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략당한 시글락(사무엘 상 30:1-6) Ⅰ. 다윗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습격하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시글락을 기습하여, 약탈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부녀자와 아이들을 붙잡아 갔다(1,2절). 이로써 그들은 최근에 다윗이 그들과 그들의 나라를 침노하였던 사건에 대한(27:8) 보복을 하고자 시도 하였다고 보인다. 원수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것들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험하게 대해 준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똑 같이 험한 대우를 받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 준 사울의 동정심이 이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울이 마땅히 자기의 본분을 지켜서 그들을 철저하게 멸망시켰더라면, 이런 재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려고 하였던 것이 얼마나 잘못 되었던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집에 남아서 자기의 일을 돌보는 것이 좋았을 것을 공연히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외출을 할 때에는, 우리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족들을 평안히 보호하여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3.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산 채로 포로로 붙잡아 가게 만들어 주셨다. 다윗이 그들을 습격하였을 때는 모든 남녀를 다 쳐서 죽였다(27:9). 그런데 그들이 이 성읍에 대해서 왜 똑같은 식으로 보복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를 제지하신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어거하실 수 있으며, 아무리 강포한 자에게 대해서도 "여기 까지느 좋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선식에 그들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 그랬든지, 혹은 그들을 팔아 버리거나 노예로 삼기 위해서 그랬든지 알 수는 없으나, 다윗의 집이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작용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Ⅱ.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들의 집이 회진되었으며, 그들의 처자식들이 사로잡혀 간 것을 보고 크게 당황하고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들의 진영으로부터, 시글락으로 사흘길을 행진하여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쉬게 될 것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그들의 눈 앞에 어둡고 침침한 그림자가 전개된 것을 보자(3절), 그들은 모두가 용사들임에도 불구하고," 울 기력이 없도록" 모두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다윗도 예외는 아니었다. 4절). 여기에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오고 또 그들이 붙잡혀 갔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윗의 마음이 심히 침통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무리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도 친척이나 친구의 재난을 보고 슬퍼하는 것은 조금도 비방거리가 되지 못한다. 1. 이 재난은 그들이 그 자리에 없었을 때에 일어났다. 옛날부터 아말렉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언제나 불시에 공격하곤 하였다. 2. 그들은 집에 돌아오면서 그 모양을 첫눈에 목격하였다. 우리가 외출하였다가 집에 돌아올 때 어떤 불길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릴는지 예측할 수 없다. 외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일는지 모르나 돌아올 때는 근심이 앞선다. 그러므로 "너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며", 오늘 저녁 일마저도 자랑치 말라. 왜냐하면 "하루 동안이나" 혹은 하루 한 나절 동안에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잠 27:1).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의 "장막이 무사한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한다. Ⅲ. 백성들이 다윗에 대하여 소란을 피우며, 불평을 토로하였다(6절). 슬픔에 빠진 그의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고자 함으로 "다윗이 크게 군급 하였다." 1. 왜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였는가 하면, 그들이 현재 당한 이 재난은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건드려 놓았으며, 그리고 또 아무런 방비책도 세워놓지 않고 시글락을 비워놓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가 재난을 당하면 우리에게 재난을 가져다 준 계기를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기가 쉽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을 묵묵히 참고 지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파하기가 쉽고, 하나님의 작용하심을 보지 못하기가 쉽다. 2. 그리고 또 그들은 다윗을 따르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었는데,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두 왕자가 될 줄로 기대 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스스로가 거지꼴이 되었다고 보고, 그러한 실망이 그들을 난폭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그들이 크게 의지하였던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로 만들었다. 난폭한 감정은 어떤 어리석은 일이라도 못하게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쓰라린 시련이었으며, 피할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사울은 그를 자기의 나라에서 추방하였고, 아말렉 사람들은 그의 성읍을 노략질하고 그의 아내들을 붙잡아 갔는데, 이제 또 매우 원통하게도, 그가 신임하였으며, 그가 보호해 주었고, 그가 먹을 것을 대주었던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그를 동정해서 그로 하여금 다시금 생기를 얻어 일어날 수 있게 하여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걷어 차며," 돌로 치려고 위협하고 있다. 위대한 신앙은 그런 가혹한 시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이 왕좌에 오르기 직전에는 극도의 곤란에 처하게 하여 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때에 그의 출세의 문을 열어 주는 최후의 일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크게 발전하려고 하는 직전이 가장 어려운 때이기 쉽다. Ⅳ. 이러한 재난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경건하게 의지하였다. 다윗은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 그의 사람들은 붙잡혀 간 사람들 때문에 애가 탔다. "백성들의 마음은 매우 쓰라렸다" 라고 글자 그대로의 뜻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 자신들의 불평과 초조함이 그들의 재난과 비탄 위에 "쓴 쑥고 쓸개" 를 더하여 주었으며, 그리고 그 슬픔을 갑절로 만들어 주었다. 1. 그러나 다윗은 그 사람들 중의 누구보다도 슬퍼할 까닭이 더 많았지마는 이를 잘 참고 견디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하였지만, 그는 체면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은 낙심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지고 침착할 수 있다. 2. 또 다윗은 "그를 돌로 치자" 고 하는 그들의 위협적인 말에 대해 어떤 언급이 있음직한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 보복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말에 위협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현재 그가 당한 재난이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그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하나님께서 흔히 쓰시는, 낮추었다가 높이시는 방법,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그리고 그를 안전하게 왕좌에 오르게 하여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굳게 믿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다윗은 현재의 재난이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굳건히 버티게 할 수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은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선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믿는 가운데 스스로를 굳세게 하여야 함은 그들의 의무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크게 도움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빛을 흑암 가운데서 이끌어 내시며, 그를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롬 8:28) 모든 자에게 이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다윗은 실제로 "내가 두려워 할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노라" 라고 말한 그대로 살았으며, 거기서 크신 위로를 받았다. 그는 그의 지혜가 부족했을 때도 믿음은 부족하지 않았다. ●노략당한 것들을 되찾은 다윗(사무엘 상 30:7-20) "의인은 재난에서 구원을 받고, 악한 자가 그대신 넘어지며,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 (잠 24:16)고 솔로몬은 보았다. 이것이 바로 다윗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많은 재난을 겪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재난에서 그를 언제나 구해 주셨다." 그리고 더우기 여기에 나오는 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구해 주셨다. Ⅰ. 다윗은 그의 의무에 관해서는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리이까" 라고 물었으며, 사건 자체에 관해서는 "가면 그들에게 미치겠나이까" 라고 두 가지로 여호와께 물었다(8절). 다윗이 공인으로서 그의 모든 문제를 물어 볼 수 있는 대제사장과 판결 흉배를 가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민 27:21) 그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윗이 아비아달과 에봇을 시글락에 남겨 놓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윗이 돌아와서 물어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그때 그것들을 숨겨 주시지 않았다면, 아말렉 사람들이 그것들을 끌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제사장과 함께 에봇을 가지고 블레셋 진영으로 갔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다윗이 아기스를 따라 싸움에 나가는 것이 좋은가 어떤가를, 그것들을 통해 여호와께 물어 보지 않는 잘못을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는 무할례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 그 때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이번의 재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 보다도 우선 에봇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재난 때문에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의 잊어 버렸던 의무를 생각할 수 있게 되며, 더우기 그것 때문에 여호와께 물을 수 있게 되었다면 (대상 15:13 참조)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는 이번 싸움이 의로운 싸움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해 오는 싸움을 싸우고 싶은 충동이 매우 강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물어 보지 않고는 싸우러 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물음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존성과 복종을 시인하였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묻는다면,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의 응답을 주시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같은 식으로 응답해 주신다. Ⅱ. 다윗은 자기도 몸소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였으며, 자기들에게 있는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였다(9, 10절). 다윗의 인내와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사리 그리고 또 어떻게 그렇게 효과적으로 군사들 사이에 있던 반항심을 진압시켰는가 보라.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 (6절)고 말했을 때, 만일 다윗이 그들을 목매달며, 그 분쟁의 주모자들의 목을 속히 치라고 명령하였다면, 그것이 비록 정당한 일이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이처럼 위기를 당한 때에 그에게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은 그들의 노획물을 말끔히 처치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귀머거리 모양으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분함을 덮어 두고, 오직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음으로" 백성들 사이에 있던 소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라 앉았다. 그리고 이처럼 그들을 부드럽게 대해주었으므로, 조금 전까지 그에게 마구 대항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따라 나서기로 모두 마음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정부라도 유화정책처럼 안전한 정책이 또 있을 수 없다. 그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따라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기를 원했으며, 다윗은 또 그 사람들이 모두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추격해 가던 도중에 그들 가운데 삼분의 일은 떨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6백명 가운데 2백명은 오랫 동안의 행진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다. 그리고 너무 큰 슬픔 때문에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그 이편에 머물게 되었다. 1. 이것은 그처럼 많은 그의 부하들이 그를 실망시켰는데도 여전히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전진할 것인가 하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어긋나고 실패하고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계속 기쁨으로 나간다면,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 이것은 또 다윗이 그의 사람들을 매우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는 좋은 실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사건 자체가 매우 다급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결코 그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다윗의 자손도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됨됨이가 모두 한결같이 강하거나 또 활기가 넘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약할 때에도 주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 아니,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신다(고후 12:9, 10). Ⅲ.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의 대적들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 주며, 그들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 주셨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한 애굽 소년이 다웃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1. 그 소년의 주인이 얼마나 그를 무자비하게 대하여 주었는가 보라. 그의 주인은 그 소년을 부려 먹을 대로 다 부려먹고 이제 그 소년이 병들자, 그것도 너무 일에 시달려 과로한 가운데 병이 들은 것으로 보이는 데도, 그 전쟁터에서 그대로 죽도록 무정하게 내버려 두고 갔다. 그들은 그때 그렇게 서둘러서 가야 할 이유도 없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레에라도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부지해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이라도 남겨 놓고 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 주인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마음이 아니라, 아말렉 사람의 마음이었다. 따라서 그의 종을 짐승보다 더 못하게 다룰 수 있었다. 악인의 자비는 아무리 부드럽다고 하나 매우 잔인하다. 이 주인은 이제 저에게 이스라엘의 포로로 해서 많은 종들이 생겼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애굽 소년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먹고 마시는" (16절) 동안 그 소년은 길바닥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를 받은 이 불쌍한 종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과 함께 온 아말렉의 군대를 진멸시키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학대받는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2. 그 소년에 대한 다윗의 동정심을 보라. 다윗은 그 소년이 시글락을 침노한 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떡과 물" 만이 아니라(11절), "무화과와 건포도" 까지 주면서(12절) 관대하게 그를 살려 주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매우 촉박하며, 그들 자신들을 위한 식량도 넉넉지 못하지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잠 4:11, 12).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동정심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치 못한 자들이다. 이 애굽 소년을 살려준 것은 매우 잘한 처사였다. 왜냐하면 그 애굽 소년은 아무 보잘 것 없는 소년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그 소년을 도와 주었을 때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를 해치거나 친절 베풀기를 금하지 않아야 하는데 조만간에 우리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해를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3. 그 불쌍한 소년이 제 정신을 차렸을 때 다윗이 그 소년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는가를 보라. 그 소년은 그와 함께 하였던 우리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해 주었다. (1) 그들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말해 주었다(14절). "우리가 침노하고 그리고 이것 저것을 했나이다" 라고 말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그가 침로한 것으로 꾸며대고 말한(27:10) 지방들이 실제로 침로를 당하고 폐허가 되었다. 그때의 거짓말이 오늘에 와서 사실이 되었다. (2)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말했다(15절). 이것은 다윗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며, 또 자기에게 더욱 가혹하게 대할지도 모르는 그 주인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면, 다윗에게 알려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 소년은 더욱 자기의 목숨이 안전하기를 원해서 다윗에게 이를 맹세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소년은 애굽이나 아말렉의 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원했다. Ⅳ. 다윗은 그 소년의 인도를 받아 아말렉 사람들이 마음놓고 승리를 자축하는 곳을 쳐들어 가서 항상 그가 기도 하였던 그대로 "원수들의 머리 위에 그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1. 약탈자들을 베어 버렸다. 아말렉 사람들은 약탈품이 굉장히 많고, 또 이제는 위험한 지경을 벗어 났다고 생각하고 크게 즐기고 있었다(16절). 그들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깡그리 잊고, 또 전리품들을 어떻게 보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온 땅에 평만하며" 아주 방심한 태도로 "먹고 마시며 춤추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우상신 앞에서 그들의 성공을 축하하며 신들을 송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그들을 다윗은 기습하여 정복하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쉽사리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죄인들이 "안전하다" 고 외치며, "악한 날이 멀리 사라졌다" 고 말하는 그 때가 가장 멸망에 가까운 때이다. 우리가 육욕에 빠지고 거기에 탐닉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원수의 공격을 가장 받기가 쉽다. "먹고 마시고 춤추다" 가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쉽사리 치달은 경우가 많다. 그들이 이처럼 방비를 소홀히 하고, 무기를 들지 않고 있으며,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다윗은 일시에 그들을 살륙 하였으며, 다만 4백명 만이 도망갈 수 있었다(17절). 이처럼 악인들의 승리는 잠시 잠간이요, 그들에 대한 진노는 벨사살의 경우와 같이 그들이 한참 연락하는 중에 그들에게 임한다. 2. 노략 당했던 것들을 모두 되찾았다. 하나도 잃은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1) 그들은 그들의 것들을 모두 회수하였다(18,19절). "다윗이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다." 다윗에게는 다른 어느 것들보다 그 두 아내를 구한 것이 기쁜 일이기에 특별히 이 사실이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말렉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탈취한 것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잘 간수하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그것들을 간수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정말 주인들을 위해서 간수해 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빠진 것이 없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상으로 우리를 잘 대해 주신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창 14:16 에 나와 있고 다윗의 경우는 여기서 볼 수 있다). 즉 예수님도 "강한 자에게서 먹을 것을 취하셨고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신 바가 계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2) 그 외에도 그들은 아말렉 사람들의 것들까지도 탈취하였다(20절). 그것들은 "양떼와 소떼" 들이었다. 그것들은 전쟁법에 의해 블레셋이나 그밖의 사람들에게서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마 다윗은 적군의 땅까지 공격해 들어가서 거기서부터 자기를 위해 양떼나 소떼를 끌고 왔을 것이다. 이 짐승의 떼는 개선군의 선봉대 속에 포함시켰으며, "이는 다윗의 탈취물이요, 그에게 감사할지로다" 라고 외치며 끌고 왔다. 얼마 전까지도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좋아하며 그를 소리높여 찬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 때문에 자기들이 잃었던 것 이상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관계에 깊이 얽혀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인심이다. ●되찾을 것들을 고루 분배함(사무엘 상 30:21-30) 여기에는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되찾아온 전리품들을 분배한 것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아말렉 사람들이 유다와 그리고 블레셋 땅에서부터 많은 전리품을 이끌고 갔을 때는 육욕에 빠지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이 전리품들을 다른 식으로 처분하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소유하게 되든지 이것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정의감과 자비심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주셨든지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선을 행해야 하며, 결코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윗은 아래와 같이 그 전리품들을 분배하였다. Ⅰ. 다윗은 소유물 곁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도 바르고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비록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21절), 정복자들을 만나 이 일이 성공했음을 축하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가 직접 그 일에 가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경우에라도 좋은 일이 이루어졌을 때는 함께 기뻐해야 한다. 다윗은 그들의 인사를 매우 친절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약함을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에 대한 자기의 염려를 표시하였다. 다윗은 그들에게 문안하였다. 그런데 그 말은(글자 그대로의 뜻을 보면) "다윗이 그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었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가 물은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들이 약하고 건강치 못한 것을 보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또는 그들의 평안을 기원하며, 그들이 뒤에 처졌다고 해서 손해볼 것이 없으니만큼 기뻐하라는 말이다. 다윗은 아마 그들의 안색에서 그들이 이것 때문에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1. 어떤 사람들은 되찾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데 그들이 한 몫끼는 것을 반대하였다.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했던 그 사람들이 역시 이번에도 그들의 형제들의 것을 횡령하고자 원했을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악한 자와 비류들" 이라고 하였다(22절). 훌륭한 사람들 밑에 악한 사람들이 따르고 있고, 또 훌륭한 사람들이 그들을 좋은 사람들로 만들지 못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다윗이 그의 군사들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을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악한 자와 비류들이 있으며, 죽음의 공포도 맛보았을 터인데도 여전히 악한 자와 비류들이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소유물 곁에 남아 있던 2백 명에게는 다만 그들의 처자식들만 돌려 주고 소유물을 일체 돌려 주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임을 나타내는데, 가히 "악한자" 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1) 그들은 매우 욕심이 과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저들의 몫을 주지 않으면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이 많아 지리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조금 전에 그들은 다른 반을 찾기 위해 자기들의 나머지 반을 기쁘게 내놓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들의 것들을 전부 찾았는데 형제들의 것까지 차지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궁했을 때의 형편을 쉬 잊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의 것들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것 이상의 것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2) 그들은 형제들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처자식은 돌려주되 그들의 재산을 돌려 주지 말자는 것은, 그들에게 입은 주되 먹을 양식은 주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만한 것들이 없다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이렇게 되기를 그들이 원했을까?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으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는 데 이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 사람들은 비류들이다. 2. 다윗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 다윗은 전투에 참가한 자들이나, 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나 다 똑같이 전리품을 나누도록 명령하였다(23,24절). (1)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렇게 일을 처리하였다. 우리가 차지한 전리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청지기와 같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세상 물질들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지으신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의 선물인 그것들을 가지고 사탄을 섬기며 인간의 욕심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우리의 형제들에게 악을 행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도 서로 자비를 베풀도록 만들어 주신다. (2) 다윗은 그들을 정당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이 뒤에 처진 것은 사실이다. [1]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갈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 때문에 책망 받아서는 안 된다. [2] 이번에는 그들이 뒤에 처졌지만 전번에는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하여 그 남은 형제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공을 생각해서 오늘의 기쁨에 동참시켜 주어야 한다. [3] 그리고 그들은 이번에도 좋은 일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남은 소유물 곁에서 그것들을 지켰다. 그것들은 또 다른 원수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지켜야 했던 것이다. 모든 직책이 모두 명예로운 직책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 것 없는 일에 종사할지언정 그것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하는 직책이라면 그런 사람들도 전체의 이익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각 부분이 모두 소용이 있으며 따라서 모두가 골고루 영양분의 공급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첫째, 이처럼 다윗은 약한 자와 비류들에 대해 정정당당한 이유를 들어 그들의 생각을 억눌렀지만 거기에는 시종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정당당한 이유에서 오는 힘은 동정심이 곁들일때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들을 "나의 형제들" 이라고 불렀다(23절). 통치자들은 가끔 거만을 떨다가 그들의 권위를 상실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공손하고 겸양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둘째, 이처럼 다윗은 (그의 통치의 첫 해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똑 같게 하는 법을 왕국의 율례와 전쟁의 규례로 삼아 그후 계속 시행하게 하였다(25절). 아브라함이 소돔의 노략물들을 되 찾았을 때, 그는 그것들을 주인에게 돌려 보내 주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되찾아 줄 때 우리는 그들의 소유권을 무시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을 군인과 회중들에게 다같이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셨다(민 31:27). 여기에 나오는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라는 같은 원칙에 의해 시행되었다. 제자들은 처음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우리도 "서로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딤전 6:18).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시 68:12). Ⅱ. 다윗은 그의 모든 친구들에게 관대하고 친절하였다. 다윗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것에다 덤까지 붙여서 나누어 주었것만은 아직도 상당한 여분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대장인 다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아마 아말렉의 장막에서 탈취한 금은과 패물이었을 것이다(삿 8:24, 26). 다윗은 이것들이 그의 병사들을 교만하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의 친구들인 "유다 장로들" 에게 선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그 선물들을 보낸 여러 지역의 이름들이 나열되었다. 그 지명들은 유다 지파의 안이거나 또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 가운데서 제일 먼저 열거한 지명은 "베델" 이었다. 그 지명은 "하나님의 집" 이란 뜻이다. 아마 이 지명이 제일 처음에 열거된 것은 그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지명은 그런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 이라고 일컬어진 곳일지 모른다. 그 곳에 다윗은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보냈다. "헤브론" 이 제일 마지막에 열거되었다(31절). 아마 그 곳에는 나머지 상당한 몫을 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곳을 자기의 본거지로 삼을 만한 고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삼하 2:1). 우리는 다윗이 선물들을 보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1. 그의 관대함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부요하게 하고자 원하지 않고, 자기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요하게 하여 주셨고, 그가 섬기던 그 나라를 그가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우아한 심령은 관대한 심령이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도 있다." 2. 감사하고 보답하는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와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30절) 선물을 보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에게 숨을 곳을 제공해 주었고, 양식을 대준 모든 곳에 선물을 보냈다. 명예와 마찬가지로 정직한 마음도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보답하게 하며, 우리의 손에 있는 능력껏 그들을 찾아보게 한다. 3. 그의 신앙심을 볼 수 있다. 그는 그가 보내는 선물을 "축복" 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그들에게 위로가 되질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선물과 함께 따른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는 그 선물이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때문에 승리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에게 감사하게 하였다. 4. 그의 정책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멀지 않아서 있을 자기의 대관식에 그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보냈다. "선물은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도 왕으로서의 관용과 박애심이 풍부한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도량이 넓은 사람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보다 더 돋보인다. 다윗은 십 사람이나 그일라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자기가 받은 모욕에 대해서 결코 경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울의 죽음(사무엘 상 31:1-7) 보복의 날이 돌아왔다. 사울은 잘못 살려준 아말렉 사람들의 피와 그리고 또 더욱 잘고 흘리게 한 제사장들의 피값을 치르어야만 하게 되었다. 그가 만일 다윗의 피를 흘리게 했었다면 그는 더욱더 그 값을 치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망할 때가 되었으며, 다윗이 예견한대로, 전장에 들어가서 망할 날이 되었다(26:10). 와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을 보라. Ⅰ. 사울은 그의 곁에 있던 그의 군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1절). 블레셋 군사의 숫자가 많았는지, 또는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잘 지도를 받았는지, 또는 다른 이점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면 그들이 보다 더 활기가 있었다고 보인다.그들은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웠으며, 이스라엘은 많이 도망치고, 살륙을 당했다. 그들의 주력 부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많은 군사들이 살륙을 당했다. 아마 그들은 다윗을 추격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울을 따르며, 사울의 범죄를 도와 주던 사람들은 그보다 앞서 멸망했으며 그의 재난에 동참하였다. Ⅱ. 사울은 그의 아들들이 그의 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승승장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치열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의 세 아들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아마 그의 세 아들은 매우 비참하게도 그의 눈 앞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그들은 그의 가족들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몸을 지켜 주는 호위병들이었기에 사울은 이제 자기가 죽을 차례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무서워 떨었을 것이다. 그의 죽은 아들들의 이름이 나와있다(2절). 그런데 매우 슬프게도 거기에 요나단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매우 지혜로왔으며, 용감하였고, 또 선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울은 다윗의 원수였지만 그는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었다. 아버지에 대한 의무가 그를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 뒤에 물러서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결코 그의 가족들의 죄악에 함께 물들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라고 말한 엘리바스의 관찰이(욥 4:7) 여기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요나단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 하나님은 이로써 사울이 죽는 순간까지 그의 괴로움을 더하여 주셨고, 그의 집에 내리시겠다고 하신 심판을 완전히 실천하셨다. 사울의 가족이 멸망해야 한다면, 요나단도 그의 가족의 일원인 만큼 그들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2. 하나님은 이로써 왕관으로 가는 다윗의 길을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열어 주셨다. 비록 요나단 자신은 기쁘게 자기에게 속했던 모든 칭호와 권리를 다윗에게 양도했겠지만(이점에서 우리는 조금도 요나단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마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붙들고 사울의 집을 계속 존속시키고자 할 수 있으며,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길이 더디게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싸움에 나갈 만한 나이가 못되어 집에 머물러 있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이스브셋도 그렇게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물며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그들의 호의를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요나단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친구들이 있었겠는가? 열국과 같이 왕을 가지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더우기 요나단과 같은 사람에게 왕관이 이어질 때, 그 왕관이 정통의 가계를 따라 이어지기를 열심히 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윗이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 요나단이 사람들을 설복하여 자기의 모든 권리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웠건마는, 요나단이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는 말이 들려질 뻔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죽음이 다윗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약함을 생각하게 하며, 그의 등극의 길을 용이하게 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다윗에게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3. 하나님은 이로써 선과 악의 구별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모든 일은 만인에게 똑같이 임한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보고 그사람의 영적인 사태 또는 영원한 상태를 판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에게 마찬가지로 임하기" 때문이다. Ⅲ. 사울 자신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부상을 입고, 그 자신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활 쏘는 자가 사울을 멈추었다(3절). 그리하여 그는 싸울 수도 그리고 뛰어 달아날 수도 없게 되었으며, 꼼짝 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붙잡히게 되었다. 이처럼 파멸이 점점 그에게 닥쳐오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느껴가며 죽도록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주썼다. 그는 아래와 같은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1.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그의 부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들이 손을 학대한 것처럼 자기를 학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 불쌍한 사람이로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을 때, 자기의 영혼을,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맡길 것을 염려하지 않고(전 12:7), 자기의 육체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고자 하는 염려만을 하였다. 그는 그가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죽었다. 거만하고 질투가 많았으며, 그리고 자신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죽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않는, 마음이 번뇌한 자는" (욥 3:20, 21)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더우기 가롯 유다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완전히 잃어버림으로써, 그들 속에 있는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 앞에 있는 지옥으로 뛰어드는 자들은 더욱 불쌍한 자들이다. 2.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혜택을 입지 못하게 되자, 부끄러움을 면하고자 하여 자신을 죽이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을 더욱 가증한 죄로 빠지게 하였고, 그의 이름 위에 : 자살자 - felo dese 라는 영원한 치욕을 남겨 놓았다.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중상을 입은 요나단은 끝까지 그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었다.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은 죽음을 죽었고, 비겁한 죽음를 죽었다. 그는 거만을 떠는 바보였으며, 비루한 비겁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에게 소망도 가지지 못하며, 인간으로서의 이성이나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신앙도 가지지 못하며, 더우기 왕으로서의 위엄이나 군인으로서의 기백도 가지지 못한 자로서 죽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그의 병기를 는 자는 그를 찌르지 않고, 그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참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종이라 해도 그 주인의 욕심이나 어떤 감정을 위한 노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사울을 찌르지 아니한 이유는 "그가 심히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진해서 즉시 자기의 칼에 스스로 엎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인을 왕으로서 공경하기 때문에 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아마 자기의 손이 떨려서 감히 단 칼에 그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더욱 괴롭게 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Ⅳ. 사울을 죽이기를 거절한 그의 병기 든 자는 그와 함께 죽기는 거절하였지만,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죽었다(5절). 이것은 사울의 죽음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사울의 자살은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도 그의 나쁜 본을 따서 같은 죄를 범하게 했기 때문이며, "자기의 죄로 자기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들은 그 때의 사울의 무기를 든 자는 도엑이었으며, 그는 제사장들을 죽인 공훈으로 그런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의 악독이 자기 자신의 머리로 돌아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영히 멸하실 것이라" 고 예언한 바가 있다(시 52:5). Ⅴ. 사울의 군대가 패주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 이웃에 있던 도성의 사람들 (요단 건너편이라고 읽을 수 있는 도성 사람들)이 자기 도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한동안 거기에 거하였다(7절). 이처럼 사울은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기 나라에 커다란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만일 다윗이 그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그 땅은 그대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무엘을 거역하고, 얻어낸 왕이 어떤 왕인가 하는 것을 사울은 잘 증명하여 주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울처럼 여전히 악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선지자가 그들에 대해 예언한 것과 같이 "그들과 그들의 왕이 다 멸망하였다" (12:15). 오랜 후에 이 일에 대해 행한 언급이 한 곳에 나타나 있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아도 죽어도 너희에게 재앙이 되었노라. 너희는 이제 다시는 왕을 기대할 수 없노라" (호 13:10). ●사울의 장례(사무엘 상 31:8-13) 성서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영혼이 그들의 사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비밀에 속한 것은 우리들이 알 바가 아니다). 성서는 다만 그들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크게 모욕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블레셋 사람들이 피로를 푼 다음에, 죽은 자들을 벗기려 왔다가, 죽은 자들 속에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발견하였다(8절).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아마 그의 주인의 명예를 위해 그를 본받을 자살을 함으로, 이로써 자기가 얼마나 사울을 사랑하였는가를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에 의해 일을 처리하였다면, 그는 그런 어리석은 식의 찬양은 중지하고, 살아남은 자로서 먼저 죽은 자에 대한 그의 도리를 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밤 사이에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옮겨다가 정중하게 장사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은 (능히 지혜롭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 때문에 어리석게 명예를 주고 받았다. 아니 사울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두려워서 자살을 한) 추적자들은 그 다음날에야 사울이 있는 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혼미하게 하고, "무서움으로 인하여 쇠잔하게 만드신다" (욥 18:5 이하) (사울이 왕으로 선출될 때도 그 키가 크므로 다른 사람들과 용이하게 구분되었다). 사울의 시체를 발견한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왕관을 쓰러뜨린 것을 크게 기뻐하였고, 살아 있을 때는 무서워 떨던 사람에 대해 그 죽은 시체를 모욕함으로 자기들의 야만적인 복수심을 만족시켰다. 1.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었다. 그들이 만일 골리앗의 목이 달아난 것을 복수하고자 하였다면, 실제로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의 목을, 그가 그들의 나라에 있었을 때 베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왕관을 쓰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자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보이며 또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도 머리 하나 만큼은 더 큰 사울 (은근히 그것을 자랑하였던 사울)의 머리를 잘라 그 키를 작게 함으로 그를 모욕하고자 그렇게 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울의 갑옷을 벗기었다(9절). 그리고 그것을 전승기념품으로서 그들의 여신 아스다롯의 신전에 두기 위해 보냈다(10절). 그리고 (여기에서는 생략이 되었지만) 역대상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다곤의 신전에 매달았다. 이처럼 그들은 그들의 승리가 참된 하나님에 의해 이룩된것이 아니라, 그들의 헛된 신의 헛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그 명예를 그들의 신들에게 돌렸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그릇 섬겼던 아스다롯 우상이 이번에는 그들을 정복하였다. 3. 블레셋 사람들은 온 나라에 급사를 보내어 온 백성이 그들의 신전에 게시된 그들의 승리(9절)를 쳐다보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를 돌리게 하였다. 다윗은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라" (삼하 1:20)고 하매 이 일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4.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의 성벽에 못 박았다(12절). 그 성읍은 길보아와 멀지 않으며, 요단강과 가까운 지경에 있다. 여기까지 시체가 끌려 왔으며, 사나운 새들의 밥이 되도록 쇠사슬에묶여서 매달리게 되었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받기가 싫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왕의 시체를 그렇게 다루는 법은 없었다. 더우기 모욕을 받기가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더욱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깡그리 이를 잃어버린다. 다윗이 그들을 정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때까지 그들의 거만이 어디까지 올라 갔었는가를 보라. 이제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자, 그들은 이스라엘 땅이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들은 그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완성하신 다음에는 다시 그들에게 대해서도 당신의 일도 완성하신다(사 10:6, 7 참조). Ⅱ.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용감하게 그들의 시체를 구출하였다. 벧산과 길르앗 야베스 사이에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은 얕은 여울을 통해서는 능히 건널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성읍의 용감한 장사들은 대단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밤에 요단강을 건너가 그 시체들을 취해가지고 돌아와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어 주었다(11,13절). 1. 그들은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땅의 명예를 위한 공동적인 관심에서부터 우러나와서 이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땅이 시체로 말미암아, 더우기 왕의 시체로 말미암아 더렵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으며, 무할례자에 의해 그처럼 모욕당하는 것을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2. 또 사울에 대한 특별히 고마운 생각 때문에 이 일을 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그 땅을 암몬 사람들의 손에서부터 열심을 다해 그리고 신속히 구출해 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11장). 그들의 행동은 관대한 정신의 표현이며, 그처럼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가 매우 곤란할 때 그것을 돌려 주었다는 데서 모든 선한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보다 일찌기 그들의 용감한 장사들을 사울에게 보내 주었다면 블레셋과 싸우는 사울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그를 매우 잘 도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시대는 끝장이 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것만이 그들이 사울을 도와 줄 수 있는 유일의 일이었다. 우리는 사울의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무엘이 죽었을 때와 같이(25:1) 애곡하였다는 기사를 읽을 수가 있다. 다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만이 사울의 죽음 앞에서 그에게 명예를 돌려 주었다. (1) 그들은 향내가 나도록 시체를 위해 향을 살랐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다(12절).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라고 나온 아사의 장례식의 경우와 같이 (대하 16:14), 흔히 죽은 친구와 더우기 왕을 위해서 향을 사르는 습관이 있었다. 아니면 살이 곪아 썩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살을 불태웠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2) 향을 다 사른 뒤에 그들은 그 시체를 (혹은 그 몸을 불살랐다고 하면 그 뼈와 재를) 어떤 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나무는 묘석 또는 기념비의 구실을 하였다. (3) 그들은 "칠 일을 금식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레 동안 매일 저녁까지 금식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현재의 어지러운 상태를 한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들의 무너진 나라가 다시 세워지기를 금식하는 가운데 기도했을 것이다. 비록 "악인이 죽으면 환성이 일어난다" 고 하지만, 인간성은 우리로 하여금 시체 앞에서, 더우기 왕의 시체에 대하여 상당한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이 책은 사무엘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제 사울의 장례로 끝맺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이 제공하고자 하는 명예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명예를 취하여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노략당한 시글락(사무엘 상 30:1-6)
Ⅰ. 다윗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습격하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시글락을 기습하여, 약탈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부녀자와 아이들을 붙잡아 갔다(1,2절). 이로써 그들은 최근에 다윗이 그들과 그들의 나라를 침노하였던 사건에 대한(27:8) 보복을 하고자 시도 하였다고 보인다. 원수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것들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험하게 대해 준 사람은 그 사람으로부터 똑 같이 험한 대우를 받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 준 사울의 동정심이 이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울이 마땅히 자기의 본분을 지켜서 그들을 철저하게 멸망시켰더라면, 이런 재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려고 하였던 것이 얼마나 잘못 되었던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집에 남아서 자기의 일을 돌보는 것이 좋았을 것을 공연히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외출을 할 때에는, 우리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족들을 평안히 보호하여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3.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산 채로 포로로 붙잡아 가게 만들어 주셨다. 다윗이 그들을 습격하였을 때는 모든 남녀를 다 쳐서 죽였다(27:9). 그런데 그들이 이 성읍에 대해서 왜 똑같은 식으로 보복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밝혀 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를 제지하신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어거하실 수 있으며, 아무리 강포한 자에게 대해서도 "여기 까지느 좋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개선식에 그들을 끌고 나가기 위해서 그랬든지, 혹은 그들을 팔아 버리거나 노예로 삼기 위해서 그랬든지 알 수는 없으나, 다윗의 집이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작용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Ⅱ.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들의 집이 회진되었으며, 그들의 처자식들이 사로잡혀 간 것을 보고 크게 당황하고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들의 진영으로부터, 시글락으로 사흘길을 행진하여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자기 집에서 쉬게 될 것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그들의 눈 앞에 어둡고 침침한 그림자가 전개된 것을 보자(3절), 그들은 모두가 용사들임에도 불구하고," 울 기력이 없도록" 모두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다윗도 예외는 아니었다. 4절). 여기에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오고 또 그들이 붙잡혀 갔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윗의 마음이 심히 침통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무리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도 친척이나 친구의 재난을 보고 슬퍼하는 것은 조금도 비방거리가 되지 못한다.
1. 이 재난은 그들이 그 자리에 없었을 때에 일어났다. 옛날부터 아말렉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언제나 불시에 공격하곤 하였다.
2. 그들은 집에 돌아오면서 그 모양을 첫눈에 목격하였다. 우리가 외출하였다가 집에 돌아올 때 어떤 불길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릴는지 예측할 수 없다. 외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일는지 모르나 돌아올 때는 근심이 앞선다. 그러므로 "너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며", 오늘 저녁 일마저도 자랑치 말라. 왜냐하면 "하루 동안이나" 혹은 하루 한 나절 동안에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잠 27:1).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의 "장막이 무사한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한다.
Ⅲ. 백성들이 다윗에 대하여 소란을 피우며, 불평을 토로하였다(6절). 슬픔에 빠진 그의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고자 함으로 "다윗이 크게 군급 하였다."
1. 왜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였는가 하면, 그들이 현재 당한 이 재난은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건드려 놓았으며, 그리고 또 아무런 방비책도 세워놓지 않고 시글락을 비워놓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가 재난을 당하면 우리에게 재난을 가져다 준 계기를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기가 쉽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을 묵묵히 참고 지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파하기가 쉽고, 하나님의 작용하심을 보지 못하기가 쉽다.
2. 그리고 또 그들은 다윗을 따르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었는데, 그들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두 왕자가 될 줄로 기대 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스스로가 거지꼴이 되었다고 보고, 그러한 실망이 그들을 난폭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그들이 크게 의지하였던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로 만들었다. 난폭한 감정은 어떤 어리석은 일이라도 못하게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쓰라린 시련이었으며, 피할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시련이었다. 사울은 그를 자기의 나라에서 추방하였고, 아말렉 사람들은 그의 성읍을 노략질하고 그의 아내들을 붙잡아 갔는데, 이제 또 매우 원통하게도, 그가 신임하였으며, 그가 보호해 주었고, 그가 먹을 것을 대주었던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그를 동정해서 그로 하여금 다시금 생기를 얻어 일어날 수 있게 하여 주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걷어 차며," 돌로 치려고 위협하고 있다.
위대한 신앙은 그런 가혹한 시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이 왕좌에 오르기 직전에는 극도의 곤란에 처하게 하여 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때에 그의 출세의 문을 열어 주는 최후의 일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크게 발전하려고 하는 직전이 가장 어려운 때이기 쉽다.
Ⅳ. 이러한 재난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경건하게 의지하였다. 다윗은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 그의 사람들은 붙잡혀 간 사람들 때문에 애가 탔다. "백성들의 마음은 매우 쓰라렸다" 라고 글자 그대로의 뜻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 자신들의 불평과 초조함이 그들의 재난과 비탄 위에 "쓴 쑥고 쓸개" 를 더하여 주었으며, 그리고 그 슬픔을 갑절로 만들어 주었다.
1. 그러나 다윗은 그 사람들 중의 누구보다도 슬퍼할 까닭이 더 많았지마는 이를 잘 참고 견디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하였지만, 그는 체면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은 낙심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지고 침착할 수 있다.
2. 또 다윗은 "그를 돌로 치자" 고 하는 그들의 위협적인 말에 대해 어떤 언급이 있음직한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 보복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말에 위협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현재 그가 당한 재난이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그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하나님께서 흔히 쓰시는, 낮추었다가 높이시는 방법,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그리고 그를 안전하게 왕좌에 오르게 하여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굳게 믿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다윗은 현재의 재난이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굳건히 버티게 할 수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은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선한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믿는 가운데 스스로를 굳세게 하여야 함은 그들의 의무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크게 도움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빛을 흑암 가운데서 이끌어 내시며, 그를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롬 8:28) 모든 자에게 이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다윗은 실제로 "내가 두려워 할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노라" 라고 말한 그대로 살았으며, 거기서 크신 위로를 받았다. 그는 그의 지혜가 부족했을 때도 믿음은 부족하지 않았다.
●노략당한 것들을 되찾은 다윗(사무엘 상 30:7-20)
"의인은 재난에서 구원을 받고, 악한 자가 그대신 넘어지며,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 (잠 24:16)고 솔로몬은 보았다. 이것이 바로 다윗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많은 재난을 겪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재난에서 그를 언제나 구해 주셨다." 그리고 더우기 여기에 나오는 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구해 주셨다.
Ⅰ. 다윗은 그의 의무에 관해서는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리이까" 라고 물었으며, 사건 자체에 관해서는 "가면 그들에게 미치겠나이까" 라고 두 가지로 여호와께 물었다(8절). 다윗이 공인으로서 그의 모든 문제를 물어 볼 수 있는 대제사장과 판결 흉배를 가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민 27:21) 그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윗이 아비아달과 에봇을 시글락에 남겨 놓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윗이 돌아와서 물어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그때 그것들을 숨겨 주시지 않았다면, 아말렉 사람들이 그것들을 끌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제사장과 함께 에봇을 가지고 블레셋 진영으로 갔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다윗이 아기스를 따라 싸움에 나가는 것이 좋은가 어떤가를, 그것들을 통해 여호와께 물어 보지 않는 잘못을 범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는 무할례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기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제 그 때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이번의 재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 보다도 우선 에봇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재난 때문에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의 잊어 버렸던 의무를 생각할 수 있게 되며, 더우기 그것 때문에 여호와께 물을 수 있게 되었다면 (대상 15:13 참조)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는 이번 싸움이 의로운 싸움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해 오는 싸움을 싸우고 싶은 충동이 매우 강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물어 보지 않고는 싸우러 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물음을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존성과 복종을 시인하였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묻는다면, 하나님은 여기서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의 응답을 주시며,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같은 식으로 응답해 주신다.
Ⅱ. 다윗은 자기도 몸소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였으며, 자기들에게 있는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였다(9, 10절). 다윗의 인내와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사리 그리고 또 어떻게 그렇게 효과적으로 군사들 사이에 있던 반항심을 진압시켰는가 보라.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 (6절)고 말했을 때, 만일 다윗이 그들을 목매달며, 그 분쟁의 주모자들의 목을 속히 치라고 명령하였다면, 그것이 비록 정당한 일이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이처럼 위기를 당한 때에 그에게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 아말렉 사람들은 그들의 노획물을 말끔히 처치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귀머거리 모양으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분함을 덮어 두고, 오직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음으로" 백성들 사이에 있던 소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라 앉았다. 그리고 이처럼 그들을 부드럽게 대해주었으므로, 조금 전까지 그에게 마구 대항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따라 나서기로 모두 마음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정부라도 유화정책처럼 안전한 정책이 또 있을 수 없다. 그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따라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기를 원했으며, 다윗은 또 그 사람들이 모두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추격해 가던 도중에 그들 가운데 삼분의 일은 떨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6백명 가운데 2백명은 오랫 동안의 행진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다. 그리고 너무 큰 슬픔 때문에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고 그 이편에 머물게 되었다.
1. 이것은 그처럼 많은 그의 부하들이 그를 실망시켰는데도 여전히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전진할 것인가 하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어긋나고 실패하고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계속 기쁨으로 나간다면,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2. 이것은 또 다윗이 그의 사람들을 매우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는 좋은 실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사건 자체가 매우 다급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결코 그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다윗의 자손도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됨됨이가 모두 한결같이 강하거나 또 활기가 넘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약할 때에도 주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신다. 아니,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신다(고후 12:9, 10).
Ⅲ.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의 대적들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 주며, 그들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 주셨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한 애굽 소년이 다웃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1. 그 소년의 주인이 얼마나 그를 무자비하게 대하여 주었는가 보라. 그의 주인은 그 소년을 부려 먹을 대로 다 부려먹고 이제 그 소년이 병들자, 그것도 너무 일에 시달려 과로한 가운데 병이 들은 것으로 보이는 데도, 그 전쟁터에서 그대로 죽도록 무정하게 내버려 두고 갔다. 그들은 그때 그렇게 서둘러서 가야 할 이유도 없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레에라도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목숨을 부지해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이라도 남겨 놓고 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 주인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마음이 아니라, 아말렉 사람의 마음이었다. 따라서 그의 종을 짐승보다 더 못하게 다룰 수 있었다. 악인의 자비는 아무리 부드럽다고 하나 매우 잔인하다.
이 주인은 이제 저에게 이스라엘의 포로로 해서 많은 종들이 생겼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애굽 소년이 어떻게 되든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먹고 마시는" (16절) 동안 그 소년은 길바닥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나치게 가혹한 대우를 받은 이 불쌍한 종으로 하여금 그의 주인과 함께 온 아말렉의 군대를 진멸시키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학대받는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때문이다.
2. 그 소년에 대한 다윗의 동정심을 보라. 다윗은 그 소년이 시글락을 침노한 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떡과 물" 만이 아니라(11절), "무화과와 건포도" 까지 주면서(12절) 관대하게 그를 살려 주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매우 촉박하며, 그들 자신들을 위한 식량도 넉넉지 못하지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잠 4:11, 12).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동정심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기에 합당치 못한 자들이다.
이 애굽 소년을 살려준 것은 매우 잘한 처사였다. 왜냐하면 그 애굽 소년은 아무 보잘 것 없는 소년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그 소년을 도와 주었을 때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를 해치거나 친절 베풀기를 금하지 않아야 하는데 조만간에 우리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 사람으로부터 해를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3. 그 불쌍한 소년이 제 정신을 차렸을 때 다윗이 그 소년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는가를 보라. 그 소년은 그와 함께 하였던 우리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해 주었다.
(1) 그들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말해 주었다(14절). "우리가 침노하고 그리고 이것 저것을 했나이다" 라고 말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그가 침로한 것으로 꾸며대고 말한(27:10) 지방들이 실제로 침로를 당하고 폐허가 되었다. 그때의 거짓말이 오늘에 와서 사실이 되었다.
(2)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말했다(15절). 이것은 다윗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며, 또 자기에게 더욱 가혹하게 대할지도 모르는 그 주인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면, 다윗에게 알려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 소년은 더욱 자기의 목숨이 안전하기를 원해서 다윗에게 이를 맹세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 소년은 애굽이나 아말렉의 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원했다.
Ⅳ. 다윗은 그 소년의 인도를 받아 아말렉 사람들이 마음놓고 승리를 자축하는 곳을 쳐들어 가서 항상 그가 기도 하였던 그대로 "원수들의 머리 위에 그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1. 약탈자들을 베어 버렸다. 아말렉 사람들은 약탈품이 굉장히 많고, 또 이제는 위험한 지경을 벗어 났다고 생각하고 크게 즐기고 있었다(16절). 그들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깡그리 잊고, 또 전리품들을 어떻게 보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온 땅에 평만하며" 아주 방심한 태도로 "먹고 마시며 춤추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우상신 앞에서 그들의 성공을 축하하며 신들을 송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그들을 다윗은 기습하여 정복하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쉽사리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죄인들이 "안전하다" 고 외치며, "악한 날이 멀리 사라졌다" 고 말하는 그 때가 가장 멸망에 가까운 때이다. 우리가 육욕에 빠지고 거기에 탐닉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원수의 공격을 가장 받기가 쉽다. "먹고 마시고 춤추다" 가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로 쉽사리 치달은 경우가 많다. 그들이 이처럼 방비를 소홀히 하고, 무기를 들지 않고 있으며,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 다윗은 일시에 그들을 살륙 하였으며, 다만 4백명 만이 도망갈 수 있었다(17절). 이처럼 악인들의 승리는 잠시 잠간이요, 그들에 대한 진노는 벨사살의 경우와 같이 그들이 한참 연락하는 중에 그들에게 임한다.
2. 노략 당했던 것들을 모두 되찾았다. 하나도 잃은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1) 그들은 그들의 것들을 모두 회수하였다(18,19절). "다윗이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다." 다윗에게는 다른 어느 것들보다 그 두 아내를 구한 것이 기쁜 일이기에 특별히 이 사실이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아말렉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탈취한 것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잘 간수하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그것들을 간수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정말 주인들을 위해서 간수해 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빠진 것이 없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상으로 우리를 잘 대해 주신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창 14:16 에 나와 있고 다윗의 경우는 여기서 볼 수 있다). 즉 예수님도 "강한 자에게서 먹을 것을 취하셨고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신 바가 계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2) 그 외에도 그들은 아말렉 사람들의 것들까지도 탈취하였다(20절). 그것들은 "양떼와 소떼" 들이었다. 그것들은 전쟁법에 의해 블레셋이나 그밖의 사람들에게서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마 다윗은 적군의 땅까지 공격해 들어가서 거기서부터 자기를 위해 양떼나 소떼를 끌고 왔을 것이다. 이 짐승의 떼는 개선군의 선봉대 속에 포함시켰으며, "이는 다윗의 탈취물이요, 그에게 감사할지로다" 라고 외치며 끌고 왔다. 얼마 전까지도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좋아하며 그를 소리높여 찬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 때문에 자기들이 잃었던 것 이상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해관계에 깊이 얽혀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인심이다.
●되찾을 것들을 고루 분배함(사무엘 상 30:21-30)
여기에는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되찾아온 전리품들을 분배한 것에 관한 기록이 있다. 아말렉 사람들이 유다와 그리고 블레셋 땅에서부터 많은 전리품을 이끌고 갔을 때는 육욕에 빠지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이 전리품들을 다른 식으로 처분하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소유하게 되든지 이것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정의감과 자비심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주셨든지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선을 행해야 하며, 결코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윗은 아래와 같이 그 전리품들을 분배하였다.
Ⅰ. 다윗은 소유물 곁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도 바르고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비록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21절), 정복자들을 만나 이 일이 성공했음을 축하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가 직접 그 일에 가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경우에라도 좋은 일이 이루어졌을 때는 함께 기뻐해야 한다. 다윗은 그들의 인사를 매우 친절하게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약함을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에 대한 자기의 염려를 표시하였다. 다윗은 그들에게 문안하였다. 그런데 그 말은(글자 그대로의 뜻을 보면) "다윗이 그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었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가 물은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들이 약하고 건강치 못한 것을 보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또는 그들의 평안을 기원하며, 그들이 뒤에 처졌다고 해서 손해볼 것이 없으니만큼 기뻐하라는 말이다. 다윗은 아마 그들의 안색에서 그들이 이것 때문에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1. 어떤 사람들은 되찾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데 그들이 한 몫끼는 것을 반대하였다. 다윗의 병사들 가운데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했던 그 사람들이 역시 이번에도 그들의 형제들의 것을 횡령하고자 원했을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악한 자와 비류들" 이라고 하였다(22절).
훌륭한 사람들 밑에 악한 사람들이 따르고 있고, 또 훌륭한 사람들이 그들을 좋은 사람들로 만들지 못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다윗이 그의 군사들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을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악한 자와 비류들이 있으며, 죽음의 공포도 맛보았을 터인데도 여전히 악한 자와 비류들이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소유물 곁에 남아 있던 2백 명에게는 다만 그들의 처자식들만 돌려 주고 소유물을 일체 돌려 주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임을 나타내는데, 가히 "악한자" 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1) 그들은 매우 욕심이 과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저들의 몫을 주지 않으면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이 많아 지리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조금 전에 그들은 다른 반을 찾기 위해 자기들의 나머지 반을 기쁘게 내놓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그들의 것들을 전부 찾았는데 형제들의 것까지 차지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궁했을 때의 형편을 쉬 잊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의 것들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것 이상의 것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2) 그들은 형제들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처자식은 돌려주되 그들의 재산을 돌려 주지 말자는 것은, 그들에게 입은 주되 먹을 양식은 주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만한 것들이 없다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이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이렇게 되기를 그들이 원했을까?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으로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는 데 이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 사람들은 비류들이다.
2. 다윗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 다윗은 전투에 참가한 자들이나, 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나 다 똑같이 전리품을 나누도록 명령하였다(23,24절).
(1)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렇게 일을 처리하였다. 우리가 차지한 전리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청지기와 같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세상 물질들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지으신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의 선물인 그것들을 가지고 사탄을 섬기며 인간의 욕심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우리의 형제들에게 악을 행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치러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도 서로 자비를 베풀도록 만들어 주신다.
(2) 다윗은 그들을 정당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이 뒤에 처진 것은 사실이다.
[1]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갈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 때문에 책망 받아서는 안 된다.
[2] 이번에는 그들이 뒤에 처졌지만 전번에는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하여 그 남은 형제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공을 생각해서 오늘의 기쁨에 동참시켜 주어야 한다.
[3] 그리고 그들은 이번에도 좋은 일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남은 소유물 곁에서 그것들을 지켰다. 그것들은 또 다른 원수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지켜야 했던 것이다. 모든 직책이 모두 명예로운 직책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보잘 것 없는 일에 종사할지언정 그것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하는 직책이라면 그런 사람들도 전체의 이익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각 부분이 모두 소용이 있으며 따라서 모두가 골고루 영양분의 공급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첫째, 이처럼 다윗은 약한 자와 비류들에 대해 정정당당한 이유를 들어 그들의 생각을 억눌렀지만 거기에는 시종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정당당한 이유에서 오는 힘은 동정심이 곁들일때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들을 "나의 형제들" 이라고 불렀다(23절). 통치자들은 가끔 거만을 떨다가 그들의 권위를 상실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공손하고 겸양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둘째, 이처럼 다윗은 (그의 통치의 첫 해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똑 같게 하는 법을 왕국의 율례와 전쟁의 규례로 삼아 그후 계속 시행하게 하였다(25절). 아브라함이 소돔의 노략물들을 되 찾았을 때, 그는 그것들을 주인에게 돌려 보내 주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되찾아 줄 때 우리는 그들의 소유권을 무시하고 우리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을 군인과 회중들에게 다같이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셨다(민 31:27). 여기에 나오는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라는 같은 원칙에 의해 시행되었다. 제자들은 처음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우리도 "서로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딤전 6:18).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시 68:12).
Ⅱ. 다윗은 그의 모든 친구들에게 관대하고 친절하였다. 다윗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것에다 덤까지 붙여서 나누어 주었것만은 아직도 상당한 여분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대장인 다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아마 아말렉의 장막에서 탈취한 금은과 패물이었을 것이다(삿 8:24, 26). 다윗은 이것들이 그의 병사들을 교만하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의 친구들인 "유다 장로들" 에게 선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그 선물들을 보낸 여러 지역의 이름들이 나열되었다. 그 지명들은 유다 지파의 안이거나 또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 가운데서 제일 먼저 열거한 지명은 "베델" 이었다. 그 지명은 "하나님의 집" 이란 뜻이다. 아마 이 지명이 제일 처음에 열거된 것은 그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지명은 그런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 이라고 일컬어진 곳일지 모른다. 그 곳에 다윗은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보냈다. "헤브론" 이 제일 마지막에 열거되었다(31절). 아마 그 곳에는 나머지 상당한 몫을 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곳을 자기의 본거지로 삼을 만한 고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삼하 2:1). 우리는 다윗이 선물들을 보낸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1. 그의 관대함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부요하게 하고자 원하지 않고, 자기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요하게 하여 주셨고, 그가 섬기던 그 나라를 그가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우아한 심령은 관대한 심령이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도 있다."
2. 감사하고 보답하는 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와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30절) 선물을 보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에게 숨을 곳을 제공해 주었고, 양식을 대준 모든 곳에 선물을 보냈다. 명예와 마찬가지로 정직한 마음도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보답하게 하며, 우리의 손에 있는 능력껏 그들을 찾아보게 한다.
3. 그의 신앙심을 볼 수 있다. 그는 그가 보내는 선물을 "축복" 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그들에게 위로가 되질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선물과 함께 따른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는 그 선물이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때문에 승리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에게 감사하게 하였다.
4. 그의 정책을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멀지 않아서 있을 자기의 대관식에 그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보냈다. "선물은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도 왕으로서의 관용과 박애심이 풍부한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도량이 넓은 사람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보다 더 돋보인다. 다윗은 십 사람이나 그일라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자기가 받은 모욕에 대해서 결코 경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울의 죽음(사무엘 상 31:1-7)
보복의 날이 돌아왔다. 사울은 잘못 살려준 아말렉 사람들의 피와 그리고 또 더욱 잘고 흘리게 한 제사장들의 피값을 치르어야만 하게 되었다. 그가 만일 다윗의 피를 흘리게 했었다면 그는 더욱더 그 값을 치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망할 때가 되었으며, 다윗이 예견한대로, 전장에 들어가서 망할 날이 되었다(26:10). 와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을 보라.
Ⅰ. 사울은 그의 곁에 있던 그의 군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1절). 블레셋 군사의 숫자가 많았는지, 또는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잘 지도를 받았는지, 또는 다른 이점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을 감행한 것을 보면 그들이 보다 더 활기가 있었다고 보인다.그들은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웠으며, 이스라엘은 많이 도망치고, 살륙을 당했다. 그들의 주력 부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많은 군사들이 살륙을 당했다. 아마 그들은 다윗을 추격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울을 따르며, 사울의 범죄를 도와 주던 사람들은 그보다 앞서 멸망했으며 그의 재난에 동참하였다.
Ⅱ. 사울은 그의 아들들이 그의 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승승장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치열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의 세 아들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아마 그의 세 아들은 매우 비참하게도 그의 눈 앞에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그들은 그의 가족들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몸을 지켜 주는 호위병들이었기에 사울은 이제 자기가 죽을 차례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무서워 떨었을 것이다.
그의 죽은 아들들의 이름이 나와있다(2절). 그런데 매우 슬프게도 거기에 요나단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매우 지혜로왔으며, 용감하였고, 또 선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울은 다윗의 원수였지만 그는 다윗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었다. 아버지에 대한 의무가 그를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 뒤에 물러서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결코 그의 가족들의 죄악에 함께 물들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라고 말한 엘리바스의 관찰이(욥 4:7) 여기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요나단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 하나님은 이로써 사울이 죽는 순간까지 그의 괴로움을 더하여 주셨고, 그의 집에 내리시겠다고 하신 심판을 완전히 실천하셨다. 사울의 가족이 멸망해야 한다면, 요나단도 그의 가족의 일원인 만큼 그들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2. 하나님은 이로써 왕관으로 가는 다윗의 길을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열어 주셨다. 비록 요나단 자신은 기쁘게 자기에게 속했던 모든 칭호와 권리를 다윗에게 양도했겠지만(이점에서 우리는 조금도 요나단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지마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붙들고 사울의 집을 계속 존속시키고자 할 수 있으며,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길이 더디게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싸움에 나갈 만한 나이가 못되어 집에 머물러 있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이스브셋도 그렇게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물며 백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그들의 호의를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요나단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친구들이 있었겠는가? 열국과 같이 왕을 가지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더우기 요나단과 같은 사람에게 왕관이 이어질 때, 그 왕관이 정통의 가계를 따라 이어지기를 열심히 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윗이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 요나단이 사람들을 설복하여 자기의 모든 권리를 다윗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웠건마는, 요나단이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는 말이 들려질 뻔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죽음이 다윗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로 하여금 자신의 약함을 생각하게 하며, 그의 등극의 길을 용이하게 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다윗에게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3. 하나님은 이로써 선과 악의 구별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모든 일은 만인에게 똑같이 임한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보고 그사람의 영적인 사태 또는 영원한 상태를 판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의로운 자나 악한 자에게 마찬가지로 임하기" 때문이다.
Ⅲ. 사울 자신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부상을 입고, 그 자신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활 쏘는 자가 사울을 멈추었다(3절). 그리하여 그는 싸울 수도 그리고 뛰어 달아날 수도 없게 되었으며, 꼼짝 없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붙잡히게 되었다. 이처럼 파멸이 점점 그에게 닥쳐오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느껴가며 죽도록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주썼다. 그는 아래와 같은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1.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그의 부하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들이 손을 학대한 것처럼 자기를 학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 불쌍한 사람이로다.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을 때, 자기의 영혼을,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맡길 것을 염려하지 않고(전 12:7), 자기의 육체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고자 하는 염려만을 하였다. 그는 그가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죽었다. 거만하고 질투가 많았으며, 그리고 자신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다. 사리를 올바르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죽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않는, 마음이 번뇌한 자는" (욥 3:20, 21)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더우기 가롯 유다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완전히 잃어버림으로써, 그들 속에 있는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 앞에 있는 지옥으로 뛰어드는 자들은 더욱 불쌍한 자들이다.
2.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혜택을 입지 못하게 되자, 부끄러움을 면하고자 하여 자신을 죽이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을 더욱 가증한 죄로 빠지게 하였고, 그의 이름 위에 : 자살자 - felo dese 라는 영원한 치욕을 남겨 놓았다.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중상을 입은 요나단은 끝까지 그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었다.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은 죽음을 죽었고, 비겁한 죽음를 죽었다. 그는 거만을 떠는 바보였으며, 비루한 비겁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에게 소망도 가지지 못하며, 인간으로서의 이성이나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신앙도 가지지 못하며, 더우기 왕으로서의 위엄이나 군인으로서의 기백도 가지지 못한 자로서 죽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그의 병기를 는 자는 그를 찌르지 않고, 그의 청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참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종이라 해도 그 주인의 욕심이나 어떤 감정을 위한 노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사울을 찌르지 아니한 이유는 "그가 심히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진해서 즉시 자기의 칼에 스스로 엎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인을 왕으로서 공경하기 때문에 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아마 자기의 손이 떨려서 감히 단 칼에 그를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더욱 괴롭게 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Ⅳ. 사울을 죽이기를 거절한 그의 병기 든 자는 그와 함께 죽기는 거절하였지만,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죽었다(5절). 이것은 사울의 죽음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왜냐하면 사울의 자살은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도 그의 나쁜 본을 따서 같은 죄를 범하게 했기 때문이며, "자기의 죄로 자기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다 사람들은 그 때의 사울의 무기를 든 자는 도엑이었으며, 그는 제사장들을 죽인 공훈으로 그런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의 악독이 자기 자신의 머리로 돌아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영히 멸하실 것이라" 고 예언한 바가 있다(시 52:5).
Ⅴ. 사울의 군대가 패주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 이웃에 있던 도성의 사람들 (요단 건너편이라고 읽을 수 있는 도성 사람들)이 자기 도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한동안 거기에 거하였다(7절). 이처럼 사울은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기 나라에 커다란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만일 다윗이 그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그 땅은 그대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무엘을 거역하고, 얻어낸 왕이 어떤 왕인가 하는 것을 사울은 잘 증명하여 주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울처럼 여전히 악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선지자가 그들에 대해 예언한 것과 같이 "그들과 그들의 왕이 다 멸망하였다" (12:15). 오랜 후에 이 일에 대해 행한 언급이 한 곳에 나타나 있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아도 죽어도 너희에게 재앙이 되었노라. 너희는 이제 다시는 왕을 기대할 수 없노라" (호 13:10).
●사울의 장례(사무엘 상 31:8-13)
성서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영혼이 그들의 사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비밀에 속한 것은 우리들이 알 바가 아니다). 성서는 다만 그들의 시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크게 모욕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블레셋 사람들이 피로를 푼 다음에, 죽은 자들을 벗기려 왔다가, 죽은 자들 속에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발견하였다(8절). 사울의 병기 든 자는 아마 그의 주인의 명예를 위해 그를 본받을 자살을 함으로, 이로써 자기가 얼마나 사울을 사랑하였는가를 보여 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에 의해 일을 처리하였다면, 그는 그런 어리석은 식의 찬양은 중지하고, 살아남은 자로서 먼저 죽은 자에 대한 그의 도리를 다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밤 사이에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옮겨다가 정중하게 장사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은 (능히 지혜롭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 때문에 어리석게 명예를 주고 받았다.
아니 사울은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두려워서 자살을 한) 추적자들은 그 다음날에야 사울이 있는 곳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혼미하게 하고, "무서움으로 인하여 쇠잔하게 만드신다" (욥 18:5 이하) (사울이 왕으로 선출될 때도 그 키가 크므로 다른 사람들과 용이하게 구분되었다). 사울의 시체를 발견한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왕관을 쓰러뜨린 것을 크게 기뻐하였고, 살아 있을 때는 무서워 떨던 사람에 대해 그 죽은 시체를 모욕함으로 자기들의 야만적인 복수심을 만족시켰다.
1.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었다. 그들이 만일 골리앗의 목이 달아난 것을 복수하고자 하였다면, 실제로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의 목을, 그가 그들의 나라에 있었을 때 베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왕관을 쓰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자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보이며 또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도 머리 하나 만큼은 더 큰 사울 (은근히 그것을 자랑하였던 사울)의 머리를 잘라 그 키를 작게 함으로 그를 모욕하고자 그렇게 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울의 갑옷을 벗기었다(9절). 그리고 그것을 전승기념품으로서 그들의 여신 아스다롯의 신전에 두기 위해 보냈다(10절). 그리고 (여기에서는 생략이 되었지만) 역대상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다곤의 신전에 매달았다. 이처럼 그들은 그들의 승리가 참된 하나님에 의해 이룩된것이 아니라, 그들의 헛된 신의 헛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그 명예를 그들의 신들에게 돌렸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그릇 섬겼던 아스다롯 우상이 이번에는 그들을 정복하였다.
3. 블레셋 사람들은 온 나라에 급사를 보내어 온 백성이 그들의 신전에 게시된 그들의 승리(9절)를 쳐다보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를 돌리게 하였다. 다윗은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라" (삼하 1:20)고 하매 이 일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4.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의 성벽에 못 박았다(12절). 그 성읍은 길보아와 멀지 않으며, 요단강과 가까운 지경에 있다. 여기까지 시체가 끌려 왔으며, 사나운 새들의 밥이 되도록 쇠사슬에묶여서 매달리게 되었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받기가 싫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왕의 시체를 그렇게 다루는 법은 없었다. 더우기 모욕을 받기가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더욱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깡그리 이를 잃어버린다.
다윗이 그들을 정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때까지 그들의 거만이 어디까지 올라 갔었는가를 보라. 이제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자, 그들은 이스라엘 땅이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들은 그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완성하신 다음에는 다시 그들에게 대해서도 당신의 일도 완성하신다(사 10:6, 7 참조).
Ⅱ.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용감하게 그들의 시체를 구출하였다. 벧산과 길르앗 야베스 사이에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은 얕은 여울을 통해서는 능히 건널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성읍의 용감한 장사들은 대단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밤에 요단강을 건너가 그 시체들을 취해가지고 돌아와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어 주었다(11,13절).
1. 그들은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땅의 명예를 위한 공동적인 관심에서부터 우러나와서 이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땅이 시체로 말미암아, 더우기 왕의 시체로 말미암아 더렵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으며, 무할례자에 의해 그처럼 모욕당하는 것을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2. 또 사울에 대한 특별히 고마운 생각 때문에 이 일을 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그 땅을 암몬 사람들의 손에서부터 열심을 다해 그리고 신속히 구출해 준 일이 있기 때문이다(11장). 그들의 행동은 관대한 정신의 표현이며, 그처럼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가 매우 곤란할 때 그것을 돌려 주었다는 데서 모든 선한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보다 일찌기 그들의 용감한 장사들을 사울에게 보내 주었다면 블레셋과 싸우는 사울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그를 매우 잘 도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시대는 끝장이 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것만이 그들이 사울을 도와 줄 수 있는 유일의 일이었다.
우리는 사울의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무엘이 죽었을 때와 같이(25:1) 애곡하였다는 기사를 읽을 수가 있다. 다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만이 사울의 죽음 앞에서 그에게 명예를 돌려 주었다.
(1) 그들은 향내가 나도록 시체를 위해 향을 살랐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다(12절).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라고 나온 아사의 장례식의 경우와 같이 (대하 16:14), 흔히 죽은 친구와 더우기 왕을 위해서 향을 사르는 습관이 있었다. 아니면 살이 곪아 썩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살을 불태웠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2) 향을 다 사른 뒤에 그들은 그 시체를 (혹은 그 몸을 불살랐다고 하면 그 뼈와 재를) 어떤 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나무는 묘석 또는 기념비의 구실을 하였다.
(3) 그들은 "칠 일을 금식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레 동안 매일 저녁까지 금식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사울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현재의 어지러운 상태를 한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들의 무너진 나라가 다시 세워지기를 금식하는 가운데 기도했을 것이다. 비록 "악인이 죽으면 환성이 일어난다" 고 하지만, 인간성은 우리로 하여금 시체 앞에서, 더우기 왕의 시체에 대하여 상당한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이 책은 사무엘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제 사울의 장례로 끝맺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이 세상이 제공하고자 하는 명예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명예를 취하여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