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아카데미 원장 이정우 교수(42)의 철학적 영화읽기가 시작됩니다. ‘이정우와 함께 떠나는 SF여행’은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을 인문학적으로 분석, 영화감상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입니다. 재야철학자로 활동중인 이교수는 1994년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간의 얼굴’ ‘주름 갈래 울림’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편집자 도움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해적과 결혼하기까지 했던 에보시는 남편을 죽이고 자유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로마치 시대에 싹트고 있었던 새로운 테크놀로지, 즉 이시비야(火繩銃)의 제작을 익힘으로써 놀라운 힘을 획득한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힘을 낳고, 새로운 힘은 새로운 권력을 낳는다. 에보시는 이렇게 얻은 권력으로 일본 서쪽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그녀는 창녀들과 병자들을 비롯한 사회의 최하층민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새로운 갱생의 길을 마련해 줌으로써 강한 신뢰와 카리스마를 획득하며, 숲을 가로지르는 강둑에 거대한 타타라바(蹈場=제철공장)를 건설한다. 에보시는 산신(山神) 나고를 쫓아냄으로써 숲을 잠식해들어가 문명을 건설하며, 떠돌이 에보시로부터 에보시 ‘고젠(御前=여사)’으로 우뚝 서게 된다. 에보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배경으로 숱한 역경을 헤치고 적대적인 자연과 사회를 제압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전사(女戰士)이다.
#‘여걸과 악녀’ 모순된 두얼굴
사회라는 공간에서 여걸인 에보시가 자연이라는 공간에서는 악녀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존재가 두 공간에서 모순된 얼굴을 가진다는 것, 그것은 그 두 공간의 화해하기 힘든 모순관계를 드러낸다. ‘모노노케 히메’는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투쟁을, 그러나 그 공존의 가능성을 그린다. 들개 신, 멧돼지 신, 오랑우탕 신, 그리고 신들의 신인 사슴 신 등은 인간들에 대항하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 앞에 역부족이다. 화승총의 뜨거운 쇳덩어리가 그들의 몸속에 파고들어 뼛속까지 지질 때 그들은 타타리가미(災殃神)로 변해 인간에 대한 마지막 저항과 저주를 퍼붓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성립, 그 기술을 등에 업은 인간의 오만, 그 오만에 점차 자리를 뺏겨가는 숲속의 동물-신들, 이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 이렇게 ‘모노노케 히메’는 근세 초에 발생했던 자연과 인간의 투쟁을 경탄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한다.
에보시의 정반대편에는 산이 있다. 들개의 이빨을 피하기 위한 먹이로서 내던져진 산은 들개의 손에 의해 들개로서 길러진다. 산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세계로부터 내버려졌으며, 인간의 타자인 자연의 손에 의해 자연으로서 길러진다.
자연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인간에 의해 다시 그 자연으로 내버려진 존재, 산의 존재에는 이렇게 2중으로 기구한 역설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산은 들개 엄마 모로의 손에 의해 길러졌으며 숲의 고통을 배웠다.
산은 인간을 증오하게 되었고 특히 에보시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소녀, 자신들이 낳았고 또 버렸던 소녀를 ‘모노노케 히메(怨靈公主)’라 불렀다. ‘원령공주’는 사회 속으로 내던져졌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섰으며 그 힘으로 자연을 공격하는 에보시와, 자연 속으로 내던져졌으나 자연에 의해 길러졌으며 그래서 그 원한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산 사이에 팽팽하게 존재하는 화해할 길 없는 모순구도에서 출발한다.
#귀연은 귀연을 낳고, 악연은…
야마토 막부에게 패해 동쪽으로 밀려와 숨어살던 에미시 부족의 젊은 전사 아시타카는 어디에선가 흘러온 타타리가미(에보시의 화승총에 맞은 나고 대장)의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구한 대가로 이 재앙신의 독을 오른팔에 묻히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 서쪽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 아시타카의 운명은 무엇인가? 아시타카는 인간이지만 그의 몸에는 이미 재앙신의 독이 들어 있다. 그는 자연을 제압했지만 동시에 자연에 빚을 진 셈이다. 그의 내부에 이미 들어와버린 독은 외부의 자연을 물리친다고 해서 소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시타카가 이미 자연의 운명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점에서 아시타카는 2중체이다. 인간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자연의 독을 몸에 지님으로써 자연과 화해해야만 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시타카는 정확히 에보시와 산의 중간에 놓인다.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산을 중재할 수 있는 매개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생사를 놓고 투쟁하는 두 적대집단 사이에 들어가 그들에게 공존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중재자의 이야기이다.
아시타카는 에보시의 화승총에 재앙신으로 변한 멧돼지에게 부상을 입는다. 따라서 아시타카의 몸에는 에보시에서 유래하는 악연(惡緣)의 상처가 각인되어 있다. 귀연(貴緣)은 귀연을 낳고 악연은 악연을 낳는다. 어디에선가 악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그 불행의 연쇄는 이어진다. 아시타카는 이 악연의 연쇄를 끊는다. 에보시는 숲으로 깊이 들어가 시시가미(사슴 신)의 목을 치지만 모로의 이빨에 한 팔을 잃는다.
그 에보시를 구한 것은 바로 아시타카였다. 동시에 아시타카는 인간을 증오하는 산에게 ‘좋아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가능성을 심어준다. 이사타카는 혈혈단신으로 타타라바에 쳐들어온 산을 죽음에서 구해준다. 산은 아시타카를 통해서 자연친화적인 인간을 만나게 되며, 인간과의 공존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아시타카는 이렇게 에보시와 산 사이에 있던 증오의 고리를 늦추게 되며, 숲에 잠정적인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으며, 아시타카는 타타라바로 산은 숲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아시타카와 산(그리고 에보시)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멧돼지 떼들과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 목이 잘린 데이다라부치(시시가미)의 무서운 분노 등에서 증오와 원한이 얼룩진 자연의 모습이 섬뜩한 이미지들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가 일으킨 비극이 인간과 자연에 얼마나 공포스러운 역운(逆運)으로 다가오는가를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소개]문제의식과 빼어난 영상 호평-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1997)는 일본 만화영화의 대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俊)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이래 14년만에 내놓은 애니메이션 걸작이다. 자연과 인간의 모순 관계와 그 화해 가능성을 파고들었던 미야자키의 문제 의식 그리고 그의 빼어난 그림 솜씨가 집약된 작품으로서, 일본 만화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기도 하다. 올 가을에 국내에서도 개봉될 예정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