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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정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정계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개혁의 의지는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쪽과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역성혁명의 중심에는 고려 말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와 그와 뜻을 같이한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있었다.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 조선 왕조를 열었다. |
변방 출신의 무장, 반원정책의 물살을 타고 고려의 중앙 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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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지역의 세력, 심지어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택이었다.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데 일조하였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을 설치한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였다.
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조직은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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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을 물리치며 큰 공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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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쿠데타 드디어 권력의 정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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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왕조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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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은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였다. 이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하고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경험론이 반영된 숭유억불(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른다.),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주요한 경제적 바탕이 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농본주의, 그리고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 사상이 된 것이다.
사대주의는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편’의 '오직 어진 자가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고 오직 지혜로운 자가 능히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섬긴다 ...(중략)...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도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것이다.' 라는 글 중 ‘이소사대(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 以小事大)’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조선이 유학에서 최고로 치는 어진 자보다는 지혜로운 자라는 두 번째 자리를 택함으로써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성계가 세운 이 세 가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나라를 세운 뒤 이성계는 1394년 무학도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본거지인 개경을 벗어남으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너무 힘이 드세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하였다. 이 [경제육전]은 성종대 [경국대전]의 완성 이전까지 조선 초기 법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 500년간 기본 법전이 된 [경국대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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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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