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논어 集註」서설 원문과 해설
(孔子 一代記 : 기원전 551~479년)
史記世家曰 孔子名丘 字仲尼 其先宋人 父叔梁紇 母顔氏 以魯襄公 二十二年 庚戌之歲 十一月
庚子生孔子於魯昌平鄕郰邑
<직역> 사기세가에 가로대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라. 그 선대는 송나라 사람이라. 아버지는 숙량흘이오 어머니는 안씨이니, 노나라 양공 22년 경술년(기원전551년)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으셨다.
(梁 들보 량 紇 사람 이름 흘 郰<鄒> 고을<나라> 이름 추 )
<해설>
주자(1130~1200년)는 사마천의 사기(1)가운데 「孔子世家」를 인용하여 공자의 일생을 서술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는 본래 송나라에서 살았는데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孔父嘉)가 송나라 귀족인 내홍중(內訌中)에게 피살되자 4대조인 공방숙 대에 화를 피하여 노나라로 피신해왔다
공방숙의 아들이 백하이고, 백하의 아들이 공자의 아버지인 공흘이다. 字가 숙량이라 흔히 숙량흘이라고 부른다. 숙량흘은 귀족집안의 후손이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변변한 지위도 없었고, 부유하지도 못했다.
결혼하여 첫 아들을 두었으나 절름발이인지라(공자의 이복형이다. 논어 공야장편 1장에는 이복형의 딸을 제자인 남용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들 앞에 떳떳이 내세울 수가 없자 나이 60이 넘어 안징재(顔徵在)를 재취로 맞아들였다. 훗날 사마천은 이를 야합(野合)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이들 부부는 니구산(尼丘山)에 올라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정성 덕분이었는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 만세사표(萬世師表)이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는 공자이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었기에 이름을 구(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이었기에 字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공자의 탄생년도에 대해서 춘추좌전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여름 4월 기축일에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두예(杜預:晉나라 사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은 춘추좌씨 경전집해 저자)는 공자가 노나라 양공 22년(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73세를 살았다고 하고, 춘추공양전(公羊傳)과 춘추곡량전(穀梁傳)은 모두 공자의 출생을 양공 21년 을유년(己酉年:기원전 552년)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공자의 생몰년대(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사마천의 사기 「孔子世家」에 의거하고 있다.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 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직역> 어려서 놀이를 할 때에는 항상 제기를 늘어놓고 예용을 베풀었으며, 장성함에 위리(창고지기)가 되어서는 요량(회계)을 공평하게 하시고, 사직리(희생으로 쓸 牛羊을 맡아 기르는 관리)가 되어서는 (희생용 가축을)번성하게 기르셨느니라.
<사진 : 朱子 초상>
嬉 즐길 희 戱 놀 희, 장난할 희 俎 도마 조, 제사 때 희생을 올려놓는 대 俎豆 제사음식을 담는 굽 높은 제기 畜 쌓을 축, 여기서는 기를 휵 蕃 우거질 번, 많을 번 息 늘어날 식
<해설>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추읍 창평 고을을 떠나 지금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공자의 고택이 있는 궐리(闕里)로 이사하였다. 공자는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에는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흔히 ‘俎豆禮容(조두예용)’의 시기라고 한다.
공자 나이 17세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돌아가시자 공자는 아버지의 장례 때 수레를 끈 사람을 통해 노나라 서울 동쪽의 방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내어 어머니와 함께 합장하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난과 주변의 멸시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공자는 20대초에 대부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었는데 저울질과 회계 관리를 공평하게 잘하여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뒤 나라의 종묘제사에 쓸 희생(犧牲)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아서 잘 번성시킴에 따라 사람들의 공자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졌다.
吾少也賤故 多能鄙事 : 내가 젊을 적에 미천했으므로 비루한 일에 재능이 많았음이라. (論語 자한편 6장) |
참고로 세간에서 논어를 인용하여 공자가 창고지기와 가축 기르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 논어 본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맹자(만장하편 제5장)와 주자의 논어집주서설의 위 문장을 근거로 나온 얘기이다.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직역>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禮를 묻고 이윽고 돌아와서는 제자가 더욱 늘어났느니라.
<해설>워낙 공부를 좋아한 공자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좋은 스승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 배웠기에 공자 자신도 마침내 좋은 스승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학문은 관부에 있다(學在官府)’고 하여 귀족 관료들이 교육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처음으로 민간 차원에서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최초로 사학(私學)제도를 도입하여 공부의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행단강학(杏亶講學)’이다. 공자가 집 뜰 안에 있는 은행나무 밑에 강단을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한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 34세(기원전 518년)에 노나라 군주(昭公)의 허가 하에 제자인 남궁경숙(노나라의 3대 권력자인 맹손씨 가문)과 함께 주(周)나라로 찾아가 당시 학식이 높다고 소문난 노자(老聃:노담)를 방문하여 禮를 묻게 된 것(問禮老聃)도 공자의 好學과 문헌고증을 나타내주는 좋은 사례이다.
공자가 문헌고증 관련해 언급한 사례 (1) 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 (賢人학자들에 의해 口傳되어온) 하(夏)나라의 예(법규범)를 내가 말할(고증할) 수 있으나, (후대 제후국인) 기(杞)나라가 족히 증거하지 못하며, 은(殷)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후대 제후국인) 송(宋)나라가 족히 증거하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니, (문헌이) 족하다면 내가 (夏·殷나라 시절 행해졌던 법규범을) 증거할 수 있느니라. :「논어」 팔일편 9장
(2) 顔淵問爲邦 子曰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안연이 나라를 위한 일을 여줍자, 공자 가라사대 “(책력으로는) 하나라의 때를 행하며, (교통수단으로는)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관복으로는)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곧 소무(舜임금의 음악)이니라. :「논어」위영공편 10장
(3) 大哉라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 크도다, 성인의 도여! 넘실넘실 만물을 발육하여 높이 하늘에 이르렀도다. 넉넉하고 넉넉해서 크도다. 예의는 삼백편이고, 위의는 삼천편이로다. : 「중용」 27장
(4) 吾說夏禮 杞不足徵也 吾學殷禮 有宋存焉 吾學周禮 今用之 吾從周 내가 하나라 예를 설명하나 기나라가 족히 징험하지 못하고, 내가 은나라 예를 배웠으니 송나라가 보존함이 있거니와, 내가 주나라 예를 배웠으니 이제 쓰이는지라 (따라서)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 : 「중용」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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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주하사(柱下史, 주나라의 도서실을 맡아보던 관리)로서 주나라의 예절과 절도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기에 공자가 방문하여 예를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가(道家)쪽에서 노자가 공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내세우는 의미가 담긴 ‘공자문례(孔子問禮)’라는 말이 나왔다.
출처 : 「논어 易解」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