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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에이지와함께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하늘저편
/ 튈르리공원의 수잔 / 사진 / 59.5x50cm / 1974 /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에 대한 생각 / 송정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사람들의 발걸음은 제각기 다릅니다. 짙은 땅거미 속에 자기 그림자를 파묻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걷는 사람, 하루 동안의 미진한 결과를 털어버리려는 듯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잊고 싶은 것이 많은지 때 이른 음주로 비틀거리는 사람......
마치 새들이 둥지를 찾아 힙겹게 퍼덕이며 날아가는 모습처럼 저녁이면 우리는 저마다의 걸음새로 집을 찾아 꾸역꾸역 걸어갑니다.
그렇게 노곤한 몸을 이끌고 가는 귀갓길을 매우 잘 그려낸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을 포착한 스틸 컷입니다. 이 작품은 '파리보다 매혹적인, 이미지의 마술사'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사진작가 사라 문(Sarah Moon)의 흑백 사진<튈르리 공원의 수잔>입니다.
사라 문은 1941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영국에서 보낸 후, 열아홉 살 때부터 9년간 유럽에서 유명 모델로 활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모델을 거쳐 영화계에서도 대성할 거라며 입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 때인 1970년, 사라 문은 카메라 앞이 아닌 무대 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햇습니다. 단적인 화려함이 아닌, 다양한 깊이를 표현해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또 모델의 예쁘장한 얼굴보다는 그 이면의 아름다움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사라 문은 자기만의 예민하고도 영민한 감성을 바탕으로 피사체의 숨겨진 내면을 잡아낼 줄 아는 예술가가 되어갔습니다.
<튈르리 공원의 수잔>은 빛과 구도, 흑백의 톤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일치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의 마른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하나, 둘, 셋 간격을 둔 채 서 있고 그중 한 나무의 밑동 옆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하루를 보냈을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무 옆으로 휑하니 뚫린 길을, 한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갑니다. 축 처진 여인의 뒤로 강아지 한 마리가 조용히 따라붙습니다. 집은 아직 멀었고,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어깨엔 어쩔 도리가 없어 보이는 쓸쓸함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해결하지 못한 어떤 문제가 있기에 그리도 고민스러운 걸까요.
<튈르리 공원의 수잔>에서 수잔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왠지, 그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세상사에 무감해진 듯 공허한 두 눈, 약간의 후회와 부질없는 미련으로 앙다문 입술 그리고 안식과 위안이 절실한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마음으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사라 문은 촬영을 다시 한다든가 찍은 사진에 대해 수정을 가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찍고 싶은 장소의 빛과 구도에 대해 준비를 해둘 뿐입니다. 그러고 나면 순간을 포착할 일만 남게 되는데, 그 상태를 일러 사라 문은 '우연의 행복'이라 표현합니다. <튈르리 공원의 수잔> 역시 그 '우연의 행복'으로 탄생한 작품입니다. 어느 날 사라 문은 수잔이라는 모델과 일을 마친 후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길을 잃은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모델의 뒤를 따라갔고, 사라 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다시 우리의 일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공원에 놓인 의자들은 비어가고, 주택가의 창에는 하나 둘 불이 켜집니다. 귀소 본능을 가진 지상의 수많은 생명들 중 누군가는 튈르리 공원의 수잔처럼 고개 숙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는 궁금해할 것입니다.
사진 속 수잔은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감정과 만나는 그 귀갓길에서, 과연 행복했을까요?
누구나 영화나 소설 속의 '반전'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일종의 보상 심리 같은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의 대반전을 기다리고 내 삶의 대역전극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꿈이자 유혹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현명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 역전'도 좋지만, '인생의 여전함'이야말로 소중한 거라고.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일할 수 있고, 여전히 먹을 수 있고, 여전히 음악을 듣고, 여전히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행복임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언제나처럼 하루 해가 뉘엿뉘엿 지고, 다음 계절이 살금살금 찾아오는 현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데 우리는 그 점을 잘 모른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라 문이 <튈르리 공원의 수잔>을 찍을 수 있었던 '우연의 행복'과도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행복은 여전한 우리네 삶 속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기쁨과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그처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로부터 언제나 감동받지 않았던가요.
-『감동의 습관』(책읽는수요일, 20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