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 앞 철길 부근에서 붙잡혀
증언자 : 고석남(남)
생년월일 : (당시나이 40대)
직 업 : 구멍가게(수퍼마켓)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20일 저녁에 조선대 병원과 철둑 길 사이로 걸어가다가 계엄군들한테 붙잡혀 옷을 발가벗기고 폭행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허리 이하가 약해졌으며 노동력이 상실되어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
시위대를 피해 가다가
아들 둘, 딸 하나를 두고 있는 나는 학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 조그마한 간장 대리점과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1980년 당시에 셋방 신세를 면해 보고자 살고 있던 집을 빚을 얻어 새로 짓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 집이 학동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5·18이 발생한 것과 이후 탄압의 소문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직접 간장을 배달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나가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20일은 계모임이 있던 날이었는데, 친목계 회원 모친 소상날과 겹쳤다. 그래서 방림동의 그 회원집에서 계를 치렀다. 우리는 통행금지 시간이 9시로 앞당겨졌기 때문에 8시경에 계모임을 끝냈다.
며칠간 계속되는 시위로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먹고살려면 효율적으로 시간 배분을 해서 하나라도 더 팔아야 했다. 통금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나는 서석동 명보분식에 가서 수금을 하고 주문을 받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학동 도로변으로 나와 보니 학동파출소가 습격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 앞에서 시위대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되도록 조용한 길을 따라가려고 도로변을 피해 서석동을 향한 철길을 걸어 올라갔다.
지금은 순환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렸지만 당시에는 조그마한 둑길만 있었을 뿐이었다. 철둑 길 주위에는 아카시아 숲이 우거져 있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이런 탓에 다른 길보다 유독 캄캄했다.
벌거숭이가 된 포로
한참을 조심스럽게 가고 있는데 아카시아 숲에서 계엄군 2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게 총을 겨누고 다짜고짜 양팔을 붙잡았다. 그들은 보초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림동 친구집에서 회원들간에 주고받았던 얘기들이 언뜻 머리를 스치면서 다릿심이 쫙 빠졌다. '이젠 죽는구나'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계엄군들은 나를 데모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너 데모하다 가는 길이지? 이 새끼 맛 좀 봐라."
군화발로 다리를 걷어차고 총구로 배를 툭툭 쳤다. 계엄군들의 언행과 폭행에 기가 막혔다. 슬리퍼 차림인 나를 보고 데모 참가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어른한테 거침없이 반말을 해댔다. 나는 데모는 대학생들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를 보고 데모 참가자라고 말하는 계엄군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붙잡은 것만으로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폭행은 하지 않고 조선대 치대 앞으로 끌고 갔다. 1백여 미터 정도 가다 보니 10여 명의 무장 계엄군들이 좁은 오르막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이들에게 나를 인계한 계엄군 두 명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빙 둘러서는 계엄군들의 눈빛을 마주 바라볼 수 없었다. 팬티 하나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으라는 계엄군들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벌거숭이가 된 나를 한가운데 세워놓고 '너 같은 새끼는 상무대로 보내 고생 좀 시켜야 한다'며 한꺼번에 달려든 군인들이 군화발로 곤봉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경황중에도 나는 '상무대로 보낸다'는 말이 더 겁났다. 영창으로 넘겨지면 개죽음당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 죄도 없는데 영창 신세를 져야 하다니 비통했다. 맞으면서도 머리 속은 빠져나갈 구실을 찾느라 고심했다. "노가다판에서 일하는데 이제 끝나 서석동 집엘 가는 길이오." 라고 하소연했다. 그렇지만 통하지 않았다. 처음 검문소와 마찬가지로 귀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도리어 그들은 나의 고통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을 때리다 힘들었던지 쉬어가면서 때리는 계엄군들의 얼굴에는 흐뭇해 하는 미소가 어렸다.
혼자서 한참 동안이나 이들의 샌드백이 되어 있을 때, 내 나이 또래의 남자 2명이 잡혀왔다. 그들도 나와 똑같이 옷을 벗은 뒤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무거운 짐 몇 개를 덜어낸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한쪽으로 몰아치던 매가 세 갈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가벼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계엄군들 앞에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죄를 실토하는 고문을 당하였다. 죄를 부인하면 계속 구타당했다. 그렇다고 죄를 뒤집어쓸 수도 없었다. 더욱 공포스런 영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리는 도중에 전라도 담양이 고향이라고 강조한 어느 계엄군은 유달리 혹독하게 굴었다. '경상도 공수대원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인다'는 며칠간의 소문을 뒤엎기라도 하려는 듯이.
12시경이 다 되어서야 데모를 하지 않았다는 자백이 먹혀 들어갔는지 그들은 일어나서 소지품을 챙기라고 했다. 그러나 순순히 보내기가 아쉬웠던지 우리에게 다짐했다.
"계속 데모할래, 안 할래?"
"나이 먹은 내가 하것소?"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며 또다시 구타했다. 그러고 나서야 풀어주었다. 나와 두 남자는 처음 잡힌 검문소까지 팬티만 입은 채 맨발로 걸었다. 만족할 만큼 폭행을 했다는 듯 그들은 친절하게도 보초가 있는 곳까지 옷입고 가면 다른 사람인 줄 알고 다시 붙잡힐 줄 모르니 옷을 벗고 가라고 가르쳐주었다. 걸어가는 동안 꿇어앉은 다리가 약간 저린 것 외에는 통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긴장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구타 후유증으로 노동력 상실
나를 본 아내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방에 들어가려고 신발을 벗으니 잘 벗어지지 않았다. 그때야 오른쪽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신발에 고여 있는 것을 알았다. 오른쪽 무릎 바로 밑이었다. 온몸 또한 피멍이 들어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셔댔다.
병원비가 없어서 집 부근 약국에서 약을 사다 치료했다. 대검으로 찔린 것도 아니고 총알에 맞은 것도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서 누워 생활한 지 1주일이 지나자 옆구리가 심하게 결렸다. 통증으로 숨쉬기가 곤란해진 후에야 김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해보니 왼쪽 갈비뼈 3개가 부러졌다고 했다.
생활이 곤란한 나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갈비뼈가 자연적으로 아물어지기를 기다리며 약국에서 약만 지어다 먹었다. 옆구리 부상으로 허리를 못 쓰게 되자 간장가게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부상당하기 전에는 자전거 뒤에 간장 한 말 통(24-25kg) 2개 정도를 들어올렸는데 이제는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이처럼 노동력을 잃은 데다가 집을 지으려고 얻은 빚과 병치료 등의 일들이 겹쳐 엄청난 빚더미(1천만 원 상당의) 위에 올라 앉았다. 간장가게를 처분하여 어느 정도의 빚을 갚고 구멍가게만 했다. 지금은 고생한 끝에 비록 전세지만 소태동에서 조그마한 슈퍼마켓을 하고 있다.
5월 진상은 당사자들이 직접 밝혀야
박정희 때부터 군인들이 국민을 학살하더니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군인이 집권하면서부터 폭력이 등장한 것이다. 갈수록 다양해지고 고도화되는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민주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지금은 어느 정도 좋아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동안 감히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할 광주항쟁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전국민이 똘똘 뭉쳐나간다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란 한번 잘못 기록되면 올바르게 수정하기가 무척 힘드니까 지금 시기에 올바르게 5·18을 규명해야 한다.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전국에 5·18의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이것은 아직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만약 5·18 당시 직접 부상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을 청취했더라면 현정부의 위증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어 5월의 진상이 전국에 시원하게 밝혀졌을 것이다.
작년 부상자 신고 기간에 5월이 왜곡될 것 같아 신고를 하지 않고 있다가 추가 신고 기간에 신고를 했다. 정부의 잔학성을 폭로하는 것이 숨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 같았다. 그 후로 부상자동지회(회장 박옥재)에서 알고는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것을 계기로 회원이 됐는데 어려운 실정이어서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직접적인 활동은 못 하고 가끔씩 전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민주화 단체에 대해서 몰랐던 나는 부상자회 가입하고서부터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부상자동지회가 둘로 갈라져 두 개의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양쪽 모두 5·18 진상규명을 주목적으로 한다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재 여야에 맡겨져서 해결이 안 된 5월 진상규명을 하나의 통합된 5월 단체가 앞장 서서 해야한다.
정부에서 '죄는 미워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 자가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말 한마디로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또한 내가 예전의 건강인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죄값을 마땅히 받아야 하고 현정권도 5공과의 분리를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보상책으로서 수많은 부상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카드를 발급해야 한다. (조사정리 최경옥)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