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갈등을 접고 감상을 버리고
이모와 나는 초저녁에 상정 아재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외할아버지가 입원하고 있는 동성로 정내과의원 입원실로 찾아 들었다. 거기에는 이모 복란이 아지매가 계셨다. 시청 새아재도 계셨다가 집으로 가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좀 전에 저녁 진지를 잡수셨고 복란이 아지매가 사과를 깎아 담아 드린 소반을 침상에 두고 아지매가 나무 이쑤시게로 찍어드리는 것을 받아 자시고 계셨다. 내가 할아버지 곁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나를 보시는 안색이 좀 평소와 달라보였다. 그래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곁에서 더 다가가서, “할아버지, 입원하시니 신관이 좀 나은 듯 합니다. 빨리 회춘하셔서 하시던 일을 하셔야지요.” 라고 인사말을 여쭈었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힐끗 한번 보시고 아무 말도 없고 그냥 사과만 잡숫고 계신다. 그래도 나는 별생각 없이 말씀을 드렸다. “할아버지, 저는 내일 밀양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잡숫던 사과 조각을 접시에 두고 매우 언짢으신 표정을 지으시고, “밀양은 왜?” 하고 물으셨다. 나는 말씀을 드렸다. “예, 겨울방학을 마치고 2월부터 학교를 「밀양고등공민학교」에 다니려고 그럽니다. 거기는 2학년이 있어서 제가 학년을 제 자리로 찾아 공부할 수 있어서 그럽니다.” 할아버지의 언성은 좀 높아지셨다. “그래 이눔아, 그럴 걸 왜 구지에 와서 1학년에 들었느냐. 이제 너그 식구를 구지에 모두 와 맡겨주고 있으니, 이제 너는 밀양에 되돌아가 네 마음대로 설치려고 그러냐! 네 할애비가 밀양에 갔다고 네도 따라 가느냐.”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몹시 황당했고 두 이모는 ‘이게 어쩐 일이냐.’는 듯 할아버지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보고 할 말을 잊고 있다. 어른의 말씀이기도 하고 더구나 절대 안정을 하셔야 하는 할아버지인지라 나도 어쩔 줄 몰랐다. 나는 황급히 말씀을 여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말씀대로 밀양에 안 가겠습니다. 내일 구지로 되돌아가겠습니다.” 나는 할아버지의 흥분을 다독거리려고 한 이 말이 더욱 부채질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허, 이놈이 면종복배까지 할 줄 아는가베.” 들으니 정말 기가 찼다. 나는 일단 병실로 나오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와 간호사실로 가서 담당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 선생, 〇호실인데요, 저의 할아버지가 저 때문에 화를 내시고 있는데 겁이 납니다. 빨리 안정하시도록 해주이소.” 라고 했다. 간호사 선생은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갔고, 병실에서는 이모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찾아 나오셨다. 나는 이모를 보자 왈칵 눈물이 나왔다. 이모를 붙잡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었다. 그냥 흑흑거리고 울고만 있었다. 이모는 나를 안고 등을 다독거리면서 말씀하셨다. “재구야,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구나.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가장 정들였던 손아래에게 화를 내고 어처구니없는 말로 싸움을 건다는구나. 그렇게 해서 정을 떼고 간다는구나. 할아버지는 평소 너에게 얼마나 많은 정을 두고 있는지 내가 잘 알지. 그 정을 떼버리고 훨훨 털고 가시려나보다.” 이 소리를 듣자 나는 참았던 울음이 통곡이 되어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이 길이 외할아버지와 마지막 길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나의 눈물은 멈출 도리가 없었다. 실제로 이 만남이 할아버지와는 마지막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그해, 1948년 7월 7일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가 오는 날 새벽에 구지면장의 사택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이때 밀양군당 당조직의 신경이라 할 수 있는 연락원으로 생사를 내 걸고 있었으며, 지금의 밀양시 상동면 도곡동 아지트에서 당시 「통일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연판장투쟁의 성과물을 모아 조직선으로 연결하는 일에 밤낮으로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이모는 병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셨다. “재구야, 간호사가 들어와서 주사를 하나 놓았고 흥분이 가라앉자 잠이 드셨다.” 그리고는 밝은 얼굴로, “할아버지도 편찮으시니 영판 어린아이 같네. 그렇게 야단이시더니 그만 잠이 들었네.” 나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할아버지 잠든 얼굴이나 잠시 보고 가자.” “그래 들어가 복란이 아지미도 보고 가야지.” 나와 이모는 문을 살짝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복란이 아지매는 나를 보고 방그레 웃는다. 언제나 말없이 방그레 웃는 미소로 마음을 전하는 우리 막내 이모. 할아버지는 숨소리도 고르게 잠드셨다. 아까와는 달리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이모와 나는 복란이 이모에게 말했다. “야가, 거창댁이 보낸 찬을 가지고 왔는데, 내일 내가 올 때 가지고 올게. 그러면 우리는 간다.” 아마 이모 둘은 서로 교대로 할아버지 병수발을 하는 것 같다. 시청 새아재를 꼭 뵙고 가야지. 이제 다시는 못 뵙게 될지도 모르니. 그래서 복란이 아지매에게 말했다. “작은 아지매, 내일 아침 일찍이 새아재 뵈려 갈게. 출근 전에.” “그래 우리집에 와서 새아재하고 아침을 함께 먹자. 같이 차릴게” 동인동 이모집으로 돌아왔더니 큰이모부가 계셨다. 나는 방에 들어가 절을 하고 밀양으로 돌아가게 된 일을 여쭙고, 곁에서 이모가 차려주는 다과를 먹으면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남조선 단독선거를 한다.’는 맨 그 소리였다. 새아재도 듣기 싫은 것 같다. 라디오를 껐다. 얼마 안되어 통행금지 예비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이층 형아 공부방으로 갔고 이모의 양딸인 삼순이가 요 이불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리고 좀 있자 더운물을 담은 탕파(湯婆)를 타월에 싸가지고 들어왔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 잠자리 발 측에 넣고 보던 책을 계속 보았다. 내일 아침 일찍이 시청 새아재집으로 갈 양이라 1시쯤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6시쯤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신암동 다리를 건너 신암동 파출소 옆 가스탱크로 가는 길로 들어갔다. 거기서 오른편으로 굽어들면 바로 복란이 아지매 내외가 의좋게 사는 살림집이 나온다. 대문에 붙은 요령을 흔들자 새아재가 마루 미닫이유리문을 열고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고 반가운 얼굴로 나의 인사를 받으신다. “새아재, 그 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너도 건강하냐.”, “예, 이처럼 힘이 넘칩니다.”, “허 허, 이 사람 갈수록 주접이 느는구나.” 이렇게 농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아침을 차리는 아지매에게 갔다. “배 고프제. 다 되었다.” 집은 가운데 마룻방을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양쪽 두 방은 원래는 다다미방인 것을 온돌방으로 만들었고 거실인 마룻방 가운데 화덕을 둔 일본식 집이다. 가운데 마룻방은 겨울에는 쓰지 않고 이런 저런 살림도구를 두고 있다. 원래는 그 곁에 있는 가스탱크회사 직원 사택인데 8.15해방 후 적산으로 되어 관리청에서 약간의 집세를 받고 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지매가 주방에서 상을 차리고 있는 동안 틈을 보아 나는 새아재에게 말했다. “이번에 「밀양고등공민학교」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좀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하려는 것입니다. 또 언제 뵈올지 몰라서 인사하러 왔습니다.” “알았다. 매사 조심하고. 우리가 할 말은 이밖에 더는 없지만, 만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말이 되는 게지.” 새아재는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지매가 상을 차렸고 좀 널찍한 상에 새아재와 나는 서로 마주보고, 아지매는 그 옆에 밥그릇 국그릇을 올려두고 셋이 둘러앉아 먹었다. 찬은 도축장 ‘장’답게 소갈비에다 소머리 국이다. 그래도 복란이 아지매답게 새큼한 동김치에 겨울초(겨울 시금치)나물 그리고 푹 삭은 김장김치에다 자질하지만 깔끔한 밑반찬이다. 아침 식사 후 새아재가 출근차림을 차리고 나오자 대문에 붙은 요령소리가 나고 몸이 튼실한 청년이 들어왔다. 출근길을 모실 지프차 운전기사이다. 그 청년은 나를 보고 의아한 듯 이모를 본다. 이모는 이질이라 했다. 나는 눈인사를 하고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 미소를 보낸다. 아마 새아재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하신 것 같았다. 새아재가 출근하시고 난 다음 아지매가 깎아주는 배와 사과를 좀 먹고 집을 나서려 하자 아지매도 병원으로 간다면서 따라 나왔다. 둘은 동인동 로터리에서 나는 바로 동인동 이모집으로, 아지매는 동성로 병원으로 갔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 더 뵙고 싶었으나 어제 일을 생각하고 발길을 멈추었고, 좀 섰다가 아지매에게 그냥 가라는 눈짓을 하고 얼굴을 돌렸다. 눈치 빠른 아지매는 무슨 짐작이 났던지 저만큼 가다가 되돌아보고 “재구야!”라고 불렀다. 나는 뒤돌아보고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지매는, “재구야! 조심하거라.”, “응!” 동인동 은행관사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눌렀더니 삼순이가 나왔다. “오빠 오나. 아침은?”, “신암동에서 먹었다.” 나는 물었다. “아지매는?”, “병원에 가셨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삼순이는, “아까, 아침에 고령에서 전화가 왔는데, 개실에 간 언니, 오빠들 오늘 일찍 온다더라.”, “그래!” “오빠, 시킬 일 있으면 이야기 해.”, “응,” 나는 이층 형 공부방에 들어갔다. 이불이 그냥 깔려있는데 손을 넣어보았더니 따뜻했다. 아마 삼순이 탕파에 더운물을 새로 갈아 넣은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삼순아, 고맙다.” 그리고는 형의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었다. 만사를 잊고 책 속에 빨려들었다. 스탈린의 「민족문제와 레닌주의」이다. 이제 이런 책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닐 수도 없는 세상이다. 당시 톨스토이가 쓴 책으로 유명한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책이 그 표지가 붉은색이었다. 어떤 친구가 그 책을 들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경찰지서 앞에서 검문에 걸렸다. 경찰 왈, “이거 빨갱이 책이구나. 너 빨갱이지!” 친구 왈, “아니요. 그 책은 빨갱이가 있기 전에 러시아의 대소설가 톨스토이가 쓴 유명한 책입니다.” 경찰 왈, “야, 러시아에다, 토머스가 아니라 톨스... 뭔가 하니 미국 책은 아니고 틀림없이 빨갱이 책이다. 이 새끼야, 이리 내려와!” 세상이 이처럼 변했다. 형에게 빌려달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그만 두기로 하고 읽기만 했다. 내일 오전까지는 다 읽을 수 있겠구나. 정오 사이렌이 불고 한 동안 지냈는데 삼순이가 와서, “오빠, 배고프지? 점심 차릴까?” “아니, 모두 온다는데. 오거든 같이 먹지.” 그리고 반 식경 못되어 대문 쪽에 부산한 소리가 들리고 복도를 쿵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오는가보다. 보고 있던 책을 엎어두고 나도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제일 먼저 눈이 똥골똥골한 작은 누이 영아다. 나를 보고 “재야 오빠!” 하고 달려든다. “아이구, 우리 영아.” 이때 영아는 4학년이었다. 내게 막 매달린다. 그리고 누나, 형이다. 그리고 아우 병성이다. 대번에 집이 시끌벅적해졌다. 누나가 주방에 들어가고 점심준비를 한다. 개실에서 가져온 찬거리와 우거지를 넣은 북어 국으로 점심상이 차려졌고 모두 두리반에 둘러앉게 되자 그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먹기에만 바쁘다. 아마 좀 늦은 점심이라서 배가 고팠는가 보다. 형과 누나는 점심을 마친 다음,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공부방에 들어와 좀 서성이다가 다녀올 때가 있다면서 나갔다. ‘곧 개학이라서 그 준비도 해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구나.’라고 생각나자, 나의 가슴 한 쪽에서 무언가 축축한 것이 스며왔고, 어제 할아버지와 있었던 일도 겹쳐, 그것이 물로 응결되는 듯 나의 눈가에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다짐을 했다. “아니야, 나는 지금 아무도 못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접고 버리고 가는 거야! 정신 차려! 너 민족 앞에 그 무슨 감상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