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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3.16 03:30
가야 문화의 일본 전파
▲ 대가야 양식 토기(왼쪽)와 일본에서 출토된 초기 스에키 토기(오른쪽). 스에키는 가야 토기의 영향이 컸어요. /국립중앙박물관·오사카부 문화재센터
일본 규슈국립박물관(九州國立博物館)에서는 오는 19일까지 '가야 특별전'을 열고 있어요. 이번 전시회는 일본에서 30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가야 유물전으로, 김해 대성동이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한 160여 점의 중요 유물을 선보이고 있어요. 또 가야를 비롯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던 모습을 소개하고 있죠. 가야와 일본 사이에 어떤 문화 교류가 있었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가야와 일본의 활발한 교류
일본에서는 가야를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환상의 나라'로 부르기도 해요. 가야는 3~6세기에 크게 번성해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당시 왜(倭)로 불리던 일본과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죠.
가야의 여러 소국이 자리한 낙동강 하류 지역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 열도와 인접해 있어서 한반도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일찍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이루어졌어요. 이를 증명하듯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방패나 화살통에 부착하는 청동제 장식을 비롯해 청동 화살촉 등 일본산 물건들이 출토됐어요. 또 고령이나 고성 지역에서는 일본에서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갑옷과 투구를 비롯해 규슈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형태의 돌방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어요.
가장 많은 일본산 유물은 일상생활 용기라 할 수 있는 하지키와 스에키 토기예요. 하지키는 적갈색 계통의 토기로 4세기부터 가야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요. 스에키는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단단한 재질의 도질(陶質)토기를 말하는데, 6세기가 돼서는 그것이 역으로 남해안의 주요 해상 교통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요. 가야 지도층뿐 아니라 여러 집단이 다양한 목적으로 일본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일본에 건너간 가야인들
사방이 바다로 막혀 있는 일본 열도에서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물건과 사람·정보가 들어와야만 거대한 기술 혁신이 가능했어요. 일본에서는 고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가리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의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르고 있지요.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 이주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적 자극과 사회의 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의 전달자로서만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국가 체제의 확립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어요.
5~6세기 가야에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교역을 목적으로 단기간에 왕래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했어요. 규슈를 비롯한 일본 각지의 여러 유적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돼요. 후쿠오카현 니시신마치(西新町) 유적에는 3~4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이 남아 있는데 부뚜막을 갖추고 있어요. 조리시설의 하나인 부뚜막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벽체를 따라 온돌 같은 난방시설을 함께 설치했죠. 이 주변에서 한반도 계통의 토기가 다수 출토됐어요. 이러한 부뚜막과 온돌, 한반도계 토기들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남긴 생활 흔적이에요.
움집 안에 있는 부뚜막에서 새로 등장한 요리 도구 중 하나가 '시루'입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린 시루는 찜 요리를 하는 데 사용돼요. 찜 요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호평받았고 시루는 순식간에 일본열도 전체로 확산됐죠. 일본으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당시 주거와 식생활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셈이에요.
가야 이주민이 가져다준 기술 혁신
가야 여러 지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은 토기 제작 기술이나 말을 타는 풍습, 차림새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를 불러왔어요. 가야 토기는 매우 단단해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고 물을 부어도 스며들지 않는 특징이 있어요. 가야 토기 제작 기술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5세기 초부터 스에키가 생산됐어요. 스에키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두드림판을 이용하는 기술, 가마를 만들고 운영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면의 정보가 필요했어요. 일본의 초기 스에키 생산에는 가야 이주민의 영향이 컸는데, 그들은 토기 제작에 직접 종사하거나 현지인을 지도했던 것 같아요.
가야 이주민들은 일본에 말과 소도 전해 줬어요. 군사력과도 직결되는 기마(騎馬) 문화는 일본 각지의 호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죠.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馬具)와 말 모양 하니와(埴輪·흙을 구워 만든 인형으로, 일본의 고분 주변에 세워둔 것), 벽화에 그려진 말 그림 등은 이를 잘 보여줘요. 말과 소를 길들이려면 사육 기술을 갖춘 사람과 각종 도구가 필요한데 일본 각지에 설치된 '목장' 주변에서는 한반도 계통의 토기나 마구가 다수 발견돼요. 말을 타는 데 필요한 안장이나 발걸이, 재갈뿐 아니라 말을 꾸미는 데 사용한 금 장식 드리개나 방울, 말갑옷과 말투구도 함께 발견됐는데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마구들과 비슷한 것이 많아요.
한반도에서 건너온 덩이쇠 같은 철 소재 역시 일본 각지로 전파됐어요. 가야에서 수입한 덩이쇠를 일본 현지에서 재가공해서 철제 농기구나 무기로 만들었고, 이것을 이용해서 땅을 개간하거나 무기를 확충하는 데 사용했어요. 그 밖에도 5~6세기 지방의 유력자 무덤에서는 대가야 계통의 금동관이나 금귀걸이들이 발견돼 가야의 공인들이 이주했거나 귀중품이 계속 수출됐음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
▲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왼쪽)과 일본 후쿠오카현 니혼마쓰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오른쪽). 5세기 후반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대가야의 금동관과 형태와 무늬가 비슷해 대가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져요. /국립중앙박물관·도교국립박물관
▲ 일본에서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말을 타기 시작했고, 고분 주변에도 말 모양 흙인형을 세우게 됐는데, 이 인형들을 모아 전시한 모습. /국립규슈박물관
▲ 일본 지바현 야마쿠라 1호 고분에서 발견된 도래인(渡來人) 흙인형. /국립규슈박물관
▲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덩이쇠. 이를 녹여 다른 철 제품을 만들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