 영웅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성이다. 국문학자들 중에는 <바리공주>에 나타난 효를 유교적인 가치관에 근거한 특수성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효’라는 주제는 <바리공주> 뿐만 아니라 외국의 생명수탐색담에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한국사회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빚어 낸 특수성으로 간주하기는 힘들다.34) 외국 생명수 설화와 차별화될 수 있는 <바리공주>의 독특한 특성은 ‘효행’보다는 오히려 ‘탈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리공주>를 외국의 유사설화와 비교하면서 내 나름대로 <바리공주>가 지니고 있는 세계적인 보편성과 한국적인 특수성을 가늠해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밝혀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바리공주>의 세계는 크고 깊고 울창한 숲과 같다. 우리가 그 숲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그 세계의 비밀을 더 잘 알기는커녕 오히려 그 신비에 압도당하게 된다. <바리공주> 에서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고 유럽과 러시아의 생명수탐색담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화소, 몽골과 만주의 샤머니즘 설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화소를 고루 찾아 볼 수 있다. <바리공주>의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유럽의 생명수탐색담과 비슷하고, 해골만 남은 시체를 생명수와 생명초로 소생시키는 바리공주의 신이한 능력은 몽골의 샤머니즘 설화를 연상시키고, 젊은 여성이 저승으로 내려가서 죽은 혼을 살리는 내용은 만주 신가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무당들의 조상신인 바리공주의 이야기 속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외국 문화의 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지 놀라운 일이다.
<바리공주>의 기원에 대해 알려 진 바가 없기 때문에는 우리는 <바리공주>가 상고시대부터 이 땅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 온 서사시인지,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설화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복합적으로 결합해서 지금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다. 바리공주가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서 간 ‘서천서역국’이 어디를 뜻하는 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수메르 신화를 전공한 어떤 학자는 서천서역국은 아라비아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속을 연구한 학자들은 서천서역국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저승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실크로드를 따라가면 바리공주가 여행한 서천서역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바리공주의 기원은 신라와 켈트문화권의 국제적인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는지 모른다.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켈트 문양으로 장식된 누금세공의 황금보검과 로마의 유리세공품은 중국문화가 신라에 유입되기 이전에 이미 신라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스텝루트를 통해서 켈트와 로마 문화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35) 요시미츠 츠네오는 “스텝 루트 동쪽으로 전해진 로마문화는 오늘날의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에서 우란우테를 돌아 산을 넘어 바라 발칸스에 이르고, 몽골 사막을 단숨에 남하하여 대동에 이르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향하다가 용성-평양을 경유하여 신라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 주장한다.36) 실제로 이러한 교류가 있었다면, 거꾸로 우리 문화가 비슷한 경로를 거쳐서 서쪽으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국제적인 교류란 쌍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신라와 켈트 문화권 사이에 활발한 예술품과 공예품의 교류가 있었다면, 설화의 교류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바리공주>를 구성하는 수수께끼같은 다양한 화소들은 그러한 국제적 교류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첫댓글 9월 금요월례토론회는 8일 저녁 7시 서울 혜화동 전국국어교과사무실에서 열립니다. 참가신청은 5일부터 받겠습니다. 발제문은, 읽는 데 시간이 걸릴 듯하여 미리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